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개의 퀘스트-19화 (19/160)

19화

<전예지>

어디서 본 걸까? 그러나 기억을 뒤져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사실 좀 이상했다. 일단 그 머리색이 금발인데다가, 얼굴도 서구형이었다. 나이는 잘 짐작가지 않았지만, 중년인 파이레스와, 딸의 나이를 생각해보면 적어도 30대 이상인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30대 이상의 금발 외국미녀라는 것이다. 내 주변에서 볼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TV에서 본 건가하고 떠올려 봐도,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뭐, 아무렴 어떤가. 퀘스트가 끝났으니 이제 볼 일 없는 사람이잖아…… 라고 하기엔 파이레스가 준 인상이 강하게 남아 있다. 그의 슬픔, 그의 절망, 그의 의지, 그리고 그의 사랑 같은 게 그냥 내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마지막에 살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그가 한 일을 생각해보면 죽어도 모자란 사람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에 다시 살아난 거 아닌가? 죽어도 모자라니까, 살아서 무슨 일을 하겠지. 그렇게 앞뒤가 없는 사람은 아니니까.

메시지도 이렇게 말해주지 않는가?

[축하합니다. 두 번째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셨습니다. 퀘스트 보상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불꽃의 성자 파이레스’의 능력 중 하나를 배울 수 있습니다. 어떤 걸 선택하시겠습니까?]

‘불꽃의 성자 파이레스’라고.

긴 퀘스트였다. 지금이 11월 1일, 9월 20일부터 이 퀘스트를 진행했으니까, 대충 40일? 그 정도나 이어졌던 퀘스트다. 무엇보다 40번씩이나 경험한 간접 아사 체험. 정말로 힘들었다.

진짜……. 그래, 진짜 힘들었어. 수고했다 나여, 정말로 대견하구나.

그럼 이제 그 열매를 수확하러 가볼까? 자, 시스템, 내게 검색창을 열어라!

[검색하시겠습니까? 검색하려고 하는 단어를 말씀하거나 생각해 주십시오.]

“마법.”

[기초마법지식 Master]

[써클 마법 lv.8]

[속성 마법 Master]

[불속성 마법 Grand Master]

……

역시나 세계에서 손꼽히는 마법사, 마법에 관련된 것만 해도 엄청난 페이지 숫자를 자랑했다. 다행히도 내가 원하는 건 바로 첫 페이지에 떡하니 있었다. 바로 불속성 마법.

[불속성 마법 Grand Master] - 불속성 관련 마법. 그랜드 마스터에 이른 불속성 마법에는 회복 마법도 포함됩니다.

설명은 간단했지만, 설명처럼 그 능력도 간단한 건 아니었다. 이 카테고리 안에 그 세계에서 쓸 수 있는 모든 불 마법이 포함 되어 있었고, 거기에는 심지어 회복마법도 들어가 있는 것이다. 불속성인데, 회복마법이라니. 쉽게 연상이 되지 않았다. 불사조의 이미지인 건가?

그리고 그랜드 마스터. 파이레스는 회복 마법을 쓸 수 없었다. 그 말은, 그 당시 그의 능력은 마스터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랜드 마스터다. 올랐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그런 일을 겪었으니 오르지 않을 수 없겠지. 그게 마스터와 그랜드 마스터라는 엄청난 격차라고 해도 그럴 수밖에 없는 엄청난 경험이었다. 그 공허, 공허를 이겨내는 의지, 폭주와 회복까지.

아무튼 그래서, 내가 익힐 수 있는 기술이 하나 더 늘어나 있었다.

[파이어 애로우 Grand Master]

[파이어 볼 Grand Master]

[익스플로전 Grand Master]

[헬 파이어 lv.9]

[미티어 스트라이크 lv.4]

[불사조 소환 lv.1]

불속성 마법 하위 마법들은 이보다 더 많았지만, 대표적인 것들은 이런 것들이었다. 이중에서 눈길을 끄는 건 당연히 불사조 소환이다.

[불사조 소환 lv.1] - 불사조를 소환할 수 있다. 불사조를 소환하는 데는 사용할 수 있는 이능력의 전부 혹은 수명 반년 치가 필요하다. 그랜드 마스터를 달성한 기술이 하나라도 있어야 익힐 수 있음.

