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개의 퀘스트-20화 (20/160)
  • 20화

    파이레스의 아내는 금발이고, 서구형 미인이고, 나이는 30대다. 예지는 검은 머리에, 동양인이고, 아직 10대다. 공통점이 전혀 없는 두 사람인데, 묘하게 닮아 있었다. 눈, 코, 입을 하나씩 떼어 놓으면 절대로 닮았다고 할 수 없는데, 모아 놓으니 ‘어라?’하는 느낌과 함께 ‘비슷한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퀘스트를 진행하는 동안에는 그 쪽에 신경이 다 가 있어서 그 유사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지만, 마음이 여유로워진 지금은 확실히 알겠다. 파이레스의 아내가 익숙했던 건, 예지랑 닮았기 때문이었다.

    “아, 안녕…… 하세요.”

    내가 계속 쳐다보니까, 예지가 완전히 들어오지도 못하고 문 앞에 서서 어정쩡하게 인사를 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인사를 받아 줄 생각은 않고, 계속 그녀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천천히 붉어지며 고개가 숙여지는 걸 보면서도, 무언가 해야 된다는 생각이 없었다. 머릿속은 왜 라는 의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왜? 왜? 왜? 왜 예지가 파이레스의 아내와 닮은 거지? 그냥 우연인가? 아니, 우연일 리가 없어. 내가 지나가다가 그의 아내와 비슷한 외국인을 만나면 우연이라고 할 수 있어. 그런데 예지는 아니야. 예지가 비슷하다는 건, 뭔가 있는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동양인이, 서양인과 비슷하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그럼 뭐지? ……모르겠어. 떠오르는 게 없다. 지금 확실히 감이 오는 건, 이게 우연이 아니라는 것뿐인가…….

    따악!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손이 절로 올라가 뒤통수를 붙잡았다. 아팠다. 그 동안 못 때린 걸 한 방에 담았는지, 정말 아팠다.

    “야, 손님 안 받고 뭐해. 너한테 예지가 손님이 아닐 진 몰라도, 이 가게에는 손님 맞거든? 그리고 넌 알바생이고.”

    내용은 화를 내거나, 비꼬는 거지만, 사장은 분명 즐거워하고 있었다. 눈이 반달을 그리고, 입 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내 뒤통수를 때릴 수 있었던 것이 그렇게나 기뻤던 모양이다.

    “으으윽, 들어와, 예지야. 아메리카노면 되지?”

    “네? 네.”

    예지가 내 말에 가게 안으로 들어와 그녀의 지정석, 구석 테이블에 앉았다. 얼굴은 여전히 숙인 채였다. 사장의 발언도 발언이지만, 내가 잘못했다. 내가 너무 뚫어지게 봤다. 나라도 부끄러웠을 것이다. 아직도 귀가 빨간 게 보이는데, 저래서 공부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재빨리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만들어 예지에게 가져갔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으면서 조그맣게 말했다.

    “아까는 미안, 잠깐 다른 데 정신이 팔려서. 공부 하는 거 잘 되길 바랄게. 그리고 수능 끝나면 보자.”

    “……네. 꼭이요.”

    조금 전보다 더 빨개진 얼굴로,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바라보았다. 이런 점은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매번 쑥스러워하고, 얼굴을 붉히기 일쑤지만 필요할 때는 용기를 낸다. 고백을 할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그녀는 아직 나와 잘 해 볼 마음이 있는 모양이다. 그 눈에서 그런 의지가 느껴진다.

    “그래. 그럼 우선은 공부에 집중해. 12년 동안 이것만 보며 한 거니까.”

    “네, 알았어요.”

    얼굴은 여전히 붉었지만, 상태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녀가 책을 펴고 펜을 쥐는 모습에서 그런 게 느껴졌다. 공부에 집중하고 있는, 평소의 그녀였다. 다행이다.

    카운터에 돌아오니, 사장이 나를 음흉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를 놀릴 기세였다.

