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안나 이바노브나 소볼레프>
클라크 패러스와 사장이 비슷하다는 걸 알게 된 건 엊그제 밤이었다. 그 순간에는 꽤나 놀랐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사장이 퀘스트에 등장한다고, 예지가 파이레스의 아내와 비슷하게 생겼다는 건 알았지만, 그걸로 뭘 할 수 있는가?
물어 볼까? 요즘 이상한 꿈 안 꾸냐고? 그러면 사실대로 대답해 줄까? 그런 꿈을 꾸는 거라도 숨길 판인데, 묻는다고 말해 줄까? 오히려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 가능성이 크다.
그들을 봐온 지 이제 반년이다. 이상한 꿈 수준이 아닌, 이런 퀘스트를 매일 하고 있었다면 내가 눈치 채지 못하는 게 이상했다. 공허 수준을 매번 경험하는 건 아니겠지만, 그에 비등한 일들을 하고 있는데, 겉으로 표시가 안 난다면 그들은 지금 스크린에 나오고 있어야 했다. 나랑 만나기 전부터 이 일에 관련되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더더욱 묻는 걸로는 알아낼 수가 없다. 그런 질문은 경계심을 돋울 뿐이니까.
그래서 그냥 넘어갔다. 머릿속에 그 사실, 클라크 패러스와 사장의 얼굴이 비슷하다는 사실을 집어넣고 평상시대로 행동했다.
그리고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예지 문제, 예지와 파이레스의 아내가 비슷하다는 건 둘째로 치더라도, 예지와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가득 찼다. 거기에 예지는 수능이 코앞이니, 더욱 머리가 복잡했다.
수능 당일인 어제는, 내가 수능을 치는 것처럼 긴장만 잔뜩 했다. 고민해봐야 답도 안 나오는 문제를 잡고 싶은 겨를이 없었다.
예지 때도 그랬지만, 사장도 겉으로는 알아낼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새로운 경험을 했으니 따로 ‘관찰해야지’하고 생각하지 않아도 그 사실, 예지와 사장이 퀘스트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보게 된다. 하지만 새로운 눈으로 봐도 둘에게서 새롭게 보이는 건 하나도 없었다.
그들 역시 평소대로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평소대로는 아니었다. 예지와 나 사이의 일은 우리 카페에서 큰 화제가 되는 일이니까. 나 마찬가지다. 오늘 아침 잠에서 깨어난 후로는 첫 데이트라고 할 수 있는 이 시간만을 고대하고 있었으니까. 중요하긴 해도 급하지 않는데다가 어려운 문제는 머리에 들어올 자리가 없었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되면 답이 없다고 해도 그냥 넘길 수가 없다.
사장과 예지는 꿈에 나올 수 있다. 그거야 내가 본 사람들이니까. 그들을 바탕으로 해서 중년의 얼굴을 만들든, 서양인의 얼굴을 만들든, 내 머리가 다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로젤리나가 현실에 나타날 수는 없는 거다. 그녀는 꿈에서 먼저 본 사람이었다.
베르트랑의 몸에서 그녀를 봤을 때, 어디서 봤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퀘스트가 꿈이라고 가정한다면, 내가 새롭게 만들어낸 사람인 셈이다. 그런 일은 어렵긴 해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내 머리가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해 미인이라 불릴 수 있는 요소를 끌어 모으면 된다.
그런데 그렇게 만들어 낸 인물이 현실에 나타날 수는 없다. 그럴 수는 없는 거다.
이건 선후관계가 뒤바뀌어 있다. 그러니 내가 꿈에서 만들어낸 인물이 현실에 등장했다는 것보다는 원래 있던 인물이 내 꿈에 나타났다고 생각하는 게 훨씬 자연스럽다.
……그래, 이 일도 그냥 넘어갈 수 있다. 세상에 불가능한 일은 없으니까, 꿈에서 본 사람이 현실에 나타나는 것 정도는 있을 수 있는 일이지. 사실 예지나, 사장의 경우도 그렇게 넘어간 것이 아니던가?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게 편하니까. 퀘스트에 무언가 있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그냥 내가 만들어낸 꿈이라고 여기는 게 훨씬 편하고, 가볍게 대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이젠 내 감각이 그 결론을 거부했다. 우연도 계속 겹치면 필연이 되는 법이다. 이번에는 그저 우연인 척 넘어갈 수가 없었다.
이 퀘스트는 대체 뭘까?
첫 번째 퀘스트는 처음이었기에 정신이 없었다. 두 번째 퀘스트는 그 고통에 정신이 없었다. 세 번째인 지금은 그나마 할 만하다. 이제 머리 싸매고 고민해야 할 때가 온 건지도 모르겠다.
“오빠, 무슨 일이에요?”
