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개의 퀘스트-36화 (36/160)
  • 36화

    <테디오>

    겉보기에 큰 변화는 없었다. 그냥 좀 단단해진 것 정도? 대신 기분 상으로는 많이 바뀌었다. 몸이 정말 가벼웠다.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요한이 제정신을 차리고 나와 함께 움직일 때 지금과 같은 느낌이었다.

    한 번 확인해봐야겠다는 생각에 연습용 롱소드를 들었다. 펜싱처럼 옆으로 서서는 검을 허리 높이 정도까지 들었다. 라이트닝 소드의 레벨은 이제 3, 기수식은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무리 없이 취할 수 있었다. 세세한 부분으로 들어가면 여전히 문제가 많지만, 베르트랑이 와도 고개를 끄덕일 수준은 된다고 생각한다.

    천천히 검을 찔렀다. 점과 점, 선과 점, 점과 선, 그리고 선과 선을 잇는 가장 짧은 선을 발견하는 것이 라이트닝 소드의 오의. 그 중에 가장 쉬운 것이자, 가장 완벽한 게 바로 이 찌르기다.

    검 끝을 그대로 밀어주는 이 동작에는 어떤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누가 와서 봐도 이 경로가 지금 상황에서의 최단 거리다.

    간단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 라이트닝 소드의 제 1식은 검술이 지향하는 바와 라이트닝 소드를 쓰는 검사로서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을 되새긴다.

    찌르기를 시작으로 기본 기술들을 천천히 펼쳤다. 검술 레벨이 3에 오르고 발생한 숙련도와 육체의 괴리감은 어제 열심히 수련해서 대부분 해결했다. 그래서 지금 하는 건 수련 겸 천강지체의 효능 확인이다.

    온 몸과 정신이 서서히 검에 빨려 들어갔다.

    + + +

    띠링!

    집중을 깬 건, 휴대폰의 알림 소리였다. 검을 찔러가던 동작 그대로 멈췄다.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그 덕에 옷이 완전히 젖어 있었다.

    빛이 들어오는 양, 해의 위치, 창문, 침대, 바닥.

    방안의 것들이 하나씩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나갈 때처럼 천천히 다시 들어온 것들이 자리를 다 잡고 나서야 눈앞에 반투명한 메시지가 떴다.

    [축하합니다. 고된 훈련의 결과로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현재 숙련도 라이트닝 소드 lv.3 25.06%]

    대략 5%의 숙련도가 올랐다. 한 번에 많이 올랐다. 이유는 아마도 조금 전의 수련. 나도 잊고, 시간도 잊을 정도로 라이트닝 소드에 몰두했다. 흔히 말하는 무아지경에 든 것이다. 내 평생 이런 걸 경험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굉장히 신기했다. 이건 아마도 검술에 대한 재능을 자각한 탓일 확률이 크다. 손에 들고 있는 연습용 롱소드가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무아지경 치고는 너무 적게 오른 거 아닌가? 무협지 같은 데서 보면 이럴 때 깨달음을 얻고 경지를 초월하던데, 거기까지는 안 바란다지만 레벨 하나 정도는 올려 줄 수 있는 거잖아? 레벨 3에서 4가 무슨 마스터에서 그랜드 마스터로 가는 것도 아니고.

    후우, 현실은 어렵구나.

    [좋은 아침이에요!] [오늘은 오빠를 보지 못해서 아쉬워요.] [보고 싶어요.] [제가 없어도 잘 지내셔야 합니다.]

    폰에는 이모티콘으로 가득 찬 예지의 메시지가 주르륵 떠 있었다. 이런 걸 보면 그녀도 여자애 같다. 평소에는 조용하게 책만 탐독하는지라 여자애라기보다는 학생의 이미지가 강하다. 카페에서 늘 같이 있긴 하지만, 그 때문에 말을 걸기가 조금 꺼려지는 경우가 있다. 대부분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지만, 가끔은 아쉽다. 목소리도 듣고 싶은데.

