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다음날, 학교 정문 앞.
이걸 첫 데이트라고 해야 하는 건가? 하지만 첫 데이트 장소가 학교라니. 우리가 그냥 서로를 알아가는 사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그러나 사전에 내가 어느 학교에 다니는지 알고 있었다면, 예지의 선택에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우리 학교는 소위 말하는 명문대니까. 고등학생이라면 한 번쯤 와보고 싶겠지. 물론 그녀도 여러 번 들어와 봤겠지만, 내가 같이 있으면 학교 학생만 들어갈 수 있는 곳에 들어갈 수 있으니까.
원래 알고 있었던 걸까?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어제 내가 처음으로 우리 학교이름을 말하며 이쪽으로 오라고 했을 때도 아무런 반응이 없어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다. 보통이라면 놀라면서 우와, 거기 다니셨어요? 라고 할 법한데, 그냥 덤덤하게 ‘알겠어요. 거기서 봐요.’가 끝이었다. 이건 사전에 알았든지……, 내 학교 따윈 밥으로 보고 있는 거다.
그런데 그러면 굳이 여기에 올 필요가 없잖아? 명문대라봐야 건물만 크지, 볼 게 하나도 없다. 수업에 참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참관해 봐야 배울 것도 없다. 요즘의 대학은 등록금 끌어당기는 블랙홀이라, 빨아들이기만 하고 뱉어내는 게 없다. ‘진리의 상아탑’이란 이름이 울고 있는 게 틀림없다. 정말, 최악이다.
사전에 알았다면, 그녀가 나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이거였을까? 명문대를 다녀서? 하기야 고등학교 때는 상위 세 개의 학교에 대한 동경이 있다. 고등학교에서 최정점인 사람들만 갈 수 있는 곳이니까. 그녀가 그런 이유로 나를 좋아했을 것 같진 않지만, 가능성은 충분한 이야기다.
그러나 그런 것도 다 고등학교 때까지다. 청년취업이 심각한 요즘은, 명문대 나왔다고 해서 앞길이 탄탄대로 인 것도 아니다. 여전히 세 개 학교를 묶어 부르고 있지만, 그 아래 대학들과의 차별화는 거의 없어졌고, 결국 개인의 노력, 아니 회사의 마음이 모든 것을 좌우하게 된다.
그러니 그런 환상을 가지고 나를 좋아하기 시작한 거라면, 유효기간은 대학 입학할 때까지다. 입학하고 나면, 현실을 알게 될 테니까. 하지만 그것도 이 학교나 혹은 그 이상의 학교에 입학해야 되는 거 아닌가? 라고 생각해보지만, 그녀는 충분히 여기나, 이 이상의 학교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분위기였다. 예전에는 무늬만 모범생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었지만, 요즘은 안 그렇다. 말하는 깊이가, 분명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의 모양새였다.
취업하니까, 어느새 취업에서 멀어졌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학교 공부를 게을리 하지는 않았다. 부모님이 성적을 보고 계시고, 나는 아직 그분들의 경제적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지만 마음은 이미 훨훨 떠나 있었다. 취직에 대한 걱정이 아예 없어졌다. 원래 일학년은 그런 생각 안 하려고 했고, 그냥 맘껏 게임이나 하며 지냈지만, 그래도 한 구석에는 걱정이 남아 있었다. 다른 애들은 1학년 때부터 스펙이니 뭐니 하면서 준비하니까. 그런데 지금은 그런 걱정 자체가 사라졌다.
바로 퀘스트 때문이다.
퀘스트가 시작되고 나서부터 내 삶은 퀘스트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삶에 큰 변화는 없었지만, 내 모든 고민들을 가지고 들어가 버린 것이다.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무료한 삶.
삶은 무료했다. 정해진 길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된다. 실패할 수도 있지만, 다시 도전하면 그만이다. 새로운 길을 개척한다든가 하는 일은 거의 없다. 멋대로 하지도 못한다. 부모님이 걸리고, 가족이 걸리고, 내가 걸린다. 기본적으로 편하게 살고 싶어 하는데, 그 틀을 깨기가 힘든 것이다.