그 소리에 내 정신이 현실로 돌아왔다. 내가 얼마나 가만히 서 있었던 걸까? 그것도 예지가 함께 있는데 어떻게 그 존재를 잊어버리고 있었을까. 다행히 그녀의 얼굴엔 불만의 기색이 보이지 않지만, 정말 큰 실례다.
“응? 아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
“맞아요? 무슨 일 당한 건 아니고요? 뭘 그렇게 멍하게 있었어요?”
오히려 걱정의 기미가 엿보였다. 내가 좀 오래 서 있었나 보다.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하지? 퀘스트 이야기를 할 수는 없고.
“오랜만에 보는 사람이라서……, 옛날 생각 좀 하느라고.”
“그렇다면야 괜찮은데……, 저런 미인과 비슷한 사람은 어떻게 아시는 거예요? 게다가 외국인인데? 어디서 만났어요?”
목소리가 높고, 말투가 빨랐다. 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던 조금 전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걱정인줄 알았더니 그게 아닌가 보다. 하지만 그거나 이거나 콱 깨물어주고 싶은 건 마찬가지였다.
“질투하는 거야?”
그 한 마디에 붉어지는 그녀의 얼굴.
“……아니, 그게 아니고…….”
“질투지?”
폭발하듯이 얼굴이 붉어지더니, 이내 폭발해 버렸다.
“……이, 이건 예의가 아니잖아요! 오늘은 저랑 보내는 거 아니었어요?”
그 말을 끝내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숙인다. 그런데 그래도 붉은 얼굴과 목이 다 보였다. 더 하고 싶다. 더 건드려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그 얼굴을 더 보고 싶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그 마음이 너무 귀여워서, 확하고 안아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첫 만남에 또 그러기엔 난 아직도 경험이 부족하니, 이 이상 건드리면 안 될 것 같다.
“미안, 미안. 예전에 알던 사람인데, 너무 비슷해서, 그래서. 깜짝 놀라서 달려갔는데, 외국인이잖아? 그 친구는 토종 한국인이었는데.”
“……오랜만에 만난 사람인데 지나가는 얼굴을 보고 기억해요? 누구에요? 좋아했던 사람?”
목소리는 좀 가라앉았지만, 그 속도는 여전했다. 조금 전에 건드리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무심코 또 나와 버렸다.
“질투 맞네.”
“피이. 됐어요.”
이번엔 몸이 돌아갔다. 이 입이 문제다. 삐진 건가? 첫날부터? 이거 어떻게 하지? 그런데 내가 생각을 정리하고 행동에 들어가기도 전에 환한 얼굴이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내 생각을 멈추고 대화에 들어갔다.
“그럼, 저녁 먹으러 가요. 엄마한테 받은 돈 있으니까, 그걸로 맛있는 거 사 먹어요.”
“응? 내가 사려고 했는데?”
“괜찮아요. 오빠 돈 없는 거, 저도 잘 아는 데요.”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저는 손님으로도 생각 안하는 사장님 때문이죠.”
“하긴…….”
“그럼 어디 갈래요?”
“적어도 오늘은 네가 가고 싶은 곳에 가야지.”
“아, 그것도 그러네. 그럼, 음, 아무데나 가도 괜찮은데……. 오빠와 함께라면.”
수줍게 웃는데, 내 혼이 쑥하고 빠진다. 뭐냐. 어떻게 하라고? 이걸 어떻게 견뎌? 공허보다 더 무시무시한 것 같다.
“오빠도 상관없는 거 같네요? 후훗.”
그 웃음, 그 웃음을 다시 보니까, 내가 조금 전까지 하던 생각이 이어졌다.
“너 질투하는 거 놀렸다고 복수하는 거지?”
“제가 질투를 왜 해요? 오빠가 과거에 누굴 만났든, 지금 만나는 사람은 전데요 뭘. 안 그래요? 오빠가 이런 거 좋아하는 거 같으니까 하는 거죠.”
연기란 말인가?
“방금 연기? 라는 표정이었는데 말이죠. 연기는 아니에요. 방금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같이 걷다가 갑자기 여자한테 달려가다니, 또 바로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무슨 망부석 마냥 멍하게 서 있는데……. 진짜 실례라고요. 이해는 하지만, 마음은 별개. 그래도 이렇게 저에게 웃어주니까 넘어가 드릴게요.”
그러더니 그녀의 손이 내 머리에 와 닿는다. 머리카락이 그 손바닥 아래서 천천히 눌리더니 이내 그녀의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그 손은 좌우로 움직이며 내 앞머리를 헝클었다.
스윽스윽.
스윽스윽.
스윽스윽.
기분이 너무 좋다. 키는 내 쪽이 더 커서 그녀가 날 살짝 올려다보는데, 그 살짝 치켜뜬 눈이 또 좋다. 내 머리카락과 그녀의 손가락이 스쳐지나가며 나는 소리가 좋다. 피부에 전해지는 그녀의 존재감이 또 좋다.