    메시지만 보면 그녀는 굉장히 표현을 잘 하는 사람이다. 매일 매일 날리는 메시지가 보고 싶다, 제가 없어서 심심하죠, 내일 어디 갈래요 등 굉장히 직설적인데다가 하트가 빠지는 적이 없다.

    넷 상에서 성격이 바뀌는 사람……까지는 솔직히 아닌 거 같고, 대면하고 말하자니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내 앞에서 할 이야기는 다한다. 눈은 마주치지만 목소리는 떨리고, 고개는 들고 있지만 얼굴은 빨개서 그렇지.

    좀 더 가까워져서 그녀가 내 앞에서 스스럼없어질 때가 기대된다. SNS상의 예지도 그녀가 가진 한 부분이니까, 그게 내 앞에서 나타나지 마란 법은 없잖아? 하지만 부끄러워하는 게 예지의 매력이기도 한데…….

    [나도.]

    남중 남고 공대 트리를 타고 있는 사람다운, 간결하고도 의미가 잘 전달되는 메시지를 보냈다. 해석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문장이다. 절대 길게 쓰기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다.

    띠링.

    답이 번개 같은 속도로 왔다.

    [너무 짧아요! 수업시간 아니에요? 아직 시작 안 했어요?]

    [수업 시작 시간에 맞춰서 메시지 보내는 사람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지.]

    [죄송해요. 그러려던 건 아닌데……. 나중에 다시 보낼게요. 수업 파이팅! 카페에서처럼 졸지 말고요.]

    [아니, 아직 집인

    까지 쓰다가 깨달았다. 시간이 내가 알고 있는 그 시간이 아니었다. 조금 전만 해도 분명 7시였는데, 체감으로는 2-3분밖에 지나지 않은 게 분명한데, 시계는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망했다. 오늘 1교신데. 교수님 딱딱한 분인데. 으윽.

    아침 수련 때문에 땀에 절은 몸을 어쩌지도 못하고, 빠르게 옷만 갈아입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모자가 날리도록 뛰었다. 학교는 가깝기 때문에 늦게라도 출석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 일은, 그 다음에 생각하자.

    달리면서 의외로 몸이 가볍다는 데 놀랐다. 3시간을 집중해서 수련했는데, 몸엔 아직 힘이 넘쳤다. 내일 쯤 되면 근육통으로 고생할 것 같은 느낌이긴 하지만 했던 만큼 또 수련해도 이 힘을 다 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이 정도라면.

    역시 천강지체를 선택한 건 잘한 일이었다.

    + + +

    [예지야,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뭘요. 그런데 뭐가요? 제가 태어나줘서 고맙다고요? 아니면 모쏠인 오빠를 구제해줘서 살았다고요?]

    [그건 좀…….]

    예지는 SNS 상에서 약간 나사가 풀린다. 그리고 한 번 풀린 나사는 끝을 모르고 풀린다. 한 번씩 단호하게 끊어줄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끊으면 당연히 그 답은,

    [……벌서 소녀가 싫어지셨나요? 왜 이렇게 메시지에서 매정함이……. 흐아아앙.]

    이렇지만, 넘어가도 된다. 메시지를 주고받은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이게 과장된 거라는 건 알고 있다. 처음 몇 번은 나도 놀라 사죄했지만, 지금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지.

    [안 통해. 아무튼 진짜 고마워. 잘못하면 결석할 뻔 했어.]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늦잠 잤어요?]

    사실대로 얘기할 수는 없다. 퀘스트에 관한 건 아직 나만 알고 있는 이야기다. 서양 검술을 수련한다는 이야기도 한 적이 없다. 예지에게는 언젠가 이야기하게 될 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아니다.

    [응.]

    [설마하니……. 또 게임하다 밤 샌 거죠? 저번에 줄인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재밌는 건 알겠지만, 잠은 주무셔야죠. 소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랍니다.]

    잔소리가 심한 건 아닌데, 벌써 잔소리가 있다. 우리 관계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이거 참.

