소설리스트

100개의 퀘스트-67화 (67/160)
  • 67화

    열 명의 무리가 유적의 복도를 지나 공동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들은 정령사 육성 학교의 학생과 교사들로, 지금은 정령과 계약을 맺기 위해 유적에 찾아 온 거였다.

    그 중에 중년의 남성이 입을 열었다.

    “자, 이제 의식을 시작한다. 민재, 너는 피를 꺼내고, 다른 이들은 정령을 소환할 준비를 해. 민재를 도와줘야 하니까. 그리고 혜리와 영철은 조력자의 방으로 갈 때 당황하지 말고.”

    “에이, 몇 번이나 얘기하세요. 저희도 다 알고 있다고요. 선생님.”

    소년, 영철이 입을 열었다. 조력자로서 처음 참가하는 거긴 했다. 그렇지만 쉬운 일이었다. 거기에 대부분은 이미 학교에서 숙지하고, 여기 오면서도 수도 없이 들었던 내용이었다. 실수할 가능성은 적었다. 그런 점에서 회현 선생님은 다 좋은 데 걱정이 많았다. 최초의 사건의 생존자이니 그럴 만하다고 생각하지만, 때때로 자신을 너무 무시하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알았다. 그럼, 민재야, 피를 부어라.”

    “네!”

    혜리와 영철을 비롯해서 조력자로 온 다른 9명은 유적에 익숙했고, 의식에도 익숙했지만, 민재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성공률 99%의 일이니 걱정할 건 없었지만, 새로운 일이라 긴장도 됐고, 드디어 정령을 가진다는 생각에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떨림을 애써 진정시키며, 그는 미리 뽑아온 피를 바닥에 부어 버렸다. 처음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지만, 약 500ml 정도 되는 피가 전부 땅에 쏟아지자, 곧 수정으로 채워져 있는 반쪽 문장이 빛나기 시작했다.

    “피의 계약이 시작된다. 모두들 주의해!”

    이번에는 회현의 말에 딴죽을 건 사람이 없었다. 익숙해졌다고는 하지만, 땅이 흔들리며 공동이 진동하는 상황에서 굳이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각자가 서 있는 바닥이 솟아오르거나 아래로 꺼지면서, 그 위에 서 있던 조력자들을 데리고 공동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윽고 공동에는 수정이 빛을 내는 순간에 정신을 잃고 땅에 쓰러진 민재만 남게 되었다.

    그 중 회현은 위로 솟아올랐다. 공동의 천장이 열리며 그를 삼켰고, 그는 어느새 사방이 막힌 방에 서 있었다.

    수백 번도 더 넘게 들어온 곳이다. 이 유적 말고도 다른 유적에도 수없이 갔었고, 그때마다 비슷하게 생긴 조력자의 방을 보았다. 이제 익숙해질 법도 한데, 그는 조력자의 방에 들어올 때마다 긴장해 버린다. 처음 이 방에 들어왔을 때의 경험이 너무 강렬해서, 아직도 생생한 것이다. 소변을 마시며 버텼던 십여 일의 처절했던 감정은 이 방에만 들어오면 어제 일처럼 되살아났다.

    그래서 그가 아직도 이 선생노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살아 있구나 하는 그 감정을 깊이 느끼기 위해서 말이다.

    “이프리타!”

    그가 외치자 영혼의 끈에서 찌릿 하는 느낌이 왔다. 그의 동반자는 이곳에 보이지 않았지만, 정령계에는 나타났을 것이다. 그녀가 영혼의 끈을 통해 그에게 의지를 전달했다.

    [회현, 또 이런 시시한 일이야?]

    [애들을 키우는 건 중요한 일이지.]

    [나는 이제 정령왕도 모자란 위치라고. 이런 잡일에 날 쓰는 건 슬슬 용납하기 힘들어.]

    [조금만 힘 좀 내 줘. 내가 하고 싶어서 그래.]

    [하지만 내가 힘을 내면 얘네들이 할 일이 없어지잖아?]

    그녀의 말처럼, 정령왕급인 그녀가 힘을 쓰면 조력자로 온 8명의 정령은 일할 게 없어진다. 그러면 애들을 경험을 전혀 하지 못하게 될 거고.