    “후우훗, 너 뭐라고 했지? 뭐라고 한 거야?”

    “수능 끝나면 보자고요.”

    “오오옷, 대담한데?”

    “약속이니까요.”

    “뭐야, 그게 다야?”

    나의 단답과 아무렇지 않은 표정에 사장은 다시 실망해 버렸다.

    “뭘 원하시는지는 알겠지만, 그게 답니다.”

    “…그래, 애들 데리고 내가 뭐하는 짓 이래니. 나 이제 들어갈 테니까, 마감 잘 해.”

    “네, 알겠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게 다는 아니었다. 나는 계속 예지를 보았다. 사귀고 말고를 떠나서, 그녀는 내게 중요 인물이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이미 중요 인물이었다.

    + + +

    [퀘스트를 깨고 보상을 받으세요! 100개의 퀘스트를 깰 수 있다면 당신은 이 세상의 영웅이 될 것입니다!]

    [마음의 준비가 되셨다면 ‘시작’이라고 말씀해 주세요. 세 번째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어느새 세 번째 퀘스트. 잠에 들자마자 눈앞에 뜬 메시지에 마음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무슨 쉬는 날도 없어.

    이번 퀘스트는 상황이 한 눈에 들어왔다. 나는 성벽이라고 짐작되는 곳 위에 서 있었다. 주변에는 무기를 든 병사들이 많이 있었는데, 복장이 제각각인 걸로 보아 다들 소속이 다른 모양이었다. 아마 대부분은 용병인 듯했다.

    우리는 전투 중이었다. 상대는 바로 갈색 아인종들. 내 눈 앞에도 막 성벽을 박차고 내게로 날아오는 자세에서 멈춘 놈이 하나 있었다. 갈색 피부는 땀으로 번들거리고, 그 입은 침으로 번들거렸다. 이빨은 날카로웠고, 코는 완전히 뒤집어져, 돼지 코와 비슷했다. 눈은 날 잡아먹을 듯 부라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그 오른 손의 대도로 나를 쳐 죽일 것 같은 역동적인 모양새였다.

    예전의 나, 퀘스트를 하기 전의 나라면 그 모습만으로도 겁을 집어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담담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침착할 수 있었다. 어차피 지금의 나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건 없었고, 피해를 준다 해도 내일 다시 도전하면 그만이고, 그 피해가 아무리 커봐야 ‘공허’의 괴로움 보다 클 리 없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이 몸의 주인이었다. 그는 상당히 무서워하고 있었다. 적이 눈앞에서 달려드는데도, 마주보지 못하고 시야가 아래쪽을 향하고 있었다. 또 무기도 바로 들어 앞을 막고 있는 게 아니라, 아래로 내려져 있었다. 거기에 무게 중심도 뒤로 가 있는 듯한 자세였다. 아마 뒷걸음질이라도 치고 있었던 걸로 예상된다. 어떻게 봐도 겁에 질린 거 이상은 아니었다.

    이번 퀘스트는 이 상황에서 살아남는 것인가?

    일단 시작하자마자 취해야 할 동작을 생각했다. 무기를 들어 후려칠까? 하지만 이 몸의 힘이 베르트랑 정도가 아닌 이상 큰 도움은 안 될 것 같았다. 오히려 적의 공격에 내 몸을 그냥 내주는 꼴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피해야 한다는 건데, 뒤로 피하자니, 뒤에 뭐가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여기가 성벽이라면 좁을 테고, 내 시야에 들어오는 현재 상황으로 볼 때, 내 뒤에는 공간이 없을 것 같았다.

    결국 앞으로 굴러야 될 것 같았다. 어차피 자세도 무너진 것 같은데, 앞으로 굴러 적과 위치를 바꾸고, 재빨리 일어나서 공격을 하는 거다. 이 몸이 제대로 된 공격 기술을 가지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해 보면 알겠지.

    “시작.”

