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개의 퀘스트-31화 (31/160)

31화

수능은 지난 주 목요일이었으니까, 금, 토, 일, 월, 4일간 하루도 빠짐없이 예지와 데이트를 했다. 맛있는 걸 먹었고, 서울 근교에 놀러 다녔고, 영화도 같이 봤다. 그리고 그 후에는 카페에 와서 또 같이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 굉장히 허전하다. 4일 간 늘 옆에 있던 예지가 옆에 없기 때문이다. 아직 정식으로 사귀는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이러면 어쩌자는 걸까. 그녀가 지난 4일 총합 40시간 이상 내 근처에 있었던 건 이런 걸 노린 건지도 모르겠다.

물리적인 빈자리가, 심리적인 빈자리로 한 번에 이어졌다. 마치 그 이전부터 내 맘속에 그녀가 들어와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지만, 또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내일은 볼 수 있겠지? 오늘은 카페에도 못 오나? 논술 준비 때문에 학원을 알아보러 간다고 했는데……, 그게 그렇게 오래 걸리나? 그리고 예지 정도면 그런 준비가 필요 없어 보이는데…….

어라?

“안녕하세요! 저 왔어요.”

내가 잘못 본 건가 했다. 오늘은 보기 힘들 거라던 예지가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교복을 입고 맨 얼굴인 예지가 웃으면서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입가에 장난기가 걸려 있다.

“사장님은 안 오신 거예요? 아니며 가신 거예요?”

“……응?”

“오빠, 왜 그렇게 굳었어요. 제가 온 게 싫으세요?”

아니다. 그건 절대로 아니지. 속마음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머리를 크게 흔들었다. 그 동작에 그녀가 입을 가리며 웃는다.

“당연히 아니지. 그냥 조금 놀랬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안 올 거라고 생각했었거든.”

“그럼 제 생각하고 계셨던 거네요?”

카운터 앞에 서서 나를 올려다보면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기가 힘들다. 갑자기 심장이 뛰어서 말도 제대로 안 나온다.

“그, 그렇지.”

“다행이네요.”

이번엔 그녀가 나와 눈을 마주친 상태에서 눈웃음을 보여준다. 내 심장이 너무 뛰다가 제자리를 벗어나 바닥으로 쿵하고 떨어졌다. 내 몸의 상태는 아마도 얼굴에 다 드러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녀의 눈빛에 만족스러운 빛이 도는 것일 테다. ‘당신은 이미 제 포로거든요. 도망칠 생각말아요.’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럼, 아메리카노 주세요. 따뜻한 걸로.”

“……그래, 기다리고 있어.”

“네.”

포니테일로 묶은 그녀의 머리가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원을 그렸다. 오늘은 내가 당하는 날인가 보다. 며칠간 내가 진실을 가지고 공격한 걸 복수하는 건가? 물론 이런 복수라면 언제든지 당해줄 수 있지만.

빨리 아메리카노나 만들자. 오늘은 사장도 없으니 좀 더 자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겠지.

+ + +

한참 이것저것 대화를 나누고 있던 중에 예지가 말을 멈추고는 내 얼굴을 유심히 쳐다본다. 둘 밖에 없으니 당연한 거긴 했지만, 지금은 완전히 뚫어져라 쳐다본다. 급 쑥스러워져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또 그럴 수는 없으니 입을 움직일 뿐이다.

“……왜?”

“흐음……, 오빠, 무슨 일 있어요?”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예상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녀의 표정도 예상과 달랐다. ‘뭐 묻었어요.’같은 일반적인 생각부터, ‘입술에 크림이…….’와 같은 므흣한 상상과, ‘잘 생겼어요.’처럼 왕자병 초기증상의 사고까지 넘나들며 그녀의 말을 기다렸지만, 정작 그녀의 말에선 걱정이 가장 먼저 묻어나오고 있었다.

“갑자기 왜?”

“울었죠?”