    [그것도 그러네. 그러면 혹시라도 모를 불상사에 대비해 줘. 저번에도 이상 개체가 있었잖아?]

    [그런 놈들은 정말로 얼마 없어. 저번에 나타난 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잖아? 그 뒤로 벌써 1년이야.]

    [아니야, 우린 못 봤지만, 지금 세계 곳곳에서 자주 나타나고 있어. 요 근래는 더 늘어났고, 이 추세라면 앞으로도…….]

    그가 처음 정령과 만난 지 20년, 유적이 나타난 지 40년이 지났다. 그는 변화하는 세상을 감지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아마 그 일이, 자신이 정령을 가지게 된 이유는 아닐까.

    [알았어. 알았으니까, 다음에는 좀 더 재밌는 일에 불러달라고.]

    [그래. 알았어.]

    그 날, 민재는 아름다운 물의 정령과 계약에 성공했다.

    + + +

    피의 계약에 관한 보고서.

    ……첫 계약이 일어난 한국의 경우와 그 후에 알게 모르게 행해진 비인도적인 실험의 결과를 볼 때, 정령을 부를 수 없는 자들이 조력자의 방에 들어가면 그 생체 에너지를 빼앗기는 것이 확실해 보인다.

    그 예로, 첫 계약의 때, 아무것도 모른 채 조력자의 방으로 끌려갔던 경비원들은 온 몸이 미라처럼 변해 발견되었다. 첫 계약에 걸린 10일이란 시간동안, 외부적 요인이 없이 인간이 그렇게 변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계약에 의해 어떤 일이 발생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조력자의 방이란 정령을 가진 이들이 자신들의 정령을 가지고 정령계에서 정령 계약 당사자의 계약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므로, 경비원들이 그렇게 된 이유 역시 계약을 돕기 위한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정령과의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이에 대해선 아직 많은 연구가 필요한 상태지만, 인간의 의지가 어떤 매커니즘을 통해 정령계 안에서 실질적인 힘으로 바뀐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 정설을 받아들인다면, 조력자의 방에 갇힌 그들의 의지가 정령계로 흘러들어가 계약자에게 정령을 제압할 힘을 줄 것이라 생각해볼 수 있다. 개인의 힘으로 정령 계약에 도전한 이들이 겪은 여러 실패 사례를 비추어 보면, 개인의 힘으로는 정령 제압이 가능할 정도의 의지를 가진 이는 없다고 볼 수 있으니 계약을 성공시키기 위해 타인의 힘이 동원되도록 설계됐다고 보는 게 바람직하다.

    그럼 그 힘의 전달이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갈 정도로 강력한 것인가?

    처음에는 생명에 지장이 없는 수준임이 판명되었다. 힘을 빼앗긴다고 해도 느끼지 못할 수준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빼앗기는 힘이 강력해짐이 관찰되었고, 7일 이상 진행된 실험에서는 참가자들이 전원 죽었다는 비공식적 실험 결과가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이런 비인도적인 실험이 자행된 건, 첫 계약 이후 각 국에서 정령 계약을 시도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탓도 있지만, 단 한 명의 예외가 첫 계약 때 발생했기 때문이다.

    첫 계약은 10일이 걸렸고, 계약자를 제외하고 10일 후에 살아남은 사람은 단 한 사람이다.

    ……(후략)

    + + +

    “쟤지? 사람을 죽인 마녀가.”

    “남자의 정혈을 빨아서 정령이랑 계약 했다던데?”

    “왜, 전에도 남자를 갈아치웠던 걸레라잖아.”

    “이제 그 힘을 막 휘두르겠지?”

    “크윽, 예쁜데, 저렇게 악랄 하다니, 아깝다.”

    “예쁘면 네가 사귀지 그래?”

    “미쳤냐, 마녀랑 사귀면 나도 정기를 빨려서 죽는다고. 아깝긴 해도 그럴 순 없지.”

    회현은 바람을 쐬러 나왔다가 연구원 둘이서 민지를 험담하고 있는 걸 들었다. 그가 서 있는 위치는 그들이 볼 수 없는 것이라 그들은 그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 앉아 있는 민지의 존재도 모르고 있었다.

