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개의 퀘스트-66화 (66/160)
  • 66화

    힘이 빠져나가는 게 끝났다. 상황이 종료된 모양이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영혼의 끈을 통해 이프리타의 존재는 느낄 수 있었다.

    살아 있다. 다행이다. 정말로 다행이다.

    하마터면 내 실수로 누군가를 잊을 뻔했다. 퀘스트 속의 누군가가 아니라, 실제 관계를 맺은 이 중에 하나를 말이다. 과연 그랬다면, 나는 미쳐 버렸을 지도 몰랐다.

    놀란 마음에 안도를 불어넣는 사이에, 그녀가 먼저 생각을 전해왔다.

    [괜찮은가?]

    [이프리타! 너야말로 괜찮아?]

    [그래, 덕분에 아무런 피해 없이 폭주하는 정령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그 여자도 살아 있다.]

    [다행…….]

    그제야 긴장이 풀리고 탈력감이 밀려왔다. 이미 쓰러져 있었지만, 중력을 따라 어디까지고 떨어지고 팠다. 헬 파이어를 썼을 때보다 더 힘이 없었다. 시스템은 헬 파이어를 쓸 때 내 체력을 다 소모한다고 했는데,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지도.

    [강민! 정신 차려라! 일을 끝내려면 좀 더 버텨야 한다! 조금 전의 너라면 할 수 있어! 여기서 무너지면 모든 걸 다시 해야 한다고!]

    네가 소멸하지 않았으면 그게 뭐 대수라고……. 다시 하는 거야 늘 있는 일이잖아? 하고 말하고 싶었으나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그녀의 걱정이 뭔지 잘 알기 때문이다. 다시 정신을 잡는다.

    [……아, 그래. 알았어. 계약은, 계약은 어떻게 됐어?]

    [지금 맺는 중이다. 살아남은 정령 한 명을 붙였다. 여자 쪽이 제정신이 아니라 시간이 좀 걸리고 있지만, 여긴 정령계니까 어떻게든 될 거다.]

    [그럼 난…….]

    [그래도 네가 필요하다. 내 존재감이 없으면 날 뛸 테니까. 길진 않을 거다. 조금만 참아라.]

    [알았어. 버티고…….]

    [지금 됐다!]

    쿠르르릉!

    그녀의 생각이 전해짐과 동시에 바닥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회현이 무슨 짓을 해도 꿈쩍 않던 바닥에 금이 갔다. 이내 몸이 쓰러져 있던 바닥이 아래로 꺼졌다. 낙하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떨어지는 듯하더니 바로 바닥에 닿은 것이다.

    희미해지는 정신을 부여잡고 본 주변은 회현의 기억 속에 있던 유적의 공동과 비슷하게 생겼다. 그 가운데에서 민지라고 생각되는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좋아, 회현도 풀려났구나. 잘 됐다. 이프리타도, 회현도…….

    그걸 마지막으로,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 + +

    창문을 통해 햇빛이 들어왔다. 그 빛이 반사되어 내 눈에 방 안의 모습을 새긴다. 유적이 아니라 내 방이다.

    그걸 깨닫는 순간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이 나왔다.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프리타!”

    화르르륵.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배 위에서 불꽃이 확하고 피어올랐다. 소환이 돼서 나타난 것 같지 않았다. 영혼의 끈엔 아무런 반응이 없었으니까. 아마도 저쪽 세계에서 같이 넘어온 걸 테다.

    [강민! 무사하게 돌아왔군!]

    윽.

    고작 하루만이었지만, 어쩐지 깊이 정들어 버린 작은 여우의 모습에 나도 기분이 좋았다. 살아 돌아온 것에 대한 기쁨도 있었다. 하지만 내 배 위에서 방방 뛰는 건 조금 참기 힘들었다.

    [그만, 알았으니까 그만.]

    [……미안하다.]

    내 제지에 그녀가 자신의 모습을 자각했는지, 뛰는 걸 멈추고 꼬리로 얼굴을 가린다. 그런데 그 모습이 어린아이가 두 눈을 가린 채 ‘숨었다’고 하는 것 같아 귀여웠다.

    [쿡, 괜찮아. 어쨌거나 다행이야. 너도 무사했고, 퀘스트도 잘 끝났고, 회현도 아마 풀려났겠지.]

    [퀘스트는 끝난 건가?]

    방방 뛰는 건 멈췄지만, 작은 여우가 내 가슴 위에 있는 건 그대로였다. 적당한 무게감과, 따뜻함이 좋았다. 살랑살랑 거리는 꼬리에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으려다가 멈췄다. 그러면 또 싫어할 게 분명했다. ‘불결하군’ 하면서 말이지.

    [이렇게 돌아온 거 보면 잘 끝난 거 같은데? 계약은 잘 된 거야?]

    [계약은 잘 됐다고 생각한다. 뒤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일단 정령계에서 나왔다는 건 계약이 성사됐다는 이야기다.]

    [그럼 아마 퀘스트도 잘 끝났을 거야. 시스템이 말한 클리어 조건은 그거였으니까.]

    [그렇다면 다행이다.]

