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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개의 퀘스트-64화 (64/160)
  • 64화

    “그렇게 일주일 정도를 버틴 건가? 진짜 일주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주일이라는 건 회현 스스로의 판단이었다. 머리를 맑게 하기 위해 잠이 오면 바로 잠을 잤고, 그게 일곱 번 반복되었다. 내가 그의 몸에 들어온 건 그 일곱 번째의 수면 도중이었고, 그의 정신은 아직 잠에 취해 있었다.

    이제 보니 벽 아래에 흙이 쌓여 있었다. 그는 단단한 벽이 나올 때까지 벽을 파내는 작업을 계속 했는데, 이제 겨우 한쪽 벽을 파헤친 것이다. 하지만 드러난 벽에는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그 반대쪽 구석에는 신발 한 짝이 놓여 있다. 요강대신 쓰는 신발이었고, 그의 식수이기도 했다. 그는 신발에 오줌을 모아놓고서 목이 마를 때마다 마셨다.

    다른 신발 한 짝은 벽을 파는데 썼다. 어차피 부드러운 부분을 파헤치는 거니까 손톱 같은 날카로운 부분은 필요 없었다. 신발 굽으로 내려쳐도 충분했다. 그 덕에 신발은 많이 망가졌지만, 그런 거야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머리도 산발이 다 되어 있었다. 그때서야 허기와 근육통에 밀려 있던 간지러움이 온 몸에서 밀려오기 시작했다.

    “…….”

    숙연해졌다. 누구나 말은 할 수 있지만,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회현은 대단한 인물이었다. 나야 죽어도 죽지 않는 상황이고, 애시당초 내 삶이 아니니, 마치 구경하는 듯한 모양새로 있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전쟁터에서도 버텨내고, 키메라의 공격에도 떨지 않았고, 극한의 허기도 넘긴 것이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면, 그게 진짜 내 삶이었다면, 그럴 수 있었을까? 이런 식으로 희망을 가지며 버틸 수 있었을까?

    평행세계의 나에게 하는 이야기니 결국 내 얼굴에 금칠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끝까지 삶을 견지하는 그 영혼에게 인간으로서 존경을 표하고 싶었다.

    여기서 꼭 나가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모르겠다.

    천강지체가 있으니 이제 벽을 파는 것은 문제가 없을 것이고, 며칠이고 버틸 수도 있을 거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여기서 나가리라는 보장이 없다. 시간만 축내고, 체력이 바닥이 된 채 죽을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눈 딱 감고 헬 파이어를 쓴다면 어떻게 하늘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 방법 역시 위험성이 더 높았다. 이어진 물체에 모두 옮겨 붙는 지옥불의 특성상, 이 주변이 한 번에 탈 수도 있었다. 또 그가 산 정상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데 걸린 시간을 생각해보면, 헬 파이어로는 불가능해 보였다. 헬 파이어로 산을 날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전까지의 나라면 이대로 아무것도 못하고 있었을 게 분명했다. 8시간 회현과 동고동락하며 벽을 파헤치고 난 후에 현실에서 이것저것 찾아보는 게 다였겠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나에게는 조력자가 생겼으니까.

    “이프리타!”

    처음 부를 때는 긴 주문이 필요했고, 힘도 들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계약, 아니 친구를 맺고 난 후에는 이름만 부르면 됐다. 존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아무 때나 반응하는 건 아니고, 내 의지가 실릴 때만 소환된다. 일상적으로 말할 일이 잘 없겠지만, 그럴 때마다 나타나면 좀 곤란할 테니까.

    마음을 담아 말하자, 영혼에 연결된 끈이 찌릿 하는 게 느껴졌다. 처음 불러낼 때는 온 몸에 힘이 빠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그 후에는 이 정도의 느낌이 다였다. 현실에 나타난 그녀가 힘을 쓴다면 또 모르지만, 그냥 소환인 경우에는 큰 힘이 들지 않았다.