    그래도 아직은 마냥 좋다. 그녀가 하는 말이 지나가는 말로 하는 그런 가벼운 게 아니란 걸 알기 때문이다. 그녀는 진짜로 내 몸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녀의 상식에는 밤은 자라고 있는 거고, 최소 수면 시간은 6시간이라고 고정되어 있다. 그 6시간도 수험생이라 양보한 거고, 평상시는 최소 8시간이다. 그게 무엇이든, 아무리 재밌어도 밤을 새는 것 자체를 이해하기 힘들고, 몸에 안 좋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다.

    게다가 게임으로 잔소리 들은 게 오랜만이라 신선하기도 하다. 부모님은 이미 포기했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네 인생 네가 알아서 살 거라.’모드로 바뀌신 것 같기도 하다.

    [미안.]

    [미안하면 몸도 좀 돌보세요. 저를 생각해서래도요.]

    [저를 생각해서래도요.] 는 특별히 이모티콘이 없이 왔는데, 그 간결함에서 다른 메시지와는 차별화되는 진심이 엿보였다. 어쩐지 이 전파 너머에 있을 예지가 얼굴을 붉히고 있는 장면이 상상된다.

    참, 오빠가 너를 위해 천강지체를 얻어왔단다…… 라고 말할 수도 없고. 이거 참, 좋은 게 있는데 말이지.

    [알았어. 그건 그렇고 이번 주말에 시간 된다고 했지?]

    [네! 완전 돼요! 저는 널널 그 자체랍니다. 이힛.]

    빼는 건 없어서 좋다.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성간 메시지는 총 없는 전쟁터나 마찬가지라던데, 이 메시지에 어디 그런 게 있는가? 하긴 그것도 썸타는 중의 이야긴가? 으음, 나는 썸타는 중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럼 공연 보러가자. 학교 밴드가 하는 건데…….]

    아무튼 예지에게 공연 보러가자고 메시지를 보냈다. 현실 로젤리나, 안나 뭐시기 양이 하는 그 공연이다. 이로써 떳떳하게 외간여자를 볼 수 있다. 저번과 같은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겠지.

    베르트랑에게서 얻은 경험은 로젤리나를 멀리 하라고 하고, 실제로 만나서 딱히 뭔가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또 이렇게 떠나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녀는 분명 중요 인물이다. 줄이라도 이어 놓을 필요성이 있다.

    + + +

    [퀘스트를 깨고 보상을 받으세요! 100개의 퀘스트를 깰 수 있다면 당신은 이 세상의 영웅이 될 것입니다!]

    [마음의 준비가 되셨다면 ‘시작’이라고 말씀해 주세요. 네 번째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이제 네 번째.

    짧다면 짧지만, 또 엄청나게 긴 편이기도 하다. 9월에 시작한 이 일, 벌써 11월이다. 그런데도 이제 겨우 4번째. 100개의 퀘스트는 언제쯤 도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생각이 들지만, 한 편으론 이번 퀘스트는 어떨지 기대하는 중이었다.

    일단 주위는 어두웠다. 노란 빛이 은은하게 깔려 있는데, 아마 양초 같은 종류가 아닐까 생각한다. 빛 아래에 보이는 건 천막이다. 이곳은 천막 안인 것 같다. 그리고 내가 무릎을 꿇고 있는 곳은 바로 그 안에 있는 침대 위다.

    침대는 하얀 색으로 짐작되는 천으로 덮여 있었는데, 그 천이 끝나는 부분에 지푸라기가 삐져나와 있었다. 천막이라면 간이 침대일 확률이 높고, 내구성이 별로이거나. 혹은 두 명이 누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지금 침대 위에는 나 말고 또 다른 사람이 누워 있으니까.

    어둡긴 해도 누워 있는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자세로 누워 있는지, 어떤 차림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다 확인할 수 있었다.

    표정은 찡그리고 있었다. 미간이 한껏 모아지고, 입술을 살짝 물고 있는 그 얼굴은 고통을 참고 있는 거 같기도 했다. 이마가 유독 빛나는 걸 보면 땀도 나는 모양이다.

