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처음에는 단순히 소년을 구하기 위한 작은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간단하리라 생각했던 그 일은, 어느새 나라를 세우는 일이 되어 있었다. 그가 세우는 나라는 아니었다. 소년이 세우는 나라였다. 이제 빠질 때도 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이미 늦은 걸음이었다. 아예 시작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소년은 이제 소년이 아니지만, 그는 아직 소년의 그 눈을 잊지 못했다. 자신을 필요로 했던 그 눈에 사로잡혀 있었다.
원래 살색이었던 그의 피부는 까맣게 변해 있었다. 피부색만 변한 게 아니라, 피부가 아예 없어지다시피 했다. 머리카락도 없었다. 모공이 용암에 녹아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 덕에 땀이 나지 않아 늘 물을 달고 살아야 했다. 솔직히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삶을 그와, 그의 부하들은 살고 있었다.
용암의 샘 속에서 몸이 변화하는 과정은 고통스러웠지만, 그 이후의 삶은 더 고통스러웠다. 고작 화염에 대한 내성을 얻기 위해서, 그들은 많은 것을 버렸다. 하지만 후회하진 않았다. 그는 소년을 지킬 수 있었고, 그들은 가족을 지킬 수 있었으니까. 콘슐 제국의 부패는 끝을 몰랐고, 하층민은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살았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복수하리라 다짐했던 이가 수만이었다. 고작 악마쯤이야.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며 여기까지 왔다.
이제 이 전투만 이기면, 콘슐 제국은 이 이상 카스티야 왕국을 부정하지 못한다. 인정해야 한다. 절대의 존재였던 제국으로서는 치욕스러운 일이다. 변방의 소국, 나라 같지도 않은 도적떼에게 이렇게나 밀렸으니 황제는 목이라도 메어 이 치욕을 잊어야 할지 모른다.
마지막 전투를 앞에 두고, 그는 처음으로 아넬라와 대화할 기회를 가졌다. 콘슐 제국인 답지 않게 그는 냉정했고, 로망을 아는 사람이었다.
대회전이 펼쳐질 평원 중앙에서, 그와 아넬라는 둘이서만 짧은 대화를 나눴다.
“이쪽으로 오게.”
“싫다. 의외로 단순한 사람이군.”
“그쪽이야말로. 이 전투가 끝나면 당신들이 있을 곳이 있을 것 같은가? 마인대까지 내가 다 받아주지.”
“적에게 걱정 받고 싶지는 않아. 당신이나 신경 써. 이 전투에서 살아나가더라도 당신이 있을 곳이 있을까?”
“……결렬이군. 그럼 마지막 전투다. 수고했네.”
“……당신도.”
6만의 마인대와 8만의 제국병이 맞붙은 그 회전에서, 마인대는 대승을 거뒀다. 적의 급조한 보병 방진은 마인대의 방진을 당하지 못했고, 마인대의 기병은 적의 기병대를 악착같이 붙들었다. 옆이나 뒤를 잡히지 않고, 정면에서의 싸움을 고집한 그들의 승리였다.
그 후, 카스티야 도적떼는 카스티야 왕국이 되었다.
+ + +
모든 게 바뀌었다. 평화의 시대가 되자, 마인대는 멸시받기 시작했다. 여전히 안정이 필요한 국경 지대에선 그 누구보다 환영받았지만, 안전한 후방에서 마인대의 자리는 없었다. 자국인들조차, 마인대를 악마라며 손가락질 했다. 면전에서 대놓고 떠들지는 않아도, 마인대의 모두가 그 분위기를 알고 있었다.
결국 마인대는 어딘가에 정착하지 못하고 국경 지대 분쟁을 떠돌았고, 단 한 번도 편히 쉬지 못했다.
이건 그의 결정이기도 했다. 마인대는 괴이했다. 그들 덕분에 이렇게 나라를 세울 수 있었지만, 인간과 상이한 건 어쩔 수 없었다. 평범한 사람의 눈에는 괴물처럼 보이는 것이다. 아넬라가 마인대의 최후를 예견했듯, 그도 이런 사태를 예감했다.
