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개의 퀘스트-58화 (58/160)

58화

스칼렛이 한창 파괴의 정령을 상대하는 동안, 존은 계속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의 그라면 스칼렛의 앞을 막아서거나, 혹은 옆에 나란히 라도 섰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보여줬던 한 걸음, 그리고 등의 이미지만 머릿속에서 붙잡고 있었다. 뭔가가 그를 건드렸다. 처음에는 그게 뭔지 잘 몰랐다. 뭔지도 모른 채 계속 찾아 헤맸다.

그러다가 파괴의 정령의 힘에 운딘이 만든 막이 깨졌다. 자유로워진 검은 번개가 운딘을 튕겨냈고, 스칼렛을 튕겨냈다. 둘 다 공중을 날아 그의 뒤쪽에 처박혔다.

그는 그제야 그녀의 등이 건드리고 있는 게 뭔지 깨달았다.

지금은 그와 파괴의 정령 사이에 아무것도 없었다. 누군가의 등에 가려 보는 시야와는 완전히 달랐다. 이래야 했다. 아니, 꼭 그럴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강한 사람이 앞에 나서면 되는 거니까.

그러나 이랬던 적이 있었다. 그 때도 앞에는 파괴의 정령, 뒤에는 스칼렛이 있었다.

“나이트 존, 어서 물러나세요. 당신이 상대할 수 있는 적이 아닙니다! 정령기사들이 해결할 겁니다!”

다시 몸을 반쯤 일으킨 그녀가 외쳤지만,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상대할 수 없으면, 물러나야 하는 겁니까?”

“네?”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이 주변에 누가 있습니까?”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연병장을 채우고 있던 수십의 후보생은 멀리 도망갔고, 교수들도 어느새 자리를 비웠다. 상처 입었던 자들도 비틀 거리며 자리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남은 이들은 심각한 상처를 입은 몇 명뿐이었다.

정령기사 아카데미에 파괴의 정령이 나타났으면, 당연히 빨리 정리되어야 하는 게 정상일 것이다. 그러기 위한 학교이고, 그러기 위한 정령기사니까.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서로 자신의 목숨을 챙기느라 도망갔고, 상처 입은 동료들을 버렸다. 그럼 이 파괴의 정령은 누가 처리하느냐고? 아마도 섹트가 나서서 할 것이다. 오늘 출동대기 중인 섹트 말이다. 그 말인즉, 이들은 지금 혹시라도 발생할지 모르는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 눈앞의 참상을 외면한 것이다. 오늘 죽어야하는 이들은 출동대기 중인 섹트지, 자신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파괴의 정령이 어디로 튈지 모르고, 그곳은 시내 한복판이 될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들의 방치로 인해 수도에 아비규환의 지옥이 펼쳐질 수도 있는데 말이다.

파괴의 정령은 정령기사들의 이기심에 방치되었다.

“……그래도, 안 됩니다. 섹트에게 맡겨두십시오. 여기서 죽는 건 개죽음입니다.”

“그럼 당신은 어떻게 합니까?”

“저는 이 자리에서 막을 겁니다. 저 정령을 조금이라도 저지해야지요.”

“그럼 저는 왜 안 됩니까?”

“나이트 존은 아직 정령기사라 하기엔…….”

스칼렛의 말은 정론이었고 그만큼 힘이 있었다. 그러나 존을 제지하기엔 힘이 모자랐다.

“스칼렛!”

“응?”

“기사란 뭐지?”

“지금 그게 중요해?”

“중요해, 그걸 너에게 가르쳐 준 건 나니까.”

어릴 때 존은 기사에 대한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같이 놀던 마을 아이들 전부가 절로 외우게 될 정도로 그 사랑이 대단했다.

첫째, 모든 약자를 존중하고 지킨다.

둘째, 적을 앞에 두고 도망가지 않는다.

셋째, 모든 이에게 관대하게 대한다.

넷째, 거짓말을 하지 말고 약속은 지킨다.

다섯째, 항상 어디서든지 정의와 선을 수행하고 악과 불의를 타파한다.

이게 그도 알고 스칼렛도 아는 기사도(Chivalry)다. 그녀도 기사도를 다시 떠올린 건지,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나에게 여기서 물러나란 말을 할 수 있지?”

“…….”

스르릉.

후보생들 중에 검을 차고 다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여기가 전쟁터도 아니고, 그들의 상대는 물리적인 공격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니까. 하지만 존은 항상 검을 차고 다녔다. 그 검이, 참으로 오랜만에 뽑혀 빛을 반사시켰다.

“나는 기사.

내 힘이 모자라도 동료를 버리고 가지 않을 것이고, 내 힘이 모자라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고, 내 힘이 모자라도 적을 조금이라도 저지할 가능성이 있다면 기꺼이 싸울 것이다.

그것은 내가 스스로에게 한 맹세.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나는 여기에 서 있겠어.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서, 내가 이후에도 기사로 있기 위해서. 그리고 이어온 가치들을 지키기 위해서.

내가 이제껏 받아온 것들은 이러라고 있는 거잖아?”

그가 왕립아카데미에서 받은 교육, 돈, 숙소. 또 이 정령기사 아카데미에서 받은 것들. 그의 힘만으로 쟁취한 건 아니었다. 다른 이들의 뜻이 모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기사라는 이름에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이 준 거였다. 그는 그걸 무시하고 도망갈 수 없었다.

