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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개의 퀘스트-23화 (23/160)
  • 23화

    왜일까? 물론 알 수 없다. 내 상상력이 빈약해서 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이건 신과 같은 초월적 존재가 꾸민 일이 아니라, 내 상상력이 만들어낸 환상이란 거지. 그러니 소스가 모자라서 예지의 얼굴이 나오질 않나, 사장의 목소리가 나오는 거 아닐까? 목소리뿐만 아니라, 그 얼굴도 비슷할 수 있다. 몸매는 여기서 봐도 확연히 다르지만.

    몸이 절로 움직였다. 성문까지의 장애물들 사이를 지나고 뛰어넘어다. 요한은 겁쟁이였지만 달리기는 잘했다. 금방 오거의 아래에 도달했다. 그 혼자서 성문을 막는 게 쉬워 보이지 않았다……라는 건 핑계고,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 내가 오거의 시체를 밟고 서자 그가 올라오는 오크들을 베며 나를 돌아보았다.

    “내려가! 내려가서 병사들을 불러 모아! 아직 막을 수 있어!”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돌리며 그에게 날아오는 화살 다발을 검으로 쳐냈다. 빈말은 아닌 모양이다. 나도 그럴 거라 생각했다. 오거를 한 방에 쓰러트리는 실력자가, 아직 이 정도로 쓰러질 리 없겠지. 적어도 두 시간 이상은 끄떡없을 것이다. 그보다 잠깐 스친 그 얼굴에서 사장을 보았다. 투구 때문에 전체를 볼 수는 없었지만, 눈, 코, 입을 보는 것만으로도 확신했다. 사장보다 늙은 중년의 얼굴이었지만, 분명 사장의 얼굴이었다.

    예지 하나는 그냥 넘어갈 수 있었다. 실제로 그냥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갔다. 그 일 때문에 예지에 관한 호감도가 오른 건 사실이지만, 예지가 이 일련의 퀘스트와 무슨 관련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우연이겠거니 했다.

    하지만 사장까지 이렇게 나온다는 건, 예지와 사장 모두 이 퀘스트에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게 어떤 방식이든 말이다. 초월자가 재미로 나를 가지고 노는 것이든, 예지와 사장이 나를 속이고 있는 것이든, 내가 혼자서 꿈을 꾸는 것이든.

    이성적으로 마지막 경우가 가장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난 당장 정신병원에 가봐야 되지 않을까 싶지만, 초월자가 나를 택해 무슨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그쪽이 더 정상적이다. 그러나 심정적으로는 초월자가 개입했다고 느낀다. 그렇지 않고서는 ‘공허’를 그렇게 현실적으로 그려낼 수가 없다.

    “빨리 움직이지 않고 뭐하나!”

    사장, 아니 클라크 패러스가 내게 달려드는 오크를 베어 넘기며 소리쳤다. 그 말대로 여기서 물러나려고 했다. 클라크의 얼굴이 사장과 비슷하다는 걸 확인했고, 이 위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그런데 그 순간, 저 멀리서 천둥소리가 들렸다. 뭐지?

    생긴 건 코뿔소와 비슷했다. 아직 1km는 넘게 떨어져 있어 보이는데도 그 생김새가 눈에 똑똑히 보였다. 그만큼 컸다. 가까이 다가오면 성벽 높이는 될 듯했다.

    쿵! 쿵! 쿵!

    그 발이 땅을 디딜 때마다 연약한 땅이 비명을 지르며 갈라졌다. 그 여파가 아직 멀리 떨어진 성문까지 전달되어, 내 발 밑의 오거를 흔들고, 내 몸을 휘청거리게 했다. 그 크기 때문에 뒤뚱 거리는 것 같긴 하지만, 실제 속도가 매우 빨랐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고, 정말 성벽만한 몸체가 눈앞으로 돌진해왔다.

    그 앞을 막고 있던 오크들이 부랴부랴 길을 내주었다. 미리 약속된 게 아닌 듯, 그들의 움직임은 엉망진창이었다. 코뿔소에게 밟히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집채만 한 뿔이 성문을 정확하게 노렸다.

