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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개의 퀘스트-21화 (21/160)
  • 21화

    분명히 세 번째 퀘스트를 하기 전에는 6% 밖에 안 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34% 다. 고작해야 2-3분여 만에 28%가 오른 것이다. 그 전에는 한 시간을 해야 겨우 0.02% 올랐었다. 비교할 수도 없는 수치다.

    왜 오른 걸까? 꿈속의 세계가 숙련도에 영향을 준다는 건 확실히 알겠다. 하지만 한 거라고는 고작해야 오크 세 마리를 죽인 거 밖에 없는데? 그것도 한 마리는 검을 쓴 것도 아니었다. 그냥 밀어 죽였을 뿐이니까.

    실전을 치루면 경험치가 쑥쑥 올라가는 건가?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건 그런 거지만, 그게 확실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오크를 죽이는 거 자체에 경험치가 높게 배분되어 있는 걸 수도 있지 않겠는가? 마치 게임처럼 말이다.

    아무튼 쉽게 숙련도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이 생겼다는 건 다행이었다. 숙련도가 아주 더디게 올라가서 고민하던 참이었으니까.

    그럼, 뭐가 어떻게 달라졌나 한 번 볼까?

    수련 때 사용하는 검을 침대 밑에서 꺼냈다. 검은 인터넷에서 산 거였다. 알아보니 취미로 서양 검술을 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고, 그 수련용으로 날 없는 검을 팔고 있었다. 그 중에 내 기억 속에 있는 검과 비슷하게 생긴 롱소드를 샀다.

    가격이 만만치 않았고, 따로 돈을 들여서 가공을 해야 했다. 게다가 가검이라도 도검소지증이 있어야 된다고 해서 신고도 해야 했다. 돈도 돈이고, 신경써야할 일이 제법 있었지만 감내했다. 취미라도 돈과 시간 투자는 기본인데, 라이트닝 소드야. 더 쓸 수도 있었다. 퀘스트는 단순한 게임이 아니었다.

    롱소드를 들고서 기수식을 취했다. 전보다 확실히 편했다. 머리의 기억과 비교하며 조정하지 않아도, 단번에 어느 정도 정확한 자세를 취할 수 있었다.

    “으윽.”

    하지만 육체는 그대로였다.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평소 수련할 때보다 훨씬 더 아팠다. 뭐랄까, 내 머리 속으로 생각하는 육체의 이미지와 실제 육체의 이미지가 다른 모양이었다. 꽤나 큰 고통에 절로 자세가 풀어졌다.

    대충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았다. 숙련도는 올라갔고, 내 검술은 좀 더 정교해졌지만, 현실의 육체는 여전히 이전 숙련도에 맞춰져 있는 것이다. 물론 그 간극은 이전보다 빨리 메워 지겠지. 한 번 걸었던 길이니까.

    쳇, 한 번에 적용시켜주면 좋을 텐데, 그렇게 쉽게는 안 되나 보다. 퀘스트 안에서도 수련, 현실에서도 수련을 하란 말이다. 이런 부분을 볼 때마다, 이게 게임이나 내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걸 공짜로 줄 수는 없다. 그런 이야기를 내게 하는 듯했다.

    좋아, 그럼 내 몸이 내 숙련도를 따라올 수 있도록 힘 좀 써 볼까?

    + + +

    “민, 이제 내일이면 수능이지?”

    “네. 수능이죠.”

    “그런데, 왜 걔는 요즘 안 보이냐?”

    “누구요?”

    “당연한 걸 뭘 묻고 그래, 그 여고생이지. 누구긴 누구야.”

    나도 알고 있다. 사장이 물어 볼 사람이 있다면 그건 하나뿐이니까. 바로 예지. 그의 말대로 그녀는 지난 3일 동안 카페에 나오지 않았다.

    “이제 수능이니까, 공부라도 하려는 모양이죠. 솔직히 여기서 공부가 그렇게 잘 될 리 없잖아요? 누가 맨날 놀리니까 말이죠.”

    “누가 놀린다고 그래? 솔직히 말해 봐.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니야? 이제 너한테 정이 떨어졌다든가.”

    겉으로 보기엔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예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왔었으니까. 하루나 이틀 정도의 공백이 크게 보일 정도니까.

    “그럴 수도 있겠죠. 사람 마음을 제가 어찌 압니까?”

    “넌 걱정도 안 되냐? 너 걔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무슨 걱정을 해요. 수능이 코앞인데, 그렇게 생각하는 게 더 이상하잖아요.”

    “쳇, 또 재미없어. 너 알아서 해라.”

    사장은 내 담담한 반응에 또 실망하고 스마트폰을 보기 시작했다.

    사실 나도 어쩌면 그런 사장이 원하는 반응, 의심하고, 걱정하며 호들갑을 떨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사람이지 않은가? 우리가 사귀는 사이는 아니지만, 거의 그에 근접해 있으니 말이다. 웬만하면 혼자서 상상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으려 하지만, 그럴 수도 있었다. 예지가 이 퀘스트와 어떤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후부터, 어쩐지 그녀에게 냉정하기가 힘들어졌으니까.