    회현은 자신이 욕하는 것도 아닌데, 안절부절못했다. 그렇다고 인기척을 내며 연구원들 앞에 나서기도 뭐했다. 이 문제는 단지 연구원 둘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첫 계약이 끝났을 때, 살아 있었던 이는 회현과 민지뿐이었다. 둘은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결계가 해제되고 들어온 유적조사팀에게 발견되었고, 동시에 쭈글쭈글해진 채 죽어 있던 경비들의 시체도 발견되었다.

    그 후에 회현과 민지는 각자 조사를 받았고, 그 조사 결과 때문에 민지는 이런 욕을 듣고 있었다. 모든 것은 우연이었고, 그녀의 잘못이라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5명이 미라가 된 참혹한 사건 앞에서 연구소의 대부분은 누군가를 공격하며 잊고 싶었던 것이다. 아니, 실은 이제 정령이라는 강대한 힘을 가지게 된 그녀에 대한 무의식적인 견제였다.

    그리고 그 견제는 그녀가 가만히 있을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그녀는 정령과 계약하면서 자살 후유증을 거의 회복했고, 기억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 뿐. 아직 그녀는 여전히 무기력했고, 손목을 그을 때처럼 살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그저 끌려 다니고만 있었다. 굳이 반박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녀 스스로가 자신이 사람들의 피를 빨아 먹는 마녀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결국 옆에 있는 회현을 제외하고는 다 죽었으니까.

    “이제 들어가자고.”

    “쳇, 또 그 마녀의 데이터 정리나 해야 하다니. 내가 다 악마의 하수인이 된 느낌이라니까.”

    “그래도 돈 받으니까 해야지?”

    “그래, 어쩔 수 없지. 그런 의미에서 오늘 술이나 한 잔 할까?”

    찰칵.

    문이 닫히고 연구원 둘이 나갔다. 연구소의 옥상은 그들이 오기 전처럼 다시 고요해졌다. 그러나 조금 전이랑은 다르게 공기가 무거웠다. 회현은 그 공기를 타파할 생각에 민지에게 말을 걸었다.

    “괜찮아요?”

    “……?”

    “신경 쓰지 마세요. 당신 잘못이 아니니까. 그도 그럴게, 저는 이렇게 살았잖아요? 살려고 하면 다 살 수 있었다니까요. 그냥 다들 삶을 포기해서 그렇지.”

    회현은 민지에 대한 감정이 없었다. 그날 거기 간 건 스스로의 잘못이고, 그런 일을 겪은 것도 우연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지, 그녀의 잘못은 없다고 여겼다. 게다가 그 방 안에서도, 연구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정혈을 빨리고 정신력이 고갈되는 일 따위는 없었다. 스스로가 경험했으니 잘 알고 있었다. 있는 것은 오직 배고픔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리고 그에 저항하지 못한 게 죽음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경비원들은 죽고, 자신이 살아난 것은 그 차이 때문이지, 다른 게 아니었다.

    그는 조사를 받을 때마다 그러한 자신의 생각을 말했고, 정식 보고서에는 그런 말이 들어갔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공격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사람들은 진실보단 자기 편한 대로 생각하길 좋아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나를 원망하지 않아?”

    조사가 시작된 지 이제 일주일, 회현과 민지의 대화는 이게 처음이었다. 그녀는 그가 조사 받으면서 말한 것을 들었지만, 전혀 믿지 않았다. 그도 실제로는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 거라 여겼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가 어떻게 살아난 건지는 모두가 의문을 가지고 있지만, 그도 발견되었을 당시에 극도의 영양실조를 겪고 있던 것만은 틀림없었다. 죽음의 문턱에 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일의 발단인 자신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지금 그가 말을 거는 것도 놀랐고, 그 내용에 더 놀랐고, 그 표정이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는 것 같아 진심으로 놀랐다.

    ‘왜? 어째서? 왜 또 나를 유혹하는 거야? 너도 나를 안고 나서 버릴 심산이지? 내가 이렇게 가만히 있으니까 갖고 놀고 싶어 하는 거야? 그런 눈으로 보면 내가 넘어갈 것 같아?’

    아직 고등학생이라 앳된 티가 나는 회현을 상대로 할 생각은 아닌 것 같았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여전히 정상이 아니었다.

