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개의 퀘스트-30화 (30/160)
  • 30화

    <요한>

    아래쪽 상황은 전에 본 것과 조금 달라져 있었다. 그 때만 해도 보급품을 배급하는 문제와, 부상병의 치료 문제로 떠들썩했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상대적으로 조용했다. 아픔을 견디는 신음소리만이 간간히 들려오고 있었고, 움직이는 사람도 적었다.

    내가 퀘스트에 들어온 것도 거의 3시간 째, 전투 시작으로부터 5시간이나 지난 시점이었다. 모두들 지쳐 있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아래에서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보급을 해야 할 물품들이 이미 다 떨어진 듯했다. 대장장이로 보이는 사람만이 바삐 움직였다. 그만이 이 아래에서 할 일이 있었다.

    그 외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건 오직 성벽 위에 세워둔 사람들만 믿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자신이 올라갈 차례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던지.

    성벽에 기대어 앉았다. 등에서 한 번씩 진동이 느껴졌다. 오거들이 던지는 돌로 인해 성벽 전체가 떨고 있는 것이다. 오거들은 지치지도 않는 모양이다. 어떻게 5시간 내내 돌을 던져댈 수 있는 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피곤하긴…… 한, 모양이다…….

    + + +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라고!’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돌아왔다. 처음에는 누구 목소리인지 몰랐지만, 이제 보니 요한의 외침이었다. 눈을 깜빡이면서 시야에 들어오는 것들을 파악하고, 현재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 지 기억해 냈다.

    ‘얼마나 지난 거지?’

    ‘30분 정도. 빨리 다시 올라가.’

    ‘너……?’

    ‘나는 못하니까, 네가 가. 빨리 가서 오크들을 막아. 그래서 이 요새를, 내 동생들을 지켜 줘.’

    마음의 대화였기에, 그의 감정이 그대로 전달되었다. 오크를 두려워하고, 자책하고, 나를 믿고, 승리를 기대한다. 내 존재에 대해 의심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으니 움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좋아. 나만 믿으라고. 물론 너도 떨고만 있으며 안 된다는 거 알지?’

    ‘……그래. 방해는 안 할게.’

    완전체……, 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이제야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된 느낌이었다. 몸에 힘이 넘쳤다. 현실적으로는 그저 30분 쉰 탓일지도 모르지만, 그보다는 요한의 도움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게 더 힘이 나는 생각이니까.

    계단을 박차고 성벽 위로 다시 올라갔다. 힘이 생기니 기분이 좋아졌다. 희망과 기대가 생겨났다. 이대로 한 번에 퀘스트를 끝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대로 성벽 위를 조금 막다가, 그 덩치 큰 코뿔소를 막으면 끝나는 거 아닌가?

    그러나 올라간 기분은 성벽 위에 발을 내딛자마자 금세 가라앉았다.

    성벽 위는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병사들과 오크들의 쇳소리와 비명소리가 귀를 때리고, 뿜어지는 피가 시야를 채웠다. 달라진 거라면 시체의 숫자. 오크든 인간이든, 서로의 시체는 계속 쌓여만 가서 성벽은 시체로 쌓은 것처럼 변해 있었다.

    그리고 그 시체의 성벽에는 조금 전에 내 앞을 막았던 용병들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았다. 빠르게 훑어봤지만, 익숙한 얼굴이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시체도 찾을 수가 없었다.

    30분, 고작 30분이었다. 그런데 그 동안 10명이나 되던 용병들이 오크들의 손에 죽었다. 고작 나를 살리기 위해서.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말이다.

    가라앉은 마음에서 다시 뜨거운 불길이 피어올랐다.