    당연히 24시간 내내 소환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소환 유지에도 내게서 가져가는 힘이 있는 모양이고, 그 양이 크진 않아도 24시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양은 아니었다. 두 시간 정도까진 시험해 봤는데, 그것만으로도 제법 힘이 들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인간형태일 때는 더 많은 힘이 들 거라고. 그래서 매번 소환할 땐 여우 형태로 와달라고 부탁했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불꽃 여우는 나타나지 않았다. 현실에서 부를 때는 바로바로 왔는데, 여기서는 안 되는 건가? ……설마 하니, 내가 자고 있는 장소에 나타난 건 아니겠지? 내 자취방에.

    [……들리나?]

    그 때, 여전히 보이진 않지만 그녀의 생각이 전해져왔다. 소환이 되긴 된 모양이다.

    [들려. 어디야? 설마 내가 자고 있는 장소는 아니겠지?]

    [아니다. 처음에는 그곳에 소환됐지만, 영혼의 끈을 따라 지금 이 세계까지 왔다. 그런데…….]

    [그런데?]

    [네가 있는 곳까지 갈 수가 없군. 거기 도착한 순간에 어떤 힘이 나를 다른 곳으로 보내 버렸다. 온 힘을 다하면 그 힘을 무시하고 너에게도 갈 수 있을 것도 같지만……. 어려울 것 같다. 이 세계에서 힘을 드러내는 건 우리 세계에서 힘을 드러내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인 것 같으니. 이런 경우는 예상치 못했지만, 세계가 내 존재를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군. 내 존재를 유지하는 것도 꽤 힘이 든다. 일단 네 힘을 좀 끌어다 써도 되겠나?]

    [아, 응.]

    허락과 동시에 온 몸에 힘이 쑤욱 하고 빠졌다. 이건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니 스태미나 수치 같은 게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얼마나 빠진 건지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다. 그래도 대충 비교하자면, 100m 달리기를 연달아 10번 쯤 한 듯한 수준?

    [괜찮은가?]

    [응, 이 정도는 괜찮아. 그런데 이런 게 계속 되면 좀 어려울 것 같은데…….]

    [계속 되지는 못할 거다. 네 힘을 빌려 유지한다 해도 한두 시간이 한계다. 너를 이 세계에 보내는 힘이 나에게까지 미치지는 않는 듯하군.]

    [그런가…….]

    좀 아쉽긴 하지만, 그거라도 어딘가. 그녀의 힘은 못 쓰겠지만, 그녀의 지식과 지혜는 쓸 수 있을 테니 상관없다.

    [그보다 그럼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정령계군.]

    [정령계?]

    이 세계에 정령계가 있다는 기억은 없었는데? 물론 우리 세계에도 정령이 있으니 이상하다고 할 것 까진 아니지만... 이 유적이 정령과 연관 되어 있는 건가?

    [그래, 우리 세계와 느낌은 다르지만 여긴 분명 정령계다. 너도 혹시 정령계에 있나?]

    [아니. 난 어떤 공간에 갇혀 있지만, 정령계는 아닐 거라고 생각해. 내가 본 게 아니라 명확하진 않지만, 이곳은 밖과 물리적으로 연결 되어 있었으니까. 정령계는 물질계? 라고 해야 하나, 그 곳과 물리적으로 연결된 곳은 아니지?]

    [그래, 아니다. 그런데, 갇혀 있다고?]

    전해지는 마음에서 걱정의 기색이 역력했다. 그 마음에 내 마음이 따뜻해졌다. 이제 이 세계에서도 혼자가 아니게 된 거다. 이프리타를 만난 건 정말 다행이다.

    [응, 그것 때문에 널 부른 거야. 여기서 어떻게 하면 빠져나갈 수 있는 지 물어 보려고. 하지만 이래서야……, 일단 기다려야 하나?]

    [음…….]

    회현처럼 소변을 마시며 벽이라도 파헤쳐야 하는 걸까, 아니면 죽는 셈치고 헬 파이어나 써볼까. 둘 중 하나를 선택해보려 하는데 그녀가 생각을 전해왔다.