    클라크는 당황하고 있었다. 요한의 기억에도 저런 생물은 없었지만, 그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게다가 아예 손쓸 방법이 없어 보였다. 그러니 지금 멍하니 서 있는 거겠지.

    “……뭐냐, 비켜라, 오거 아래로 내려가면 살 수도 있겠지만, 여기 있으면 무조건 죽어.”

    아까의 노기 찬 목소리와는 다른 힘 빠진 목소리가 내 뒤에서 들려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정면에,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뿌리며 다가오는 뿔이 보였다.

    그에게는 방법이 없겠지만, 나에게는 방법이 있었다. 바로 이것.

    [헬 파이어 lv.0]

    아직 한 번도 써보지 못해서 그 위력은 잘 모르겠다. 대인용인데 저런 성만한 놈에게 통할지도 의문이다. 그래도 명색이 지옥의 불꽃이면 어느 정도 타격은 입힐 수 있겠지. 그리고 그러지 못하면 이 퀘스트는 가망이 없다.

    두 손을 가슴 위에 모으고, 주문을 외웠다. 정체불명의 언어로 된 주문이지만, 외우고자 하니까 입이 저절로 움직여 내가 처음 들어 보는 소리를 냈다. 가늘고 길며, 빠른 소리가 이어졌다. 클라크도 내 주문을 들었는지, 내려가란 소리는 멈추었다. 주문에 더욱 집중했다. 서 있는 곳은 전쟁터 한 가운데고, 눈앞에서 나보다 더 큰 뿔이 오고 있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이런 것쯤, 공허에 맞서며 버티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약 1분 여 동안 뜻 모를 주문을 외우고 나니, 내 손 사이에 뜨거운 기운이 모였다. 손을 뻗으며 그것을 10m 앞까지 다가온 뿔, 너무 가까워 이제 울퉁불퉁하고 거친 표면만 보이는 그 벽을 향해 쏘아냈다.

    기운은 내 손에서 떠나자마자 붉은 불꽃으로 변했고, 거기서부터 붉은 불꽃 수십 개가 뻗어 나와 벽을 향해 날았다. 뻗어나간 불꽃들은 불규칙적인 궤도를 그리며 벽, 뿔에 부딪혔고, 부딪히자마자 폭발했다. 폭발은 지우개로 지우듯 뿔을 지워 버렸고, 뿔의 뾰족한 부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그 폭발 면에 내가 쏘아낸 붉은 불꽃, 용암처럼 점성이 있어 보이는 불꽃이 닿았다.

    화라라라락.

    불꽃은 뿔의 작은 면적, 내 손바닥만 한 면적에 닿았을 뿐인데, 한 번에 코뿔소의 전신으로 옮겨 붙었다. 그리고 계속 타올랐다. 누가 그 몸에 기름을 뿌려놓은 것도 아닌데, 불은 꺼질 줄을 몰랐다.

    불꽃을 쏘아냄과 동시에 온 몸에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공허와 마주했을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한참 동안 수련했을 때보다는 힘이 들었다.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이대로 무릎에 힘이 풀려 주저앉는 게 기정사실처럼 여겨졌다. 여기서 주저앉으면 오거의 등을 미끄러져 내려가 오크들 사이에 떨어질 텐데도,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주저앉기도 전에 코뿔소의 뿔이 내 몸에 닿았고, 나는 그 순간에 하늘로 날아갔다. 불도 옮겨 붙었지만, 불에 의한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뿔에 닿은 순간 즉사로 처리된 모양이었다. 내 귀에 코뿔소의 몸에 성벽이 무너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 + +

    통한다. 통하기만 하면 그 다음은 어떻게든 할 수 있다. 몇 번이고 다시 도전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통하지 않았다면 정말 골치 아팠을 것이다. 약점을 찾느라 몇 십일을 보내야 했을지도 모르고, 라이트닝 소드의 필살기들을 쓸 수 있을 때까지 몇 년이고 이 퀘스트를 반복해야 했을 지도 모른다. 그건 정말 최악이다.