하지만 퀘스트는 달랐다. 진짜 죽을 위기에 처해보니 편하게만 살 수가 없었다. 자유롭게 하고 싶지만 손에 피를 묻히게 되니 그 무게와 기쁨을 알게 되었다. 중요한 건 재밌다는 거다. 일탈이란 게, 나만 간직한 비밀이라는 게, 무언가 특별한 일을 겪고 있다는 게 너무 즐거웠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퀘스트는 내게 힘을 주었다. 라이트닝 소드와, 헬 파이어라는 힘을. 그 힘, 현대사회에서 함부로 사용할 수 없지만, 그것만으로도 내 태도가 달라졌다.
자칭 타칭 프로게이머라고 불리는 게임 폐인. 공부는 잘했지만 그것뿐이었다. 남자로서의 힘, 그 본능적인 힘에 대해서는 늘 주눅 들어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대학교에 들어오고, 성인이 되면서 어느 정도 극복되긴 했다. 필요한 힘의 종류는 달라졌고, 그런 힘에 가까이 있는 것을 손에 넣었으니까.
그래도 원초적인 힘에 대한 갈망은 늘 있었다. 그것 때문에 굳이 운동을 하거나 격투기를 하는 건 웃긴 일이었지만, 그 힘이 생기자 신기하게도 태도가 달라졌다. 당당해졌다고 해야 하나? 남에게 해를 끼칠 생각은 없지만, 누가 나에게 해를 끼치려 하더라도 주먹으로든 법으로든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그렇게 된 거 같았다.
그리고 이 검술, 이걸로 돈을 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라이트닝 소드에는 검술만 들어 있는 게 아니었다. 근육을 만드는 방법, 유연성을 기르는 방법, 간단한 체술까지, 모든 방법이 들어가 있었다.
그 모든 방법이 내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몸에 익히는 건 아직 이었지만, 정보는 언제라도 명확하게 꺼내올 수 있었다. 이걸 사람들에게 운동 삼아 가르치면 되지 않을까?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라이트닝 소드 레벨이 어느 정도 오르고 나서 세계 검도 대회 같은 데라도 나가서 유명해지면 그 뒤는 도장이라도 차리고 먹고 살 수 있지 않을까.
그게 아니라도, 앞으로 얻을 수 있는 능력 중에 내 취직을 한 방에 해결할 수 있는 쌈빡한 기술이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니 내가 지금 취업에 눈이 돌아가겠는가?
그리고 그보다 더 내 정신을 빼앗아 가버린 존재가 지금 저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연한 노란색을 베이스로 갈색과 남색이 섞인 원피스에 빨간 니트 가디건. 검정색 스타킹에 굽이 있는 구두. 거기에 웨이브가 살짝 들어간 가슴까지 내려오는 갈색 머리카락.
어제만 해도 검은색 머리카락을 머리 뒤에서 질끈 묶고, 동그란 철테 안경을 끼고, 근처에 자주 보이는 교복을 입은 평범한 여고생이었다. 그것도 치마는 펑퍼짐하고, 큰 가방을 메고 있어서, 제대로 쳐다보지 않으면 예쁜 줄도 모르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확 바뀌었다. 옷차림은 러블리했고, 안경테의 감옥에서 벗어난 그 눈도 역시나 사랑스러웠다. 살짝 들어간 웨이브가 그 사랑스러움을 증폭시켰다. 그것만 해도 주위의 남자들이 다들 한 번씩 쳐다보는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옷으로 숨길 수 없는 볼륨감과 검은 스타킹에 감싸인 쭉 뻗은 다리가 또 한 번 남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각선미가 너무나 뛰어나서, 지나가던 여자들도 한 번씩 쳐다볼 지경이었다.
사랑스러움과 섹시함,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은 차림이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 두 마리가 어떻게 한 몸에 공존할 수 있지? 그러나 눈을 씻고 봐도 분명히 공존하고 있었다. 얼굴 부근을 보고 있으면 한 없이 사랑스러운데, 조금만 시선을 내리면 금방이라도 나쁜 놈이 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신기하게 그게 전체적으로 어울렸다.
처음에는 그게 예지인 줄도 모를 정도로 보고 있다가, 그 눈이 나를 보고 웃는 걸 보았다. 그제야, 그 웃음을 보고서야 눈이 휘둥그레질 미인, 포샵질을 많이 한 것 같은 미인이 예지인 줄을 깨달았다.
