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개의 퀘스트-42화 (42/160)
  • 42화

    카페 앞에서 예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점심부터 만나서 좀 놀다가, 저녁엔 로젤리나의 공연을 보러 갈 거 같다. 알바는 사장님께 좀 부탁했다. 귀찮아했지만, 강하게 나갔다. 어차피 그 사람은 나를 자를 사람이 못되니까.

    “오빠!”

    라는 소리는 언제나 듣기가 좋다. 그 말을 하는 주체가 나랑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도 기분이 좋은데, 하물며 그 주체가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냥 헤벌레 녹는 거다. 아, 이래서 모태 솔로는 안…… 된다고 하면 스스로에게 돌을 던지는 거지. 아아, 서글픈 인생이여.

    “오늘은 편하게 입고 나오래서 편하게 입고 나왔어요.”

    오늘은 공연에 갈 거고, 공연 장소는 협소하고, 여성보컬이니 아무래도 남정네들이 득실거릴 것 같아 사전에 편하게 입고 나오라고 해뒀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다른 남자에게 예지가 예쁜 걸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꼴을 보니 완전히 틀렸다.

    편하게 입고 나오긴 했다. 펑퍼짐한 패딩에 레깅스, 운동화. 활동하기에 참 편한 복장이다. 문제는 너무 사랑스럽다는 거다. 어깨 품이 넉넉한 패딩이 마치 남자 옷을 입은 듯해서 보호본능을 자극했다. 엉덩이 까지 덮은 패딩이 하의실종 패션을 연상시켰고, 손가락만 살짝 튀어나온 소매는 깨물어주고 싶은 정도로 귀여웠다. 거기에 검은 계통 일색에 홀로 하얀 얼굴은 시선이 집중시킨다. 반짝반짝 하는 눈동자를 보니 내 가슴에 폭하고 안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아직 시기가 일렀다. 손잡는 거나 쓰다듬는 게 한계다. 그녀의 키가 조금 커서 폭하고 안기기엔 무리가 있다는 점도 있지만. 내 턱이랑 그녀의 이마가 부딪힐 거다.

    아무튼 옅게 화장한 얼굴 하나만으로 예쁘다는 건 충분히 알 것 같다는 이야기다. 다음부턴 선글라스 쓰고 나오라고 해야지, 원. 아, 얼굴선만으로도 충분하려나? 남자라는 생물은 망상력이 뛰어난 사람이 많으니까. 턱 선만 예뻐도 얼굴을 짐작해내곤 하지. 다리만 봐도 몸매를 구별해내기도 하고. 으으, 진짜 그렇게 생각하면 다리가 강조되는 이 패션은 별론데? 아니지, 가슴이 강조되는 것보다는?

    “오빠?”

    “응? 아, 널 보니 떠오르는 게 있어서.”

    “뭔데요?”

    실제로 떠오르는 게 있었기 때문에 한 걸음 다가갔다. 그런데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또 그대로였다. 그녀가 한 걸음씩 물러서고 있었다. 또 한 걸음 다가갔다. 그제야 거리가 가까워졌다. 그녀는 뒤로 가고 싶어 했지만, 유리로 막혀 있어서 가지 못했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그게, 이런 게, 있을 거라고는…….”

    그녀가 뭐라고 하든 말든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등 뒤로 가져갔다. 그녀가 눈을 힘껏 감는 게 보인다. 얼굴이 빨개졌다.

    “너무! 이르지 않을까요?”

    등 뒤로 가져간 손으로 그녀의 후드를 잡아 머리 위에 씌웠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는데, 눈떠 봐. 그러려는 거 아니니까.”

    “……에? 아니……죠. 그렇죠. 아니겠죠.”

    그녀가 살며시 눈을 떴다. 후드에 앞단추도 달려 있어서 그것도 채웠다. 그녀는 내가 하는 양을 가만히 보다가, 뭘 하는 지 눈치 챈 거 같았다. 내 손을 멈추려 했지만, 이미 단추는 다 채워졌다.

    검은색이지만, 귀여운 우비소녀가 나타난 것이다.

    그녀가 후드를 벗으려고 하는 걸 재빨리 제지했다.

