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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개의 퀘스트-47화 (47/160)
  • 47화

    테디오는 용암의 샘 속에서 화염내성을 얻는 대신에 전신화상을 입었다. 대부분 정도가 심해 감각이 살아있는 곳이 없다. 완전하게 남아 있는 곳은 눈, 코, 입과 성기뿐이다. 그가 섹스에 좀 과하다 싶은 집착을 보이는 이유도 여기 있었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감각이 살아남아 있는 곳이 있다. 팔의 몇 부분, 가슴에 몇 부분 이런 식이다. 처음에는 그도 그런 곳이 남아 있는 줄 몰랐다. 스쳐지나가는 자극으로 반응하지 않았고, 그 부위도 굉장히 작았기 때문이다. 지름 1cm 정도?

    알게 된 건 수에르테 때문이었다. 그녀가 그의 온 몸을 핥고 빨면서 알아낸 것이다. 창녀로서 화상 입은 자들도 여럿 상대해 봤는데, 모든 감각이 죽은 건 아니었다고, 그도 분명 살아 있는 곳이 있을 거라면서 며칠 동안이나 애를 썼다.

    그렇게 10개의 부위, 다 합치면 손바닥 하나도 안 되는 부위를 그녀가 밝혀냈다. 자연스레 그곳은 그의 성감대가 되었다. 희미하게나마 감각이 느껴지는 곳이다. 게다가 희미하게라도 감각을 느끼게 하려면, 오래도록 자극을 줘야 했다. 진득하게 붙어서, 온기를 나눠야 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니 야릇한 생각과 이어지는 건 당연했다. 어차피 그 외에는 쓸 일도 없었다. 부위를 아는 건 수에르테 혼자였으니까.

    그 부위들에서 뜨끈한 게 느껴지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이전까지는 이런 정보를 몰랐다. 그게 이상하다는 건 아니다. 이런 정보를 검색해 볼 정도로 여자에 굶주려 있는 게 아니니까 모를 수도 있었다. 지금은 완전히 죽었다고 생각한 피부에 감각이 느껴져서 이것저것 찾아봤을 뿐이다.

    이상한 건 현재의 상황이다.

    어제 이상하게 끝을 맺고 나서 다시 들어온 건데, 내가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 빠져 있었다. 이것도 이상하다고 할 일은 아니다. 퀘스트가 끝나면 항상 그랬으니까. 조금 전까지도 드디어 퀘스트가 끝났나 보다 하고 즐거워했다.

    이상한 점은 이게 미래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퀘스트를 끝내고 시스템이 보여주는 건 다 미래의 일이었다. 베르트랑의 결혼식, 파이레스의 회복, 요한과 칼레르까지, 전부 후일담 스타일의 이야기였다.

    그런데 지금 겪고 있는 상황은, 과거의 일이었다. 그것도 내가 퀘스트에 들어와 있을 때 경험한 일이었다. 나는 기억에 없지만, 테디오의 기억에 따르면 그러했다. 이 상황은 처음 헬파이어를 쓰고 마차에 누워 있을 때, 그 때의 일인 것 같다. 내 정신이 지쳐 쓰러져 있는 동안 그가 느낀 감각들의 기억인 것이다.

    “츄웁.”

    소리가 들린다. 피부를 빨고 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소리다. 부위는 왼쪽 가슴, 젖꼭지가 있었던 부분 바로 아래다. 왼팔에 있는 4개의 부위에 감각의 잔재가 남아 있는 걸 보면 왼팔부터 시작한 모양이다.

    상황이 이해가 잘 가진 않았지만, 그의 기억에 따르면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건 오직 수에르테 뿐이었다. 그러니 지금도 그녀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대고 입술을 꼭 붙이고 있는 게 틀림없다. 문드러지고, 쭈글쭈글해져서 흉측한 피부에 말이다.

    “읍, 읍, 읍!”

    또 다른 소리도 들린다. 이건 아마도 동생 암살자의 소리인 듯하다. 그녀는 입이 막혀 있었으니까. 고작해야 이런 소리밖에 낼 수가 없다.