얼마나 강하기에, 수명 반년 치를 소모하는 걸까? 게다가 배울 수 있는 조건도 어마어마하다. 배울 수만 있다면 배우려고 했는데, 역시 내 뜻 대로만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면 원래 계획했던 대로 헬 파이어나 미티어 스크라이크 인가?

[헬 파이어 lv.9] - 지옥의 불꽃을 소환한다. 지옥의 불꽃은 온도를 낮추는 걸로는 꺼지지 않는다. 사용할 수 있는 이능력의 절반 혹은 체력의 전부를 소진한다. 1분 정도의 주문을 외어야 함. 대인용 마법.

[미티어 스트라이크 lv.4] - 운석 하나를 공중에서 낙하시킨다. 들어가는 이능력 혹은 체력에 따라서 운석의 크기와 떨어지는 높이가 달라진다. 최소는 직경 10m 크기의 운석을 1km 높이에서 떨어뜨리는 것이다.(운석의 무게를 2천t이라고 하면, 명중 시 파괴력은 약 4킬로톤으로 히로시마에 떨어진 전술핵, ‘리틀보이’의 약 1/4 수준이다.) 마스터 수준이 아니면 파괴력 조정은 불가능하고, 최소 수준의 위력만 낼 수 있다. 사용할 수 있는 이능력의 전부와 체력의 전부가 소진된다. 2시간 이상의 준비 시간이 필요하다.

헬파이어는 그냥 덤덤히 넘어갔다. 그 위력이 실제적으로 와 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티어 스크라이크의 상세 설명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운석 충돌이니 강할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최소 위력이 이 정도라니……, 정말 멍해지는 위력이었다. 하나 떨어뜨리면 도시를 날리게 되는 것이다. 한 사람이 그 정도의 일을 할 수 있다니, 그것도 단 한 번 만에.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선택한 건 헬파이어였다. 그게 지금 내게 필요한 능력이었다.

저번에는 멋을 위해 라이트닝 소드를 선택했으니 이번에야말로 단발 기술, 한 방에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큰 기술을 배워야 했다. 지속 기술을 배웠다간 라이트닝 소드처럼 애물단지가 되고 말 것이다.

[라이트닝 소드 lv.1 6.50546%]

얻은 직후부터 지금까지, 하루에 대략 8시간씩 꼬박꼬박 수련한 결과였다. 이제 기수식을 겨우 벗어나 가로 베기, 세로 베기, 찌르기를 연습 중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퀘스트 해결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아직도, 아직도 멀었다는 이야기였다.

라이트닝 템페스트나 토네이도 같은 큰 기술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검의 움직임이 좀 더 살아 있기만 하면 되는데, 그것조차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후회는 없다. 수련은 의외로 성취감을 주니까. 그래도 두 번 선택할 일은 아닌 게 확실했다.

그리고 미티어 스트라이크는 범위가 너무 컸다. 대인용 검술 다음이니 범위용 기술을 배우는 게 맞을지 모르지만, 그 범위가 1km 정도 되면 물음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상황에 따라 사용이 제한 될 경우가 많았다. 이번처럼 던전 안에서 진행되는 퀘스트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헬 파이어의 범위만 해도 충분했다. 대인용 마법이라지만, 시연 영상을 보면 그 대인이 인간을 기준으로 한 게 아니라, 인간보다 몇 배나 큰 오거나 트롤, 더 나아가 악마들을 기준으로 한 것 같았다. 불꽃이 전방 10m를 커버했다.

“헬 파이어를 배우겠어.”

[[헬 파이어 lv.9]를 배우시는 게 확실합니까?]

“그래.”

[확인했습니다.]

[잠에서 깨어나시면 헬 파이어를 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 + +

“드디어 끝났군.”

뿌듯했다. 동시에 죄책감도 들었다. 마지막은 좋게 끝났지만, 중간에는 미친 듯한 학살을 했다. 정확하게 하자면 내가 한 건 아니었지만, 내가 거든 건 확실했다.

퀘스트를 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 불꽃의 성자를 출현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변명은 하고 싶지 않았다. 게임이라면, 이게 단순한 게임이라면 그런 변명을 했을 것이다. 애당초 그런 변명이 필요할 정도로 마음이 무거워지지도 않았겠지만, 게임이라면 그렇게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건 그렇게 넘어갈 순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내가 한 일이다.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져야만 했다. 그런 예감이 든다. 그게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그때가 오겠지. 그때 책임을 더 하지 않으려면, 지금은 모든 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다.

