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개의 퀘스트-56화 (56/160)
  • 56화

    [다섯 번째 퀘스트, 존이 수호정령을 불러낼 수 있도록 가르치세요!]

    쉽게 깰 줄 알았다. 수호정령이 분명한 이프리타는 처음 들어갔던 날부터 소환해낼 수 있었으니까. 게다가 한 몸을 사용하니 가르치는 게 어려울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몇 번 시범을 보이고 나면 알아서 깨우치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일주일이 지난 지금도 난 존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자, 다음 주에 무투회가 있는 건 알지? 이번 무투회엔 각 섹트에서 너희들을 보러 나올 테니까 최선을 다하도록. 이상.”

    “수고하셨습니다.”

    지루한 수업을 이어가던 교수가 퇴장하자 후보생들이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번 무투회는 서열에 얼마나 반영되는 거야?”

    “무투회도 무투회지만, 아카데미 전체 성적이 중요한 거 아냐?”

    “후우, 첫 서열이 조금이라도 높아야 내년까지 살아남을 텐데…….”

    “그나저나 쟤는 졸업하면 바로 죽겠지?”

    “그렇지 않을까? 왕립 기관에 꼴찌로 들어가면 그날 바로 출동할지도 몰라.”

    “그럼 바로 죽겠군. 크크크.”

    그러는 너네들도 남말 할 처지는 아니지 않나? 섹트 중에서도 최약체에 소속된 녀석들 주제에.

    “이번에 참관은 누가 오는 거야? 어떻게 잘 보여야 할 텐데…….”

    “후원자에게 부탁해 봐. 후원자도 네가 오래 사는 걸 좋아하겠지.”

    “그게, 그 후원자가 돈도 권력도 별로야.”

    “쯧, 그러게 무턱대고 받지 말았어야지.”

    이 세계도 돈이군. 누가 정령기사를 정의롭다 했던가.

    연병장 한 쪽에 서 있던 존은 들려오는 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동경했던 정령기사에 대한 환상은 깨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바닥에 바닥까지 내려가는 이들의 모양새를 보고 있으니 참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자신에 대한 모욕보다, 그는 정령기사란 이름, 오래전부터 존경을 담아 불렀던 이름에 먹칠을 하는 이 꼴을 더 견디기 힘들어 했다. 물론 나는 존을 욕하는 게 더 싫었지만.

    후보생들에게 무투회는 중요했다. 무투회는 수호정령의 힘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이자, 졸업 후에 받을 섹트 내 서열을 올릴 수 있는 유일무이한 자리였다. 서열이 높으면 파괴의 정령을 막으러 가는 순번이 잘 돌아오지 않고, 자연히 오래살 수 있게 된다. 정령기사들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문제였다. 거기에 첫 서열을 받으면 1년 동안은 꼼짝없이 그 서열에서 버텨야 했다. 어려운 일이었다. 생환율 50%라는 건, 1년에 한 번씩 있는 섹트 내 무투회 전에 죽는 이가 절반이라는 거니까.

    그런 상황이니, 실력이 안 되는 이들이 다른 요소를 끌어들이려 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내 세상에서는 아주 익숙한 일이다. 눈뜨고 코 베어가도 모를 세상이라고 하지 않는가? 별의별 사건 사고와 기상천외한 부패가 판치는 내 세상에서는 놀라지도 않을 일이다.

    사실 이 세상에서도 그리 어색한 일은 아니다. 사람 사는 곳이 다 똑같으니까.

    그런데 존은 정령기사에 한해서는 완전히 다른 기준을 갖고 있어서,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화를 내고, 짜증을 부렸다. 그의 어린 시절을 돌려달라고 하는 느낌이었다. 그가 아카데미에 온 지 벌써 한 달, 익숙해질 법도 한데 그의 마음은 아직도 칼처럼 날카롭게 서 있었다.

    그 칼이 갑자기 훅 들어온 누군가를 베어버렸다.

    “우리를 경멸해?”

    “당연……, 아닙니다. 나이트 스칼렛.”

    존은 당황해서 수습하려 했지만, 이미 말은 뱉어졌다. 그리고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스칼렛의 말투가 바뀌었다.

    “괜찮습니다. 이런 모습이 어떻게 보일지는 잘 알고 있으니까요.”

    “아닙니다. 나이트 스칼렛이 얼마나 모범적인 후보생인지는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정령기사의 정신은 사라지고 이름만 남은 이곳에서, 그나마 그 정신을 계승하려고 하는 자는 나이트 스칼렛밖에 없었다.

    “진전은 있으십니까?”

    “다행히 있습니다. 차후에 기회가 된다면 보여드리겠습니다.”

    존과 함께한 지 일주일, 이 세계의 시간으로 치면 3일간 존과 나는 밤낮으로 이프리타를 불러냈다. 그 덕에 존은 잠깐이나마 그녀를 소환해낼 수 있었다. 물론 녹초가 되어 버렸고, 그 탓에 수업시간인 지금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한쪽에 빠져 있었다. 애초에 수업시간엔 그 사실을 드러낼 생각이 없었지만.