    소리 내는 이유는 뻔하다. 그녀가 매번 언니를 노려보았던 것도 이제 이해가 갔다. 지금 상황 때문인 거다.

    수에르테는 분명 묶여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다. 이 간극이 말하는 건, 그녀가 알 수 없는 방법을 써서 포박을 풀었다는 것이다. 물론 얼굴을 묻는 거만이라면 포박된 상태로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녀는 입이 막히지 않았으니까. 그렇지만 내 갑옷은? 정신을 잃기 전에도 갑옷을 입고 있었고, 깨어난 후에도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들이댄다 해서 피부와 그 혀가 맞닿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동생의 분노는 당연했다. 도망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하고 있는 일이 암살대상의 성감대를 자극하는 일이라니, 짜증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어제의 마지막에 등장한 그녀도 이해가 안 가지만, 지금의 이 모습은 뭔가? 도대체 왜? 왜 이런 짓을 하고 있지?

    “츄웁.”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거나 말거나, 그녀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왼쪽 가슴에서 복부로, 복부에서 다시 오른쪽 가슴으로, 그리고 오른팔로. 어두운 공간에 불이 하나씩 켜지듯이, 따스함이 늘어났다.

    더불어 테디오의 생각 속에도 따스함이 늘어가고 있었다. ‘인생은 허무한 것이다.’라고 적혀있는 그의 철벽에 구멍이 숭숭 나기 시작했다.

    그는 놀라고 있었다. 놀라는 부분은 왜 도망가지 않는가. 그녀가 이런 변태 짓을 하는 건 익숙한가 보다. 하기야 감각이 살아 있는 부위를 찾느라 며칠 동안 애를 썼다는 순간부터 그녀는 변태확정이었다. 창녀조차 무서워서 거부하는 몸이다. 그런 몸을 핥고 빨았다고? ……잠깐, 이 정도였으면 당장 수에르테랑 결혼이라도 해야 되는 거 아냐? 이런 여자가 또 있을 리가 없을 텐데?

    하지만 그렇게 이상한 짓을 했기 때문에 그는 더 경계했다. 일반 창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한 달, 두 달 넘어가는 것도 신기한데, 감각을 찾아주려 애를 쓰다니……, 다른 목적이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신도 몰랐던 10개의 감각을 되찾아 준건 고맙지만, 그는 순수하게 고마워할 상태가 아니었다. 호의에는 의심을 더하는 강력한 경계가 그의 정신을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지금 풀려가고 있었다. 그도 지금 그녀가 이런 일을 하는 이유는 모른다. 모르지만, 그 이유와 상관없이 도망가지 않는다는 사실에 감동 중이었다.

    그런 식으로 1시간 이상. 그녀는 그의 몸을 따뜻하게 만들고는 입을 뗐다. 들리는 소리로 보아 갑옷을 다시 입히고 있는가 보다.

    그 소리를 끝으로 내 정신이 다른 장면으로 넘어갔다.

    + + +

    다음은 미뉴 강이었다. 수에르테를 죽이느니 마느니 하며 고민하던 때였다. 기억이 난다. 그 문제로 고민하느라, 그의 생각과 감정을 제대로 읽지는 못했었다.

    그래서 이번에 제대로 읽은 그의 생각은 이랬다.

    그는 여전히 그녀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녀가 그때 도망가지 않은 걸로 철벽이 어느 정도 풀리긴 했지만, 마지막 한 장이 남아 있는 것이다. 혹시 그 모든 게 도망가기 위한 사전준비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 생각이 그를 잡고 있었다.

    ‘죽는 것도 운명, 사는 것도 운명. 이 정체불명의 조력자가 신이라면, 그녀의 정체를 알려 주겠지.’

    내 예상과 아예 달랐으면 좀 더 집중하며 그의 생각을 파헤쳤겠지만,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란 태도는 이미 예상하던 바였기에 넘어간 게 잘못이었다.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를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첫 처형이라는 일 앞에서 내 정신 상태도 말이 아니었다.