    “잠깐, 우비소녀 한 번 보고 싶었다고.”

    “놀리는 거잖아요.”

    “아니야, 놀리는 거긴, 얼마나 귀여운데.”

    후드를 내리려는 그녀의 손을 잡고 내렸다. 그냥 우비소녀 예지를 제대로 보려고 내린 건데, 그러자 분위기가 미묘해졌다. 그녀는 벽에 밀어 붙여져 있고, 나는 그녀의 두 손을 잡고서 그 앞에 서 있었다. 얼굴 사이 간격은 15cm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녀도 그 미묘한 분위기를 느꼈을까? 내 귀에 그녀의 호흡 소리가 크게 들리고, 살짝 고개를 들어 나를 보고 있는 그녀의 그 호흡이 내 턱 부근에 닿았다.

    내 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눈은 떨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피하지 않았다. 피하면, 피하면 그냥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넘어갈 텐데, 똑바로 마주하고 있으니까 그럴 수가 없었다.

    두근, 두근, 두근.

    그녀의 심장 소리가 들릴 리 없지만, 지금 귀에 들리는 건 내 심장 소리겠지만, 그녀의 심장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맞잡은 손을 통해 그 진동이 전해오는 것 아닐까?

    그녀가 슬며시 눈을 감았다. 나에게 모든 걸 맡기겠다는 건가? 어떻게 하라고? 입술? 입술로?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닌가? 아니면 이마? 이마로? 아니면 여기서 멈춰야 하나?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불현 듯 여기가 카페 앞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천천히 고개를 드니까, 예지의 뒤 카페 유리 너머로 바리스타 누님이 이쪽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게 보였다. 눈이고, 입이고 웃고 있는 걸 숨기지 않았다.

    그래, 적어도 여기서는 아니야.

    예지의 손을 놓고, 그녀의 후드를 다시 등 뒤로 넘겼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를 헝클였다.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안도인가, 실망인가. 그 눈의 진의를 파악할 수 없었다.

    쳇, 이럴 거면 그냥 확하고 했어야 했는데.

    손을 들어 카페 쪽을 가리켰다. 내 손짓에 바리스타 누님이 후다닥 카운터 뒤에 숨었지만, 예지도 무슨 뜻인지는 안 것 같다. 카페를 한 번 돌아보고 다시 나를 돌아보는 데,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뻘쭘한 채로 공중을 돌아다니는 그녀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가자.”

    “……네에.”

    + + +

    “사람이 많네요?”

    “그러네. 많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정도일 줄이야.”

    “유명한 밴드예요?”

    “사실 나도 처음 와서, 유명하다는 이야기만 들었어.”

    학교 주변 공연장이 사람으로 반쯤 차 있었다. 그러나 그 수는 얼핏 봐도 200명이 넘어 보였다. 그만큼 공연장이 크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조금 일찍 왔는데 이렇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가득 찬단 이야긴가? 그럼 400명은 넘을 것 같다. 인디밴드인데, 이 정도로 공연할 수 있는 건가?

    “흐응, 여자들이 많네요. 그것도 예쁜 여성분들이 잔뜩 이네요.”

    그녀의 말처럼, 공연장에는 예상 외로 여자들이 많았다. 남자는 여자의 1/3 정도밖에 없었다. 왜 그렇지? 분명 보컬은 여잔데.

    “오빠? 설마 이런 거 때문에 온 거 아니죠?”

    “응? 당연하지. 나도 여자가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어. 오히려 남자들이 많을 줄 알았는데.”

    “그건 왜요?”

    “아, 이 밴드 보컬이 여자거든.”

    “아아, 역시. 오빠도 그럴 줄이야. 카페에서 보여주던 냉철한 게임중독자는 어디 간 건지…….”

    잘못 들었나 했다. 냉철한, 뭐?

    “예지야?”

    “아무것도 아니에요. 밴드 실력은 어때요?”

    목소리에 숨어 있는 칼에 내 목소리가 덜컥했다.

    “…좋, 좋데.”

    “그럼 재밌게 들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내 팔짱을 꼈다. 패딩 위고, 나도 겨울옷이라 뭘 느끼고 자시고 할 건 없었지만, 그 무게만은 느껴졌다. 신기한 기분이다. 내게 기대어 오는 그 무게감이 묵직하면서도 나를 설레게 했다.

