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개의 퀘스트-43화 (43/160)

43화

그 후로 두 번의 밤이 지나고, 세 번째의 밤이 되어서야 부대는 미뉴 강이 보이는 곳까지 올 수 있었다. 물론 나에게만 3일 째고, 부대에게는 대충 하루다. 나는 평균 8시간씩 자니까.

“이제 이 언덕만 넘으면 보일 거라고 생각 합니다.”

포에고의 말처럼 언덕 위에 서자, 새벽 어스름에 멀리 큰 강이 굽이치는 곳이 보였다. 하회마을처럼 호리병 모양으로 굽이치는 곳은 아니었지만, 90도 이상으로 꺾이는 곳이었다. 대충 내각이 80도 정도? 예상보다 훨씬 자리가 좋았다.

저 안에 진을 치고 적을 막으면 작은 병력으로도 많은 적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앞만 신경 쓰면 되니까.

강폭은 대략 100m, 수심은 척 봐도 3-4m는 되어 보였다. 배가 없으면 넘어올 수 없을 것이다. 설사 어떻게 넘어오더라도 활로 견제할 수 있다. 활의 수가 모자라긴 하지만, 마인대 숫자도 적으니 어차피 운용할 수 있는 궁병은 얼마 없다.

궁병의 공격도 걱정할 게 못 된다. 이 거리 에서 유효한 타격을 가할 수 있는 궁병대는 없다. 몇 만씩 와서 쏜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 만큼 끌고 올 수 있을 리가 없다. 많아 봐야 5천 정도고, 천 단위의 궁병대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그리고 우리와 싸우게 되는 건 주로 기병대겠지.

“건너갈 수 있는 곳은 어디지?”

“남쪽으로 3km 정도 내려가면 건너갈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좋아. 강을 건너 자리를 잡는다.”

저기서 한 번 더 전투를 치르고 이긴다면, 그 다음은 계속 도망치면 된다. 그 과정도 쉽진 않을 것이다. 거기서 부터는 진짜 체력과 운 싸움이니까.

일단은 이 전투부터다.

+ + +

도착한 뒤에는 최대한 부대를 쉬게 하고, 동시에 덤불이라도 모아 장애물을 설치했다. 각종 집기들도 다 동원 되었고, 짐마차도 마찬가지였다. 어설펐지만, 이 정도만 해도 기병대의 속도는 많이 줄어들 것이다. 그 다음은 장창방진으로 버티면 된다.

마차를 방어용으로 쓰게 되면서 안의 짐들은 다 바닥에 부었다. 다른 건 문제가 안 됐다. 다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까. 문제가 되는 건 딱 두 사람. 수에르테와 그녀의 동생 암살자였다.

처음에는 주저했다. 풀어줄까 생각도 했다. 흑발이긴 하지만, 3일 전 공연에서 본 사람과 똑같은 얼굴이다. 그 사람과 수에르테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건 아니겠지만, 얼굴만은 같았다. 그리고 그녀를 볼 때마다 자연스레 현실의 인물이 연상됐다. 그런 이를 죽이는 게 그리 쉽게 될 리 없다. 테디오의 생각이나 감정이라도 좀 도와주면 모르겠는데, 그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죽이든 말든 상관없다는 투였다. 그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죽으려고 하는 사람이 암살자를 죽일 필요가 있는가? 그에겐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풀어주자니 그것 역시 뭔가 아닌 거 같아서 눈 딱 감고 죽였다.

끔찍했다. 입엔 재갈을 물리고, 얼굴은 천으로 가린 뒤 목을 벤 거지만, 그 감각만으로도 소름이 끼쳤다. 퀘스트 시작부터 한결 같은 테디오의 허무함에 기대어 겨우 평정은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감각은 기억 속에 평생 남을 것 같았다.

사람을 직접 죽인 건 이게 세 번째였다.

처음은 흑마법사 제코르. 그 때는 별 느낌이 없었다. 베르트랑의 감정에 말리지 않으려고 애쓰기는 했지만, 그의 분노가 온 몸을 내달리고 있었기에 제코르를 죽이는 건 비교적 거부감이 없었다.

두 번째는 파이레스가 되살아난 딸을 죽일 때. 되살아난 딸은 언데드였고, 그 당시에는 거의 관찰자 입장에 서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때도 크게 문제가 없었다. 단지 엄청 슬플 뿐이었다.

이게 세 번째였다. 무척 힘든 일이었다. 감정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고, 필요만으로 움직여야 했다. 실행도 어려웠고, 그 후는 더 어려웠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로 일어나는 세계지만, 나는 처음 겪는 일이니까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았다.