    수에르테가 내 검에 목이 잘리고 나서는 이랬다.

    ‘결국 죽었군.’

    장면이 또 바뀐다.

    + + +

    이번에는 수에르테를 살려 준 다음이다.

    ‘살아가는 군. 결국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나?’

    떠나는 그녀를 보면서, 그의 마음에 떠오르는 건 묘한 실망감이다. 살려줘도 같이 죽으란 예상을 하고 있었던 걸까? 그는 그녀가 죽는지 사는지에 관한 문제에만 집중했고, 그 이후의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모든 걸 미리 예측하고 움직이던 그가 그 간단한 문제에 허술함을 보였다.

    ‘내 편이 될 운명은 아니었나 보군.’

    그 한 마디로 그의 마음은 다시 허무함으로 돌아갔다. 더 이상 상처받을 게 없다는 것 마냥 깨끗한 포기였다. 그 감정의 요동 순간이라, 그 당시에 나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었다.

    + + +

    그리고 마지막.

    떠오르는 태양을 등지고 나타난 수에르테가 보였다. 같은 감각임에도 내가 보았던 광경과 그가 본 광경은 차원이 달랐다. 그의 시야 안에서, 그녀는 태양 그 자체였다. 찔끔 남아 있던 새벽별을 한 번에 날려 버리고 그 존재를 과시하는 태양. 밤이 아무리 거부해도, 폭력적으로 밤을 들춰 그 아래를 드러내는 태양 그 자체였다.

    그 빛 아래서, 그의 철벽이 완전히 녹았다. 상처가 날아가 버렸다. 빛이 ‘거기 있지 말고 밖으로 나와’하고 끌어당겼다. 그는 거부하지 못했다. 아니, 거부하지 않았다. 이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그러든지 말든지. 가자, 포에고, 빅팀.”

    그는 내 낌새를 보더니, 바로 전면에 나서서 일을 진행시켰다. 비로소 그에게 조금의 희망이 생긴 것이다. 이후에 또 배신과 상처가 따라올지 모르지만, 겨우 마음을 줄 상대를 찾았다.

    그러니까 이제 자살에서 한 발작 물러났다는 이야기다.

    그녀가 태양의 후광을 벗어나 그의 옆에 섰어도, 그의 눈에는 여전히 자체 발광 중이었다. 그 때의 소년과 같이.

    내가 자체 발광한다고 느꼈던 건, 그의 마음이 반영되었기 때문인지도.

    + + +

    나는, 정확하게 말하면 그가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눈을 아래로 내리니 검은 머리의 정수리가 보였다. 감각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수에르테가 오른팔을 베고서 나를 껴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건 당신이 아니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죽으려고 했던 사람이 그런 일을 했을 리가 없지. 게다가 당신은 굉장히 수동적이잖아요, 안 그래요?”

    둘은 예전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퀘스트를 진행하고 있을 때의 이야기인 것 같았다.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기 위해 그의 기억을 빠르게 훑었다.

    + + +

    어느새 나이 30. 그녀는 암살자 생활에 신물이 나 있었다. 영지 전 중에 고아가 되었고, 어떻게 운이 좋게 살아남았지만 남은 건 없었다.

    자매 암살단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암살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암흑가의 명성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검은 돈은 많이 벌었지만,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는가? 한 때는 흥청망청 썼지만, 금방 질릴 뿐이었다.

    그리고 쓸 만한 남자도 없었다. 그녀는 암살자가 되기 전에도 창녀로 살았고, 우연한 기회로 암살자가 되었을 때도 창녀의 신분을 유지했다. 남자란 남자는 다 만나봤지만, 그녀의 마음에 드는 남자는 없었다.

    돈으로 위세를 떠는 남자는 돈 빼면 아무것도 없었고, 힘으로 누르는 남자는 힘을 빼면 아무것도 없었다. 로맨스 소설에나 나오는 남자는 현실의 창녀에겐 찾아오지 않았고, 간혹 비슷한 있어도 그녀의 돈을 노릴 뿐이었다. 뒤로는 경멸이 이어졌다.

