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개의 퀘스트-33화 (33/160)

33화

“흐으윽.”

소리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이것만큼은 무리였다. 몸이 중력에 끌려 자유낙하를 하니 절로 비명이 흘러나왔다. 공기가 얼굴을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그러다가 피가 아래로 쏠리며 몸이 강제로 정지했다. 단단하게 묶여 있는 매듭이 더 단단해지며 바람소리 같은 걸 낸다. 동시에 팔에도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찾아온다.

“으윽.”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참았다. 예상보다 충격이 컸다. 팔이 빠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멈춘 곳은 성벽 중간쯤이었다. 위로도 5m, 아래에도 5m. 예상이상으로 빠른 낙하의 속도는 섬찟했고, 팔의 고통은 생각보다 컸다.

그리고 나를 지지해주는 땅의 부재.

옷가지로 만든 부실한 이 줄이라도 잡고서, 버디든지 위로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불현 듯 들었다. 그러다가 오크들이 쏜 화살이나 오거의 돌에 맞아 죽을 확률이 높다는 건 알았지만, 아무것도 없는 공중에서 믿을 수 있는 건 이 줄 밖에 없는 것 같았다.

‘놔!’

의외라고 생각하면서도 요한의 말을 따랐다. 손을 놓자, 다시 낙하가 시작되었다. 5m도 안되니까, 분명히 짧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왜 그리 긴 건지. 발에 오크의 시체가 닿을 때까지가 천년과도 같았다. 머리로 피가 쏠렸다가, 다시 발끝으로 피가 몰리는 감각이 프레임 끊어지듯 천천히 느껴졌다. 눈에는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오크들의 면면이 들어왔다. 성벽 한 구석에서 낙하 중이라 별로 관심이 없을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보고 있었다. 그건 성벽 위에도 마찬가지인지, 머리 위쪽도 뜨거웠다.

발에 무언가가 느껴지자마자 몸을 앞으로 숙이고, 시체가 쌓여 만들어진 카펫 위를 굴렀다. 짧은 낙하의 충격은 그걸로 다 해소되었다. 일어났다. 다행히 비죽 튀어 나온 쇠붙이 같은 건 이동경로에 없었다. 온 몸이 쑤셨지만, 다친 곳은 없었고, 바로 움직일 수 있었다.

“크아아악, 죽어라!”

움직여야만 했다. 벌써 다가오는 놈들이 있었다. 그것도 한 둘이 아니다. 수십의 오크들이 이미 내 쪽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뛰었다.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위에서 봤을 때 오크들의 사이사이에는 공간이 많았다. 그만큼 많은 오크들이 죽었다. 그 공간을 따라 움직이면 충분히 남쪽 성벽 앞의 전장을 벗어날 수 있어 보였다.

믿을 수 있는 건 요한의 두 다리밖에 없었다. 라이트닝 소드의 레벨은 아직 3에 숙련도 20% 정도. 오크들 사이에서 자유롭게 휘젓고 다니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도망, 아니 돌파다. 그 수밖에 없었다. 놈들이 눈치 채기 전에, 놈들이 밀집하기 전에 이 전장을 빠져나가야 했다. 요한의 다리를 믿었다. 그가 어제 보여준 폭발적인 속도를 믿었다. 무모한 이 계획의 성패는 그 다리에 걸려 있었다.

“뛴다!”

‘알았어.’

일방적인 관계였다. 나는 그의 생각과 감정을 읽을 수 있었지만, 그는 내 기억도, 생각도 읽지 못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감정만 조금 느낄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별다른 반발 없이 내게 몸을 맡기고, 내 뜻에 따라 주었다. 고마웠다. 그의 입장에선 다중 인격 같은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실제 나는 완전한 타인이니까. 나를 받아주는 그가 고마웠다.

바보 같은 베르트랑은 내 존재 자체를 구분하지 못했고, 파이레스는 알고 있었겠지만 반응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몸의 주인과 마음이 통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스파크가 튀었다.

발이 땅을 박차고 몸이 앞으로 나아간다. 오크의 뒤집어진 코가 순식간에 내 앞으로 다가온다. 왼쪽으로 피한다. 오크의 고개가 내 움직임을 쫓아 돌아가기도 전에 벌써 몸은 그 옆을 지나간다. 다음 오크의 눈이 커진다. 들고 있는 대도를 나에게 겨누려고 움직인다. 그 동작이 마무리되기도 전에 또 그 옆을 지나간다.