굳이 죽일 필요가 있었을까? 그녀들이 살아 있다고 내게 해를 가할 가능성은 적었는데.

포에고나 빅팀도 수에르테를 죽이는 데 완전 찬성하진 않았다. 그들은 그녀가 아까운 것이다. 그녀가 어떤 사람이든, 그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가장 바뀌기 어려운 자질을 가지고 있으니, 나머지는 어찌되든 상관없다는 뜻을 고수했다. 이제야 우리 주군이 살 마음을 먹었는데, 저런 사람을 또 어디서 구하냐는 눈으로 안타까워했다. 물론 말로는 하지 않았다. 어찌됐던 그들은 내 수족이고, 내 명에 반대하진 않는다.

그녀의 비명을 들었거나, 마지막 눈동자라도 봤으면 꿈에서라도 시달렸을 것이다. 요즘은 꿈을 꿀 수 없는 상황이니 그럴 리야 없겠지만, 앞으로 현실에서 로젤리나를 볼 때마다 계속 떠오르지 않을까?

잠시 후면 제국군을 직접 베어야 한다. 내가 직접 처형을 한 건 그 예행연습이었다. 거기에 로젤리나를 죽이는 데 다른 사람 손을 빌리는 건 책임 회피 같아서였다. 그냥 다른 사람에게 명할 걸, 그런 생각이 계속 들었다. 책임 회피는 하지 않았지만, 그 무게가 예상 이상으로 무거웠다.

공허의 경험이 있기에 묵직하게 눌러오는 이 감각을 견딜 수는 있었지만, 그게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다시 한 번 이 퀘스트의 현실성이 마음 속 깊이 다가왔다. 이제 와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건 알고 있다. 그렇지만, 어쩌다 이런 일을 하게 된 걸까?

이 퀘스트의 끝에는 해답이 있을까?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낸다. 2, 300m 정도 앞에는 적의 기병대가 늘어서 있다. 이제 곧 적병을 베어 넘겨야 하니 잡생각이 드는 거다. 지금은 이 전투와, 퀘스트에 집중하자.

마인대는 강을 등지고 ㄴ모양으로 방진을 짜고 있었다. 서쪽 방향으로 방진 하나. 남쪽 방향으로 방진 하나다. 북쪽과 동쪽은 강으로 방어했다. 그리고 가장 방어가 취약한 ㄴ의 꼭지점에는 나를 비롯한 직속 친위대가 서 있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호를 그리며 진을 짰겠지만, 그렇게 해서는 후열의 힘이 앞으로 잘 전달이 되지 않는데다가, 전열에 서 있는 이들은 다수의 적에게 공격 받을 확률이 높았다. 그럴 바에는 직선으로 방진을 짜, 방진의 효율성을 최대한 높이는 게 나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만큼 꼭지점에 있는 나와 친위대의 부담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겠지만, 반대로 여기만 버틸 수 있으면 이 전투에서 이길 게 분명했다.

버틸 자신은 있었다. 여차하면 헬 파이어라도 쓰면 되겠지.

그 꼭지점의 끝, 부대의 최전선에 서서 마인대를 향했다.

“너희들은 누군가!”

“마인대입니다!”

여기까지는 테디오가 늘 하던 대로였다. 이 뒤에 너희들은 악마다, 악마답게 뒤를 두려워하지 마라. 저들에게 지옥으로 가는 길을, 우리가 가장 잘 아는 길을 열어 주어라 등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게 할 것이다. 지난 3일 동안 테디오의 죽음을 막는 방법을 생각해 봤는데, 이 순간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나마 그의 마음속에 들어가 있는 게 마인대였다. 그들을 끌어들이는 방법 말고는 그의 마음을 바꿀 수 없을 것 같았다.

솔직히 이것도 통하지 않을 것 같기는 했다. 마인대는 그와 한 몸이었기 때문이다. 너무 가까이 있어서, 이들의 소중함이 와 닿지 않을 거다. 파이레스가 처음 내 목소리를 무시했던 것처럼.

그래도 딱히 생각나는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이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우리들은 누군가!”

“마인대입니다!”

“아니다! 우리들은 마인대가 아니다! 우리들은 악마가 아니다! 우리들은 인간이다! 우리들은 오늘 새로 태어난다! 오늘! 우리들은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

“우리들이 누구라고!”

“…….”

푸르릉 거리는 말의 울음소리만이 전장을 장식했다. 갑자기 벙어리가 된 부대를 향해서 다시 소리쳤다.

