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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개의 퀘스트-27화 (27/160)
  • 27화

    현실의 로젤리나를 보았고, 가까이 다가가서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까지 확인은 했지만, 별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일단 외모밖에 몰랐다. 그 외모 정도면 학교에 유명해질 법 하지만, 우리 학교는 크고, 미인은 내 생각보다 많았다. 그리고 이름이라도 들어본 사람들 중에는 그런 외모를 가진 자가 없다.

    알만한 애들에게 수소문을 해봐도, 딱히 걸리는 게 없었다. 학교에 가면 좀 더 알아보든지, 아니면 무턱대고 기다리든지 할 텐데, 주말이라 그러기엔 무리가 있었다.

    예지랑 사장에게서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예지에게는 넌지시 꿈 이야기도 꺼냈지만, 역시 반응은 평범했다. 꿈 이야기를 하면서 얼굴을 붉히는 반응은 평범한 건 아니었지만, 퀘스트와 관련된 반응은 아니었다.

    이 이상 뭘 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현실의 로젤리나가 이 학교를 다니고 있기는 한 건지, 그게 어느 과의 학생인지 정확하게 알게 된다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그 사람을 찾아가서 뭐라고 물으면 될까? 그래봐야 돌아오는 건 평범한 대답일 뿐일 게 틀림없다.

    내가 휘말려 있는 일은 그런 일이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접근조차 하기가 어려웠다. 처음 퀘스트에 들어갔을 때 생각했던 것처럼, 길은 그 퀘스트 안에 밖에 없어 보였다.

    그러니 퀘스트에 관한 건 다음에, 월요일이 되거든 생각하자. 지금은 눈앞에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 여성분을 상대하는 거에 집중해야 한다.

    “오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예지는 내 맞은편에 앉아서 아까부터 커피 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내가 뭐하는지 빤히 보이는 위치다. 대화가 잠시 끊긴 사이에 다른 생각에 빠진 걸 모를 리가 없다. 위기……는 아니었다. 어제 하루 겪어본 게 처음이었지만, 그녀는 이 말에 약하니까.

    “너 예쁘다는 생각.”

    그녀가 눈에 띠게 당황했다. 역시 진실은 통하는 법이다.

    “거, 거짓말 말아요. 분명 저 보고 있었던 거 아니잖아요.”

    “아닌데? 너 보고 있었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예지를 두고서 내가 어떻게 눈을 돌려.”

    “……제가 졌어요…….”

    알았어요, 안 물을게요. 정도가 숨겨져 있는 잠깐의 침묵. 애초에 나를 추궁하려는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그냥 궁금했던 거겠지. 이제 화제를 돌려 볼까 싶지만,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니 멈출 수가 없다.

    “질 게 뭐 있어. 내가 행운이지. 이렇게 예쁜 사람이랑 데이트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못했는데.”

    “그만해요. 계속 하면 이제 꾸미고 안 나올 거예요.”

    “흐응? 너 안 꾸며도 예쁜데? 내가 그 때는 그런 말 한 적 없나? 교복 차림도 예쁘다니까. 그 전에도 예뻤어.”

    “…….”

    째려본다.

    “알았어, 알았어. 그만할게. 그렇지만 네가 예쁘고 사랑스럽다는 건 진실이니까. 네가 너무 부끄러워해서 그만두는 거지, 내가 거짓말하는 거 아니다?”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그만해요.”

    째려보면서도 붉어지는 얼굴을 막을 수 없나 보다. 그녀도 그걸 느끼고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나 얼굴은 더 빨개졌다. 그걸 보고 내가 가만히 있을 수가 있나.

    “그렇지? 너도 네가 예쁜 걸 아는 거지?”

    “오빠!”

    예지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눈이 완전 동그래졌다. 가녀린 손으로 테이블도 콩하고 친다. 진짜 화난 건가? 그런데 어쩌니, 내 눈엔 귀엽게만 보이는 걸.

    “왜 웃어요!”

    “귀여워서.”

    “오빠!”

    진짜, 안 웃을 수가 없잖아. 나도 좀 봐줘.

    + + +

    어엇? 어라? 저기 날아가는 게, 내 왼팔이 맞지?

    팔꿈치 아래 부분의 팔과 손이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고통이 신경을 타고 내 머리에 닿기 전에는 그 팔이 뭔지 바로 파악할 수 없었다. 한참을 보고서 방금 전까지 내 왼팔에 달려 있던 부분이라는 걸 알았다. 한참이나 관찰할 수 있었던 건, 그 팔의 움직임이 슬로우 비디오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집중력은 내 팔이 잘리게 된 원흉, 오크의 대도를 볼 때 나타나야 했는데, 한 발 늦은 감이 있었다.

    “으아아아악!”

    ‘으아아아악!’

    세 번째 퀘스트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요한과 내 의견이 일치했다. 격통이 내 머리를 뒤흔들었다. 팔이 잘린 부분에서는 피가 쏟아졌다. 순간적으로 몸이 휘청인다.

    깜빡했다. 베이고 나서야 생각이 났다. 16번째 오크의 첫 공격이 내 왼팔이라는 것.

    처음 이 오크를 상대할 때는 긴장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냥 피할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너무 순서만 신경 썼다. 3번째 오크는 굴러서 피하고, 5번째는 뒤에서 찌르고, 8번째는 왼쪽으로 페이크를 주는 게 공격 이라는 등의 순서에만 관심이 있었다. 이 급박한 와중에.

