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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개의 퀘스트-22화 (22/160)
  • 22화

    첫째 날은 세 마리, 둘째 날은 다섯 마리, 셋째 날 다시 세 마리 정도를 잡고 나자, 메시지가 떴다.

    [축하합니다. 고된 훈련의 결과로 라이트닝 소드가 lv.1에서 lv.2로 올라갑니다.]

    [현재 숙련도 라이트닝 소드 lv.2 0.1034%]

    레벨 2가 된다고 크게 바뀌는 건 없었다. 검의 움직임이 조금 더 빨라졌고, 편해졌다는 것 정도? 덕분에 셋째 날은 다섯 마리를 돌파해 열 마리의 오크를 죽일 수 있었다. 그런 후에는 또 눈 먼 화살에 맞아 죽어 버렸지만.

    그게 오늘 아침까지의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제 4번째로 들어가게 된다.

    [퀘스트를 깨고 보상을 받으세요! 100개의 퀘스트를 깰 수 있다면 당신은 이 세상의 영웅이 될 것입니다!]

    [마음의 준비가 되셨다면 ‘시작’이라고 말씀해 주세요. 세 번째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늘 보던 메시지를 보면서 ‘시작’이라고 말하려 하다가, 잠시 멈췄다. 라이트닝 소드의 레벨을 올릴 수 있으니, 이렇게 무작정 도전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어제와 오늘은 그 달콤함에 빠져서 퀘스트를 진행했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반복 작업을 할 수는 없었다. 40일의 반복을 한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만, 그건 그게 길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지, 아무생각 없이 몸을 놀린 건 아니었다.

    그러니 이번에 들어가면, 기억을 뒤지든지 해서 일단 퀘스트의 목적부터 알아내야 한다. 첫 오크를 죽이고 다음 오크를 죽이러 가는 대신에 성 아래로 내려가는 거다. 그러면 차분히 생각할 틈이 생기겠지. 아니면 다른 이벤트가 벌어지거나.

    “시작.”

    “죽어라!”

    첫 번째 오크가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라이트닝 소드 레벨 2로는 이 상태에서 한 번에 벨 수 없었다. 여전히 자세가 완전히 무너져 있기 때문이다. 세 번이나 반복해서 익숙한 앞구르기를 시도했고, 다시 일어나며 오크를 성벽 아래로 밀어 버렸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싸우는 오크와 용병들 틈에서 밑으로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을 발견했다. 그쪽으로 움직였다. 중간에 용병 하나를 죽이고서 나에게 달려드는 오크를 만났지만, 요리조리 잘 피하고 성 안쪽으로 밀어 버렸다. 성벽의 높이는 약 10m, 즉사는 아닐지 몰라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의 중상을 입었을 것이다.

    계단에 도착해서 아래로 내려갔다. 계단도 복잡했다. 화살, 돌, 기름 등 각종 보급품을 올려다 나르는 아낙네와 병사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그들 사이를 역주행하는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바빠서 그런 건지, 아니면 탈영에 대해 관대한 건지, 군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그 덕에 그 이상의 방해 없이 성 아래로 내려왔다.

    “빨리, 기름!”

    “부상자도 대충 싸맸으면 다시 올라가! 어쨌든 버텨야 해!”

    “화살 더 없어? 서쪽에서 계속 부족하다고 연락이 와. 어디든 마찬가지지만, 서쪽도 뚫리면 끝장이라고!”

    성벽 아래도 성벽 위와 막상막하였다. 시끄러웠다. 절박했다. 여자,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들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에는 희망이 엿보였다. 생각해보면 성벽 위의 용병들도 그러했다.

    성벽 아래는 얼핏 봐도 만 단위 이상의 오크가 우글거리고, 성벽 위의 병사들은 천 단위 정도임에도, 그들은 절망하지 않았다. 이유가 뭘까. 기억이 내 물음에 답해 주었다.

    클라크 패러스.