    “아니요. 오히려 고마워하고 있어요. 그 일 덕분에 저는 정말로 살고 싶어 졌거든요.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자신도 생겼고요. 이제 여기만 좀 나가게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게 좀 어렵겠죠? 그래도 거기서도 살아나왔는데, 이 정도도 못 헤쳐 나갈까 봐요? 여긴 물도 주고, 밥도 주는데.”

    “…….”

    ‘안 통하네. 하긴 이 사람 나사가 풀린 것처럼 보이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공동에서 봤을 때부터 얼굴이 죽어 있었다. 그 죽은 얼굴 옆에 생동감이 넘치는 푸른 새가 있다는 건 정말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얼굴을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그런 사람을 자신의 말 몇 마디로 위로할 수 있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냥 뻘쭘해서 하는 말이 뿐이다. 조금 안타깝기도 했고.

    “아무튼 저는 들어가 볼게요. 이왕 살아난 거, 열심히 살자고요. 그렇게 풀 죽어 있어봐야 되는 일 없잖아요?”

    그는 씨익 웃고서 돌아섰다.

    그녀는 그의 말을 빈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웃음이 머릿속에 깊이 들어오는 걸 느꼈다. 금세 부정적인 마음과 무기력이 그녀를 다시 채웠지만, 그 웃음이 한 순간 모든 것을 밀어낸 건 사실이었다.

    돌아보면 그게, 그녀를 진정한 정령사로 깨어나게 한 요인이었다. 비록 그 뒤로도 한참동안이나 무기력하게 지내야 했지만.

    + + +

    [축하합니다. 여섯 번째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셨습니다. 퀘스트 보상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인류의 수호자 회현’의 능력 중 하나를 배울 수 있습니다. 어떤 걸 선택하시겠습니까?]

    ============================ 작품 후기 ============================

    이프리타를 고르지 않았으며 이 퀘스트는 민지가 혼자서 정령과 계약을 맺을 때까지 버티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을 겁니다.

    천강지체의 도움이 있으니까 그리 어렵지는 않겠지만, 민지 혼자서 정령과 계약을 맺을 경우의 수가 지극히 작기 때문에 몇 번이고 굶어 죽어야 가능했을 겁니다.

    천강지체의 도움 없이 회현 혼자서의 힘으로만 버텼다면, 더 낮은 확률로 유적에서 탈출할 수 있었겠죠.

    100이면 100 죽을 상황이었지만, 1억 분의 1 정도는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유적의 자력 탈출이 가능할 겁니다.

    강민은 지금 그런 경우들을 돌아가며 체험 중입니다.

    @흑월접 배경상황과 완전히 무관하다 볼 수는 없지 않을까요. 강민의 세계에서도 이프리타를 잘만 불러냈으니까요. 회현의 세계에서도 그러한 일이 없을 거라고 단정하기는 힘들죠....... 라는 건 좀 변명이지만요. 솔직히 이번 퀘스트는 멍한 상태에서 뽑아냈다고 해야 하나. 이것저것 뜯어 고친 게 많아서..... 원래는 우주선 이야기였는데.... 정령 이야기로 바뀌다니....ㅜㅜ 다음번엔 좀 더 정진하겠습니다.

    @프리크리 천강지체가 소수만이 타고나는 능력입니다. 훈련으로 습득할 수 없는 능력이고 그런 능력도 얻을 수 있습니다. 나중에 필요한 능력이라... 그런 것도 나름 생각해서 하고 있기는 한데..... 잘 와닿지 않으시나 보네요. 제가 좀 더 열심히 쓰겠습니다.

    @눈꽃J 현실이야기는 조금 있으면 나오긴 할 텐데... 활약이 아니라서.... 일단 3부 예정이고 1부는 길어야 30편 내에 끝이 납니다. 그런데 1부는 주인공 정체성 확립이랄까. 그런 게 목표라..... 활약은 2부, 아니 3부에... 하하하;;; 나름 소소하게 활약하는 에피소드들은 마련해 두었습니다만..... 그걸로 독자분들이 만족하실지.....ㅜㅜ@카르마의 신 그렇군요. 츠바사 크로니클이 있었군요..... 확실히 비슷한 컨셉이죠.... 하하하;;;

    자, 여러분 추천과 코멘트를 주세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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