    간단한 맞장구인 듯했지만, 그 생각 속에 내 예상보다 훨씬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무슨 일 있었어?]

    [6시간이었다.]

    [응?]

    [저쪽 세계에서 계약이 끝남과 동시에, 나 역시 너의 모습, 그러니까 저쪽 세계에서 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 여자의 본체가 있는 곳에 도착한 거 같았다. 그 후에 바로 네 영혼은 그 세계에서 사라졌고, 나 역시 거기에서 머무르지 못하고 이 세계로 옮겨왔다. 그리고 넌 깨어나지 않았다.]

    [그게 6시간이라는 말이야?]

    [그래. 6시간 동안 너는 자고 있었다. 영혼의 끈에도 이상이 없고, 몸에도 이상이 없는 듯하여 그대로 자게 두었지만, 혹시나 하는 염려는 있었다. 그래서 조금 전엔 과한…… 반응을 했군. 다시 한 번 사과하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시간의 흐름 자체는 같은 모양이니까. 전에 한 번, 퀘스트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잠에서 깨어난 적도 있지 않았던가?

    그래도 매번 깨어날 때, 자고 일어났다는 느낌이 없어서 그 사실에 대한 자각이 거의 없었다. 지금도 그렇다. 내 의식은 유적의 천장을 보고 나서 바로 내 방 천장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 사이에 6시간이나 있다니. 신기함과 동시에 주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와 내가 느끼는 그 6시간의 차이가, 그녀가 시스템에 속하지 않은 존재라는 건 확실히 알려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괜찮아. 그나저나 이번에는 정말 빨리 끝났네. 한 번 만에 끝나다니.]

    [이전에는 어땠나?]

    [보통 2주 정도? 두 번째 퀘스트는 한 달 내내 죽었었고……. 그런 거 생각하면 진짜 장족의 발전이네. 다 이프리타 덕분이야.]

    [내가 한 게 아니다. 다 네 힘이지.]

    앞으로의 퀘스트도 이렇게 빨리 깰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번 퀘스트도 그리 쉽게 깬 건 아니었다. 폭주하는 정령들 때문에 이프리타가 위기에 처한 건 진짜였으니까. 게다가 그녀가 없었다면 계약 진행이 어려웠을 테고.

    혹시 다른 방법이 있는 건가? 저번 퀘스트 보상으로 이프리타 소환을 고르지 않았어도 깰 수 있는 방법이?

    그게 아니라면, 퀘스트를 주는 자의 손에 놀아나고 있는 건지도. 나는 내가 주체적으로 능력을 선택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모든 것이 누군가의 계획 아래에서 일어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대체 내게 뭘 원하는 것일까. 6번째 퀘스트를 마친 지금도, 실마리는 보이지 않는다.

    + + +

    “오빠, 저 왔어요.”

    수능이 끝난 후에 예지가 안경을 끼고 카페에 오는 날은 잘 없었다. 안경을 껴도 옛날처럼 무미건조한 뿔테 안경을 끼고 오는 게 아니라, 엣지있는 안경을 썼다. 그런데 지금은 오랜만에 교복에 예전 뿔테 안경을 끼고 들어왔다. 그녀 나름대로는 신선함을 주기 위한 노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그걸 보면서 혜선을 떠올렸다.

    “오빠?”

    “아, 왔어. 오늘은 웬일로 교복이야?”

    “어때요? 오랜만에 보니까 교복도 괜찮죠?”

    “네 교복차림은 예전부터 예뻤어. 오랜만이 아니라 늘.”

    “피잇, 이제 사탕발림은 안 통해요.”

    하는 데 그녀의 얼굴이 좀 더 밝아졌다. 아직 통하는 모양이다.

    “그럼 가서 앉아 있어. 커피 가지고 갈 테니까.”

    “네에.”

    올려 묶은 그녀의 포니테일이 공중을 한 번 훑는다. 그 모습이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아 있는 혜선과 비슷했다. 같은 영혼을 가진 자들은 역시 그 모습이 닮는 걸까나. 그럼 회현과 나도 그럴까나.

    회현과 혜선은 어떻게 됐을까? 잘 됐을까? 오늘 밤에 볼 후일담이 살짝궁 기대됐다.

    + + +

    ‘선배, 아시는 분이세요?’

    ‘응? 아니, 오늘 처음 보는 분이셔. 뭔가 오해가 있으신 거 같은데……, 괜찮으세요?’

    민지는 조금 전에 보여줬던 남자친구의 천연덕스런 모습을 떠올렸다. 분노보다도 눈물이 주주륵 흘렀다. 양다리를 걸친 남자친구에게 화낼 힘조차 없었다. 그녀는 몰릴 대로 몰려 있었으니까.

    김민지, 유적조사팀 언어 연구원.