빨랐다. 어제보다 훨씬 빨랐다. 발이 한 번 땅을 밀 때마다 몸이 앞으로 쑥쑥 나아갔다. 속도뿐만이 아니었다. 제동, 방향 전환, 순간 가속도까지, 어느 것 하나 빠질 게 없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건, 끝 모를 지구력이었다.

요새는 평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요새의 주 수입원은 척박한 땅에서 나는 작물로, 남쪽에 기름진 평원에 비하면 형편없었지만 이 주변에서는 꽤 넓은 농지를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북방의 성치고는 인구가 많아 상단의 출입이 잦았다. 지난 10년간 안정적으로 오크를 막아온 덕에 그 수입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커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약초를 캐서 나오는 수입이 있었다.

상시 오크들의 위협을 받는 북방의 땅, 이 땅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위험하지 않는 게 있겠냐만은 그 중에서도 약초를 캐는 일은 가장 위험하고, 힘든 일이었다.

일단 약초를 캐러 멀리까지 나가야 했다. 거의 2시간을 걸어가야 상품성이 있는 것들을 캘 수 있는 산과 숲이 나온다. 여기까지라면 해볼 만한 일이었다. 이 근처에서 나는 약초들은 여기서만 났고, 꽤나 비쌌으니까. 돈도 없고, 땅도 없이 북쪽까지 쫓기듯 올라온 유민들에게는 재기의 꿈을 꾸게 만드는 일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산과 숲이 북쪽에 있었다. 사시사철 오크들이 득실득실한 그 북쪽 말이다. 오크뿐만 아니라, 정체불명의 마물들도 넘쳐나는 곳. 그곳에서 목숨을 걸로 약초를 캐야 하는 것이다. 해볼 만한 일이 단숨에 최악의 일로 둔갑한다.

위험했다. 약초 캐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 중에 절반은 오크와 같은 몬스터의 손에 죽었다. 수입도 보잘 것 없었다. 시장에서 클라크 요새의 약초를 찾는 이들이 제법 많지만, 물량을 댈 수가 없으니 수입이 적었다. 번식률이 올라가는 봄, 여름에는 가까이 가는 것조차 힘들었다. 수가 줄어드는 겨울에는, 약초의 수 역시 줄어들었다.

그래도 맨 손으로 이 북방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할 수밖에 없었다. 목숨을 걸고 돈을 모야야 했다. 그래야 그 다음 일을 찾을 수 있었다.

요한도 그 중 하나였다.

8년 전, 요한의 부모님은 오크의 침공에 돌아가셨다. 그는 7살의 어린 나이에 생계를 책임져야할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었다. 게다가 이제 갓 젖을 땐 동생들도 요한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7살짜리가 뭘 할 수 있겠는가? 일을 맡겨주는 사람도 없었고, 무언가 해볼 지식도 없었다. 닥치는 대로 이것저것 해봤지만, 세상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그는 재주가 부족했고, 금방 쫓겨났다. 결국 마지막으로 하게 된 일이 북쪽 숲에서 약초를 찾아 캐는 거였다.

위험하지만, 어린 아이도 할 수 있는 일. 어린 아이에게는 너무나 위험한 일이지만, 배운 게 없어도 할 수 있는 일.

그런데 거기서 의외로 대박이 났다. 약초꾼들조차 어린 아이라고 받아주지 않아 혼자서 몰래 따라 다녔는데, 그게 오히려 도움이 되었던 거다. 덩치가 조그만 어린 아이는 쉽게 숨을 수 있었고, 쉽게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욕심을 부리지 않았던 그의 태도가 생존에 한몫을 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지 않고,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만 일을 했다. 돈에 눈이 멀어 깊은 곳으로 들어가지 않아 생환률이 높았다.

운도 많이 따랐다. 눈앞에서 오크들이 스쳐 지나가는 경험은 수백 번이나 있었고, 이름 모를 마물들이 서로 싸우는 사이에서 숨죽이고 참아야 했던 시간들도 수십 번이나 있었다. 약초꾼무리들이 마물들에게 잡아먹히는 틈을 타 도망갔던 기억도 얼마든지 꺼낼 수 있었다.

그렇게 8년. 그는 베테랑이 되었다. 이제 북쪽 산과 숲의 지리를 꿰뚫고 있었고, 마물과 오크의 분포와 그 영역이 어디인지 눈감고 알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약초가 어디서 나는지, 그만의 포인트도 가지고 있었다. 여름에도 숲 속에 들어가 약초를 캐올 정도였다.