    그런 그녀에게 제국에서 연락이 왔다. 장기 프로젝트를 해볼 생각이 없냐고.

    황제의 의뢰였다. 황제의 의뢰는 받아선 안 된다. 그게 암살자들 사이에서의 불문율이었다. 황제랑 거래하는 건 목을 내놓고 거래를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성공해도 위험하고, 실패해도 위험하다.

    하지만 일개 암살자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 거부할 수도 없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의뢰를 맡았다. 자신이 언제부터 뒤를 생각하고 살아 왔나. 그녀의 삶은 하루하루를 겨우 넘기는 삶이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오히려 내일이 보장되지 않는 시간에 뛰어들자 그녀는 삶이 즐거워지는 걸 느꼈다.

    그건 의뢰 대상이 남부의 악마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남부의 악마, 테디오 공작은 유명한 사람이었다. 제국에 반기를 든 사람, 제국을 무릎 꿇린 사람, 악마를 수족으로 부리는 자, 악마의 두뇌를 가진 자, 불을 무서워하지 않는 자 등 별명만 해도 수십 가지가 넘었다. 산골 구석에는 신으로 추앙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니 그 명성이 얼마나 큰 지는 알만했다.

    처음에는 조마조마 했다. 창녀들 사이에서 도는 악마라는 소문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첫날부터 어떻게 되는 거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황제의 의뢰를 수행하기 전에 죽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그의 방에 들어갔다.

    그런데 웬걸, 직접 만나 보니 그는 굉장히 수줍음을 타는 소년과 다름이 없었다. 전장에서는 모르겠지만, 잠자리에서 만큼은 여자를 다룰 줄 모르고, 여자에게 약한 게 빤히 보였다. 그렇다고 그 약함을 숨기기 위해서 폭력적으로 여자를 다루지도 않았다. 그는 그녀의 몸을 조심스럽게 대했다. 문드러진 피부의 감촉은 꽤 끔찍했지만, 그게 그의 뜻인 것은 아니었다.

    창녀들이 왜 악마라 부르는 지도 금세 알았다. 예상이상으로 그의 몸은 흉측했다. 선천적으로 섹스를 좋아하던 그녀라 정말 별의 별 사람과도 다 자봤지만, 그만큼 심한 사람은 처음이었다.

    일반 창녀들이라면 그의 몸과 그의 위업들 앞에서 주눅 들게 분명했다. 창녀 중에도 폐기에 가까운 나이의 사람들이라면 감당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사람은 이쪽에서 거부했겠지. 그는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이니까. 힘으로든, 돈으로든 젊은 여자를 안을 수 있는데 늙은 사람을 안고 싶어 할까?

    기회다.

    여자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그는 분명 제대로 된 섹스를 경험해보지 못했다. 줄 수 있는 이를 아직 만나지 못한 것이다. 좀 더 시간이 지나면 늙은 창기에게도 손을 댈지 모르나, 아직은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아슬아슬한 위치였다. 얼굴은 동안이고 몸매는 나이에 맞지 않게 잘 빠져서 여기에 들어올 수 있었지, 원래 그녀 나이의 얼굴과 몸매였다면 들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노련한 창기로서 소년을 어떻게 요리하면 되는 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첫날밤부터 자신의 포로가 될 수 있도록 행동했다. 그동안 배운 모든 스킬을 써서 그에게 쾌락이 뭔지, 섹스가 뭔지 가르쳤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의 반응은 귀여웠으니까. 성기를 빨아줄 때도 그랬지만, 감각이 살아남은 몇 부분을 애무할 때의 눈빛은 말할 수 없이 귀여웠다. 얼굴이 굳어 표정이 나타나지는 않지만, 눈을 감았다가 뜨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그의 모습은, 전장을 지배하는 장군이라고 믿겨지지 않았다. 거기에 그의 물건은 쓸 만했다. 손에 꼽을 정도로 정력도 좋았고.