    “저기 봐. 저기.”

    “저 병신자식이 또 정신을 못 차리고.”

    “아아, 우리 여신님은 왜 저렇게 착하신지.”

    존에게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지만, 스칼렛도 들은 건지 안 그래도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가 살짝 끼었다. 말하는 이들도 그녀가 듣고 있다는 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저렇게 좋은 이야기만 하는 거겠지. 스칼렛이 없는 자리에서는 심한 이야기도 했다.

    ‘이런 버러지한테 신경 쓰는 못된 버릇은 내 아래에서 몇 번 박아주면 고쳐질 텐데.’

    ‘크윽, 그거 생각만 해도 좋은데?’

    ‘그렇지? 제깟 년이 수호정령 좀 강하면 어쩔 거야. 여자는 남자한테 안 되게 되어 있다고.’

    기억을 떠올리니 내가 다 화가 났다. 존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반응하지 않는 그도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단호했다. 그래서 원래라면 그녀가 사과를 해야겠지만, 그가 먼저하고 말았다.

    “그만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와 같이 계시다간 나쁜 소문만 돌 것입니다.”

    “죄송합니다. 오히려 저 때문에 나이트 존이…….”

    “저는 괜찮습니다. 그런 소문이야 웃어넘기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레이디에게 소문이란 언제나 좋지 않은 법입니다.”

    “저도 괜찮습니다.”

    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고, 거기에 다시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 역시 그와 비슷한 과인 듯했다. 역시 이 아카데미에서 가장 정령기사에 가까운 사람답다. 마음에 든다. 그러나 존은 아닌가 보다. 이쯤에서 받아주면 될 텐데, 그는 또 한 번 고개를 젓는다.

    “제가 괜찮지 않습니다.”

    그는 그 말을 하고선 똑바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 시선을 받은 그녀의 표정이 약간 풀어지는 게 내 눈에는 보였지만,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듯했다.

    “……알겠습니다. 나중에 기약하죠.”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나이트 스칼렛.”

    스칼렛은 존에게 살짝 고개를 까닥이고 연병장을 떠났고, 다른 후보생들은 또 이것저것 험담을 하기 시작했다. 들릴 듯 말 듯한 위치에서 지껄이는 그들을 존은 없는 사람마냥 싹 무시하고 역시 자리를 떴다.

    ‘바보.’

    ‘……왜 또?’

    이유를 말해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내가 그의 연애문제까지 해결하러 온 건 아니지 않은가?

    + + +

    퀘스트는 퀘스트고, 내 일상은 계속 되고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카페에 나와 알바 중이다. 퀘스트에 비하면 무료한 시간이지만, 이 시간이 없이는 내 생활을 지탱할 수 없다. 나는 아직 가난한 대학생이니까.

    카페는 오늘따라 특히 한가했다.

    카페가 집 근처라 예지가 얼굴도장 찍듯이 매일 밤 오긴 하지만, 내 알바 시간 내내 같이 있는 건 아니다. 그녀도 그녀의 일이 있고, 만날 사람들이 있으니까 당연한 거다. 그에 불만은 없지만, 사장도 없는 오늘 같은 날에는 심심함을 달랠 길이 없다. 그런 참에 찾아온 손님은 손님이라도 반갑다. 그 손님이 아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문을 열고 큰 선글라스를 낀 금발 미인이 들어왔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비주얼이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신기했다.

    “아냐 누나? 어쩐 일이세요?”

    “그게, 그냥 커피 마시러 왔지.”

    그러나 평소와 약간 달랐다. 목소리도 약간 흔들렸지만, 선글라스를 벗으면서 인사를 하는 데 확실히 깨달았다.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전에는 이런 관찰력이랄까, 이런 식으로 절대로 발견하지 못했겠지만, 테디오와 한 2주 뒹굴고 나니 눈빛만 봐도 대충 무슨 말을 하는 지 알 것 같았다.

    “무슨 일 있어요?”

    “아무것도 아니야.”

    가볍게 부정하는 누나의 말은 평소와 같이 태연했다. 숨기고 싶은 것 같다. 그럼, 굳이 들출 필요는 없겠지.

    “그래요? 그럼 말고요.”

    그 후 누나는 혼자서 커피를 마셨다. 이전에는 커피는 덤이고 오자마자 나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는데, 오늘은 ‘나 우울함.’ 포스를 풍기면서 접근을 방지했다. 이전의 누나를 생각하며 ‘이제 좀 심심하지 않겠구나.’했는데, 그 우수에 젖은 자태를 보니 말을 걸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이 넓은 공간에 혼자가 아니라는 것만으로 조금은 위안이 됐다. 누나가 생각에 잠긴 것처럼, 나도 생각에 잠기기로 했다. 생각할 거리는 많았다. 당장 존의 이야기만 해도 문제가 많지 않은가? 5번째 퀘스트를 시작한 지 이제 열흘이지만 아직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누나가 먼저 조용한 배경음악이 흐르는 카페에 목소리를 넣었다.

