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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개의 퀘스트-41화 (41/160)

41화

꿈의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의 감정에 휘말려서 이리저리 표류하다 깨어났을 때, 가장 먼저 그에게 말을 걸 수밖에 없었다.

‘너……?’

‘보았나? 그렇게 생각할 거 없다. 그냥 살 이유를 잃었을 뿐이니까. 살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너도 알지 않은가?’

한 마디 밖에 하지 않았지만, 그는 내 말을 다 알아들은 듯이 대꾸했다. 그의 말처럼, 살 이유가 없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 게 아닌가? 나만 해도 그렇다. 퀘스트를 하기 전의 나에게, 아니 지금도 무슨 목적 같은 게 있어서 사는 건가? 그냥 살 뿐이다.

‘바보 같으니, 삶은 그냥 그 자체로 소중한 거야. 살 이유가 없어도 살아. 다 그렇게 살아가는 데 뭐가 문제야?’

‘……내 기억을 읽고도 그런 말을 하는 거라면 실망이군.’

이 말에는 반박할 말이 없었다. 배신은 넘어갈 수 있다.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 그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희망이 없는 건 넘어갈 수가 없다. 그의 미래에는, 마인대의 미래에는 희망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아 보였다. 삶의 이유 같은 거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건, 막연한 희망, 잘 될 거라는 희망이라도 품을 수 있기 때문일 거다. 그것조차도 없는 삶이란 게 있을 수 있을까? 파이레스가 공허를 이겨낼 수 있었던 이유가 뭔데.

‘…….’

‘그러면 이제 죽는 건가?’

솔직히 그가, 그리고 마인대가 더 살아 무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터에서 죽는 거 이상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가 콘슐 제국의 도발에 응해 적국의 깊숙이 들어온 이유를 알겠다. 이왕이면 싸우다 죽고 싶었겠지. 최고의 상대에게.

그러나 퀘스트 때문이라도 그를 죽게 둘 순 없다. 자살을 어떻게 막아야할지 잘 모르겠지만, 여기서 죽는 건 아니겠지.

‘아니, 죽지 않을 거야. 어떻게든 널 살려주지. 적어도 이 제국에서 죽게 하진 않겠다.’

‘헛된 몸부림이군. 내 지식과 경험을 네 것처럼 사용하는 너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 여기까지 왔으니.’

그의 말대로 큰 이변이 없는 한 이 제국에서 벗어날 수는 있을 것이다. 조금 전의 전투에서 얼마의 피해를 입었는지에 따라 그 어려움이 달라지겠지만, 어느 정도 우위를 점하며 벗어난 이상, 이대로 도망치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물론 실낱같은 가능성이지만, 남부의 악마, 혹은 대륙 최고의 장군이라는 호칭이 그냥 생긴 건 아니다. 그 정도면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이다. 어려운 건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일이지, 되는 일을 되게 하는 건 그에게 기본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는 없나?’

‘넌 쓰러졌고, 그 뒤로는 마인대가 이겼고, 지금은 이동 중이지. 여긴 짐마차다.’

‘피해는?’

‘모른다. 포에고가 바보이긴 하나, 정신을 잃은 내 옆에서 보고를 할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니까.’

‘그럼 전투가 승리한 건 어떻게 안 거야?’

‘눈은 보이지 않지만, 귀는 들린다. 소리를 들어보면 대충은 알지.’

몸은 움직일 수 없지만, 감각은 전달된다는 건가?

‘짐마차라는 건?’

그러나 그 다음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래봐야 그의 생각이 알아서 대답을 해주지만, 그가 나에게 생각을 전달하려고 한 건 아니었다.

수에르테, 목소리, 집으로 사용되는 짐마차 하나. 그의 생각과 기억을 종합해보니 어떻게 된 일인지는 짐작이 갔다. 부대에 짐마차는 몇 개 있지만, 수에르테의 집으로 사용되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누워있는 동안 수에르테의 목소리가 들렸으니 짐마차 확정이라는 거다.

‘그런데 포로가 왜 목소리를 낼 수 있지?’