    [여기서 탐색을 해보지. 네가 있는 곳에 가지 못하고 여기에 온 건 이유가 있을 테니까.]

    [그러네.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

    + + +

    벽을 파헤치는 건 정말 소용이 없을 것 같았고, 헬 파이어를 쓰느냐 마느냐 하는 결정은 이프리타의 소식을 받고 난 후로 하기로 했다.

    그러고 나자 할 일이 없어서, 기다리는 동안 회현의 기억을 계속 뒤졌다.

    이 세계는 우리의 세계와 많이 비슷했다. 한국이 있었고, 미국이 있었고, 다른 나라들도 있었다. 자신들이 사는 행성을 지구라고 부르는 것도 비슷했고, 대륙의 형태도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그야말로 평행세계라고 부를 만한 곳이었다.

    다른 건 딱 두 가지였다. 하나는 두말 할 필요도 없는 이 유적들이고, 다른 하나는 년대였다. 여기는 2100년이었다.

    2100년까지 한국이 남아 있을 줄은 예상치 못했는데, 한국은 여전히 살아남아 있었다. 아직도 중국과 미국, 일본 사이에서 아등바등하는 건 마찬가지로, 안쓰러우면서도 대단해 보였다. 100년 이상이나 균형을 유지하다니, 통쾌하진 않지만, 이것 역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2100년인 만큼 신문물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상용화된 홀로그램이 가장 눈에 띄었다. 휴대폰으로도 3차원 홀로그램을 볼 수 있었는데, 기억으로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한 번 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 방에 갇히면서 폰은 떨궈 버린 건지, 지금 회현은 폰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애초에 폰이 있었다면 어떻게든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을 테지만.

    우리 세계와 이 세계를 비교하는 것도, 새로운 문명이기를 살펴보는 것도 재밌었지만, 가장 재밌었던 건 혜선에 대한 기억을 살펴보는 것이었다.

    혜선은 예지였다. 생긴 게 약간 다르긴 했지만, 그냥 알 수 있었다. 이전 퀘스트에서 아무 증거 없이 아냐 누나를 아냐 누나라고 생각했던 것과 같았다.

    그런 혜선의 학창시절을 떠올리는 건 즐거웠다.

    퀘스트에 들어오면 아무래도 혼자가 된다. 몸의 주인과 대화를 나누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퀘스트 속의 세계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 알게 모르게 외로움을 느끼게 되는 거다. 심한 정도는 아니지만, 몸의 주인과의 관계도 퀘스트를 다시 시작할 때마다 리셋되어 버리니, 가끔은 그게 훅하고 마음을 칠 때가 있었다.

    그걸 일부나마 해소해 주는 게 현실에서도 알고, 퀘스트에서도 나오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볼 때마다 동향 사람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평행세계인 게 확실하지 않았을 때에도 그러했다. 그저 얼굴이 비슷하고, 느낌이 비슷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평행 세계인 게 분명해졌다.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이 내 현실의 사람들과 같은 영혼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걸 알았다. 이전과는 다른 눈, 좀 더 마음을 쏟아 보게 되는 게 당연했다.

    그래서 예지, 아니 혜선을 보는 내 마음은 회현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따뜻했다. 웃고, 떠들고, 놀라기도 하는 표정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았던 회현 덕분에, 마치 옆에서 본 듯 떠올릴 수 있었다. 예지가 학교 안에서 지내는 모습이 저럴까 싶었다. 한번쯤, 예지의 학교에 몰래 가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예지는 수능을 끝낸 고3이라, 가봐야 소용없겠지만. 좀 더 일찍 만났다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지나자, 기다리던 이프리타의 연락이 왔다.

    [사람이 있다. 정령계에 사람이 있을 리 없건만, 이상하게 사람이 있군. 그것도 정신체로 있다니, 이 세계는 정령이 흔한 세계인 건가? 혹시 아는 바가 있나?]

