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개의 퀘스트-60화 (60/160)

60화

<평행세계>

노년을 살아가는 스칼렛의 웃음은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할머니에게서 그런 걸 느낄 수 있을지는 몰랐지만, 분명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런 사랑을 받는 존은 또 얼마나 행복할지.

게다가 그 중간 사정은 잘 모르지만, 로건이라든지, 로건이라든지, 로건이라든지……, 그놈들도 다 존 앞에서 깨갱하지 않았을까?

정말로 잘 됐다. 욕을 듣는 동안 내가 더 부글부글해서 속을 태웠었는데, 이제야 좀 시원하다.

그럼 존의 능력을 한 번 볼까?

[체력 Master], [검술 lv.9], [방패술 lv.8], [창술 Master], [마술(馬術) lv.9] 등 기사 존의 육체 능력은 기사답게 최고급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침착함 lv.9], [집중 Master] 등 정신적 능력도 뛰어났다. 문무겸비에, 바른 정신까지 그야말로 기사 중의 기사, 기사(Knight) 존다웠다.

하지만 이번에 배울 능력은 이미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 자잘한 능력들은 감상용으로만 봤다.

그렇게 존을 하나하나 파헤치다보니 드디어 원하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이프리타 소환 lv.8] - 불꽃의 정령왕을 소환할 수 있습니다. 활동량에 따라 소환 시간이 달라지고, 숙련도에 따라 쓸 수 있는 힘의 양, 소환 시간이 늘어납니다. 능력 중 하나라도 Master에 도달했거나 Master 보정을 받고 있는 경우에만 습득 가능합니다.

파괴의 정령, 아니 외로운 정령을 한 번에 날려 보낸 그 파괴력이 보통의 종류는 아니었던 게 확실하다. 배우는 데만 Master급 능력이 필요하다니, 단순하게 비교할 순 없지만, 헬파이어보다 힘든 조건이지 않은가?

물론 천강지체 덕분에 체력 Master보정을 받고 있으므로 배울 수 있긴 하다.

그렇다면 이제 현실에서 이프리타를 소환할 수 있는 건가? 정말? 헬 파이어는 파괴력을 조절할 수 없기 때문에 사용할 생각일랑 눈곱만치도 안했지만, 이프리타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라이트닝 소드를 할 수 있는 것만으로, 현실에서 메시지가 뜨는 것만으로도 퀘스트의 현실성은 증명되었다. 하지만 공중에서 불이 생기는 건 또 다른 문제이지 않은가.

마음이 두근두근했다.

그나저나 정령왕 아니라며?

[대부분의 세계에서 그녀는 정령왕입니다. ‘기사 존’이 있었던 세계가 조금 특별한 경우입니다.]

오랜만에 듣는 시스템의 사적인 메시지다. 예상치 못할 때만 반응하는 나쁜 녀석이지.

“그 말대로라면, 내 세계에서는 정령왕이라는 거야?”

[그렇습니다.]

“내 세계에서 정령은 한 번도 본적이 없는데?”

그러나 이 질문엔 아무리 기다려도 답이 없었다. 역시 기대하고 있을 땐 또 반응하지 않는 녀석이다.

“이프리타 소환을 배우겠어.”

[[이프리타 소환 lv.8]을 배우시는 게 확실합니까?]

“그래.”

[확인했습니다.]

[잠에서 깨어나시면 이프리타 소환을 사용하실 수 있을 겁니다.]

한결같은 시스템의 메시지를 보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 + +

[라이트닝 소드 lv.3 88.258%]

5번째 퀘스트를 진행하는 3주간, 하루도 빠짐없이 라이트닝 소드를 수련했다. 그러고 오른 건 4%. 굉장히 적지만, 이 정도도 많이 오르는 거라고 생각한다. 수련을 시작한 지 이제 고작 3개월이다. 단번에 검에서 번개가 쫘자작하고 나가는 걸 기대하는 건 도둑놈 심보다.

[헬 파이어 lv.2 10.023%]

하지만 이런 사기 기술을 보고 있으면 감질나기도 한다. 라이트닝 소드는 헬 파이어처럼 눈에 확하고 보이는 게 없으니까. 최소 검기를 다루기 전까지는 현실 검도랑 다를 게 크게 없다. 검기를 다루게 되면 눈에 보이게 되겠지만, 그게 아마도 lv.9였던가?