‘바보 같은 포에고가 할 만한 짓이지.’

눈을 떴다. 덜컹 거리는 진동이 등에서부터 느껴졌다. 승차감이 좋은 마차는 아닌 게 확실했다. 보병의 행군 속도가 얼마나 된다고, 이렇게 덜컹 거리는 지.

천천히 일어났다. 배가 고팠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가 말한 것처럼 짐마차가 확실해 보였다. 안에는 각종 조리기구와 간단하게 조리할 수 있는 식량들이 차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았다. 보급이 끊겼으니까 당연한 일이다. 이래서야 전투를 지속할 수가 없다.

개인적으로 들고 다니는 식량도 있지만, 그 걸로는 하루 이틀이 한계다. 예상한 바긴 하지만, 생각보다는 심각했다. 만전의 상태에서 전투할 수 있는 건 아마 한 번 뿐. 그 다음은 모두가 정신력으로 버텨야 했다.

“몸은 괜찮아요?”

마차 안에는 나 외에도 두 사람이 더 있었다. 수에르테와 그 동생 암살자. 암살자는 포박에 재갈까지 물린 채 눈을 부라리며 수에르테를 노려보고 있다. 왜? 아무튼 수에르테는 포박은 당했지만, 재갈은 없었고, 입가가 살짝 늘어져 있다.

살아 있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을 끌고 가라고만 했고, 그 다음은 적이 쳐들어 왔으니까. 식량과 함께 실려 있으니 덤으로 보호를 받은 것도 이상하진 않았다. 그렇지만 입이 틀어막혀 있지 않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녀 혼자만.

“너는 왜 그렇게 편한 상태지?”

“그거야, 당신의 두 부관이 저를 끔찍이 여기니까 그렇죠. 마인대 애들이 저한테 어떻게 하시는 지 잘 아시잖아요?”

확실히 그녀는 특별했다. 1년간이나 이 몸과 몸을 섞을 정도의 사람이니까. 기억을 알고 나니 마인대 애들이 그렇게 극성인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창녀도 서너 번 이상을 견디지 못하는데, 1년을 견디는 사람이 있다. 그럼 다른 조건은 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거다.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은가? 1년이나 버티긴 했지만, 그녀는 결국 나를 죽이려는 목적으로 접근한 것이다. 완전히 적대적인 목적으로 다가왔는데도 이전의 태도를 유지한다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이 몸이 아무리 끔찍하다 하더라도, 목적이 있으면 견딜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대륙에 명성을 떨치는 자매 암살단이라면, 그 정도의 정신력은 가지고 있겠지.

허나 그걸 생각하면서도 이런 짓을 한다면……, 포에고가 그만큼 마인대의 현재 상태에 절망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섹스를 할 수 있는 능력 외에, 정말로 다른 조건은 필요 없다는 이야기가 되니까.

‘너는 어떤데?’

‘암살자일 뿐이다.’

호? 전부터 알고 있었어? 놀라지도 않네?

‘어떻게?’

‘뻔하지. 자매 암살단이란 건 몰랐지만, 이 몸을 견딜 수 있는 여자는 없다. 목적이 있는 게 분명했지.’

‘뭐야, 그럼 상관없지 않아? 너한테 보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잖아? 적어도 준만큼은.’

갑자기 밑의 애들이 이러는 것도 이해는 갔다. 그게 목적이 담긴 연기든, 아니든 감당할 수 있다는 거 아닌가? 그럼 그 이외의 문제는 어떻게든 해결하면 되겠지. 돈을 원하면 돈을 주면 되고, 암살자면 계획을 저지하면 되고.

‘그럴 거면 노예를 썼다.’

‘노예? 그러고 보니 노예를 쓰면 되는데, 왜 안 그런 거지? 창녀나 노예나.’

‘노예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게 어디 있어? 노예도 사람이지.’

‘자신의 의지가 없는 이는 사람이 아니지.’

그건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이거 희망이 없는 건 아닌가? 조금 전에야 테디오의 감정에 취해 있어서 생각하지 못했는데, 의외로 구멍이 많다. 힘이 있으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거고, 테디오는 힘이 있잖아? 힘으로 맺은 관계는 필요 없다는 건가?