    아팠다. 무지하게 아팠다. 왼팔로 뭘 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몸의 부위를 사용하는 것도 아닌, 그냥 가만히 있는데도 아팠다. 이제껏 운이 좋아 심장이 한 번에 뚫리거나, 목이 한 번에 베이거나 했다. 이런 아픔은 로젤리나의 주먹에 맞고 갈비뼈들이 우수수 부러졌을 때 이후 오랜만이었다.

    그래도 공허에 비하면 별 건 아니었다. 이건 그래도 정신이라도 차릴 수 있으니 말이다. 요한이 난리치는 걸 의지로 누르고, 이를 꽉 물고 몸의 균형을 회복했다. 눈앞에는 16번째 오크가 아직 버젓이 살아 있다.

    그런데, 이번 판 계속 해야 하나?

    이번엔 목을 노리는 오크의 2차 공격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아픔을 참아낼 수는 있지만, 잘 움직일 수 있는 건 또 별개의 문제다. 천천히 움직일 수는 있다. 근육을 사용할 때마다 왼팔에서 비병을 지르지만, 어쨌든 움직일 수는 있다. 파이레스의 몸에 들어갔을 때는 그걸로 충분했다. 내가 조금만 움직여주면, 그 다음은 파이레스가 알아서 했으니까. 거기에 그 몸은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어서 이래나 저래나 천천히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걸로 부족했다. 오크의 대도는 빨랐고, 지금의 내 속도라면 피할 수 없어 보인다. 피하더라도 또 큰 상처를 입을 게 뻔했다. 그렇게 상처가 쌓이면, 내 움직임은 더 느려진다. 또 상처가 난다. 악순환의 반복이다.

    그럴 바에는 그냥 목을 내주는 게 낫지 않을까.

    ‘…….’

    요한은 이미 기절했다. 조금 전, 1초 전만 하더라도 세상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는데, 지금은 잠잠하다. 나는 여기서 목을 내어주어도 죽지 않는다. 나의 몸은 현실에 있으니까. 하지만 요한은 진짜로 죽는 거겠지?

    죽는 건 어떤 기분일까?

    이 퀘스트는 그 부분만큼은 내게 경험시켜 주지 않았다. 공허의 블랙홀 속으로 빨려들어갈 때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모든 고통이 사라졌다. 어쩌면 그게 죽음의 순간이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지만, 첫 번째나 지금의 퀘스트를 생각해보면 아니었다. 고통이 사라지는 순간은 진짜 죽어 버리는 순간이고, 그 순간 그냥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뿐이다.

    나는 아직 죽음을 모른다. 요한 역시 모른다. 죽음을 경험한 요한은 만날 수가 없으니까.

    목을 파고드는 차가운 물건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 + +

    눈을 뜨자마자 습관적으로 일어나 모니터 앞에 앉았다. 모니터에는 자기 직전까지 보던 파일이 하나 열려 있었다. 요즘 계속 외우고 있는 오크 공격 순서였다. 키보드에 손을 올리고 그 다음 오크, 31번째 오크에 대해서 추가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제야 16번째 오크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기록은 두 번째 퀘스트, 깊은 던전의 마지막 미궁을 탐사할 때부터 시작했었다. 수없는 갈래길이 펼쳐져 있던 미로를 돌파하기 위해서였다. 40일간 만들어놓은 미궁의 지도는, 퀘스트를 클리어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습관은 세 번째 퀘스트에도 이어졌다. 오크들의 공격 패턴을 외워두면 퀘스트를 쉽게 깰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오크들이 셋, 넷 정도일 때는 그 기록이 굉장히 효과를 보았다. 오크들이 내가 기억하는 대로 움직이는 건 꽤나 신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크들을 상대하는 숫자가 늘어나자 머리가 뒤죽박죽이 되어갔다. 10번째 오크의 공격이 왼쪽이었던가? 오른쪽이었던가? 그렇게 한 번 헷갈리기 시작하자, 그 뒤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결국 이번엔 16번째 오크에게 죽었다. 어제만 해도 30번째까지 죽였었는데 말이다.

    이래서는 안 돼. 이래서는 실력이 늘지 않아.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파일의 대부분을 지웠다. 대충 오크들이 어느 방향에서 나타나는지, 그 다음에 일어나는 일들이 뭔지, 주의해야할 게 어떤 게 있는 지 등 큰 줄기만 남겨 놓았다.

    내가 이 퀘스트만 하고 말 거라면 오크들의 동작을 하나하나 기억해서 퀘스트 클리어를 노리겠지만, 내게는 아직 90개 이상의 퀘스트가 남아 있었다. 외워서만 하기에는 너무 많은 양이 분명하다. 한 퀘스트에 오래 붙잡혀 있으면 모든 퀘스트를 끝내는 데 10년 이상 걸리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실력을 키워야 했다. 어떤 임무가 떨어지더라도 대응할 수 있게 말이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빨리 퀘스트를 깰 수 있다.

    이번 퀘스트는 그 실력, 그 중에서도 검술을 키우기에 아주 적합한 거였다. 성벽 위로 올라오는 오크를 죽이는 게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싸움을 거의 해보지 않는 현대의 나에게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나저나 점점 현대를 살아가는 데엔 별 필요가 없는 능력들을 키우게 되는 군. 재밌기는 한데, 언젠가 쓸 날이 있을까?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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