    내가 이 사람들을 위해 분노하는 건 웃긴 일일지도 모른다. 아니, 웃긴 일이다. 나는 이 세계와 관련이 없는 사람이고, 그들 하나하나와는 더욱 관계가 없는 사람이며, 지금 죽었어도 내일 밤이며 다시 살아날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들도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내일이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살아날 것이다. 게다가 내일이면 그들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기억도 못한다. 퀘스트는 사실적이었지만, 내 입장에서 볼 때 이건 싱글 RPG와 다를 게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베르트랑의 폭발적인 감정도 컨트롤 했고, 파이레스의 끝을 모르는 의지도 잠시나마 컨트롤할 수 있었다. 그 정도면 내 마인드 컨트롤은 수준급이 아닌가? 그런데도 지금 내 감정을 컨트롤 할 수 없었다. 이래봐야 그들은 돌아오지 않으며, 내일이면 다시 나를 처음 보는 양 대할 게 틀림없었지만, 내 가슴이 그 생각을 거부했다.

    나를 내려 보내던 그들의 웃음이 잊히지 않았다.

    “다 죽여 버리겠어!”

    ‘……나도 도울게!’

    요한 역시, 분노하고 있었다.

    + + +

    [축하합니다. 고된 훈련의 결과로 라이트닝 소드가 lv.2에서 lv.3로 올라갑니다.]

    분노에 휩싸여 검을 휘두르다 보니, 레벨 업 메시지가 떴다. 레벨 3이 되니 검로가 더 자유로워졌고, 오크의 공격이 눈에 더 잘 들어왔으며, 내 검이 더 빨라졌다. 근육의 힘은 아니었다. 라이트닝 소드의 비전은 힘으로 속도를 더하는 게 아니라 본능적으로 가장 짧은 검로를 찾아 휘두르는 것이다. 레벨 3이 되자 내 감각이 정신없는 전투 속에서도 검이 지나가는 가장 빠른 길을 찾아내기 시작한 거였다.

    분노에 따라 달려들었지만, 성벽 아래로 내려가 무쌍을 뽐낸 건 아니었다. 가슴은 분노했지만, 머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그동안의 경험이 있으니 그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이전처럼 성벽을 방패삼아 오크들을 상대했고, 우리 편이 상대하고 있는 오크들을 협공했다.

    그럼 뭐가 바뀌었냐고?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오크들을 찾아 다녔다. 그래도 아까 전에는 내 눈 앞의 성벽만 마크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남쪽 성벽 전체를 뛰어다니며, 오크들을 죽였다. 힘을 아끼지 않았다. 전력으로 휘둘렀고, 빠르게 움직였다.

    그 덕에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오크를 죽였고, 레벨 3부터 더디게 오르던 경험치도 10%나 올랐다.

    [현재 숙련도 라이트닝 소드 lv.3 10.15%]

    또 다른 수입은, 남쪽 성벽의 병사들이 내 얼굴을 익히게 된 것이다. 어느 순간 나는 남쪽 성벽의 지휘자가 되어 있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오크들의 화살도 떨어졌다! 오거가 던지는 건 무시해! 고개를 내밀어! 성벽 위로 올라오기 전에 죽여야 한다! 뒤는 내가 지키겠다! 앞만 보지 말고 옆을 봐라! 너희들은 혼자 싸우는 게 아니다! 전우를 이용하고, 전우를 지켜라!”

    내가 이런 말을 할 위치도 아니고, 그럴만한 경험도 없지만, 오크 하나를 죽일 때마다 주위 사람들에게 외쳤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했다. 이 정신없는 와중에 내 말들이 귀에 들어갈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오크를 죽이는 것만으론 내 분노가 진정되지 않았다.

    나를 지키고 죽었던 그 용병들의 정신이 이어지기를. 그들의 바람이 실현되기를. 나 혼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성벽을 누비던 내가 멈춘 건, 지축을 뒤흔드는 충격 때문이었다.

    쿵! 쿵! 쿵!

    놈인가?

    실수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그런 생각이 번뜩 들었다. 감정에 빠져서 너무 신을 내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적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 적은 나 말고는 상대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뛰었다. 자책할 겨를이 없다. 성벽 위를 달려 서쪽 성벽에 도달했다. 그 쪽 역시 피터지게 싸우고 있었다. 오크들이 더 많아서 그런지 남쪽보다 치열했다. 그 사이를 뚫고 달렸다.