그래도 뭔가를 끝냈다. 그런 느낌은 있었다. 지난 40일, 파이레스가 겪은 만큼은 아니지만, 나 역시 내가 상상할 수 없었던 경험을 했다. 그리고 그 일이 끝났다. 게임 하나를 클리어 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끝이 가져다주는 만족감과 아쉬움,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 등이 뒤섞여서 내 마음을 채우고 있었다. 여운에 젖어 하루 종일 누워만 있을 수도 있을 듯한 상태였다.

성장, 했다고 볼 수 있을까?

분명한 건, 이제 다음 스텝을 밟을 수 있다는 거겠지.

+ + +

“야, 그 여고생은 어떻게 하기로 한 거야?”

사장은 바리스타 누님을 보내고 내가 카운터에 서자마자 그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당연히 손님 따윈 없었다. 유일한 단골인 예지는 조금 더 있어야 온다. 그리고 내 알바 시간이 끝날 때쯤 돌아가니까, 사장에게 그 이야기를 물을 수 있는 기회는 지금밖에 없는 셈이다. 나름 배려가 넘치는 분이다. 그게 나를 향한 것인지, 그녀를 향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제 수능 일주일도 안 남았잖아. 수능 지나면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며?”

그의 말대로, 어느새 11월, 수능은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수능 끝나고 한두 번 만나면 알아서 결판이 나겠죠.”

“……뭐냐, 그 덤덤한 반응은. 기대했던 반응이 아닌데?”

“그럼 뭘 기대하셨는데요?”

“그야, 넌 모쏠이니까……. 하긴, 별로 나올 게 없긴 하네. 그래도 프로 게이머이자 모쏠인 너라면 내 기대를 뛰어넘는 반응을 보여줄 거라고 생각했어. 쳇, 이러면 아무런 재미가 없잖아.”

“사장님도 모르는 걸 기대하는 게 잘못이에요. 그것도 모태 솔로 남한테.”

“그럼 너는 별로 사귈 생각이 없는 거야?”

사장은 내 덤덤한 말투에 곰곰이 생각에 잠기더니, 진짜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데, 아까와 다를 게 없는 질문이었다. 물론 내 대답도 아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사귀면 좋겠다. 그 정도의 생각은 있죠.”

그렇다. 예지는 예쁘고, 몸매도 빠지지 않고, 지켜본 바로는 성실한데다가, 행동도 귀여운 편이다. 그런 여자를 싫어할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게 다예요. 그 이상은 저도 만나봐야 알겠죠. 감정이 생기면 더 가는 거고, 아니면 몇 번 만나다가 끝나는 거고. 그런 게 남녀 사이 아니겠어요?”

“…….”

사장이 갑자기 날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가 나를 쳐다보는 건 일상적인 일이었지만, 지금은 좀 부담스러웠다. ‘너 다시 봤다.’ 그 눈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봐. 너 모태 솔로 아니지? 모태 솔로가 이럴 리가 없어. 모태 솔로면 여자가 한 마디만 해도 온갖 상상을 다하면서 혼자 진도를 팍팍 나가야 되는 거 아니냐고.”

얼마 전까진 확실히 모태 솔로였지만, 지금은 좀 애매해졌다. 베르트랑과 파이레스의 기억이 내 사고를 마구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에게는 로젤리나와 나누었던 풋풋한 사랑과 아내와 나누었던 진실한 사랑의 경험이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그러니 모태 솔로는 맞지만, 또 아니라고 할 수도 있었다.

또 그것과는 별개로, 그가 말하는 부분, 망상에 대해서는 이미 예전부터 경험치가 쌓여 있었다. 그런 점 때문에 예지가 고백을 하던 당시에도 침착할 수 있었고, 지금도 담담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저 개념 있는 사람이라니까요. 아시면서 왜 이래요.”

“아아, 실망이야. 사장한테 연애사실을 숨기는 알바 생이라니. 이거 돈은 벌고 싶은 건가? 그냥 내 말동무로 취직한 거나 다름없는데…….”

사장의 궁시렁은 가볍게 무시해주었다. 마침 우리 가게의 유일한 단골이 왔기 때문이었다. 문에 달린 방울 소리를 들으며 인사를 하려고 몸을 살짝 돌렸다. 들어오는 그녀의 얼굴을 보였다. 원래라면 고개를 숙이며 ‘어서오세요!’가 이어져야 했지만, 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왜 예지를 보는 데, 파이레스의 아내가 떠오르는 거지?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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