놀랬다. 어떻게 안 거지? 요한의 감정에 제법 깊게 이입해 버려서 좀 심하게 울긴 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건 아침의 일이다. 벌써 10시간은 지난 일이라고. 충혈 되었던 눈은 이미 회복되었고, 붓기도 이미 다 가라앉았다.

“아, 아니야.”

“다 티나요.”

내 눈앞에 그녀의 가는 검지가 클로즈 업 되었다.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력이죠. 무슨 일이에요? 오빠는 눈물과 거리가 먼 사람처럼 보였는데……, 큰일이에요? 제가 들으면 안 될…….”

진짜 놀라운 관찰력이다. 그리고 내가 눈물과 멀다는 것도 얼추 비슷했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이성적인 사람이니까.

그녀의 관찰과 추측, 떼어놓으면 아무렇지도 않을 그 언어들이 합쳐져서 만드는 울림에 내 얼굴이 묘하게 풀어졌다. 그런데 그녀는 그걸 이상하게 해석한 모양이었다. 말이 완전 걱정모드로 흘러가자 내가 재빨리 끊고 들어갔다.

“아니, 큰 일 아니야. 그냥 책을 읽었을 뿐이니까, 거기까지 안 나가도 돼.”

“책이요?”

“응, 책. 슬픈 이야기였거든.”

“어떤 내용인데요?”

요한의 이야기를 했다. 최대한 요한의 입장에서 요한을 변호하며 얘기했다. 그가 처한 상황, 그가 느끼는 두려움에 대한 당위성, 그가 동생들에게 품은 마음, 그 동생들이 죽었을 때의 슬픔까지, 내가 느꼈던 그의 생각과 감정을 자세하게 풀어 주었다.

한 몸이 되어 느낀 거라 생생하긴 했지만 이야기는 길었다.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녀는 마치 자기 얘기처럼 집중해서 들어 주었다. 기본적으로 그녀의 천성이랄까, 습관이 그렇게 형성된 탓도 있겠지만, 절반 정도는 내 얘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신이 나서 이야기가 더 길어져 버렸다.

예지랑 있으면 모든 게 좋지만, 내가 왕자병이 되어 가는 거 같아 걱정이다.

“……그렇게 된 거였어. 처음엔 괜찮았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나더라. 그게 아침이었어. 꿈에 나왔거든.”

꾸며낸 이야기 속에 진실을 교묘히 섞었다. 이 말에 그녀가 반응할 것 같진 않지만, 그녀 역시 꿈속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미끼를 던지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랬었군요.”

그러나 그녀는 ‘꿈’이라는 단어에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녀의 반응은 내 예상과 달랐다. 내가 국어책 읽듯이 이야기를 읽어준 것도 아니고, 최대한 생생하게 요한의 감정을 설명했으니 조금이라도 슬퍼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엔 그런 기미가 전혀 안 보였다. 오히려 놀라운 기색이랄까. 그런 게 비쳤다.

“바보 같지? 책 읽다가 울기나 하고.”

“아니에요. 그게 뭐 어때서요. 감성이 풍부하다는 건 좋은 일이죠. 오빠는 생각보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군요. 저 같으면 그냥 한심하다고 하고 말 것 같아요.”

그런가. 하긴 그녀는 하고 싶은 일은 하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끙끙 앓고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면 요한에게 공감할 수 없는 것도 이해가 된다. 그걸 감안한다고 해도 조금 차갑다고 생각되긴 하지만. 그것도 그녀의 모습 중 하나니까.

단호박이네. 그것도 은근히 끌린다.

“오빠도 그렇지 않아요? 소설 속 인물에 감정이입하는 것과는 별개로 하구요.”

“나? 나는 오히려 소설 속 인물에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상황이면 누구나 떨 수밖에 없지 않을까?”

오크의 존재감을 피부로 느꼈고, 전장의 무거움에 어깨에 져 봤다. 그건 가볍게 털어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게 나의 현실 상황이었다면, 솔직히 요한보다 잘 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내 머릿속에는 꿈에서 깨어나 요한의 행동을 안타까워하던 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녀의 말처럼, 나는 요한을 한심하게 여기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직접 겪은 경험이 없었다면 안타까움이 아니라 예지처럼 단호한 비난이 나왔으려나.