어쩐지 부끄러워 얼굴이 뜨끈해졌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내 입이 쭈욱 하고 벌어지는 걸 막지는 못했다. 나, 로또 맞은 기분이야.
“밖에서는……, 처음이네요. 안녕하세요. 강 민씨.”
왜 그렇게 격식을 차릴까 하는 생각도 잠시, 그녀의 눈에 보이는 장난끼에 나도 자연스럽게 반응했다.
“안녕하세요. 전예지양.”
“어머나, 제 이름은 어떻게 아셨어요?”
“그쪽이야 말로요.”
“그럼 오늘은 어떻게 할까요?”
“일단 가볍게 걸을까요?”
그렇게 말하고 손을 정중히 뻗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제는 희미한 베르트랑의 기억에서 가져온 자세였다. 어색한 자세고, 길 한 중간에서 취하긴 부끄러운 자세였다. 하물며 사람들이 마구 다니는 대학 안에서야. 그러나 모든 걸 잊고 갑자기 하게 된 연기에 몰입했다. 그녀의 존재가, 나를 그렇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손, 부드럽고, 가늘고, 아름다운 손이 내 손 위에 살포시 얹혔다. 찬 공기를 밀어내고, 따스한 온기가 내 손을 감쌌다. 천천히 일어났다. 그녀의 얼굴이 내 앞에 있었다. 우리의 두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동자가 웃고 있다.
“쿠쿡.”
나도 웃었다.
“푸하하.”
“쿠쿠쿠쿡.”
일련의 행위들로 인해서 주변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바쁜 대학생이라 대부분은 그냥 지나쳤지만, 그 중에는 뭔 일인가 하고 스마트폰부터 들이대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나와 예지는 그런 거 아랑곳하지 않고 웃었다.
너무 즐거웠다. 예지랑 나는 처음부터 너무 잘 맞는 것 같았다.
+ + +
니트 가디건은 올 하나하나가 손가락 굵기는 되어 따뜻하게는 보였지만, 카라도 없고 후드도 없는 거라 목이 추워 보였다. 다리 쪽도 추워 보이긴 마찬가지였지만, 저 쪽은 내가 모르는 비장의 무기가 있겠지. 기모 스타킹이라든가.
“안 추워?”
“네, 괜찮아요. 낮에는 아직 햇볕이 따뜻하잖아요. 그리고 추우면 어제처럼…….”
어제는 돌아갈 때 추워 보여서 내 겉옷을 빌려 주었다. 외간 여자에게 해보는 건 처음이었는데, 심장이 쿵쾅 거려서 난 추운 줄도 몰랐다. 큰 옷에 후드를 뒤집어쓴 예지도 귀여웠지만, 내 냄새가 배긴 옷을 입고 있다는 점이 심장을 뛰게 만들고, 머리가 회전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예지의 향기가 나는 내 옷을 돌려받았을 때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그게 어제의 일이었다. 심장에 상당히 안 좋은 일이었지만, 예지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해줄 수 있다. 까짓것, 죽고 다시 살아나며 되지……. 아, 지금은 퀘스트 중이 아니었지.
“그건 그렇고, 오늘도 예쁘다. 어제도 예뻤지만, 오늘은 더 예뻐.”
“갑, 갑자기…….”
“눈부셔서 내가 옆에 서 있지 못할 정도야. 내가 너무 꿀리는 데?”
“아니에요. 오빠도 멋져요. 빈말이 아니라, 진짜 멋져요.”
조금 전까지 부끄러워 한 사람이 맞는지, 열과 성을 다해서 내가 멋지다고 하는 예지. 청바지에 녹색 자켓을 대충 껴입은 내가 멋지면 얼마나 멋지겠는가. 저게 다 콩깍지가 쓰여서 그러는 거다. 그런데, 그 말에 너무 기분이 좋아진다. 내 얼굴은 아까부터 그냥 헤벌쭉 상태다.
“염색은 또 언제 한 거야?”
“오전에요. 학교에 잠깐 들렸다가 바로 했어요. ……어때요?”
“예뻐. 진짜로 예뻐. 검은 머리도 예쁘지만, 이 색도 진짜 예뻐. 웨이브도 예뻐. 다 예뻐.”