“힘이 모자라 죽을 수 있지. 아마 오늘이 그런 날이겠지. 너의 말대로 개죽음일지도 몰라. 수호정령도 제대로 못 부르는 반푼이가 괜히 나서는 꼴이니까.”

“…….”

“그런데 여기서 살아나간다고 뭐가 달라지지? 내 마음은 이미 꺾였고, 내 맹세는 무참히 짓밟혔는데, 나보고 그 지옥을 살아가라고? 여기 있는 이 기사도 아닌 것들처럼 기사의 모양만 가지고 있으라고?”

“…….”

“웃기지마! 그러느니 차라리 여기서 죽겠다! 기사가 기사로서 죽는 거야!”

“…….”

“나는 기사다!”

머리는, 그래 머리는 절대로 동의할 수 없었다. 여기서 죽는 건 그냥 개죽음이니까. 그가 여기 있는 건 오히려 스칼렛을 방해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마음을 통해 절절히 흘러들어오는 그 결의를 싫어할 수는 없다. 나뿐 아니라, 그런 사람은 아마도 없지 않을까.

죽음까지도 낭만의 한 소재로 삼아 버리는 그 태도는 남은 생명을 한 번에 태워 빛을 내는 것처럼 눈부셨다.

“그래, 너는 기사야. 지금도, 그 때도. 가라고 하진 않을 테니, 옆에 서게는 해주겠지? 이제 나도 기사니까.”

“물론.”

스칼렛이 존의 옆에 섰고, 그 옆에는 아직 몸의 반이 투명해져 있는 운딘이 섰다. 그때, 이제껏 조용히 있던 파괴의 정령이 움직였다. 정령 주위로 스파크가 튀며 번개가 모이기 시작했다.

저 공격이 날아오면 분명히 죽을 것이다. 존은 직감했고, 무서웠지만 한 걸음 더 나갔다. 그만 그런 건 아니었다. 스칼렛도 운딘도, 뒷걸음질 치지 않고 그처럼 한 걸음 앞으로 움직였다. 같은 동작을 한 둘이 얼굴을 마주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그는 죽는 게 외롭지 않아서 고맙다고 했다. 그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비슷하겠지.

그러나 굳이 죽을 필요는 없었다. 이전의 존이라면 여기서 꼼짝없이 죽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는 잊었던 기억을 되찾았고, 내 예상대로라면 그 기억은 수호정령을 부르는 핵심 키다. 지금이라면 이프리타를 불러낼 수 있을 거다.

‘존, 이프리타를 불러!’

‘응?’

‘그냥 불러!’

존은 그제야 놀랐다. 그가 매번 떠올리던 장면이 이미 완벽하게 재생되어 있었던 것이다. 실루엣으로만 보이던 세 사람에게는 눈, 코, 입이 생기고, 표정이 생기고, 생기가 돌았다. 그게 누구인지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중간의 사람은 아마도 어릴 때의 그, 그의 뒤에 서 있는 사람은 어릴 때의 스칼렛,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이프리타!”

화라라락!

공중에서 불꽃이 피어났다. 불은 순식간에 사람의 형체를 갖추더니, 도복을 입은 정갈한 미녀가 되었다.

[드디어 나를 불렀구나!]

[어? 어? 네가 진짜 이프리타야?]

[상황설명은 나중에 하고, 지금은 힘을!]

파괴의 정령은 번개를 쏘아냈고, 존은 정신을 집중했다. 이프리타의 등에서 아홉 개의 꼬리가 튀어나왔고, 그와 스칼렛의 앞에 커다란 불꽃 방패가 생겼다.

콰가가가아.

검은 번개 다발은 강력했다. 불꽃 방패가 미친 듯이 흔들리고, 주변의 땅도 들썩 거렸다. 그러나 뚫지는 못했다.

[자, 좀 더 가볼까?]

이번엔 이프리타가 힘을 쓰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 위에 붉은 구슬이 생성됨에 따라 존의 몸에서 힘이 무지하게 빨려 나갔다. 다른 건 다 달랐지만, 이것만은 그녀와 불꽃 여우가 비슷했다.

[이프리타, 잠깐, 조금만, 존이 위험해!]

[아 그렇군. 알겠어. 힘 조절을 하지. 겨우 돌아왔는데, 이번에도 돌아갈 순 없으니까. 그래도 조금 더 필요하다. 힘을 내라, 존!]

“으아아아앗!”

존이 기합을 내지르며 힘의 흐름에 집중했고, 어디서 솟아난 건지 모를 힘이 그 흐름에 더해졌다. 처음에 의지로 안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냥 기합으로 모든 게 되는 세상이었어.

[좋아!]

그녀의 말과 동시에 힘의 흐름이 끊겼다. 이전에는 이쪽에서 끊어줘야 했지만, 이젠 그녀가 할 수 있는 모양이다.

[자네도 좋은 벗을 만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다음번엔 좋은 친구를 만나길 바라겠네.]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구슬을 불꽃 방패 밖으로 내 보냈다. 구슬은 빠르게 파괴의 정령을 향해 날아갔다. 파괴의 정령은 번개 다발을 쏘아내며 붉은 구슬을 저지하려 했지만, 구슬은 번개를 헤치고 정령의 몸까지 손쉽게 도달했다.

그리고 폭발했다.

콰가가가아!

============================ 작품 후기 ============================

쿠폰 주신 분들께 감사를 전합니다.

좀 적지만, 여기서 끊어 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올립니다....

댓글과 추천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