    5년 전만 하더라도 정말 좋은 직업이었다. 사람들의 관심이 줄어들든 말든, 성과가 나오든 말든, 국가에서 손을 놓고 있기엔 애매한 사업이었으니까. 거기에 전 정권이 예산을 많이 투자하는 바람에 일자리가 많이 늘었고, 투자와 동시에 여론몰이도 했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선 안정적인 직업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정권이 바뀌면서 예산이 팍 줄었고, 20년이나 파도 나오지 않는 성과에 정부에서 사업 철수를 고민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혹시 이 나라에서 무언가 발견한다 해도, 돈을 미친 듯이 투자하는 중국과 미국보다 먼저 발견할 수 있을 리 없었고, 선도하지 못할 바엔 그 돈을 아껴서 따라가는 데 쓰자는 여론이 돌고 있었다. 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생각이었지만, 그것이야말로 100년 동안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한국의 살아남는 방식이었다.

    그녀는 그 변화를 직접 체험할 예정이다. 팀이 축소됨으로 인해 그녀는 내일 해고되고, 예산부족으로 밀렸던 월급도 받을 길이 애매해지게 되는 것이다.

    그 미래를 앞두고 그녀는 어쩔 줄을 몰랐다. 대학 졸업 후 한 일이라고는 이거밖에 없었고, 다른 일은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아직 젊었지만, 이제 와서 새로운 걸 배우는 것도 막막했다. 더구나 빚도 있었다. 월급이 밀리는 바람에 쓴 돈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남자 친구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생긴 빚이.

    그런 상황인데, 그녀는 오늘 우연히 남자 친구의 다른 여자를 만나고 말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우연이 아니었다. 그녀의 남자친구는 그녀의 해고사실을 메시지로 들었고, 그녀가 그 일로 하소연하러 온다는 것도 알았고, 이참에 그녀를 떼어놓기 위해서 그동안 숨겨온 다른 여자 친구와 마주치게 만든 것이다. 아수라장이 될 가능성도 있었지만, 남자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의 성격과 과거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양다리를 당한 경험만 5번이 넘었다. 그것도 전부 한결같이 퍼주다가 내침을 당한 경우였다. 처음 한두 번은 그녀도 난리를 쳤지만, 세 번째, 네 번째는 화낼 마음도 없어 조용히 돌아섰다. 지친 것이다.

    남자는 이번에도 그럴 거라 생각했다. 그도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다른 남자들에게 분노하며 그녀를 지켜줄 거라 다짐했지만, 이렇게 이용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그녀는 자연스레 자신을 모른 척 하는 그와, 그의 여자 친구를 그대로 두고서 아무런 조치도 없이 그와 만나기로 했던 가게를 나왔다. 그 후엔 근처 포장마차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이다가, 유적 발굴 현장으로 향했다. 한밤중이었지만, 아직 연구원 신분이었기 때문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지금 그녀는 그 유적의 복도를 걸으며 우는 중이었다.

    그녀가 긴 복도를 걸어, 이내 공동에 도달했다. 공동의 벽면에는 조사를 위한 임시 구조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이 유적은 벽면 문자들이 수정으로 채워져 있었는데, 그걸 파내기 위한 구조물들이었다.

    수정은 세계에서 처음 발견된 거였다. 그 덕에 그녀도 어떤 기대를 가졌다. 연구원 생명이 더 늘어날지 모른다. 예산이 더 투입될지도 모른다, 같은 거 말이다. 그러나 그 기대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고, 결국 그녀는 해고를 당하게 생겼다.

    그 수정이 지금 눈앞에 있었다. 술김에 수정을 상대로 화풀이를 할 법도 했지만, 그녀의 눈에서는 오히려 눈물이 흘렀다. 수정으로 된 문장이 반 정도 형상을 잃고 있는 걸 보니, 바보같이 있는 거 없는 거 다 줘 버리고 자신조차 잃어버리는 게 그녀 자신과 비슷하다는 생각에서였다.

    다행히 그녀의 머릿속에는 원본 사진이 들어 있었고, 지난 3개월 간 계속 연구한 거였으니 얼마든지 떠올릴 수 있었다.

    ‘자, 나는 그래도 너를 기억하고 있어. 그러니까 울지 마.’

    하지만, 그녀는 누가 떠올려 줄 것인가? 이미 다섯 번이나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만 그녀의 원형은 누가 기억해 줄 것인가?

    고아로 태어나 사랑을 갈구했던 그녀는 이젠 정말로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 아무도 없는 밤에, 아무도 없는 공동에 서서 그 손목을 그어 버렸다. 아픔이 느껴졌지만, 이미 몇 병이나 마시고 온 술 덕에 무시할 수 있었다.

    피는 그 팔을 타고 흘러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한참을 그렇게 떨어지자, 바닥에 살짝 고일 정도가 되었다. 그녀는 이미 정신이 희미해지는 중이었다. 마지막에 그 눈으로 본 건, 빛을 발하는 반쪽짜리 수정 문장이었다. 그녀는 그 반짝임이 자신을 위로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너라도 나를 기억해 주니 다행…….’

    ============================ 작품 후기 ============================

    쿠폰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어제는 올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래서 조금 뒤 12시가 지나면 바로 한 편 더 올라갑니다.

    그렇다고 이 편의 추천과 코멘트를 넘어가면 미워할 겁니다......는 거짓말이고요읽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를 드립니다.

    그럼, 잠시 후에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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