    그런데 4일 전, 마감하기 전에 예지가 와서 한 말이 있었다.

    ‘저 오빠, 남은 3일은 아무래도 여기 못 올 것 같아요. 이 카페에서 공부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어서요. 카페에 수십 권을 들고 올 수는 없어서……. 그러니까, 그것뿐이니까, 수능 끝난 뒤에 봐요. 그럼, 오늘도 수고하셨어요. 저는 먼저 가 볼게요.’

    우리 사이가 뭐라고, 그런 이야기를 할까. 저도 그런 생각을 한 건지, 그녀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붉어져 있었다. 그녀는 그 말을 마치자마자 가게를 나가 버렸다.

    그래서 지금 담담할 수 있었다. 공부하겠다고 했으니, 공부하고 있겠지. 사장이 옆에서 부추기는 것처럼 다른 상상은 들지 않았다. 그녀가 이런 걸 노렸다면 성공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생각하면, 난 그녀의 손 위에서 놀아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나도 나의 마음을 잘 모르겠는데, 그녀는 내 마음을 다 아는 것처럼, 오해를 하기도 전에 미리 오해를 풀어 주었다. 무서운 이야기다. 나란 인간은 벌써 그녀에게 다 파헤쳐지고 있는 건가? 매일 카페에 와서 하던 건 공부가 아니라 관찰이었던 건가?

    하지만 머리로만 그렇게 생각할 뿐, 마음으로는 그런 사실조차도 두근거리게 할 뿐이었다. 애써 담담한 척 하지만, 나도 수능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수능 전날인데, 오늘도 안 오려나? 마지막 날은 그렇게 붙잡고 있어봐야 들어오지도 않을 텐데……. 말 뿐이지만, 응원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카페로 오지 않으면 만날 방법이 없었다. 집을 아는 것도 아니고, 핸드폰 번호를 아는 것도 아니니까. 카페에서의 모습 말고는 아직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흐음, 이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진짜 좋아하는 것 같다. 어느 정도는 동의할 수 있지만, 이건 벌써 내 사람이 된 거처럼 생각하고 있는데?

    아, 몰라. 내일 시험이나 잘 치길.

    그날 저녁, 사장은 약속이 있다며 나가 버렸다. 그리고 시간이 좀 더 지나자, 가게를 닫을 시간이 되었다. 결국 예지는 오지 않았고, 손님도 하나도 없었다. 아무리 장사가 잘 안 되는 카페지만, 오늘처럼 한가한 날은 정말 손에 꼽을 만했다. 요 근래엔 예지가 매일 와서, 손님이 없는 날은 진짜 오랜만이었다.

    적당히 청소를 하고, 나갈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불을 끄고 나가는데, 다다다닥하고 뛰어오는 발소리가 있었다. 누구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겨울 운동복 차림의 예지가 뛰어오고 있었다. 운동복이라지만, 요즘 나오는 것들답게 운동하기에 편해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교복보다는 몸매가 더 드러나서, 순간 눈 둘 곳을 찾지 못했다. 결국 이리 저리 눈을 돌리다가, 시선이 멈춘 곳은 예지의 얼굴. 다급해 보이는 얼굴이 나에게로 빠르게 다가왔다.

    “예지야?”

    “하아, 하아. 다행히 안 늦었다. 후우우.”

    예지는 내 앞에 서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우선 반가웠다. 돌아보면 오늘은 하루 종일 그녀에 대한 생각밖에 안 했던 것 같았다. 수능은 내일이고,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는 하지만, 솔직히 조금 이상하긴 했다.

    “아직 안 잔 거야? 내일 수능이잖아. 괜찮아?”

    “후, 괜찮아요. 어차피 잠이 잘 안 와서…….”

    그 말은, 자려고 누웠다가 내 생각에 뛰쳐나왔다는 건가? 그렇게 밖에 해석이 안 되는데? 그러나 예지는 진짜 급하게 뛰어나온 건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르는 상태인 것 같았다. 이런 바보 같은 아가씨를 보았나.

    “준비는 잘 끝났어?”

    “아, 네, 다 끝냈어요. 오빠.”

    “그럼, 내일은 잘 쳤으면 좋겠다. 힘내. 가서 응원해 줄 순 없지만, 여기서라도 하고 있을 테니까.”

    “고마워요. 오빠. 그 말이 듣고 싶었어요. 오빠한테 응원의 말을 들으면 잘 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 말을 한 예지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안경테 안의 눈이 반달을 그린다. 그 모습을 보는데, 나도 모르게 진심이 나왔다.

    “예쁘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지금 침대에 누웠다가 나와서 얼굴이…….”

    그녀가 당황했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도 완전히 담담했다. 나 스스로 내가 너무 바람둥이 같은 거 아닌가 하고 생각하면서도, 말이 술술 나왔다. 이건 베르트랑의 영향인가?

    “그래도 예뻐.”