그래서 쉬지 않고 싸웠다. 마인대는 싸우지 않으면 뿔뿔이 흩어지고, 혼자만 남게 되면 인간으로서 살 수 없다. 마인들은 마인대에 속해 있어야만 인간으로 살 수 있었다.
그 중에서 그만 조금 사정이 달랐다. 그는 개국 공신에, 대장군이고, 왕이 형으로 모시는 사람이었다. 그의 외모가 어떻든지 간에, 그는 영웅으로 대접받을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마인대에 남았다. 그가 시작한 일이었다. 그가 책임져야할 생명들이라고 생각했다.
왕성을 떠나면서 많은 게 그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다. 이렇게 밖을 나돌면, 있는 권력도 사라지게 될 게 뻔했다. 악마로 살지 않을 수 있었던 그였지만, 이제 왕성을 나서면 악마로 밖에 살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한 가지 믿고 있었다. 소년은 여전히 소년이라고. 소년은 자신들을 필요로 할 거라고 말이다. 왕성의 모든 사람들이 마인대가 없는 자리에서 마인대를 욕해도, 소년은 그러지 않을 거라 믿었다.
세상과 인간을 모르는 바가 아닌 그가 그 부분에만 괴이한 판단을 했다는 건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인간은 머리로만 판단할 수 없는 법이다.
그는 그렇게 믿고 있었고, 믿는 대로 행동했다.
+ + +
카스티야 왕국력 15년. 그는 원정을 마치고서 오랜만에 왕성을 방문했다. 왕성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알현이었다. 알현을 요청하자, 궁내부장이 뛰쳐나와 그를 작은 집무실로 안내했다. 왕이 사적인 용도로 사용하는 공간이었다. 궁내부장은 그 밖에서 경비를 통해 그의 도착을 알렸다.
“전하, 테디오 공작입니다.”
“들라 하라.”
문 밖에서 들리는 소년의 목소리, 왕의 목소리는 여전했다. 그 때 들었던 소년의 목소리는 이제 없지만, 그가 듣기에는 여전히 장난기가 가득한 목소리였다. 건강하게 들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안에는 소년과, 또 다른 소년 하나가 마주 앉아 있었다. 처음 보는 아이였다. 아마도 왕자일 것이다. 그는 먼저 소년에게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셨습니까, 전하.”
“왜 그러십니까, 형님. 편하게 하시지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둘은 호형호제 했다. 비록 사적인 자리에서만 이었지만. 그러나 겨우 이것도 대신들 사이에서 말이 많은 걸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그는 그럴 수 없었다.
“아닙니다. 어찌 신하된 도리로 전하와 호형호제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말씀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형님…….”
소년이 말을 못 잊는 사이에 또 다른 소년이 나섰다. 셋째 왕자였다. 왕자는 테디오를 처음 보았다. 그는 왕자가 세상에 나오기 전에 원정을 나갔었다.
“아바마마. 저 분은 누구세요? 누군데 왜 아바마마 앞에서 가면을 쓰고 있는 거죠? 그리고 아바마마께 형님도 계셨어요?”
“당연하지. 형님은 내게 둘도 없는 분이시란다. 테디오 공작님이시지. 형님이 안 계셨으면 나도 없고, 너도 없었을 걸? 내가 얘기하지 않았느냐, 내 영웅이 있다고.”
“아, 그럼 그 분이요? 그런데 왜 얼굴을 저렇게 하고 계세요?”
“……그게.”
소년은 왕자에게 무어라 설명할지 몰랐다. 사실대로 말해줄 순 있지만, 어린 왕자에게 좋을 것 같진 않았고, 그에게 실례가 될 수 있었다.
그런 기색을 그가 먼저 눈치 챘다. 소년의 얼굴에 주저함이 있는 걸 보면서, 그는 자신이 먼저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는 늘 겪는 일이었으니, 이제 와서 특별할 것도 없었다.
“괜찮습니다.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왕자님, 제 얼굴에는 흉측한 상처가 있어 얼굴을 가리고 다닙니다.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기 때문이지요.”