‘현실주의자인 줄 알았더니 로맨티스트였군. 하기야, 현실주의자라면 이런 식으로 죽으려고 하지도 않겠지.’

‘나는 그저 인간답게 죽고 싶을 뿐이다. 인간답지 않은 삶을 이어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간다운 삶이라. 그게 뭐지?

나 역시 삭막한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 총과 칼이 판치는 세상은 아니지만, 서로를 등쳐먹으려고 하는 세상이다. 힘의 논리에 익숙해져 있고, 돈이면 마음이라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세상이다. 이 세상은 그게 좀 더 표면으로 드러나 있겠지. 실제로 죽으니까.

그런 세상에서, 인간다운 삶이라?

생각이 마음을 쿡쿡 찔렀다. 인간답지 않은 삶을 산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런데 이 물음에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나 역시 삭막한 세상에 물들어 있었으니까.

“장군님?”

수에르테의 의아한 목소리가 생각을 멈추게 했다. 다시 그녀를 쳐다보자, 그녀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애교를 부렸다.

“그래서 말인데, 이거도 좀 풀어주시면 안 돼요? 아무 짓도 안 할게요. 도망도 안 가구요. 어차피 도망갈 곳도 없잖아요?”

“안 돼.”

“피이…….”

그녀가 몸을 비틀며 귀여운 척을 했다. 그녀는 내가 덮어줬던 망토만을 입고 있어서, 비틀 거리는 와중에 가슴이 드러났다. 의도적이다. 분명 의도적이다. 그러나 별 감흥은 없다. 테디오의 감정 상태는 항상 허무하고 무료했기에, 거기에 조금 마음을 동화시키면 아직 소년 같은 내 감성도 가슴 정도엔 흔들리지 않는다.

그녀는 일단 그냥 두기로 했다. 아는 얼굴을 한 그녀를 굳이 죽일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여기는 전장이고, 그녀는 묶여 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테디오도 그녀에 대한 생각이 별로 없는 것 같으니, 그냥 넘어가도 되겠지.

그 가슴을 한 번 더 쳐다보고는 마차에서 뛰어 내렸다.

“포에고를 불러라!”

“여기 있습니다, 장군님!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포에고는 마차 바로 옆에서 말을 타고 있었던 모양인지, 내 말이 끝나자마자 말에서 내려 내 앞으로 왔다.

“전황을 보고하도록.”

“적은 기병 포함 약 4만의 병력을 잃고 후퇴했습니다. 우리 측 피해는 보병 1만, 기병 2,000입니다. 현재 2만의 보병과 3천의 기병이 말씀하신 곳으로 행군 중입니다. 현재까지 마주친 적은 없습니다.”

앞을 막아서는 적이 없다니 다행이다. 도박이 통했다. 그렇다면 추격만 신경 쓰면 되겠군.

“활과 화살은?”

마인대의 모두는 활을 쏠 수 있다. 그래서 궁병은 따로 운용하지 않고, 필요할 때마다 무장을 바꿔 사용했다. 활과 화살을 실은 마차는 진지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을 테니 살아 있을 가능성이 있지만, 보호 순위는 식량에 밀리니, 다 건지지는 못했을 거다.

“5,000개에 5만 발이 있습니다. 나머지는 전투 중에 못쓰게 되어 버렸습니다. 죄송합니다. 보급품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습니다.”

“아니야, 식량이라도 지켰으면 됐다. 얼마나 버틸 수 있지?”

“길어야 사흘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먹을 게 없습니다.”

예상과 같군.

“얼마나 온 건가?”

“아마 쉬지 않고 하루는 더 가야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하루라. 포에고는 지금 자지 않고 하루를 걸어도 되겠냐는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솔직히 부대엔 쉼이 필요했다. 어젯밤 내내 전투를 했을 것이고, 바로 이어서 또 도망 나와야 했으니까.

하지만 여기서는 빠르게 도망가야 한다. 적병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고, 준비되지 않은 상태라면 우리는 진다. 그리고 쉬려면 예정된 장소에 가서 쉬는 게 낫겠지. 마인대의 체력을 믿자.