    이번엔 퀘스트의 대강을 확인했다. 목표도 알았고, 장애물도 알았고, 최종 보스로 짐작되는 생명체도 보았다. 클리어 방법도 대충 보인다. 바로 클리어하려 들면 일주일 안에 깰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지 않을 것이다. 이제 오늘 밤부터는 노가다에 들어가야 한다. 어디까지 올릴 수 있을지는 모라도, 라이트닝 소드 레벨을 올릴 수 있을 만큼 올려놓아야 한다. 성벽이라는 방패가 있고, 검이라는 무기가 있고, 오크는 제법 상대하기 쉬운 적이니,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다. 지겨워질 때까지, 혹은 숙련도 상승이 거의 일어나지 않을 지점까지 퀘스트를 반복해야지. 혹시라도 클리어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말이다. 내가 헬 파이어를 쓰지 않으면 클리어는 절대 불가능할 것 같지만, 또 모르지.

    그러고 보면 헬 파이어 숙련도는 어떻게 됐을까? lv.1로 오르기는 했을 테고, 혹시나 그 괴상한 생명체를 죽인 걸 좀 쳐주는 건 아닐까? 시간이 걸리긴 해도 분명히 죽었을 텐데, 그게 진짜 지옥의 불꽃이라면.

    [헬 파이어 lv.1 30.242%]

    오옷! 이 정도면 놀라운 수준 아닌가? 오크 세 마리에 라이트닝 소드가 28% 오른 걸 생각하면 별 것 아닌 거 같지만, 라이트닝 소드 lv.1과 헬 파이어 lv.1은 차원이 틀린 기술이니 그걸 감안하면 정말로 놀라운 수준이다.

    이렇게 되면 헬 파이어도 노가다를 좀 해야겠는 걸.

    + + +

    학교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과 좀 놀다가, 카페에 들어가니 바리스타 누님이 반겨 주셨다. 그런데 그 웃음이 평소보다 더 짙다. 그 입에서 나올 이야기가 뻔히 보였다.

    “민아, 축하해. 오늘부터 1일인 건가?”

    역시.

    “그런 거 아니거든요.”

    “그럼 뭐야, 걔 가지고 노는 거야?”

    그게 아니면 어떻게 바로 그런 말이 될 수 있는 겁니까, 누님.

    “그런 것도 아니에요.”

    “그럼?”

    다행히 이번에는 진짜 궁금하다는 게 느껴졌다.

    “일단 만나는 거죠. 예지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는 데 사귀긴 뭘 사귀어요. 걔도 나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을 테고……. 저희 아직 핸드폰 번호도 모른다니까요.”

    “으음, 그래, 그건 네 말이 맞네.”

    “그렇죠? 한두 번 만나다 보면, 서로에 대해서 알게 되겠죠. 그동안 가져온 환상이 아니라 진짜를 말이죠. 그럼 예지가 먼저 떨어져 나가지 않을까요? 걔는 솔직히 스트레스에 대한 반발로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았으니까요.”

    “그건 그럴 수도 있지만……. 네 마음은 어떤데? 잘해 볼 생각이 있어?”

    그 질문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어제의 일이었다. 성만한 크기의 코뿔소도 지우지 못한 어제의 일, 예지의 집 앞에서 보았던 그녀의 웃음. 솔직히 잘해보고 싶었다.

    “그러든 말든 무슨 상관있나요. 제 모습을 알고 나서 하는 결정에 제가 무슨 수로 막아요.”

    “그건 너무 이상적이야. 연애는 환상이라고, 진실을 아는 건 결혼해서 해도 늦지 않다고.”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죄다 결혼 후엔 이혼을 하는 거죠.”

    “에이, 너 걔랑 결혼할 생각으로 만나는 건 아니잖아.”