    “원래 이렇게 손님이 없어?”

    누나가 카페에 방문한 건 이제 한 네 번쯤? 그러니 아직 이 카페의 진실을 몰랐다. 손님이라고는 예지밖에 없고, 그러고도 카페가 돌아간다는 전설을.

    “그렇죠 뭐.”

    “그럼, 내 얘기 좀 해도 돼?”

    그 사실이 누나에게 조금 용기를 준 건지, 마음을 풀어지게 한 건지, 누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야 언제든지 환영이다.

    “하세요.”

    내가 허락과 함께 누나가 앉아 있는 테이블 앞에 앉자, 누나의 사연이 쏟아졌다.

    “저번에 내가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갔다고 했잖아? …….”

    길고 긴 이야기의 요지는 딱 하나였다.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간 건 좋았는데, 외모 때문에 붙었다는 악플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아주 흔하디흔한 이야기라 새로울 것도 없었지만, 내 주위 사람이 당하고 있다니 참 씁쓸했다.

    누나가 어떤 악플을 받았는지 이것저것 얘기해 줬는데, ‘외모 때문에 붙었네.’ 정도는 정말 예의바른 말이었다. XX년이라느니, 심사위원에게 가랑이를……, 하는 차마 말로 하기도 힘든 악플도 있었다. 누나도 말로 하진 못했고, 인터넷 찾아봐서 안 거다.

    듣고 있기조차 힘든, 화가 부글부글 나는 그런 말들이 이어졌다. 누나의 목소리가 반쯤 젖어 있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 마음이 대충 짐작이 갔다. 존과 함께 지내며 모욕이란 게 사람을 얼마나 열불 나게 하는 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공감이 갔다. 그는 아무렇지 않아 했지만, 나는 뒤엎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를 깔아 내리는 후보생의 말들이 자신에게 실질적으로 아무런 피해를 줄 수 없다는 사실은 나도 안다. 하지만 이성과 감정은 가깝지만 먼 사이 아닌가? 그 하나를 되뇌는 것만으로 어떻게 그렇게 참을 수 있는지, 보면 볼수록 신기했다.

    그 탓일까. 존을 위해 화를 내지 못한 것까지 포함해서 누나에게 악플을 다는 병신 같은 것들에게 진지하게 화냈다.

    “정말 병신 같은 것들이네요. 그런 놈들이 하는 말에 신경 쓰지 마세요. 가랑이가 어쩌고 뭐? 진짜 말도 잘 안 나오네요. 눈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할 것들이 진짜. 으, 누나, 혹시 누나 앞에서도 그런 말 하고 다니는 자식들이 있으면 날 불러요. 다 패 버릴 테니까.”

    “……에?”

    진심이었다. 예전이라면 이런 말 못했을 것이다. 나는 상대 봐 가면서 덤비는 현실적인 사람이니까. 그러나 지금은 누가 와도 한 방에 날려 버릴 자신이 있다. 악으로 깡으로 버틸 체력도 있다. 뭐하면 헬 파이어로 날리면 될 거고.

    “그리고, 자요.”

    “……에? 왜?”

    휴지를 건네자 누나가 의아한 눈으로 쳐다봤다. 바보 같은 사람이, 자기 눈에 뭐가 흐르는 지도 모르는 모양이다.

    “닦아요.”

    “에? ……아, 흐윽.”

    그 뒤로 누나는 혼자서 끄윽끄윽 하면서 질질 짜기 시작했다. 저번에는 소리도 크게 내면서 잘만 울더니, 이번엔 숨넘어가듯이 소리도 못 내고 서럽게 운다.

    그게 너무 안쓰러워서 몸이 절로 누나 옆으로 갔다. 옆으로 가서 등을 토닥토닥 하니까 누나가 내 품을 파고들며 그제야 기차화통 같은 목소리를 뽐냈다.

    “흐어어어엉.”

    예전엔 이정도로 감성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예지가 말했듯이 냉철한 프로게이머에 가까웠다. 그런데 어느새 바뀌었다. 남의 인생에 개입하다보니 이렇게 된 거 같다. 게다가 수에르테와는 이래저래 엮이기도 했으니까.

    흠……, 예지가 보기 전에 끝나긴 하겠지?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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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일부터는 좀 더 많이 쓰도록 하겠습니다.

    급하게 진행되던, 사실은 마감이 코앞이던 일이 결국 파토가 나 버렸지만, 뒤처리는 하지 않을 예정이니까....크크크크크크킄 아악.

    댓글과 추천 감사드립니다.

    추천이 벌써 만이 넘었군요ㅋㅋㅋ 여러분의 덕분입니다. 이번주는 꼭 달려보도록 하겠습니닷!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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