“아니에요. 오빠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예지가 내 말을 한 번 더 부정했다. 그녀의 눈빛은 좀 전과 같이 단호했다. 근거가 있는 건가? 나를 얼마나 봤다고? ……보기야 많이 봤겠지만, 그게 본 건 아니잖아?

“그걸 어떻게 알아?”

“다 아는 수가 있어요. 그리고 오빠가 그런 사람이라고 해도 이제 다 된 밥이니까 무르기 없기에요. 제가 다 책임질 테니까 걱정 마세요.”

그녀의 말에는 애정과 결단이 담겨 있었다. 그 감정이 전달되어 와서 내 기분도 좋아졌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다 된 밥이라는 건 이미 사귀기로 결정했다는 정도의 의미인 것 같다. 그러니까 그녀 입장에서 내가 요한과 같은 한심한 사람이라도 그 결정을 돌리지 않겠다, 뭐 그런 의미인가 보다. 하지만 마지막 말은 곰곰이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된다.

“……무슨 책임?”

“오빠를 한심한 사람으로 가만히 두지는 않을 거라는 의미죠. 저는 제 사람이 그런 꼴을 보고 있을 순 없어요.”

어떻게 가만히 두지 않을까. 그게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입술을 오물조물 거리며 내뱉은 말이 내 등골을 서늘하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단호박이니까.

“……좀 무섭다?”

“……죄, 죄송해요. 제, 제가 주제넘은…….”

그러나 내 한마디에 삶은 호박이 되어 버린다. 고개를 들지도 숙이지도 못하다가 결국 고개를 푹 숙이고 내게 정수리를 보인다. 그 머리를 톡톡하고 쳤다.

“아니야, 고마워. 네가 나를 그만큼 생각하고 있다는 거니까. 나도 좀 분발해야겠는 걸?”

내 말에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려고 하는 게 보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내 말에 그녀의 머리가 격침당해 버렸다.

“다 된 밥과 내 사람? 예지야, 네 머릿속에서 우리 결혼이라도 한 거야?”

“…….”

목까지 빨개져서 아무 말도 못하는 그녀를 보니 가슴에서 웃음이 튀어 나왔다. 그 웃음을 따라 어제 그 용병들에 대한 미안함도 같이 흘러 나왔다. 모두 그녀의 덕분이다.

“하하하하.”

+ + +

지금의 내 상태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시험지를 한 번 풀어보고 나서 시험에 들어가는 것과 비슷한가? 하지만 그걸 로는 부족하다. 시험은 자리에 앉아 풀기만 하면 되는데, 이쪽은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여야 하니까.

오늘도 50여 마리의 오크를 저 세상으로 보낼 수 있었지만, 내가 표현하는 문장만큼 단순한 일은 아니었다. 자신감은 있었지만, 긴장은 하고 있어야 했고, 한 동작을 성공시키기 위해 계속 집중해야 했다.

그래서 오늘도 체력의 한계에 도달하고 말았다. 이게 지금의 내 한계인가 보다.

그리고 이번에도 어제와 같은 이벤트가 벌어졌다.

“뭐하는 거야! 정신 차려! 힘들면 내려갔다 와. 너 같은 전사를 여기서 소모시킬 순 없으니까.”

씨익하고 웃는 그 얼굴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어제처럼 그들은 내 앞을 막아선 것이다. 누군가가 나를 신뢰하고, 지켜준다는 건 든든한 일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머리는 착하고 가라앉았다. 저들의 호의는, 그 결단은 진짜인가? 단순히 프로그램 된 건 아닌가? 심정적으로 그들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진짜 사람, 단지 쳇바퀴 속에 갇힌 사람일 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머리에서는 계속 의심을 제기했다.

시간.