    북방의 이 클라크 요새를 벌써 이십년 동안 지켜 온 명장이다. 요새의 원래 이름은 클라크 요새가 아니었지만, 그의 명성이 요새의 이름까지 바꾸게 만들 정도로 그는 유명했다. 그리고 그 이름처럼 이 요새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정평이 나 있었다. 그가 지키는 한, 10만 대군이 몰려와도 요새를 점령하지 못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었다. 요새를 기반으로 살고 있는 이들도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은 겨울. 여름동안 북쪽에서 엄청난 숫자로 불어난 오크들은 식량을 찾아 남쪽으로 내려온다. 남쪽도 겨울인 건 마찬가지지만, 동토인 북에 비하면 천국이다. 북방의 요새들은 그런 오크들을 막으려고 세워졌고, 매년 겨울마다 목숨을 건 공방전을 펼쳐야 했다. 이 클라크 요새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도 그 중의 하나였다.

    쳐들어 온 오크는 대략 10만. 지난 10년 동안 가장 많은 수였다. 클라크는 자신 있다고 했다. 믿어 달라고 했다. 10년 전, 15만의 오크도 물리쳤던 우리다. 모두가 힘을 합하면 오크 따위야 한 주먹 거리밖에 안 될 거라고 주민들을 독려했다. 주민들도, 나, 요한도 그 말을 믿었다. 우리에게는, 그에게는 그보다 더 큰 위험을 이겨낸 경험이 있었으니까.

    그래, 그건 믿고 있었다. 10만의 오크로 이 클라크 요새가 점령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분명 이길 것이다. 최후에 이기는 건 클라크 요새가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클라크 요새가 이기는 거지, 내가 살아남는 게 아니었다. 더군다나 나는 이제 겨우 15살. 올해 처음으로 전선에 나가는 것이다. 그 전에는 요새 안쪽에서 지원 업무만 했지만, 이번 전투에서는 성벽 위로 올라가서 싸워야 했다.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약초를 캐는 거 밖에는 모르는 내가, 검을 들고 오크를 베어야 하는 것이다.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한다 해도, 곧 눈 먼 화살에 죽고 말 것이다. 도망칠까 생각도 해봤지만,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오크가 우글거리는 요새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결국 이렇게 전투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세 번째 퀘스트, 클라크 요새를 지키세요!]

    요새를 지키세요라……. 예상했던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목표였다. 과거를 보고는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요새를 벗어나세요, 같은 게 나오면 어떻게 하나 싶었는데, 최악의 수준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기억 상으로는 나, 요한이 있든지 없든지 성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클리어가 안 되는 걸 보면 그게 아닌 건가? 아니면 요한이 살아 있어야 하는 건가? 겨우 두 개의 퀘스트를 했을 뿐이고, 두 번 다 퀘스트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 내가 움직일 수 있는 인물이 살아 있었으니까, 뭐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오래 살아남는 것.

    최소한 요새의 방어가 완료된다고 확신할 수 있는 시점, 혹은 요새가 무너지는 시점까지는 살아 있어야 한다. 그러면 클리어가 왜 안 되는 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내가 죽고 사는 것과는 관계가 없을 듯싶지만.

    그럼 다시 성벽 위로 올라가봐야 하나? ……라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그 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 볼 수 있긴 해도, 오래도록 버틸 수가 없었다. 밀려드는 오크들에 의해 죽거나, 화살에 맞아 죽을 것이다. 망루 같은 곳에 올라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곳까지 가는 길은 너무 험난하다. 가다가 죽을 확률이 더 높았다. 결과적으로 성벽 위에 올라가는 건, 지금까지와 같은 일의 반복일 뿐이다.

    그러니 아래에 있자. 이왕 아래에 내려온 거, 아래에서 모을 수 있는 정보를 모으고, 숨어서 전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자. 그러고 있다 보면, 무언가 더 알 수 있는 게 있겠지.

    + + +

    시계가 없으니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지만, 대충 5시간 이상은 흐른 것 같았다. 요새는 아직도 소란스러웠다. 전투는 아직도 진행되고 있었다. 밀리고 있는 쪽은 인간. 요새 아래에서 모든 걸 확인할 수는 없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성벽 위 오크들의 모습이 늘어났다. 올라오는 오크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곧 끝나지 않을까. 지금 내가 있는 곳은 북문이 환히 보이는 골목길이다. 문 앞에는 방책과 나무로 만든 거마창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지만, 오크 대군의 돌진을 막기에는 빈약해 보였다. 아무리 용을 써도, 저 문이 뚫리는 순간이 이 요새의 마지막 일 것이다.