    부하들도 귀여운 짓들만 했다. 상황은 대충 짐작이 갔다. 그를 견디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마치 공작부인처럼 그녀를 대하는 데, 그게 또 가식적이 아니란 게 다 보여서 즐거웠다. 임무나 그녀의 명성 때문에 어디 가서 귀족이나 때로는 왕족의 정부 노릇은 한 적은 있었지만, 정부는 어디까지나 정부,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녀가 그의 저택에서 경험하는 일들은 전부 새로운 거였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전쟁터에도 따라다니게 할 줄을 몰랐지만, 그것도 꽤 신선한 경험이었다. 그의 옆에 있으면 죽을 걱정을 할 필요도 없기에, 든든한 감정도 쌓여갔다. 이제 진짜 그가 자신에게 푹 빠져 있구나,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 즈음하여 콘슐 제국이 남부로 쳐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떻게 할까. 그가 만약 이전에 알고 있던 그였다면, 그녀는 그를 죽이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1년 간 옆에 있으면서, 그의 부하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인간 테디오가 거의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금 전쟁을 하는 것도 거의 죽으러 가는 거나 다름이 없다는 걸 알았다.

    그렇다면 자신이 죽여주면 되지 않을까?

    그러고 나서 그녀도 죽겠지만, 원래 죽음을 각오하고 온 곳이었다. 마지막에 꽤 즐거운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 세상에 해볼 만 한 건 다 해봤으니까.

    하지만 암살은 실패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냉철한 인간이었으니까. 한 편으론 죽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현재 자살을 계획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어느 쪽이든, 그가 그녀에게 정이 떨어졌을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 그가 망토를 덮어 주었다.

    마차 안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 제국군과 마인대가 싸우는 소리에 기절에서 깨어났을 때, 그녀는 원래 도망가려고 했다. 그 이후에 제국의 추적을 어떻게 뿌리칠 지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일단 살아야겠다고 생각 했다.

    그렇지만 망토의 온기를 느끼자 도망갈 수 없었다. 그녀의 머리가 멍해졌다. 이건 뭘까? 자신을 용서한다는 걸까? 아니면 한 순간의 변덕? 왜? 몸은 사로잡은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지만, 그 마음은 아직도 왕에게 가 있었을 텐데? 걸어볼 만한 게 있는 건가?

    옆에서 그녀의 동생이 재촉을 해도, 그녀는 망토의 온기에 쌓여서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이건 그가 처음으로 그녀에게 내민 손길이었다.

    마차에 그가 들어왔을 때는, 그녀의 몸이 무의식적으로 움직였다. 그녀만 아는 그의 비밀을 확인하고 싶었다. 입술을 댈수록 빨갛게 피가 몰리는 부위들을 보며, 이 사람이 그녀가 아는 사람이 맞구나, 그녀에게 손을 먼저 내민 사람이 맞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 흉측한 몸이 싫지 않았다. 그녀만 알고 있는 비밀이 숨어 있고, 그녀만 이 몸의 구석구석을 다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몸은 이미 여러 사람이 거치며 닳고 닳았는데, 이 몸에는 자신의 흔적만이 잔뜩 있었다.

    ‘왜 이제야 제대로 마주하게 된 걸까?’

    그러나 이미 늦었다. 전투는 시작됐고, 빠져나갈 길은 요원하다. 한 명이나 두 명은 빠져나갈 수 있겠지만, 군대가 빠져나가는 건 무리였다. 그가 부하들과 떨어질 리도 없고, 그렇게 떨어져 나간다 할지라도 제국이 쫓아올 게 분명했다.

    어쨌거나 죽은 목숨이었다. 마지막에 그를 보고, 그와 체온을 나눌 수 있어서, 그녀는 이런 죽음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그가 또 살려 줬다. 병사로 쓰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살려준다. 그냥 가란다.

    ‘왜? 당신은 갑자기 왜 나에게 잘해주는 거지? 이제껏 창녀로만 대했으면서!’

    생글생글 웃었지만, 내치려는 그를 보면 그녀는 마음속으로 계속 울었다.