    그나저나 방금 전까지 나를 몰아붙이던 애가 맞는 건가? 응?

    “좀 더 앞으로 갈까요?”

    “나는 너는 어떤데, 잘 보여?”

    “보는 게 뭐가 중요해요. 어차피 여자 보컬이라면서요. 오빠가 보여야죠.”

    윽, 여전히 꽁해 있는 건가?

    “미안, 내가 잘못했어.”

    “응, 왜요? 오빠가 뭘요?”

    “아니, 그게…….”

    “설마, 제가 여자 보컬이라서 그랬다고 생각해요?”

    “아니야?”

    “흥, 저를 뭘로 보시고.”

    그 말을 하고 그녀는 내 팔을 가슴 쪽으로 더 끌어안았다. 이 정도면 팔짱을 낀 게 아니라, 끌어안았다고 하는 게 맞았다. 그리고 내 귀에 내고 속삭였다. 뜨거운 입김에 귀가 간질거린다.

    “부끄러워서 그러는 거니까, 그냥 넘어가요.”

    “응?”

    “그냥 넘어가라고요!”

    “악!”

    그녀가 내 허리를 푹 하고 찔렀다. 아프지도 않았고, 놀라지도 않았다. 그냥 실실 거리고 싶어졌다.

    “이 폭력녀.”

    “뭐라구요?”

    들었을 거다. 그런데 모른 척 하기는. 발끈하는 것도 이제 그냥 귀엽다. 그녀가 내 팔을 꼭 껴안고 있으니까, 아무런 걱정이 들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거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아무것도 아닌 게 아……, 이제 시작하나 봐요.”

    무대 위로 사람들이 올라오기 시작했고, 어느새 공연장에도 사람이 더 들어와 있었다.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과 다르게, 뒤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남자였다.

    예지의 머리를 내 쪽으로 당겼다. 늑대들에게 그녀를 보여줄 순 없지.

    + + +

    대중가요를 커버하는 식의 노래들이 이어졌다. 밴드라고 하지만, 락 밴드 같은 건 아닌가 보다. 아니면 청중을 의식한 건지도.

    노래는 들어줄만 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곡을 불렀으면 아무것도 몰랐겠지만, 아는 노래를 부르니까 어느 정도 평가가 가능했다. 그렇지만 이 큰 공연장이 꽉 찰 정도로 노래를 잘 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성량이나 분위기는 충분히 압도하고 있었지만, 기교는 아직 부족했다.

    대신에 미모는 이 공연장을 채울만 했다. 로젤리나가 예쁜 건 말할 것도 없다. 무대의상이라고 따로 차려 입은 것도 아닌데, 위에 선 것만으로도 그 미모가 빛을 발했다.

    거기에 이 밴드에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미모의 소유자가 둘이나 더 있었다. 둘 다 외국인으로, 기타를 치는 금발 남자와 베이스를 치는 은발 남자였다. 금발 쪽은 선이 굵어 마초 적이었고, 은발 쪽은 선이 가늘어 샤프한 느낌이 났다. 여자들이 이만큼이나 모여든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둘은 포에고와 빅팀, 즉 크리스와 마크를 떠올리는 눈, 코, 입을 가지고 있었다. 이젠 놀랍지도 않다. 그냥 그러려니 한다.

    그런데, 그러면 칼레르는 안 나오려나? 솔직히 그 사람이 제일 보고 싶은데.

    시간은 아깝지 않았다. 솔직히 로젤리나 때문에 온 거라 예지한테 미안한 감이 있었는데, 비주얼 밴드긴 해도 공연이 엉망인 건 아니었다. 그녀도 재밌어 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수능이 끝난 지 얼마 안 됐다. 많이 데리고 다녀야겠네.

    “재밌어?”

    “네, 오빠. 재밌어요.”

    “다행이다.”

    “그런데 있잖아요? 저 보컬은 왜 계속 오빠를 보는 거예요?”

    “응? 그래?”

    “그래요. 지금도 보고 있잖아요.”