그리고 오늘은 그런 사기 기술을 하나 추가하게 된다.

[이프리타 소환 lv.0]

일어나자마자 콧노래를 부르며 방을 정리했다. 혹시라도 이프리타의 불에 탈지 모르니 옆으로 치우는 작업을 했다.

수호정령 이야기를 듣자마자 정령소환을 배울 거란 생각은 했었다. 물론 퀘스트 중에는 그런 기대에 젖을 새도 없이 문제 해결에만 빠져 있어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잘 상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런 날이 왔다. 조금 있으면 현실에서 이적을 보게 된다. 과학이 신이 된 이 세상에,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공학도로서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게 참 기대가 됐다.

그러나 서두르진 않았다. 천천히 방을 쓸고, 천천히 짐을 옮기고, 천천히 움직였다.

퀘스트를 끝낸 이 순간은 유일하게 쉴 수 있는 시간이다. 전심전력을 쏟게 만드는 퀘스트의 흐름에서 유일하게 벗어난 날이다. 오늘 밤만 되도 다시 퀘스트가 시작될 것이고, 한 번 시작되면 퀘스트 생각을 멈출 방법은 없다. 이런 날에만 퀘스트의 여운에 사로잡혀 이전의 인물들을 정리하며 편안하게 있을 수 있었다.

그런 날이니, 기다림조차도, 기대에 젖는 것조차도 즐거웠다.

어떻게 보면 너무 팍팍하게 살고 있는 거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다. 그 말도 옳다. 지금 내 인생은 퀘스트에 맞춰져 있으니까. 학교조차도 단지 부모님과의 불협화음을 내지 않기 위해 다니는 판국이니 말 다했다.

그러나 이 생활이 싫지 않았다. 예지와의 시간까지 포함해서, 내 삶의 모든 것이 변했지만, 그 변화가 싫지 않았다.

즐거웠다. 전심전력을 쏟을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이, 그 일이 허무하게 끝나는 게 아니라 심적인 보람과 물질적인 보상이 뒤따른다는 것이, 정말로 즐거웠다.

이전의 나는 무료하게, 또 무심한 채로 누군가를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었을 따름이니까. 퀘스트가 내게 이 이상 해를 입히지 않는 한, 이 삶이 싫을 이유가 없었다.

“불꽃의 정령왕 이프리타여! 여기 세계를 넘어 그대와 연결된 영혼의 끈을 가지고 전합니다. 이곳에서도 저와 친구를 맺지 않으시겠습니까?”

헬 파이어의 주문은 내가 전혀 알 수 없는 언어와 소리로 되어 있었지만, 이프리타를 소환하는 의식의 언어는 뜻만 통하면 되는 듯, 한국어로 되어 있었다. 유치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진지하게 임했다. 이런 경우일수록 마음이 담기지 않으면 소용이 없을 테니까.

그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필요 없었다. 게임에서 흔히 나오는 것처럼 바닥에 소환진을 그린다거나, 불을 피워 매개로 사용하지도 않았다. 그냥 말이면 끝. 현실성이 있는 듯하면서도 없는 게 이 시스템의 힘이다.

화르륵.

허공에서 불꽃이 피어오르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었다. 공기나 전파 외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란 말이다. 내가 1년 가까이 살고 있었던 곳이고, 어제도, 아니, 조금 전까지도 지나다녔던 곳이니 확실히 보장할 수 있다. 공기랑 전파에서 불이 붙을 확률은 개미 손톱만큼도 없으니, 내 방 중앙에 피어난 불과 인과관계를 가지는 물질은 없다고 할 수 있었다.

만약 있다면 바로 나의 존재, 그리고 나의 말일 것이다.

“……진짜로 되는 구나…….”

퀘스트를 시작한 후에 새롭지 않은 게 없었지만, 이것은 또 하나의 신세계였다.

멍하니 불꽃이 커져 사람이 되어가는 걸 지켜봤다. 속도는 느렸지만 확실하게 발이 나오고, 손이 나오고, 가슴도 나오고, 머리카락도 길어졌다. 불에 타고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사람이라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형태가 갖춰졌다. 도복을 입고 있었던 퀘스트 안과 달리, 여기서는 여성정장을 입고 있었다.

“이프리타?”