    차림을 봐도 아픈 거라고 볼 수도 있었다. 빛 아래에 부푼 앙가슴과 바짝 솟아난 유두가 보이는데, 피가 몰려 있고, 물방울이 맺혀 있는 것이 어디가 안 좋은 게 틀림없었다. 적나라한 차림이지만 온 몸을 비트는 그 자세에서 전신을 관통하는 고통이 느껴진다.

    비트는 자세는 부분이고, 그 사람은 요상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 팔은 침대 위에 붙어 있고, 양 다리는 번쩍 들어 내 어깨에 걸쳐 있는 것 같았다. 다리는 부분, 부분만 시야에 들어 왔지만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력을 따라 흘러내린 물방울의 자국이 아름다운 곡선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아픈 건 이 요상한 자세 때문이지 않을까? 현재 내 몸의 무게 중심이 앞으로 쏠려 어깨에 걸쳐져 있는 다리를 밀고 있으니까……, 스트레칭을 너무 심하게 한 거 같은데?

    사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얼굴이었다. 그 얼굴은 내가 아는 누군가와 비슷했다. 깊이 들어간 그윽한 눈동자와 오똑하게 솟은 코가 확실히 그 사람을 닮았다. 넓은 이마도 비슷했고, 도톰한 입술도 그 사람과 똑같았다. 흑단과 같은 검은 머리만이 다른 점이었다.

    로젤리나.

    로젤리나와 같은 얼굴을 한 여인이, 전라의 상태에서 내 아래에 누워 있었다. 당연히 스트레칭 따위를 하는 건 아니다. 현재 시야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서로의 중요부위가 맞닿아 있음이 틀림없다.

    거기까지 생각이 도달하자, 이 이상 상황을 파악할 인내가 남아 있지 않았다.

    “시작.”

    “흐으읏.”

    “으읍?”

    속았다. 또 속았다. 시작이라고 하는 그 순간, 내가 느낄 수 있는 건 오직 허무함 밖에 없었다. 1초 정도만 시점이 빨랐어도 극도의 쾌감을 느낄 수 있었을 텐데, 지금 이 몸은 모든 것을 쏟아내고 헐떡이는 하나의 고기 덩어리일 뿐이었다.

    반대로 그녀는 충실한 감각을 느끼는 지,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상기된 그 표정을 보니까 심사가 약간 비틀렸다. 베르트랑을 농락했던 이 요물은 여기까지 쫓아와서 이 몸의 주인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모든 것을 뽑아가서 혼자 느끼지 않는가? 이 몸도 이용당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리고 그 허무맹랑한 예상이 맞았다.

    그 이상 생각을 전개하거나 기억을 살피거나, 주변 상황을 파악할 새도 없이 시야에 삐죽하게 튀어나온 쇠붙이가 보였다. 세검이 뒤에서부터 찔러 와서 내 목을 한 번에 관통해 버린 것이다.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단칼에 즉사다. 깔끔한 실력이었다. 그거 하나는 칭찬해 주고 싶었다.

    [실패하셨습니다. 다음 기회를 기다리세요!]

    한 번 만에 깰 것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이건 너무 빠르다. 충격적이기도 하고. 내일, 내일은 내 실력을 보여주지.

    ============================ 작품 후기 ============================

    후원해주신 4962님께 감사를 전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네 번째 퀘스트가 시작했습니다.

    이게 파란 노블이었다면 그냥 옆자리에 누워 있다가 죽었겠지만, 빨간색으로 바꿨으니까 적어도 이정도는 가야죠.

    이번 편은 장군의 시점에서 펼쳐집니다. 여러분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열심히 써 보겠습니다.

    아키로 등급은 제 아이디고, 제가 예전에 구상한 소설의 잔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언젠가는 쓰게 될 소설입니다.(위너 이야기 아닙니다. 위너 이전의 소설이에요. 위너는 한 달 안에 연재 재개할 것 같습니다. 나중에 습작을 풀면 자세히 이야기 하겠습니다.)아키로란 단어를 다른 곳에서 쓰는 경우는 아직 못봤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댓글과 추천을 기대합니다. 응답해주세요. 독자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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