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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개의 퀘스트-55화 (55/160)
  • 55화

    단출한 방이었다. 정령기사 후보생의 기숙사답게 컸지만, 그 안에 채워진 게 거의 없었다. 기본적으로 제공되는 가구들이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넣을 것을 감안해서 정말 기본적인 것들만 있었다. 어떻게 보면 사람이 살지 않는 방 같기도 했다.

    존이 평민 출신이라서 이런 것은 아니다. 평민 출신의 후보생이라도 섹트에 소속되면 품위 유지를 위해 채워준다. 혹 섹트가 없더라도 후보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줄을 대려는 사람은 많다. 후원하려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파괴의 정령이라는 재앙에 대비할 수 있는 카드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너는 누구지?’

    15살답지 않은 존. 도발에도 반응을 하지 않고, 모욕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여자를 대하는 것만 능숙했다면, 미래에서 돌아온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준이었다. 그런 그답게, 방에 들어오자마자 나를 찾는다. 스스로에게 대화를 걸 때는 어디에 앉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며 우물쭈물하던 그의 모습은 웃겼지만, 홀로 테이블에 앉은 뒤 묻는 그의 생각을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이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그 동안은 대충 얼버무릴 수 있었다. 넷 다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퀘스트 목표가 내가 움직여 하면 되는 거니까, 굳이 정체를 밝힐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나도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뭔지. 무작정 퀘스트를 깨는 것에만 집중했을 뿐이다. 재밌었고, 보상도 있었고, 만족감도 있었다. 정체를 생각하기 전에 빠져들었다. 이것저것 재어보고 고민하지 않았다. 현실에서 아냐 누나를 찾아가기도 했지만, 그것도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접근했을 뿐이다. 내게는 전력을 다해 이 퀘스트를 파헤칠 생각이 없었다.

    왜 그랬을까?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라는 게 정답에 가까울 것이다. 퀘스트는 처음부터 친근했다. 나름 경계를 하려고 이것저것 생각했지만, 결국 내 마음은 그게 어때서? 란 대답을 내 놓았다. 그 친근감은 키메라 로젤리나에게 맞아 아픔을 겪을 때도, 매일 밤 공허에 사로잡히면서도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커졌던 거 같다. 베르트랑, 파이레스, 요한, 테디오와 함께하면서 그들과 함께 울고 웃으면서, 나는 퀘스트에 더 몰입했다.

    첫 단추를 잘 끼웠기 때문에 일어난 일인 것 같기도 하다. 게임 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던 삶에 신기한 것이 들어왔으니까. 아픔도 있었지만, 즐거움이 더 컸으니까. 그리고 나에게 아직 요구하는 것이 없으니까.

    평소에는 심장보다 머리가 강한 나다. 그러나 퀘스트만 관련되면 역전이 된다. 감과 느낌을 따라간다. 어째서 이런 거냐고 스스로에게 되물어도 소용이 없다. 자기 합리화만 할 뿐이다.

    지금도 그렇다. 의문만 실컷 늘어놓고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는가. 그래서 뭐가 문제야? 하고 마음이 묻는다.

    함정에 빠진 사람이 스스로를 구출하는 건 정말로 힘든 일이다. 그러라고 만든 함정일 테니까. 그렇다면 나는 이미 함정에 빠진 건지도.

    이번에도 그 감을 따라 아무렇게나 대답해 버리고 말았다.

    ‘너를 도와주러 온 사람이지.’

    ‘사실인가?’

    ‘사실이지만, 믿기지 않겠지? 지금도 의심에 가득 찼고.’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나 보지?’

    ‘응, 생각도, 기억도, 감정도 다 내 맘대로 볼 수 있지.’

    ‘그, 그건…….’

    지금 내 육체가 있었다면 피식하고 웃었을 것 같다. 그가 터무니 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조종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런 걱정은 마. 신이라니, 신이 이런 식으로 접근하겠냐?’

    ‘……그럼 넌 누구지?’

    ‘너를 도와주러 온 사람이라니까. 정확하게는 네게 수호정령을 다룰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러 왔지.’

    ‘……정령인가?’

    ‘음……, 그런 건 아니지만, 그렇게 이해해도 상관없겠지. 아, 그런데 형체는 없으니까, 나를 수호정령이라고 생각하면 안 돼. 그리고 네 수호정령은 따로 있다고.’

    의심의 벽을 두르고 있던 그의 정신은 ‘수호정령’이라는 한 마디에 쉽게 흔들렸다.

    ‘……진짜인가!’

    ‘그래, 있어. 있으니까 그렇게 호들갑 떨지 마. 내가 다 도와주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너는 수호정령을 불러 낼 수 있을 거야.’

    ‘어떻게 하는 건가?’

    정상적인 줄 알았더니, 존도 나사가 하나 빠져 있었다.