    그 광경을 보기 위해 여기 서 있었다. 문이 열리는 순간, 혹은 문을 여는 데 쓰는 힘이 오크 군대가 가진 가장 큰 힘일 것이고, 그 힘의 정체를 알아야 요새를 지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 그 중에서도 왜 북문인가 하면, 소리를 들어보니 북문의 싸움이 가장 치열했기 때문이었다. 저 문 밖에 오크의 본대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콰아아앙!

    결국 성문이 깨졌다. 두터운 나무에 철판을 덧댄 문이었는데, 한나절을 못 버티고 깨진 것이다. 그 문 뒤에는 일반 오크의 5배는 되어 보이는 갈색 거인이 둘 서 있었다. 따로 충차 같은 걸 두지 않고, 저 거인 둘이서만 계속 문을 때리고 있었던 것 같다. 둘은 내 몸통만한 망치로 성문을 때리고 있었고, 한 번 때릴 때마다 성문이 부서져 안으로 접혔다. 아직은 그 구멍이 작지만, 저 거인, 오거만한 크기로 넓어지는 건 시간 문제였다. 30분도 안 걸릴 것이다.

    오거가 오크들의 비장의 카드인가? 하지만 기억 속에서 쉽게 그 이름을 발견할 수 있는 만큼, 오거의 등장은 특별할 게 없었다. 매년 오크들의 선봉에 서서 성문을 때리는 게 오거인 것이다.

    그런데 오거들이 비장의 카드가 아니라면, 비장의 카드는 어떻게 상대하지? 저 오거들만 해도 내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들 이다. 내 몸만 한 쇠뭉치는 스치기만 해도 온 몸을 으스러뜨릴 것만 같고, 멀리서 봐도 두꺼운 피부는 내가 벨 수 없어 보였다. 그래서 지금도 쳐다보고만 있지 않은가. 그동안 잠잠했던 요한도 다시 벌벌 떨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몸의 주인이 크게 감정적이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반대로 그렇기에 힘을 못 받고 있었다. 베르트랑의 분노, 파이레스의 의지는 퀘스트를 진행하는 데 긍정적인 효과를 주었다. 하지만 요한의 감정은 오히려 부정적이었다. 그의 두려움에 잘못 집중하면, 금방 투쟁심을 잃고서는 도망치고만 싶어진다.

    ‘……내가 저걸 어떻게 상대해…….’

    ‘…진정 좀 해. 너보고 싸우라고 안 하니까!’

    내가 요한과 실랑이 아닌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와중에, 성문은 거의 다 부서져 버렸다. 이대로 그냥 오크의 대군이 밀려들어오나 싶었는데, 성문을 막는 그림자가 하나 있었다. 공중으로부터 떨어져 내린 그 사람은 검으로 두 오거를 한 번씩 베었다. 닿지도 않아 보이는 그 공격에 두 오거는 맥없이 쓰러졌고, 그 큰 덩치가 다시 한 번 문을 막았다. 남자는 오거의 위에 착지했다. 그리고 외쳤다.

    “이 빌어먹을 오크 놈들아! 너희들의 뜻대로는 안 돼!”

    때 탄 갑옷과 큰 덩치, 특유의 장도. 그 외형만으로도 쉽게 알아 볼 수 있었다. 그는 이 요새를 수비하고 있는 클라크 패러스였다. 요한의 기억 속에 들어 있는 그는 개인의 무력이 뛰어나다기 보단 머리가 뛰어난 무장이었지만, 저 정도는 가볍게 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건 그렇고, 저 목소리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데? 언어가 다르고, 말의 뉘앙스가 달랐지만, 어쩐지 알 수 있었다. 저 목소리는 내가 들어본 목소리다. 그것도 한국어로.

    “내가, 너희들을 다 뭉개주마!”

    그가 장도를 휘두르며 오거 위로 뛰어올라오는 오크들을 베었다. 한 번 더 들으니까, 누구의 목소리인지 감이 왔다. 예지의 경우도 있고 해서 주위 사람부터 생각했더니 바로 알 수 있었다.

    이번엔 사장이냐…….

    ============================ 작품 후기 ============================

    겨우 2개의 퀘스트를 끝내고, 3개째 진행 중인데 벌써 22편... 이런 식으로 가다간 700편쯤 쓰게 되는 걸까요? ㄷㄷㄷ여러분의 작은 관심이 작가에게는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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