    진짜 예쁘다. 웃는 게 너무 예뻐. 침대에 누워 있다가 나온 게 사실인지, 그녀는 정말로 내추럴했다. 완전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 모습도 예뻤다. 아이라인이 가득 들어간 눈도 예쁘지만, 이것도 예뻤다. 아름다움은 하나가 아니니까.

    “고, 고마워요.”

    부끄러워하는 그 모습도 너무 귀엽고, 예뻤다. 그 말도 해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 말까지 했다간, 예지의 얼굴이 폭발할 것 같았다.

    “내가 데려다 줄게. 가자.”

    “아니, 안 그러셔도…….”

    “아니야, 가자. 지금이 몇 신데 여자애 혼자 다녀.”

    “이 근처라서 괜찮아요.”

    “나도 이 근처라서 괜찮거든?”

    “……알았어요.”

    “그럼 갈까?”

    시간은 열두 시, 8시간 후면 수능을 치게 되는 고3 소녀가 내 옆에서 걷고 있었다. 옆에서 걷고 있다고 하기에는 조금 사이가 벌어져 있었다. 부끄러운 가 보다. 하지만 그래서 그녀의 하얀 손이 너무나 잘 보였다.

    8시간 후면 수능을 치게 되는 고3이다. 그래, 지금은 그냥 고이 보내 드려야 되는 신분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8시간 후면 수능을 치게 되는 고3인데, 왜 그런 게 눈에 안 들어오는 걸까.

    한 걸음 옆으로 움직여서, 예지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 가녀린 손에 내 손을 포개었다. 그녀가 놀라며 손을 빼려했지만, 내가 좀 더 꽉 잡으니까, 잠잠해졌다.

    “…….”

    “…….”

    그 뒤로는 말이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채로 나를 집으로 인도하고 있었고, 나는 그 손의 온기를 느끼면서 고즈넉한 골목의 풍경을 즐기고 있었다. 매일 보던 건데, 오늘따라 더 특별해 보였다. 특히나 가로등 아래의 예지가 너무 예뻤다. 그리고 그녀가 방향을 꺾어야 해서 내 손을 당길 때가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별일 아닌데, 진짜 별일 아닌데, 진짜 기분 좋다.

    이게 여자 친구가 생긴다는 건가? 아직 여자 친구는 아니지만.

    실제로는 5분도 되지 않을 짧은 거리였다. 그런데, 그 시간이 정말 길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지루한 게 아니라, 그냥 너무 기분이 좋아서, 행복해서 그렇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 시간이 끝나자 너무나 아쉬웠다. 그 손을 놓기가 아쉬웠다. 그렇지만 놓아야 했다. 예지는 내일, 아니 8시간 후면 수능을 쳐야 하는 고3이니까. 그런데, 이러다 망하면 어쩌지.

    “……아.”

    손을 놓는데, 그녀의 입에서 탄식이 나온다. 그녀가 내뱉고는 자신이 놀란 모양이다. 황급히 손으로 입을 막는다. 그 모습도 너무 귀여웠다. 내 스트라이크 존에 정중앙으로 들어와 버렸다. 내 심장이 쿵하고 떨어졌다. 오늘 몇 번이나 떨어졌는데, 아직도 떨어질 게 남아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들어가. 내일 카페에 올 거지?”

    예지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럼 내일 보자. 시험, 잘 봐. 파이팅!”

    “……네. 내일 봐요. 꼭이에요.”

    처음에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다. 조금 전의 말실수의 여파가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말을 하면서 목소리가 커졌고, 부끄러움에 숙였던 고개가 들렸고, 마지막엔 나를 똑바로 보면 환하게 웃었다. 할 땐 하는 여자다, 예지는.

    “웃으니까 진짜 예쁘다. 나 푹 잘 수 있을 것 같아. 빨리 들어가, 너도 이제 자야지.”

    “네. 이제 들어갈게요. 조심히 돌아가세요.”

    그녀는 마지막으로 나를 한 번 더 쳐다보았다. 그 눈이 무얼 얘기하고 있을까. 아쉬워하고 있다는 건 왠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도 아쉽지만, 참아야 했다. 쳇, 아아, 이래서 수능이 끝난 뒤에 시작했어야 했다고. 그랬어야 했는데……. 바보 같다.

    그녀는 짧은 눈 맞춤을 마치고는 후다닥 뛰어 들어갔다. 천천히 움직이면 더 아쉬울 것 같다는 말이 전신에서 나오는 듯했다. 그대로 들어가 버릴 것 같았던 그녀였는데, 그녀가 대문 밖으로 고개만 내밀고 크게 말했다. 조용한 골목이 완전히 찰 정도의 크기였다.

    “저도 오빠 웃는 거 좋아해요. 오늘 웃어주셔서 저도 푹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고마워요!”

    그리고는 한 번 웃고 쏙 들어가 버렸다.

    “…….”

    내 심장이 붙어있는 지 손을 들어 확인했다. 다행이다. 아직 있다. 살아 있길 잘 한 거 같아. 내일부터 더 웃어야지.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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