이쯤 되면 그게 단순한 운 때문이라고 여길 수는 없었다. 운도 한두 번이지, 7살 어린아이가 15세의 소년으로 성장할 동안이나 이어질 수는 없었다.

그걸 가능하게 한 건 그의 실력과 재능이었다. 본능적으로 위기를 감지하는 감각. 수없는 생사의 고비를 넘기며 알게 된 마물들의 생태.

그리고 선천적인 체력과 단련된 다리.

8년 동안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요인은 다른 곳에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7살 어린 아이라고 할 수 없는 기이한 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체력이 매번 그를 위기의 상황에서 구했다. 어른들이 도망치다 쓰러질 때, 그는 한 발자국 더 가서 숨었다. 한 발 더 뛰어 오크와 마물들에게서 멀어졌다.

다리는 그 자연스레 따라왔다. 8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산과 들과 숲을 누비니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황금 다리가 만들어졌다. 속도를 내고 싶을 때는 속도를 내고, 멈추고 싶을 때는 멈추고, 방향전환을 하고 싶을 때는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최고의 다리였다.

이제 그는 100이면 100, 갈 때마다 살아 돌아왔다. 여전히 욕심을 부리지 않았기에 큰돈은 벌지 못했지만, 주변에서 나름 유명한 약초꾼이 된 것이다.

그 다리와 체력이 하나 된 마음과 만나 지금 그 울분을 토해냈다. 휙휙 지나가는 오크들이 보인다. 요한이 몸으로 외치고 있었다. 이게 나라고!

좁은 성벽 위에서는 그 장점을 발휘하지 못했다. 발휘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소극적이 되어 버렸다. 좁은 성벽, 도망칠 수 없는 그 공간이 어릴 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나무 아래 구덩이에 숨어 숨죽이던 기억. 바로 위에 오크가 킁킁 거리는 것을 벌벌 떨며 귀로 듣고 있던 기억. 그저 지나가기만을 빌 수밖에 없었던 연약한 자신이 그를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넓은 평지에서는 떨 필요가 없었다. 이곳은 그의 홈그라운드였다. 느릿느릿한 오크는 그를 잡을 수 없었다. 더 느린 오거는 두말할 것도 없다. 늑대 중에서도 빠른 종만이 그와 견줄 수 있을 뿐이다.

‘좋아!’

신났구만. 내가 대신 싸워주고, 용병들의 호의를 받고, 남쪽 성벽을 지휘하는 동안 그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연약한 어린 시절에서 벗어나, 스스로가 가진 능력에 자신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도 지금처럼 밝고 긍정적인 감정이 전해진 건 처음이었다. 한심한 사람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요한의 특기 덕분에 남쪽 성벽은 예상보다 쉽게 벗어났다. 어제 생각보다 빠른 요한의 움직임에 이런 배경이 있었다는 건 오늘 그의 기억을 뒤져 알아냈었다. 재능에 긴 시간 쌓아온 경험이 있다면 오크의 군대를 뚫고 지나가는 걸 시도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훨씬 더 빨랐다.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이 정도면 괴물 코뿔소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그럼, 원래는 괴물 코뿔소와 달리기 경주를 하는 게 클리어 방법인가?

이제 크게 원을 그리며 북쪽을 향해야 했다. 방향을 꺾는데, 웅성거리는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남쪽 성벽 위 병사들이 살짝 걱정되긴 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다시 지휘자가 사라진 거니까. 그렇지만 믿을 수밖에 없다. 내가 눈을 마주하며 대화한 한 사람, 한 사람이 제대로 해줄 거라 믿는다. 나는 나의 할 일을 해야 한다. 각자가 가진 힘에 따른 책임, 그 책임을 다해야만 이 전장에서 승리할 수 있으니까.

달리기든, 헬 파이어든, 남은 건 괴물 코뿔소뿐이다.

============================ 작품 후기 ============================

후원해주신 '천공의성'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원고료 쿠폰 투척해 주신 여러 독자분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퀘스트가 이번 편에 끝나지 않았지만, 현재 다음 편을 쓰는 중입니다. 아마 30분 안에 올라갈 거고, 그 편에서 세 번째 퀘스트가 끝이 나게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 저는 추천과 코멘트를 사랑합니다. 관심을 주세요. 관심이든 압박이든 주시다 보면 뭐라도 튀어나오지 않을까요? 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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