    다시 깨어났을 때, 그녀는 이렇게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그를 구해야겠다고, 그 다음에 죽든 말든, 아니, 무조건 살려서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황궁에 연락을 넣었다. 암살은 성공했고, 남부의 악마는 죽었다고. 그런데 아넬라 장군이 그 사실을 은폐하고 포위망을 펼치는 척 하며 병력을 모으고 있다고 전달했다. 통할지는 모르지만, 동생의 정보를 떠올려보면 그거 말고는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확률은 있었다. 권력이란 그런 거니까. 남부의 악마에게 아무리 복수를 하고 싶다고 해도, 반란보다 무섭진 않을 것이다.

    결국 도박이 통했다. 포위망은 펼쳐지지 못했고, 아넬라 장군은 죽었다. 그녀는 다시 그와 함께 하게 된 것이다.

    + + +

    그는 아직 정체를 모르는 그 때의 조력자, 즉 나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조금 찔려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

    “그렇죠? 그럼 그건 누구였어요?”

    “그건…….”

    그가 나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름 모를 정신체가 와서 자신을 도왔다. 그런데 누군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 전투가 끝나고, 당신이 나타났을 때 사라졌다란 이야기를 상세하게 꺼냈다. 거기에 고마운 사람이라고 덧붙였다. 자신이 살아난 건 그녀 때문인 줄 알았는데, 이야기를 종합해보니 결국 모든 게 나 때문이라면서.

    “흐응, 결국 내가 좋아한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그 사람? 이라는 거네요?”

    “……그, 그게 그렇게 되나?”

    “호호호, 아니에요. 그는 그냥 계기일 뿐이죠. 제가 사랑한 건 결국 당신이지, 당신의 몸에 잠시 머물러간 사람이 아니에요. 그래도 고맙긴 하네요. 우리를 이어준 사람이니까요.”

    “그래, 그가 없었다면 이렇게 당신과 누워 있는 시간도 없었겠지. 그 사람은 누굴까?”

    그가 팔을 굽혀 그녀의 머리를 끌어 당겼고, 그녀는 그에 따라 그의 겨드랑이 사이로 더 파고 들었다.

    “그나저나 결국 당신이 아니었단 말이죠. 당신이 그렇죠, 뭐. 저란 사람을 염두에 두고 있기야 했겠어요? 매일 애들 생각밖에 없었지.”

    “아니야, 지금은 아니라고. 지금은 오로지 당신뿐이야.”

    그녀가 생긋하고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눈부신 나신이 창으로 들어오는 태양빛 아래에서 그날처럼 빛났다. 이미 10년이나 지나 그녀는 40살이 되었지만, 여전히 20대의 몸을 하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몸에, 그는 또 음심이 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그녀도 그걸 눈치 챘는지, 한 손으로 그의 성기를 슬쩍 쓸었다.

    “그럼, 몸으로 좀 보여줄래요?”

    “그러지.”

    잠깐, 이 흐름은, 이 흐름은! 드디어?

    ============================ 작품 후기 ============================

    쿠폰 주신 독자님들께 무한한 감사와 사랑을 전해 드립니다.

    뒷이야기가 굉장히 기네요.

    이러고도 아직 끝나지 않은;;;;

    앞으로 세 편은 더 써야 뒷 이야기에, 능력 습득까지 끝날 것 같습니다. 그러고 나면 바로 현실에서의 스토리가 조금 진행됩니다. 연애 이야기 말고, 스토리요ㅎㅎㅎ여러분의 코멘트가 많아서 굉장히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 내용도 잘 받았습니다. 연재가 이게 네 번째인데, 제 멘틀은 아직 유리인가 봅니다ㅎㅎㅎ 뭐, 차차 나아지게죠. 아무 생각 없이 열심히 쓰겠습니다.

    다음 편은 정말 오랜만의 침대씬이군요.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바로 다음편으로 갑니다ㅋ

    잘 읽으셨다면 추천과 댓글을! 댓글 읽는 게 참 재밌답니다. 제 글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시는 것도 기쁘구요ㅎㅎㅎ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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