과거로 돌아가면 우리의 삶이 바뀔까? 한 번쯤은 다들 상상해 볼 것이다. ‘그 때로 돌아가면 이렇게 할 텐데, 저렇게 할 텐데’하고 말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진짜 과거로 돌아갔을 때, 우리의 삶은 바뀌게 될까?

현재의 기억을 가지고 돌아간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바뀔 것이다. 그게 좋은 방향인지, 나쁜 방향인지는 몰라도, 대충이나마 미래를 알고 있는 자는 그 옛날의 삶을 살 수 없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 기억이 없다면? 그럼 우리의 삶은 변하는 것일까? 모든 것인 그대로인데, 시간을 되돌린다고 변하는 게 있을까? 아니라고 생각했다. 평소의 나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원인이 바뀌지 않았는데, 결과가 바뀔 리 없다는 본능적인 감각에서 나온 결론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광경을 눈으로 보니까, 과연 그게 맞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어제와 비슷한 행동을 한 나에게, 어제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용병들을 보았다. 그게 인간인건가?

그게 맞는다면, 우리가 기계랑 다를 게 무엇인가? 모든 변수를 통제할 수 있는 똑같은 상황에서 한 치도 다름없는 반응을 내놓는 건 기계나 하는 일이 아닌가?

시간에 갇혀 있을 자는 절대로 느끼지 못할 위화감이, 시간을 벗어나니 그 존재를 드러냈다.

……잘 모르겠다. 게다가 지금은 깊게 생각할 틈이 없었다. 일단 그들의 결단에 응답해 주어야 했다.

설사 그들이 프로그램 된 대로 살아가는 존재라 할지라도 상관없다. 그렇다고 그들의 반응이 가치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 모두를 위해서 목숨을 거는 그들의 행동은 그 이유가 무엇이든 칭찬 받을 만한거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취급 받아서는 안 된다. 프로그램이라 할지라도, 희생을 하도록 프로그램 된 사람들은 적고, 그런 사람들은 칭송받아야 한다.

그 행동이 앞으로 몇 백번 반복된다 하더라도, 그 일이 가치 없다 할 순 없다. 내 입장에서야 몇 백 번 중 한 번이지만, 그들의 입장에서는 언제나 한 번 뿐인 목숨이다. 그것을 이딴 위화감 때문에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건 어제의 내가, 내 분노가 용납하지 않는다.

어쩌면 내 감정과 이 선택 모두, 또 한 단계 위에서 보면 그저 프로그램된 것으로 보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끝이 없다.

지금은 감정에 몸을 맡기자.

나 역시 그들처럼 쳇바퀴 같은 삶을 사는 필멸자일 뿐이다. 다른 시간을 산다고 신이라도 된 듯한 고민은 버리자. 눈앞에 있는 이들은 나와 같은 피와 살을 가진 인간으로밖에 보이지 않으니까.

“아니요, 저는 여기서 여러분과 싸울 겁니다.”

오늘은 어제와 다르게 가보자. 이 방법이 이들의 결단에 응할 수 있는 길이길 바란다.

============================ 작품 후기 ============================

이글을 빨간 노블로 바꾸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빨간 노블로 바뀐다고 내용이 바뀌는 건 없을 것 같지만요.(그러나 그렇게 되면 또 제 속의 음란마귀가 날 뛸지도 모르죠.)원래부터 주인공을 고자로 두고 싶은 생각은 없기에 쓴다면 못 쓸것도 없긴 한데요...

(다만 몇 장면 안 나오기는 합니다.) 바꾼다고 독자분들이 늘기는 할까. 새로 들어오는 독자님들이 야한씬만 바라며 댓글을 도배하진 않을까.

여러가지 고민이 있습니다.

이에 관한 의견도 좋고, 글에 관한 의견도 좋습니다. 아무튼 댓글을 바랍니다. 댓글 하나 다시는 거 크게 어려운 일 아니지.... 않을까요? '잘 보고 갑니다.'도 큰 힘이 됩니다. 그게 아니라면 추천이라도 한 번 꾸욱 눌러주세요ㅎㅎㅎ여러분의 작은 관심이 작가에게는 큰 힘이 됩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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