“아닙니다. 어찌 그런!”
소년의 목소리는 빠르고 높았다. 그는 그런 반응이 기분이 좋아졌다. 아직, 아직 이었다. 소년은 자신을 잊지 않고 있는 거다.
“그럼 한 번 벗어보면 안 돼?”
“놀라실 겁니다.”
“아니야, 보고 싶어.”
그는 떼를 쓰는 왕자 앞에서 어떻게 할 줄을 몰랐다. 얼굴을 보여주는 건 문제가 아니었지만, 실제로 놀라는 아이들을 많이 봐왔기에 섣불리 행할 순 없었다. 그는 소년에게 공을 넘겼다.
“…….”
왕자도 그 시선을 따라 소년을 바라보았다.
“아바마마, 그래도 돼?”
“으음…….”
“전하, 큰 충격을 받으실 지도 모릅니다.”
“아바마마, 형님이라며?”
왕자의 칭얼거림에도 소년은 망설였다. 그는 그걸 자신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국 그가 가면을 들어 올렸다.
“흐악!”
왕자가 빠르게 뛰어가 왕의 뒤로 숨었다. 그러면서도 호기심이 이는지 눈만 빼 꼼이 내 놓고 그의 얼굴을 살핀다. 그는 그 눈에서 예전 소년의 눈을 보았다. 순수한 눈이었다. 오랜만에 즐거웠다. 옛날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거기에 왕자는 소년의 아들이 아닌가? 나중에 자신의 충성이 어린 왕자로 바뀔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런데 그가 왕의 눈을 보는 순간 모든 기분이 바뀌었다.
왕의 눈은 차가웠다. 진짜로 차가웠다. 눈으로 대화하는 게 익숙한 그이기에 알 수 있었다. 그의 눈은 경멸을 담고 있었다. 예전의 그 눈이 아니었다. 순수하게 도움을 바라던 어린 소년의 눈이 아니었다. 계산적이고, 얼음 같았다.
그렇게 다시 보게 되니 그는 조금 전 소년의 머뭇거림이 자신을 위한 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 행동은 물론 그에 대한 예의긴 예의였으나, 호의에서 나오는 예의가 아니라, 계산에서 나오는 예의였다. 그는 아직 마인대의 수장이었고, 원한다면 이 나라를 뒤집어엎을 수도 있었으니까.
순수한 어린 아이의 눈을 보고 난 다음에야 그는 그 사실, 이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 때의 소년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 + +
그가 섹스를 하기 시작한 건 그 때쯤이었다. 이런 몸에 여자만 고생시킬 것 같아 아무래도 자제했었지만, 너무나 무료한 삶에 그 짓이라도 하면 나아질까 싶어 시작했다. 변하는 건 없었다. 사정하는 순간,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것이라도 내어줄 듯 짜릿했지만, 그럴수록 허무함은 반대로 더 커져만 갔다.
그래도 그 이상의 자극이 그에게는 없었다. 전신의 피부 중에 온전히 감각이 살아 있는 곳은 성기 밖에 없었고, 거기에 자극을 주는 건 이제 그가 사는 이유나 다름없게 되었다.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다. 소년을 위해 살았다.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소년이 편히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차츰, 살 이유가 사라져갔다. 소년이 없어졌기에.
지금의 삶이나, 그 옛날 도시에서의 삶이나 다른 게 없었다. 누군가 구타하진 않았지만, 온 몸에 입은 화상은 그를 괴롭혔고, 주고받는 이치는 여기서도 똑같았다.
그의 부하들이 없었다면 이미 죽었어도 벌써 죽었을 것이다. 마인대는 그가 없으면 붕괴될 게 뻔했다. 그가 죽으면 포에고나 빅팀이 마인대를 맡겠지만, 그들에게는 정치적 배경이 없다. 이러 저리 휘둘리다가 해체 수순을 밟게 될 게 눈에 보였다.
그래서 살고 있었다. 자신이 시작한 일, 끝까지 책임을 지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그것도 채 2년을 가지 않았다.