    “물론 그렇지만, 저는 저의 꾸민 모습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저를 좋아해 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그렇지 않으면 의미가 없잖아요?”

    내 말에 누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게 이상적이란 거야. 그리고 사랑은 서로를 위해서 변하는 거잖아? 그건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니니?”

    “제가 안 변하겠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저도 좋아하는 사람의 맘에 들기 위해 이것저것 하겠죠. 하지만 저만 변하는 관계나, 제가 먼저 저자세로 들어가는 관계는 싫어요.”

    누님이 잠시 말을 멈추고는 내 눈을 쳐다보았다. 나도 그 눈을 마주 보았다.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 회피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 깊은 눈을 보고 있자니, 다른 이유로 회피하고 싶어졌다. 누님은 입만 닫으면 참 아름다운 사람이다.

    “……아하, 알겠다. 너 걔한테 큰마음이 없구나?”

    그런가? 그렇게 되는 건가? 어제의 그 즐거움은 분위기 탓이었던 걸까? ……단지 그렇게만은 볼 수 없지만, 여기는 그렇게 넘어가자.

    “……뭐, 그런 셈이죠.”

    그러나 내 속마음을 꿰뚫는 비수가 등 뒤에서 날아왔다. 클라크 패러스, 사장의 목소리였다. 이제 출근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상처 받을까 봐서 지레 물러서고 있다거나.”

    “앗, 사장님, 그 말 다시 해주세요. 방금 뭐라고 하셨죠?”

    “상처 받을까봐서 지레 물러선 걸 수도 있다고 했는데?”

    “맞아! 맞아요. 그 말이 정확한 거 같아요. 민이 얘, 제가 보기엔 완전 푹 빠졌는데, 진실한 모습이니 뭐니 하며 지금 발뺌 중인 게 확실해요. 역시! 남자 마음은 남자가 잘 아나 보네요.”

    누님은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니라 거의 헤드뱅잉 수준으로 움직였다. 과한 긍정이었지만, 그만큼 사장의 말이 마음에 닿았다는 뜻이었다.

    “그런 게 아니야. 네가 연애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 거지……. 아니다. 이런 경우엔 상담 경험이 부족하다고 해야 하나?”

    “그러는 사장님은 상담 경험이 풍부하신 모양이네요?”

    “나? 나야 넘치지. 학교 다닐 때 내 별명이 카사노바였거든.”

    “진짜요? 으음, 그러고 보니 그럴 만도……. 솔직히 사장님 좀 괜찮아요.”

    막말을 잘하는 누님이지만, 사장에게는 저렇게 아부도 떤다. 아니, 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보기에 사장님은 동네 바보 형이지만, 누님이 보기엔 좀 다르게 보일 수도 있겠지. 누님의 나이가 20대 후반, 사장이 30대 초반이니 뭔가 공유하는 게 있을 것이다. 시대정신이라든가, 패션이라든가.

    “그렇지? 당연하지. 난데.”

    “호호호.”

    서서히 둘만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나도 생각에 잠겼다.

    나 역시 부정할 수 없었다. 사장의 말을 듣는 순간 본능적으로 알았으니까. 내가 지금 뒤로 빼고 있다는 걸.

    어쩌다 이렇게 됐지? 짝사랑에 실패한 경험이 나를 이렇게 만든 건가? 그래서 내가 모태 솔로인 건가…….

    “후우…….”

    딸랑, 딸랑.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 쉬는 순간, 카페의 문이 열리며 소리가 났다. 올 사람은 하나밖에 없었기에 나도 모르게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문 앞에는 역시 예상의 인물이 서 있었다.

    “수능 끝났어요!”

    예지가 환하게 웃으니까, 내 머릿속에 있던 쓸데없는 생각이 한 번에 날아갔다. 내가 빼고 있든지, 말든지, 아무렴 어때. 지금은 이 순간을 그냥 즐기자.

    “수고했어.”

    나도 마주 웃어주었다. 예지가 어제 말 한 걸 떠올리면서.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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