    어쨌든 그의 말을 따라 어떻게 하는 지 가르쳐 주려고 했는데, 정작 나도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고 있었다. 헬 파이어를 쓰면서 힘의 흐름에는 익숙해졌고, 그걸 다룰 수는 있지만, 일단 그 흐름이 시작하게는 해야 할 것 아닌가? 나는 그 부분을 알지 못했다.

    ‘으음, 일단 어제 기숙사 뒤편에서의 상황을 재현해 볼래? 거기까지만 하면 내가 알아서 할게.’

    ‘기숙사 뒤편이라…….’

    존이 정신을 집중했다. 대상은 마음속에 느껴지는 이질감. 그의 안에는 나 말고도 다른 존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아마도 전에 만났던 그 정령의 흔적이겠지.

    집중하는 과정은 기억을 더듬는 과정과 비슷했다. 희미한 기억 속의 한 장면은 하나하나 되짚어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날씨는 어땠지? 장소는? 나무가 많았나? 누구랑 같이 있었더라? 등의 질문을 하면서 관념적인 이미지를 구체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가 그리는 이미지는 불꽃 여우와는 많이 달랐다. 무언가 판별할 수 있을 정도의 이미지가 완성되진 않았지만, 그 크기가 여우와는 차이가 났다. 저 정도면 사람이라도 봐야 했다. 붉은 색인 것 비슷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가 대충 형태가 잡혔다. 그의 머릿속에는 세 사람이 있었다. 하나는 그인 듯했다. 그의 뒤엔 조그마한 사람이 서 있었고, 그의 앞에는 붉은 사람이 서 있었다. 세 사람 다 색깔만 칠해져 있고, 구체적인 부분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아마 이 이상 그림을 완성시키려면 힘을 불어넣어야 하지 않을까.

    그 순간, 그의 몸에서 힘이 쭈우욱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처음 들어왔을 때 느낀 것처럼, 온 몸이 블랙홀처럼 빠져나가는 듯했다. 그의 정신은 그 와중에도 그림을 완성시키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야, 정신 차려!’

    ‘이번엔 이쪽을, 저쪽을…….’

    ‘야!’

    두 번째 부름에도 그는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일단 그의 몸을 가로챘다. 이쪽에 대한 정신 방어는 약한 지, 그는 주도권을 쉽게 내주었다. 바꾸자마자 무서운 흡입력이 전신을 강타했다. 조금만 긴장을 놓으면 생각을 놔버릴 만한 감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정신을 집중하는 존은 대단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불 가운데로 끌려가고 있는데도 퍼즐맞추기를 하고 있는 격이 아닌가?

    ‘존! 정신 차려!’

    이래도 반응하지 않으면 어떡하나 싶었지만, 몸의 주도권이 바뀌면서 주는 자극이 그의 정신을 깨우는 데 성공했다.

    ‘……아, 아.’

    ‘정신없겠지만, 내가 어떻게 하는 지 느껴!’

    ‘아, 알았어.’

    그 이상은 나도 그에게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다른 데 신경쓰다가다는 체력을 다 빼앗기고 죽을 것 같았다. 그는 알아서 할 것이라 믿고서 힘의 흐름에 집중했다. 그리고 들어왔을 때 한 것처럼 힘을 한 번에 폭발시킨 다음에 그 통로를 끊어 버렸다.

    이번에는 테이블 위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무릎에 주저앉는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게다가 힘도 그만큼 무식하게 빨려나가지 않았다. 100m 전력질주를 몇 번이나 한 것 같은 탈력감이 온 몸을 감돌았지만, 긴장을 풀면 바로 정신을 잃을 것 같은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지, 테이블 위에 나타난 여우는 저번보다 작아 내 주먹만 했다. 여우가 몸의 절반이나 하는 꼬리를 돌리며 내 쪽을 바라보았다.

    [안녕?]

    [이렇게 빨리 다시 부를 줄은 몰랐군. 무슨 일이 있나?]

    전에도 느꼈지만, 귀염귀염 열매를 잔뜩 먹은 것 같은 외모에 비해서 말투가 너무 딱딱했다.

    [아니, 아니, 원래 너의 친구에게도 인사를 해야 할 거 같아서. 앞으로 자주 보겠지만.]

    [그렇군. 안녕했는가, 친구여. 참으로 오랜만이군.]

    [……어? 어? 어?]

    존은 아직 상황에 적응하지 못했는지, 놀라고만 있었다.

    [친구가 당황 했나 본데? 정신을 못 차리고 있어.]

    [나도 느껴진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마음속의 이질감이랄까, 그런 게 훨씬 커져 있었다. 나처럼은 아니겠지만, 그 흔적을 통해 여우도 존의 상태를 느낄 수 있는 모양이었다.

    [일단 통성명이나 해볼까? 나는 민이라고 부르면 돼. 너는 이름이 뭐지?]

    [내 이름은 이프리타.]

    응? 익숙한 이름인데?