    그 말과 동시에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소리가 가장 먼저 내 귀를 채웠다. 온힘을 내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내뱉는 기합, 목숨을 눈앞에 두고 지르는 비명, 쇠붙이가 서로의 단단함을 과시하며 부딪히는 소리. 피부를 때리는 것들도 있었다. 성벽의 진동은 발바닥에서부터 전해졌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물의 울음은 내 피부를 떨게 했고, 돌덩이가 돌덩이를 부수며 만들어내는 높고도 큰 음에는 심장이 절로 박자를 맞추었다.

    그 다음으로 반응한 건 코였다. 땀 냄새, 피의 냄새, 상처가 썩어 들어가면서 내는 역겨운 냄새, 제대로 손질하지 않는 가죽에서 올라오는 고약한 냄새들까지. 내 평생 처음 맡아본 냄새들이 코의 신경세포들을 마비시켰다.

    그리고 피부가 아픔을 호소했다. 부드럽지 않은 가죽 옷들, 무명천들의 꺼끌꺼끌한 촉감이 전신에서 느껴졌다. 그 뿐 만이라면 어떻게 넘길 수도 있겠는데, 땀에 전 옷이 상처에 딱 달라붙어 있어서 움직이는 것조차 괴롭게 했다. 아드레날린이 분비된 상황이라면 이 정도 고통쯤은 잊고서 전투에 집중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갑자기 모든 감각을 넘겨받은 상황이라서 모든 게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전쟁은 소란스러웠다.

    “죽어라!”

    오크(Ock). 비슷하다고 생각은 했다. 그 코를 보는 순간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이 그 이름이었다. 피부는 갈색이었지만, 각종 게임이나 영화에 나오는 오크와 비슷하게 생겼다. 그런데 실제 이름도 오크라니. 사용하는 언어가 완전히 다른데도, 그 발음이 같았다. 이것도 뭔가 있는 건가?

    그리고 역시나 뒷걸음치고 있었던 듯, 무게중심이 뒤에 있다 못해서 넘어지려고 하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뒤로 피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예상대로 뒤는 더 갈 곳이 없었다. 흉벽으로 막혀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억지로 균형을 회복하고, 앞으로 굴렀다. 온 몸이 비명을 질렀지만, 어떻게든 굴렀다.

    오크는 내 등을 넘어 성벽 위로 처박혔다. 얼굴부터 부딪혔으니 타격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 같지만, 인간이 아니라 오크니 그 정도는 별 것 아닐 지도 몰랐다. 이 몸의 기억도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오크와 나는 동시에 일어났다. 오크의 얼굴을 일그러져 있었지만, 아픈 것보다는 화가 나 보였다. 그는 뒤돌면서 바로 대도를 휘둘렀다. 허리 부근으로 날아오는 그 대도를 허리를 숙이며 겨우 피했다. 내 등 위를 검이 스쳐 지나갔다. 앞으로 엎어질 듯한 자세였다. 그 자세에서 한 발작 더 내딛었다. 발목이 삐걱댔지만, 견뎌냈다. 내 어깨가 오크의 가슴을 밀어 버렸다. 그걸로 오크는 끝이었다.

    “후우, 후, 후우.”

    짧은 공방이었지만, 숨이 차올랐다. 힘들지는 않았다. 단지 긴장했을 뿐이다. 이 몸은 내 생각보다 유연하고, 힘과 체력이 좋았지만, 전투에 관한 능력은 없어 보였다. 기억을 뒤져보았지만, 검술, 체술, 마법, 그 어느 것에 관한 지식도 찾을 수 없었다.

    이대로 계속 기억을 살펴보다 보면 퀘스트 목적에 관한 것도 찾을 수 있겠지만, 그럴 틈이 없었다. 성벽을 넘어 들어오고 있는 오크들이 있었다. 검을 들었다. 성벽 위로 올라온 손을 찍어 버리고,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오크의 목을 잘랐다. 나 역시 실력이 미흡한지라 그 목을 제대로 베지는 못했다. 그래도 반쯤 베는 것에는 성공했고, 오크는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내가 죽였…….’