“……언제까지 해야 돼요……?”
“평생?”
“……빨리 가요.”
몰라, 그냥 웃고 싶어진다.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 나가면서도, 내가 뒤따라오는 것을 신경 쓰며 보조를 맞추려는 게 훤히 보이는 예지. 그런 예지의 옆을 걸어가며 웃었다.
+ + +
오크는 철을 어디서 구하는 걸까?
내 얼굴을 향해 다가오는 대도를 보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드문드문 이가 빠져 있고, 뭉툭한 느낌이라 검이라기보다는 몽둥이에 가까웠다. 맞으면 베이기보다는 부서질 것 같은 느낌? 그래도 분명 햇빛에 광택을 드러내는 철이 분명했다. 먹을 것도 없어서 아래로 내려오는 녀석들인데, 철은 대체 어디서 구하는 걸까?
몸을 반시계방향으로 회전하며 피한다. 대도라 쓰고 몽둥이라 불릴 그 쇳덩이가 내 가슴 앞을 스쳐지나갔다. 아슬아슬했다. 하지만 그만큼 나에게 기회가 왔다. 무방비인 오크의 상체가 내 검의 사정거리 안에 있다. 오크의 왼쪽으로 빠져나가며 오크의 가슴과 팔을 벤다.
촤아악.
“크아악! 죽인다!”
분명히 베었지만, 오크는 그 한 번에 죽지 않았다. 내 힘과 기술, 둘 다 부족했다. 오크의 살가죽은 두꺼웠고, 오크의 체력과 무식함은 더욱 대단했다. 방금 전의 칼부림은 생채기 정도일 것이다.
조금 더 시간이 있었다면 생채기가 아니라 상처를 낼 수 있었겠지만, 거기서 더 지체했다간 오크의 반격이 이어져 내 사지 중 하나가 잘렸을 가능성이 높았다.
소리를 지르며 몸을 돌리는 오크에게 다시 달라붙었다. 맘 같아서는 멀리 떨어져서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싶지만, 성벽은 좁았고, 도망갈 공간은 없었다. 달라붙어서, 빈틈을 노려서, 쓰러질 때까지 공격하는 수밖에 없었다. 성벽에 올라오기 전에 해결하는 게 상책이지만, 이미 올라온 건 시간을 두고 공략해야만 했다.
털썩.
10번을 베이고 나서야 오크가 쓰러졌다. 종이 한 장 차이의 공방이 10번이나 이어진 거다.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음에도, 또 땀으로 도배를 한 것 같았다. 옆에서 도와줬다면 좀 더 쉽게 이겼겠지만, 저마다 올라오는, 또는 올라온 오크를 상대하느라 남을 도와 줄 여유가 없었다.
‘……무서워, 무서워, 무섭다고!’
요한의 반응은 자연스러운 거였다. 쇠몽둥이가 눈앞에서 휙휙 지나가는데, 오크가 살의를 가지고 덤벼드는 데 침착함을 유지한다는 게 더 이상하다. 나야 공허를 마주하면서 기른 평정과, 죽어도 죽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침착하게 상대할 수 있는 것뿐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오크의 기세에 눌리고, 크게 피하고, 공격할 기회는 얻지 못하고, 이어지는 공격에 몸 어디를 내어준 다음에 그 고통에 울부짖고, 그리고 죽었을 것이다.
‘좀 조용히 해! 안 죽어!’
그러나 머리로는 이해해도, 감정적으로는 짜증날 뿐이다. 말은 쉽지만, 나를 죽이려도 드는 생명체, 나랑 비슷한 크기의 생명체를 상대하는 게 쉽지 않다. 쇠붙이를 들고 있는데 그게 쉽겠는가? 한 마리, 한 마리를 죽일 때마다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것 같다. 특히나 성벽에 올라온 오크를 처리할 때는 더 그렇다. 거기에 징징대는 요한의 생각이 들려오면, 짜증이 날 수밖에 없다.
‘……흐익, 흐윽.’
내 호통에 반응 하는 건지, 요한의 생각이 다시 잠잠해진다. 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다시 징징대겠지.
이 몸의 주인은 익숙해질 생각이 없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나는 이미 몇 번이나 이 전쟁을 경험하고 있지만, 요한의 입장에서는 언제나 처음일 뿐이니까.
죽어도 살아나는 건, 나 밖에 없으니까.
긴장을 풀 새도 없이, 다시 몸을 움직여 성벽을 올라오는 오크를 막아섰다. 그 날은 30여 마리 정도를 죽였다. 마지막은 멀리서 날아온 돌덩이였다. 투석기로 쏘아 날리는 건 아니었고, 성벽 아래에서 오거가 오크만한 돌들을 성벽으로 던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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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