원래 그에게 접근하는 여자들은 많았다. 외모는 흉측했지만, 그는 대장군이었고, 왕의 형이었고, 카스티야 왕국, 어쩌면 세계 최고의 무력 집단을 수족으로 부리는 사람이었다. 눈 딱 감고 그의 여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널리고 널렸다.
하지만 한 번이 두 번까지는 가도, 한 달이 되는 경우는 없었다. 대게는 두세 번의 만남 후에 여자 쪽에서 나가 떨어져다. 그의 몸은 그녀들의 생각보다 흉측했고, 그 때문에 성적으로 전혀 흥분하지 못했다. 그가 아무리 애무를 해도, 겁만 집어 먹는 것이다. 결국 강간하는 거나 다름없이 관계가 진행되었고, 나름 고귀하게 자란 첫 세대들이 그걸 견뎌낼 리 만무했다.
그렇게 2년 동안, 그 앞에 줄을 섰던 대부분의 여자들이 한 번씩 그의 몸을 맛보고 떠나갔다. 레이디들 사이에서 그의 소문이 돌았다. 그는 진짜 악마라고.
결국 창녀를 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감각마저 포기할 순 없었다. 문제는 창녀도 그를 잘 받아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두 달이 한계였다. 누구에게나 몸을 여는 직업여성조차도, 그 앞에 오면 평정을 잊어 버렸다. 성욕이 전혀 오르지 않았다. 아니면 올라도 급격하게 떨어지던지. 그는 늘 그랬듯이, 관계를 맺지 못하고 강간을 해야만 했다.
그제야 그는 부하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 지 깨달았다. 창녀에게도 거부당하는 몸. 무엇을 주고도 보답 받지 못하는 삶. 그가 그랬던 것처럼, 이들에게도 살 이유 따위는 없었다. 화상을 입은 피부는 그들은 계속 괴롭혔고, 준 것도 받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아직 마인대에 있는가? 마인대가 만들어진 이후로, 마인대를 나갔다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는 없었다. 모든 마인은 전쟁터에서 죽었다. 그 이외의 죽음은 없었다. 살 이유가 없어 보이는 사람들인데, 어째서 살고 있는가?
그는 그 이유도 단숨에 알아차렸다. 그가 소년에게 모든 것을 주었던 것처럼, 이들은 그에게 목을 메고 있던 거였다. 그가 보답 받을 리 없는 길을 계속 걸었던 것처럼, 그들도 보답 받을 수 없는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었다.
4만의 마인대, 10년 전부터 충원되지 않고 줄어들기만 했던 이 부대는 그에게 모든 것을 투영하고, 그의 행복을 그들의 행복처럼, 그의 삶을 그들의 삶처럼 생각하고 살아왔던 것이다. 한 부대, 한 가족을 넘어서서 이쯤 되면 한 몸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들에게 줄 수 있는 게 무엇이 있는가? 이들을 다시 사람으로 만들어 줄 수도 없고, 이들에게 부인을 만들어 줄 수도 없고, 이들에게 자식을 줄 수도 없었다.
줄 수 있는 건 오직 승리, 그리고 이 인간 같지도 않은 삶을 끝내주는 일.
그는 그게 자신의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굳이 살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주는 대로 받는 관계에 무슨 의미가 있으랴. 주는 대로 받지도 못하는 사람이 살 이유가 있으랴. 그런 마음조차 들지 않는 사람이 무슨 살 이유가 있으랴.
그게, 그가 죽으려는 이유였다.
그게, 마인들과 함께 죽으려는 이유였다.
[네 번째 퀘스트, 남부의 악마 테디오의 자살을 막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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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료 쿠폰 투척해주신 독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쓰다보니 제 소설은 일일연재에는 그다지 맞지 않는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호흡이 좀 긴 거 같기도 하고요. 그런 의미에서 모아 뒀다 보세요ㅎㅎㅎ여러분 덕분에 추천이 확 늘었습니다. 정말로 감사 드립니다.
그러나 오늘도 추천과 댓글을 바랍니다ㅎㅎㅎ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