    ‘닥쳐!’

    이 몸은 대체 뭐하는 거지? 딱 봐도 중세쯤에 사는 것 같은데, 뭘 죽이고 자시고 타령인지. 게다가 같은 인간도 아니고, 오크한데. 이런 건 내가 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아직 흥분 상태가 아닌지, 감각이 예민하단 말이다. 롱소드가 목을 가르는 게 다 느껴진다고.

    하지만 감각에 아랑곳 않고 다음 타깃을 향해 움직였다. 지금은 그런 감각에 빠져 있을 상황도 아니었다. 이 퀘스트가 첫 퀘스트라면, 주춤하다가 여기서 죽었을 수도 있었다. 나는 사람도 한 번 쳐보지 않은 평범한 소시민이었으니까. 그러나 퀘스트를 하면서 많이 죽어 보았고, 누군가를 죽이기도 했다. 여기에 흔들릴 깜냥은 아닌 것이다.

    ‘……내가, 내가…….’

    또 하나의 오크를 성벽 아래로 떨어뜨리는데, 여러 감정이 올라왔다. 두려움, 죄책감, 떨림, 본능적인 거부감, 그런 것들이 섞여 있는 감정 덩어리였다. 나도 이랬을까? 베르트랑이나 파이레스는 내가 들어가기 전에도 이미 살인에 대한 경험이 많았다. 몬스터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퀘스트 도중 내가 누군가를 죽이거나, 다른 사람이 죽는 걸 봐도 내가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영향이 아니었다면 이 몸의 주인처럼 호들갑을 떨었을 수도 있었다.

    ‘적이야, 인간도 아니고, 정신 차려!’

    그러니까, 이번엔 내 차례란 말이지. 겁에 질린 소년을 노련한 병사로 바꾸는 것. 내가 그런 걸 할 수 있을까? 한 번 만에 할 자신은 없다. 나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일 뿐이니까. 하지만 하다 보면 되겠지. 나는 몇 번이고 싸울 수 있으니까.

    공허와는 비교할 가치도 없는 그의 감정을 다독이면서, 또 올라오는 오크를 공격했다. 맨손으로 성벽을 오르는 오크는 손쓸 새도 없이 내 공격에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그 다음엔 내 동작이 멈춰 버렸다. 화살이 심장에 정확하게 꽂힌 것이다.

    + + +

    한 번에 죽는 공격은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건 알고 있지만, 무의식적으로 손으로 심장부근을 쓸어 내렸다.

    이번 퀘스트는 저번 퀘스트에 비하면 쉬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지금까지의 진행을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세상을 파괴할 수 있는 파이레스에 비하면 이 퀘스트의 주인공은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으니까, 퀘스트 목적도 간단한 거겠지.

    대신 이 퀘스트를 깨려면 ‘라이트닝 소드’의 도움이 많이 필요했다. 내 기술이라고는 그것 밖에 없으니까. 아주 더디게 성장하지만, 그거라도 있어야 깰 수 있겠지. 그 몸의 주인은 진짜 공격 기술이라고는 없었으니까.

    그러고 보면 퀘스트에서 한 칼질은 숙련도에 영향을 주나? 마음속으로 라이트닝 소드의 숙련도가 떠오르기를 바랐다. 그러자 내 눈 앞에 메시지가 떴다. 시스템이 내 마음을 읽는 건 꿈의 세상만이 아니었다. 난 대체 어떤 일에 휘말리게 된 걸까. 혹시 내가 미친 걸까. 그건 아닐 거야.

    머리를 흔들며, 시야 중앙에 뜬 메시지를 읽었다. 그리고 내가 진짜 미친 건 아닌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더딘 성장에 신물이 난 내 정신이 환각을 보여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메시지의 내용은 그대로였다.

    [라이트닝 소드 lv.1 34.2047%]

    분명, 6% 였는데?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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