“우리들이 누구라고!”

“…….”

20년, 20년의 세월은 말 몇 마디로 바뀌지 않겠지. 이런 거 해봐야 별 소용없을지도 모른다. 테디오의 마음도 여전히 그대로다. 이런 걸로 변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 테다. 그러나 하고 싶다. 간접적이나마 이들의 삶을 체험해 본 나는, 이들을 존경하고 있다.

이들은 그 누구보다 인간다운 사람들이다.

폐에 있는 공기를 다 끌어 모아 공기 중으로 뱉어냈다. 헬 파이어를 쓰듯이, 진심을 토해냈다. 바뀌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바꿔 버리겠다는 심정으로 목소리를 가지고 그들을 찍어 눌렀다.

“우리들이 누구라고!”

“……인간…….”

병사 중 한 명이 반사적으로 ‘인간’이란 단어를 내뱉었고, 그 단어는 도열해 있는 전 부대로 삽시간에 퍼졌다. 이내 모든 부대원이 한 목소리가 되어 외쳤다.

“우리들이 누구라고!”

“인간입니다!”

“그래, 우리들은 인간이다! 누가 우리들을 악마라 하는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용암 속으로 뛰어든 우리를 누가 악마라 하는가! 누가 우리들을 악마라 하는냔 말이다!”

“…….”

“왜 당당하지 못하는가! 왜 나서지 못하는가! 우리들이 뭘 잘못했나! 뭘 그리 잘못했기에 배척당하는가!”

“…….”

“이제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취급을 당해야 하는가! 우리가 악마인가!”

“아닙니다!”

“그래, 우리는 악마가 아니다! 우리는 인간이다! 오늘 후로 우리들을 악마라 부르는 자는, 마인이라 부르는 자는, 내가!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

“…….”

“싸우자, 그리고 싸워라! 너희들을 옭아매는 모든 것들에게 전투를 선언하라! 받아들이지 마라! 그게 나라고 할지라도!”

“…….”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적의 기병대가 돌격을 시작한 것이다. 더 뱉어낼 호흡도 없었지만, 온 몸의 힘을 모아 더 높은 소리를 냈다. 이 전장의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그 첫 상대가 저기 있다! 우리를 악마라 부르기 주저하지 않는 간악한 자들이 저기 있다! 저들이 한 일을 떠올려 보라! 20년 전, 우리를 인간 이하로 취급한 건 누구인가!”

“저들입니다!”

“지난 20년, 우리의 전우들을 빼앗아간 이들은 누구인가!”

“저들입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지금 다시 우리의 땅을 유린하려는 자들은 누구인가!”

“저들입니다!”

“저들은 누군가!”

“악마입니다!”

“그렇다! 저들이 악마다! 우리들은 인간이다! 이것은 성전이다! 빼앗긴 이름을 되찾아라! 우리들의 이름을 되찾고, 저들에게 자신들의 이름을 가르쳐 주어라!”

쿵!

모든 병사들이 대답대신 그 창으로 땅을 찍었다. 2만 병사들이 동시에 내리치는 그 진동은 적 기병이 땅을 딛는 소리보다 짧았지만, 훨씬 강했다.

“저들에게 악마가 누구인지 똑똑히 가르쳐 주는 거다!”

쿵!

“오늘! 우리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

쿵!

기수를 다시 앞으로 돌렸다. 적 기병이 코앞이었다.

“전군!”

내 창을 높이 한 번 들었다가, 앞으로 내렸다. 창끝을 따라 적 기병의 얼굴이 보인다. 그 눈이 겁에 질려 있다. 표정은 의연해 보이지만, 그 눈은 감정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다. 우리 쪽 병사들의 얼굴도 보고 싶다. 눈으로 의사소통을 하기에, 눈이 항상 초롱초롱한 그들의 눈을 보고 싶다. 얼마나 용기를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다.

“거창!”

“우와와와와와아!”

나는 믿는다, 인간은 악마를 이길 수 있다고.

콰가가가강!

고슴도치처럼 늘어선 우리들의 방진과 제국의 기병대가 부딪혔다. 미뉴 강 전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 작품 후기 ============================

후원해주신 dkshk, 로오안 님께 감사를 전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신 독자님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오글오글

이 적당한 수준으로 받아들여지셨으면 좋겠군요.

추천과 댓글은 작가에게 수액을 주는 거와 같습니다. 여러분, 제 링겔이 다 떨어져갑니다. 채워 주세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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