“그렇게 해. 이걸로 우는 소리를 하는 녀석은 없겠지?”

“당연합니다.”

자부심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자신의 일에 저런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는 건 충분히 인간답게 사는 것 같은데, 너는 안 그러냐?’

‘나는 저들에게 줄 수 있는 게 없다.’

그게 아닌 거 같은데……, 지금 말해봐야 소용없겠지.

‘베베 꼬였군.’

‘맘대로 생각해라.’

“말에 타시겠습니까? 아니면 다시 마차로 들어가시겠습니까?”

“말……, 아니, 마차에 타지.”

말 위에 앉을 생각을 하니, 어쩐지 속이 안 좋았다. 헬 파이어의 후유증이 아직 덜 풀린 모양이다. 이럴 때는 차라리 덜컹거리는 마차라도 누워 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아, 그리고 안의 건 네 작품이냐?”

“……죄송합니다.”

“됐다. 어차피 말해도 안 되겠지.”

“아닙니다!”

포에고가 목소리를 높이며 부인했지만, 그 눈에는 진심이 보였다. ‘그런 여자 흔치 않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정작 테디오는 아무 생각이 없는데 말이다. 이런 걸 보고 손과 머리가 따로 논다고 해야 하는 건가?

그나저나 저런 반응은 그냥 나오는 게 아닌데. 포에고나 다른 마인대들이 정말로 테디오를 믿고 따르기 때문에 나오는 건데……. 그 배우자까지 걱정해 준다는 건 말이다. 그것도 저렇게 적극적으로.

나 같은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이것도 굉장히 인간적인 관계인데, 테디오는 대체 뭘 더 바라는 거지? 20년 간 이들과 동거 동락해 온 입장은 다른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은 단순히 삐진 걸로 밖에 안 보이는데…….

“됐다.”

뒷말은 무시하고 마차에 탔다. 안에는 수에르테가 여전히 가슴을 반쯤 드러낸 채 앉아 있었다. 그 암살자 동생은 어찌된 영문인지 여전히 수에르테를 노려보고 있었고.

“이제 절 풀어주시려는 건가요?”

수에르테가 생긋 웃었다. 예쁜 웃음이기는 하지만, 그걸로 넘어갈 테디오가 아니다. 테디오에 기생해 있는 나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그 가슴에 계속 신경이 쓰일 것 같으니 다시 제대로 가려야겠다. 하는 김에 그 입도 막아 버리고 말이지.

마차 안에서 적당한 천을 찾아서 그 입을 막아 버렸다.

“앗, 뭐, 그만……. 읍, 읍!”

내 망토도 잘 정리해서 그녀의 알몸이 드러나지 않게 잘 덮어 주었다. 그런 다음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웠다.

그것을 끝으로 시야의 모든 것이 정지하고, 시야가 깜깜해졌다. 시간이 다 된 모양이다. 눈을 뜨니 원룸의 천장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밋밋한 천장을 보니, 사진이라도 붙여둘까 하는 싱거운 생각이 들었다. 너무 삭막해 보이는 군.

테디오의 마음은 어떻게 돌려야 할까. 마인대를 가지고 자극하는 거 밖에는 안 떠오른다. 하지만 그 자식이 베베 꼬여 가지고 말이 통하질 않으니.

일단 계속 가보는 수밖에.

============================ 작품 후기 ============================

후원해 주신 X5413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원고료 쿠폰 주신 독자분들께도 감사를 전합니다.

이번 편을 쓰다보니, 독자 여러분이 이 글을 좋아하시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소설은 먼치킨도 아니고, 시원시원한 맛도 없고, 갑질도 없는데 말이죠.

왜 일까요?

제가 하나 바라는 게 있다면, 독자 여러분을 롤러 코스터에 태워서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드리는 건데.... 그 꿈 같은 일이 제 실력으로 가능할 지...

앞으로도 열심히 쓰겠습니다.

추천과 댓글 주시면, 더 열심히 씁니다ㅎㅎㅎ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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