“그, 그만 띄우세요. 얼굴 터질 것 같……으니까요.”
이제, 뭘 해도 귀엽다. 사랑스럽다. 비싸게 주고 한 머리 같지만, 손이 제멋대로 올라가서 헝클어뜨렸다. 그래도 예지는 예뻤다. 예쁘다 라는 말을 하루 종일 해도 모자랄 것 같았다. 이건 너무 팔불출인가?
“간지러워요. 오빠.”
예지가 다시 고개를 들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만하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그녀가 웃었고, 나도 웃었다.
+ + +
“학교는 어때?”
“예뻐요.”
“빈말은, 공사 중인 학교가 뭐가 예뻐.”
“그래도 곳곳에 나무도 많고, 기념관도 예뻤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예뻤어요.”
“그러고 보니 그렇네. 예지가 예쁘니까, 그리고 예지가 학교에 있었으니까, 학교도 예쁜 거네. 인정.”
“우웃, 그게 무슨 논리에요.”
“아니, 예지가 예쁘다고.”
“그만 좀 하세요. 벌써 몇 번째인지 아세요? 세 자리는 넘게 들은 것 같아요.”
그랬나? 그래서 그런지 이젠 예쁘다는 말을 해도 반응이 없었다. 그래도 귀여운 걸 보니 나 진짜 중증인가 보다.
“그래서 싫어?”
“싫지……는 않아요.”
또 부끄러워한다.
“예쁘다.”
“아, 진짜, 진짜, 진짜.”
흥하고 고개를 돌려 조금 앞으로 나갔다. 하지만 내가 묻자 바로 돌아본다.
“근데 과 같은 건 정했어?”
“네, 신소재공학과로 갈 거예요.”
“공대?”
“안 어울려요?”
“아니, 생각해보면 넌 안경소녀였지. 어울리지 않는 건 아니네. 지금 모습에서는 연상이 잘 안되지만. 너 입학하면 공대 여신 소리 듣겠다.”
우리 과에 여신 소리 듣는 애도 예지에 비하면 훨씬 떨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왜? 이렇게 예쁜데.”
“…이건 데이트 전용 복장이라, 학교에서는 꾸밀 생각 없어요.”
“너, 솔직히 말해 봐. 이게 처음 사귀는 거 아니지?”
“맞거든요. 오빠나 말해 봐요. 처음 사귀는 거 맞아요? 그런데 예쁘다는 소리가 그렇게 막 튀어 나와요?”
“나는 사실을 말한 것뿐이다.”
“그 태도, 그게 얼마나 여자를 가, 가슴 뛰게….”
또 빨개졌다. 오늘만 해도 예쁘다는 소리 그만하라고 몇 번이나 들었는데, 사실은 기뻤나 보다. 많이 해줘야겠다. 일단 진정 좀 시키고.
“너는 왜 그렇게 혼자 무덤을 파.”
“다 오빠 때문이에요.”
꿈같은 대화다. 예지를 두고 꿈꿨던 건 아니지만, 여자 친구와 함께 이런 대화, 알콩달콩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여기가 학교라는 것도 안 믿긴다. 갑자기 퀘스트 메시지가 떠도 아무런 이상이 없을 것 같다.
그런 내 눈에, 저 멀리 지나가는 사람이 보였다. 금발 머리의 여성이었다. 예쁘기도 예뻤지만, 그것 때문에 내 눈에 들어온 건 아니다.
“오빠?”
“잠깐만.”
예지를 두고 그 여자를 쫓았다. 뛰다시피 걸었기 때문에 바로 여자를 따라잡았다.
“저기요.”
“네?”
내 말에 그 여자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얼굴에는 이유 모를 웃음이 맺혀 있었는데, 그 표정을 보는 순간 확신에 찼다.
“아…….”
“왜 그러세요?”
“아, 죄송합니다. 아는 사람이랑 비슷해서요. 그런데 아니네요. 제가 착각했나 봐요.”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그럼!”
착각한 게 아니다. 분명 내가 본 그 사람이 맞았다. 문제는 그 사람이 현실에서 본 사람이 아니라는 거였다.
왜, 로젤리나가 우리 학교에 돌아다니고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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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