    사실 나도 느끼고 있다. 로젤리나는 나를 발견한 건지, 계속 내 쪽을 보고 노래를 불렀다.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야 그냥 이 근방을 보고 노래를 한다고 생각했겠지만, 나는 눈이 맞았으니까 모를 리가 없었다.

    곤란했다. 로젤리나와 어떻게 친분을 맺을 수 있을까? 아니, 꼭 친분을 맺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녀는 위험한 인물이었으니까. 이번 퀘스트만 해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냥 약간의 호기심과, 퀘스트에 나오는 사람을 내 시야 안에 두고 싶어서 온 거라고 할 수 있었다. 목적이 어떻든 그녀와 눈을 맞추는 게 편하지 않았다. 그 눈을 보니 수에르테의 알몸과, 느끼는 표정이 겹쳐졌고, 움찔할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옆에 예지가 있는데도!

    그런 반응을 보이니 예지가 로젤리나에 대해서 의식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지금 그녀는 살짝 기분이 안 좋은 듯했다. 질투다. 질투 자체는 사실 크게 문제될 거 없다. 그녀가 나를 그만큼 좋아한다는 거니까. 문제는 내가 떳떳하지 못하다는 거다. 로젤리나를 볼 때마다 내 분신이 움찔 움찔하니까, 얼굴이 붉어지면서 예지를 똑바로 보지 못하는 게 문제였다.

    “저번에 넘어진 걸 한 번 도와준 적이 있어서 그럴 거야. 그 때 얘기 안 했나?”

    “얘기는 했죠. 그런데 그게 저 여자 분이란 말은 하지 않았죠.”

    좋지 않다. 내 감각이 경고했다. 어떻게 달래야 하나 고민하는데, 일단 노래가 다시 시작되어서 대화가 끊겼다. 노래는 한 귀로 흘려들으면서 빠르게 해결책을 짜내야 했다.

    그래, 그러고 싶었는데, 더 큰 일이 터졌다.

    밴드가 다음에 부른 건 남녀 사이의 이야기를 다룬 발라드였는데, 로젤리나가 노골적으로 나를 보면 부른 것이다. 얼마나 노골적이냐면, 내 주변의 사람들이 한 번씩 나를 쳐다볼 정도였다. 내가 아니라는 제스처로 나 역시 한 번씩 고개를 돌아봤지만, 내 옆의 예지에게는 통하지 않을 수법이었다.

    예지의 얼굴에 먹구름이 낀다. 반대로 로젤리나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다.

    ……나 어떡하지? 난 잘못한 게 없는데?

    잘 생긴 게 죈가? 이게 외모 레벨 5의 위력? ……현실 도피는 말자.

    ============================ 작품 후기 ============================

    원고료 쿠폰 주신 분들께 감사를 전합니다.

    설마했던 한편 더!

    현실편은 술술 써져서요. 그리고 이걸로 하루를 넘기기에는 왠지 미안한 마음이....

    여러분이 어떻게 생각하실 지 모르겠지만, 저는 현실 편은 예전 '디 어비스'의 연예인 파트 쓰는 기분으로 씁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끝나진 않고요.(추가-어쩐지 댓글 방향이 이상한 느낌이 나서 보충 설명합니다. 강철신검님은 옆동네에서 잘 활동하고 계시고 디 어비스도 다시 쓰고 계십니다. 예전에 봤던 디 어비스나 이번의 디 어비스도 재밌지만, 개인적으로는 연예인파트가 있는 디 어비스가 좋더라.... 이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강철신검님 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ㅎㅎㅎ)정확하게는 제가 쓰면서 힘을 얻는다고나 할까.... 여러 분들이 여러 우려를 표현해주고 계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만, 현실편은 앞으로도 쭈욱 이어질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원하신다면 현실 편을 줄이거나 연참을 하거나 할 수는 있습니다. 현실편은 술술 써지거든요ㅎㅎㅎ추천과 코멘트는 작가를 춤추게 합니다. 칭찬 좋아합니다. 고래도 춤추게 하는데, 고작 몸무게 80kg도 안 되는 사람쯤이야 가볍지 않겠습니까?

    내일부터는 다시 테디오의 전장이 펼쳐집니다. 기대해 주세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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