    감이 왔다. 그녀가 말하는 사람이 이 퀘스트의 실마리다. 아직 퀘스트 목표도 안 떴는데, 혹시 그 사람과 접촉하면 뭔가 뜰지도.

    [여기는 정령이 흔한 세계는 아니야. 우리 세계와 비슷해. 역사 속에서는 드러난 적이 없나 봐. 그 사람은 어때? 대화가 가능해?]

    [그걸 하려고 연락했다. 네 힘을 좀 써도 되겠지?]

    [물론. 그런데 아직 이 세계에 있을 수 있어? 안 힘들어? 힘들면 다음에 또 해도 돼. 시간은 많으니까, 여차하면 다시 시작할 수도 있고.]

    [……그럴 수는 없다. 죽음을 간단하게 생각하지 마라. 그건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게임 같은 게 아니니까. 죽지 않을 수 있다면, 죽지 않는 편이 낫다.]

    그녀의 생각에 진지함이 더해졌다. 이전의 대화가 진지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지금의 말은 묵직했다. 단순한 걱정 이상이 담겨 있었다.

    '죽음을 간단하게 생각하지 마라.'

    현실에서 소환했을 때 느꼈던 그녀의 감정도 이런 생각에서 나온 걸까? 그때는 내가 느꼈을 고통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 거라 여겼는데, 그보다는 '죽음'이라는 거 자체에 방점이 찍혀 있는 느낌이다.

    직접 유사죽음과 리셋을 경험했기에, 그녀의 말에 완전히 동의할 순 없었다. 나에게는 죽음보다도 고통이 더 겪기 싫은 거였으니까.

    그래도 그녀의 마음은 이해할 수 있었다.

    [알았어. 주의할게.]

    [그럼 네 힘을 좀 쓰겠다. 너도 같이 듣겠나?]

    [그럴 수 있어? 그럼 그렇게 하지 뭐.]

    [알겠다.]

    그리고 또 다시 탈력감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컸다. 천강지체 덕분인지 아직은 버틸만했지만, 원래 회현의 상태였다면 이걸로도 생명의 위기에 이르렀을 지도 몰랐다. 그는 지금 빈사상태니까.

    [눈을 감는 게 좋을 거다.]

    그녀의 말에 따라 눈을 감았다. 감았음에도 녹색과 파란색, 주황색이 섞여 있는 하늘과, 은색과 갈색이 섞인 땅이 보였다. 망막에 맺히는 건 아닌 것 같고, 그냥 이미지가 내 생각으로 전달되는 방식이었다. 그 땅 위에는 한 여자가 있었고, 그 여자 주변을 형형색색의 불꽃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여기가 정령계? 신비한 곳인데? 그런데 좀 황량한데? 원래 이래?]

    [원래 이러지는 않다만, 여기도 정령과 인간의 교류가 끊겨 있으니까, 그저 에너지체로 있는 게 편하겠지. 우리 세계의 정령계도 비슷하다.]

    그건 좀 슬픈 이야기다. 신비로운 하늘과 땅은 마음에 들었지만,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형형색색의 불꽃은 아마 정령인 모양이지만, 같이 모여 있어도 각자 따로따로인 듯한 느낌만 들었다. 이프리타의 세계도 이렇다면……, 자주 불러줘야겠다.

    [말을 걸겠다.]

    정령들 사이에 있는 여자의 모습이 가까워졌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내가 아는 누군가와 닮았다. 왜 안 나오나 했던 사람, 아냐 누나였다. 여섯 번 중에 세 번. 이렇게나 자주 나오는 걸 보면, 내가 아냐 누나랑 인연이긴 한 모양이다.

    “너는 누구지?”

    이프리타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음으로 전해지는 그녀의 생각이 아니라, 소리가 직접 들렸다. 불의 정령왕 답지 않은 딱딱하고, 감정이 없는 목소리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진짜 불의 정령왕 답지 않다.

    “나? 나는…….”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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