    [잠깐, 이프리타면 정령왕의 이름 아닌가?]

    [아니다.]

    단호한 이프리타의 생각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거짓은 아닌 듯했다. 이프리타가 존의 생각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듯이, 존 역시 이프리타의 생각을 느끼는 게 가능했다. 그 감각은 이프리타의 말에 진실성을 부여해줬다.

    나도 그 의견에 수긍했다. 아는 이름이 나와 무심코 물어보았지만, 엄연히 다른 세계다. 이름이 비슷하다고 직책이 같다는 건 섣부른 판단일 뿐이다.

    [음, 하긴 그렇겠지. 어이, 존?]

    [저, 전 존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격식을 차릴 필요는 없는데.]

    [그렇다. 나는 너의 친구. 편하게 대해도 된다. 정령과 인간의 관계는 누가 누구의 위에 있지 않다.]

    [그렇다잖아?]

    [그, 그게 만나서 반가워.]

    존은 여전히 정상적 상태가 아니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프리타의 어투가 너무 딱딱한 탓 아닐까?

    [나도 만나서 반갑군. 그럼 이만.]

    [어? 벌써?]

    [지금 정도의 힘으로는 이 시간이 한계다. 좀 더 힘을 내보도록.]

    조금 이상했다. 의외로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길었다. 저번보다 힘을 적게 썼기 때문에, 시간도 짧을 거라 생각했는데, 단순히 그것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좀 더 알아봐야할 문제다.

    [으음, 대충 알겠어.]

    [……잘 가!]

    존이 부랴부랴 하는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이프리타는 온기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그러고 보면 이프리타는 성별이 있는 건가? 그 모습에 남자면 좀 깰 텐데…….

    잠시 이프리타가 남겨 놓은 온기를 느끼고 있으니, 존이 정신을 수습하고 말을 걸어왔다.

    ‘뭐야, 어떻게 한 거야?’

    ‘너도 다 느껴놓고 그러기냐? 내가 굳이 말로 설명해야겠냐?’

    혹시나 했지만, 역시 그 정도로 정신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내 말에 내가 어떻게 했는지를 정확하게 떠올렸다.

    ‘……아, 아니야.’

    ‘좋아, 그럼 이번엔 네가 해 봐.’

    그리고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몸의 주도권을 돌려주었다. 그는 통제권이 돌아온 지도 모르고 소리 내어 말했다.

    “내, 내가?”

    ‘그래.’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어. 잘 안 되면 내가 도와 줄 테니까, 일단 해봐. 여러 번 하다보면 익히겠지.’

    ‘……알겠어.’

    존은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 한 번 만엔 무리였는지, 그는 힘을 조절하지 못하고 계속 빼앗기고만 있었다. 결국 내가 다시 나서서 이프리타를 불러내야 했다.

    [안녕?]

    [빨리도 부르는 군. 그것도 매우 짧게.]

    여전히 딱딱한 느낌이었지만, 싫다거나 귀찮다는 투는 아니었다.

    [당분간은 이럴 것 같은데? 존이랑 너도 친해져야지.]

    [영혼으로 이어진 친구는 더 친해질 게 없다. 안 그런가?]

    그러나 이프리타의 기대에 존은 부응하지 못했다.

    [아, 응…….]

    [저 쪽은 아닌 거 같은데?]

    [그렇군. 친해지는 게 필요하겠군.]

    [그런데 친해지면 존이 널 계속 불러내지 않을까? 귀찮지는 않아?]

    [그래도 상관없다. 친구를 가지는 게 그런 이유니까.]

    [좋아, 그럼 이제 또 시간 다 됐겠지?]

    [그래.]

    [오늘은 한두 번 더 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조금만 기다리라고.]

    [알았다.]

    [조금 뒤에 또 봐, 이프리타. 아, 너 여자야, 남자야?]

    [여자다.]

    그 말을 끝으로 이프리타, 그녀는 조금 전처럼 온기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이제 두 번째, 아직 익숙해지긴 어려워도 존의 반응은 너무 심했다. ‘아, 응’한 게 유일한 대화인였으니.

    다시 주도권을 돌려주며 그에게 물었다.

    ‘야, 넌 왜 얼어 있어?’

    ‘그냥, 아직 안 믿겨서.’

    주도권을 돌려받자마자 미친 듯이 쿵쾅거리는 심장이 느껴지니, 그 말이 무슨 의미이지 강하게 다가왔다. 얼어 있는 게 아니라, 열이 올라 멍하게 있었던 것이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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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조금 늦었습니다..... 늦은만큼 좀 더 알 찬 내용으로 찾아가야 할텐데....윽, 어째 대화하다가 끝났군요ㅠ다음주에는 최소 10편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주는 내일까지 바쁩니다....ㅠㅠ선작 6000을 넘었습니다. 더 좋은 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추천과 댓글을 기다립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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