내 말에 그녀의 눈이 떠졌다. 주황빛과 붉은 빛을 내는 불꽃에 휩싸여 진홍빛의 눈동자가 반짝인다.

[너는 누군데 나를 부를 수 있는 거지?]

체형도, 말투도 퀘스트 속에서 만나 ‘그 이프리타’와 비슷했다. 그렇지만 이 이프리타는 ‘그 이프리타’와 달랐다.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의심스런 목소리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그냥 사실대로 말하면 되나? 아는 게 없는 지라 우물주물하고 있는데 불꽃 여우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이프리타가 알아서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이 끈은……, 알겠어. 대충 알겠군. 어차피 심심하던 차, 거부할 이유는 없다. 너의 이름은?]

[조……, 민, 강민이야.]

버릇처럼 존이라고 말할 뻔 하다 도중에 말을 바꿨다.

[나는 이프리타. 나와 친구가 되길 원하는가?]

[그래. 너와 친구가 되고 싶어.]

이것은 사심이 없는 진실이었다. 그녀의 힘 때문이 아니라, 내게는 이야기할 상대가 필요했다. 퀘스트에 대해서 이야기할 상대가 필요했다. 그녀는 그 목적에 걸맞은 존재였다. 내가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지금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짐작하는 그녀라면 무슨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 테니까.

[좋은 눈빛이군. 하지만 그걸로 충분하지 않아. 나와 친구가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는가?]

그러나 ‘친구’라는 말의 무게는 내 생각보다 더 무거운가 보다. 하긴, 단순히 이야기만 하고 끝나는 관계가 아니니까. 필연적으로 우리 사이에는 힘이 오고가야 한다.

[무슨 의미인데?]

[나는 불꽃의 정령왕, 이 세계의 모든 불꽃은 내 존재 아래에 있고, 이 세계의 모든 불꽃은 내 허락 없이 피어날 수 없다. 그런 이의 친구가 된다는 건, 너도 그만한 무게를 질 수 있어야 한다는 거다. 너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가?]

그녀가 말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따라 자신이 위라 주장하는 감이 머리보다 먼저 나섰다. 머리는 뒤이어 부연설명을 했다. 체력에 Master 보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닌가하는 추측이었다.

동시에 나는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그 손을 보더니, 마찬가지로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처음의 나타날 때부터 그녀는 따뜻하기만 할 뿐, 뜨겁지는 않았다. 겉보기에는 이미 이 방이 타고 없어져야 할 모양새였지만, 그녀의 존재는 그저 따뜻했다. 게다가 그 온도가 절묘했다. 이불 속 온도와 같아 잠이 솔솔 왔다. 손바닥을 통해 직접 전해져오는 그녀의 불길은 더 포근해서 오래도록 잡고 싶었다.

[나 이프리타는 강민과 친구가 됨을 선포한다.]

따라했다.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나 강민은 이프리타와 친구가 됨을 선포한다.]

그러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이 선포는 영혼의 외침, 그대가 어디에 있든지 그 영혼을 따라 내가 가리니.]

[우리의 이 사귐은 영혼이 삭아 없어질 때까지 이어지리라.]

빛이 방을 채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하얀 빛 속에서 내 가슴부근에 무언가가 들어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육체가 파인 것은 아니었다. 육체에 연결되는 게 아니었다. 그보다는 좀 더 깊은 곳, 피부의 아래, 심장의 안쪽에 있는 무언가와 내 가슴으로 들어온 게 연결되었다.

그 결합은 이전까지 그 자리에 희미하게 있던 가는 실을 대체했다. 이번에 만들어진 결합은 매우 단단해서, 어딜 가나 끊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반갑네. 친구.]

시종 무표정이던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살짝 걸렸다. 훨씬 예뻤다.

[웃으니 예쁘잖아. 만나서 반가워, 이프리타.]

============================ 작품 후기 ============================

쿠폰 주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열심히 썼는데, 열심히 안 쓴 것 같은 이 느낌은 뭘까요..?

이제 스슬 퀘스트의 윤곽이 드러날지...?

여섯 번째 퀘스트는 좀 쉬어갈 생각입니다.

댓글은 늘 잘 읽고 있습니다.

추천은 겸허히 받고 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급수정) 존-> 강민

실수였습니다. 실수예요!

갑자기 댓글이 많아져서 기쁜 마음으로 확인했는데.... 이런 큰 실수가.....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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