    그러나 실수를 되돌리기엔 시간이 없었다. 내가 서쪽 성벽을 거의 다 지나왔을 무렵에, 거대한 생명체의 뿔이 북쪽 성벽을 뚫는 게 보였다. 두꺼운 성문이 종이 짝처럼 성벽에서 찢겨져서 공중을 날았다. 소리가 그 뒤를 따라왔다.

    콰가강!

    성문이 날아가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성벽만한 덩치가 그냥 성벽을 부숴 버렸다. 반나절 이상 오거가 던지는 바위를 막아내던 성벽이 몸통 박치기 한 번에 무너졌다. 성벽을 이루던 바위 덩어리들이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공중을 날았고, 그 위에 있던 사람들도 같이 공중을 날았다. 적어도 4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단 한 번에 죽었다. 성문 근처에 있었을 명장 클라크 패러스의 생사도 불명이었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놈의 돌진은 성벽을 부수고도 멈추지 않았다. 속도는 조금 떨어졌지만, 상처하나 없었고, 그 육중한 덩치가 요새 안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머리로 박거나 뿔에 힘을 집중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움직이기만 해도 사람들은 죽어갔고, 집들은 수수깡처럼 부서져 나갔다.

    가라앉아 있긴 해도 승리의 희망을 품고 있던 요새가, 한 순간에 지옥도로 변해 버렸다.

    나는 그 광경에 맥이 탁하고 풀렸다. 실패였다. 이제 와서 저 괴물을 죽여 봐야 퀘스트는 성공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내일 다시 도전해야 했다. 시스템도 메시지로 얘기해 주었다.

    [실패하셨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그러지 못했다. 이전까지 보조적인 역할을 하던 그가, 갑자기 전면으로 나왔다. 내가 제어할 틈이고 자시고, 그의 강렬한 의지가 내 의식을 밀어냈다. 그의 간절한 목소리가 입에서 터져 나왔다.

    “안 돼!”

    빨랐다. 조금 전 성벽을 달려갈 때도 느꼈지만, 요한의 몸은 내 생각보다 빨랐다. 그리고 그 몸의 주인이 움직이는 건 더 빨랐다. 그것도 단거리를 폭발적으로 달리는 게 아니었다. 그는 단거리 경주자 정도의 속도를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는 것 같았다.

    ‘동생들, 동생들이!’

    소리를 내는 것조차 아끼며 달리는 그의 머리는 집에 두고 온 동생들과, 남쪽에서 보급을 도와주고 있는 동생들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감정과 의지가 순간적이지만 파이레스에 견줄 만 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빨라도, 이미 움직이기 시작한 괴물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그가 서너 계단씩 뛰어 내려가는 동안 괴물은 이미 요새 전체를 짓밟는 중이었다. 안타까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괴물이 남쪽 성벽도 부숴버리고 요새 밖으로 나가는 순간, 그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아아아악!”

    슬픔이 터졌다. 그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족을 잃어도 슬픈데, 그에게 동생들은 자식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장으로서 동생들만 보고 살았던 그다. 심장이 쪼개지는 슬픔이 나에게도 전해졌다.

    [다음 기회를 기다리세요!]

    아비규환의 지옥도가 시야에 마지막으로 들어왔다. 긴 꿈의 끝이었다.

    + + +

    깨어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퀘스트 내내 두려워하며 떨고만 있던 그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원하는 일이 있다면, 아니, 그렇게 지키고 싶은 게 있었다면, 조금 더 일찍 움직일 수도 있었잖아?

    아침이 지나면 아픔이고 슬픔이고 다 잊어버리겠지만, 적어도 이 순간, 몸이 아직 이불 속에 있는 이 시간만큼은 그 감정에 젖었다. 슬픔과 안타까움이 범벅이 되어 내 볼을 타고 흘렀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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