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개의 퀘스트-17화 (17/160)

17화

내가 다시 현실로 돌아온 건, 그의 광기가 한 시간 동안이나 그 세계를 할퀸 뒤였다. 그는 강력했다. 그의 손에서 파란 불꽃이 떠나가면, 영지 곳곳이 터져나갔다. 그를 막을 수 있는 자가 없었다. 무엇이든지 누구든지, 그 불꽃에 눈 녹듯 녹아버렸고, 파괴되었다. 영지는 순식간에 폐허가 되어 버렸다.

게다가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주위에는 푸른 구슬의 힘으로 되살아난 언데드가 붙어 있었다. 그들만 해도 강력했다. 언데드이니만큼 죽지 않았고, 피를 흘리면서도 계속 움직였다. 게다가 생전의 근육을 그대로 쓸 수 있고, 기억도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움직임이 보통의 언데드보다 빠르고 자연스러웠다. 살아난 언데드 중에는 생전에 용병이었던 자들도 있었는데, 이들의 공격력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무식하게 달려들어 적을 죽이고, 그 와중에 상처 입은 자신의 몸은 금세 재생해 버렸다. 일반인은 막을 수 없었고,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검기를 써서 사지를 자르고, 불을 가지고 태워 버려도, 푸른 구슬이 금세 원상태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언데드는 계속 불어났다. 푸른 구슬에서 마나가 계속 흘러나와서 죽은 자들을 일으켰다. 어떤 죽음이든, 푸른 구슬에 걸리면 다시 살아났다. 파이레스의 불꽃에 녹았던지, 언데드에게 찢겨 죽었던지 상관없었다. 가루가 되어도 푸른 구슬은 그들을 살려냈고, 파이레스 아래로 편입 시켰다.

영지가 무너지고 완전히 폐허가 되는 데는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 후에 그의 군대는 10배로 늘어나 있었다. 그는 그것을 보면서 웃었다. 만족하지 못한 것이다. 그의 군대가 옆의 영지로 이동을 시작했다. 이동은 느렸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깊은 던전에서 길을 찾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기어이 온 세계를 멸망시킬 생각이었다. 모든 인간을 린처럼 언데드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 이동 중에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

40일 만에 처음으로 허기를 느끼지 않고 퀘스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일단 이렇게 나오면 다시 들어갈 때, 처음의 그곳, 깊은 던전의 마지막 층으로 돌아갈 것 같지가 않았다. 그냥 조금 전에 나왔던 그곳, 옆 영지로 이동하던 그 순간으로 돌아갈 것 같았다. 그건 정말로 나쁜 상황이었다. 파이레스가 영지를 파괴하는 와중에도 계속 그를 저지하려 했었다.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허나 통하지 않았다. 이미 광기에 빠진 그는 돌아갈 생각이, 아니 생각 자체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걸고 있던 게 이 리셋이었는데, 어쩌면 그게 듣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고 있었다. 퀘스트는 어떻게 깨지?

그리고 사람들의 비명과 파괴되는 영지, 다시 되살아나는 죽은 자들을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목이 꺾여도 움직이는 언데드 보고 느끼는 이질감, 펑펑 터지는 불꽃들로 인한 아비규환에서 오는 혼란, 그리고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죽음의 공포. 그 죽음이란 걸, 몇 번이고 간접 체험했다. 그들의 비명이 나에게 다가왔다.

베르트랑의 부하들, 은십자 기사들이 키메라에 의해서 죽을 때만해도 이런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 때는 아직 게임에 가까웠다. 상처가 나면 아팠지만, 죽는 거에 대한 실감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수십 번 정도 공허에 삼키고 나니까, 이게 누군가의 장난이라는 생각이 사라졌다. 이건 게임이라기보다는 현실에 가까웠고, 저들 역시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더 컸다.

똑같은 사람들이 죽는 것이다. 비록 내 손에 죽는 거 아니지만, 내가 제지할 수 있는데, 나밖에 제지할 사람이 없는데, 내가 그러지 못해서 그들은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진짜, 어떻게 하지?

+ + +

“어서오세요! ……체, 민이잖아?”

이름 김미영, 내 마음속 명칭은 바리스타 누님, 실제로는 누나라고 부르고 있는 여자 분께서 활짝 웃어주다가 나를 확인하고는 표정을 풀어 버리셨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누님은 미인이다. 어디가 확 예쁘다거나 하는 건 아닌데, 보면 볼수록 예쁘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다. 이른바 볼매(볼수록 매력적인 사람의 준말). 그리고 굉장히 한국적인 미인상이다. 그런 미인이 환하게 웃을 때는 카페가 다 꽃밭으로 변하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표정을 풀어버리니까, 금세 쓸쓸한 카페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당연한 일이다. 나는 손님이 아니고, 후배에, 알바생일 뿐이니까. 그런데 그 당연한 일이 너무 아쉬웠다.

“너무하세요, 누님. 그렇게 실망스런 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잖아요? 누님의 미소를 조금 더 보고 싶었는데에…….”

“그만해, 남자애가 애교 피우는 거 별로야, 그런 건 아줌마들에게나 가서 하는 거야. 오케이?”

아쉽다 못해 안타까웠다. 누님은 솔직한 편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막말을 잘 한다고 할까? 그게 매력이 될 수는 있다. 요즘은 다소곳한 요조숙녀보다는 화끈하고 솔직한 사람이 더 인기니까. 그런데 누님의 외모에서 느껴지는 기품이랄까, 그런 게 너무 커서, 매력보다는 충격을 안게 되는 게 먼저였다. 매일 보는 나조차도, 누님이 입을 열 때면 뭔가 어색함을 느끼곤 한다. 그게 너무 안타까웠다.

“……진짜 너무하시네요. 누님은 그 말투 좀 어떻게 해야 한다니까요?”

“이게 어때서? 그리고 너니까 이런 거지, 다른 남자들 앞에 가면 안 그래. 그런 의미에서 너는 아직 남자가 되기엔 멀었다는 거지. 요즘 진짜 남자 코스프레 하는 건지, 눈에 우수를 장착하고 다니던데, 그거별로야.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면 가랑이가 찢어지는 법이야. 너야말로 원래대로 돌아오지 그래?”

정정할래. 그냥 이 사람은 막말이 심한 사람이라서 매력이 없는 거다. 그 단아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남자친구가 없는 게 그 반증이지. 아무리 예뻐도, 심지어 몸매까지 좋아도, 말이 심하면 역시 안 되는 거야.

“……제가 졌습니다.”

“뭘 질 것까지야. 그나저나 사장님 쫌 어떻게 해봐, 그 인간은 도대체 장사할 생각이 있는 거니? 이렇게 좋은 원두를 그냥 버리다니……, 아까워 미치겠어.”

그러면서 원두를 담아놓은 통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누님 안에서 내 존재는 원두보다도 못한 게 틀림없었다. 아니지, 나도 원두처럼 아무 말 안하고 새침하게 있으면 관심을 가져 주려나? 내가 괜한 애교를 부려서 그런가?

“가져가시면 되잖아요? 어차피 가져가도 모를 텐데.”

“이 많은 걸 어떻게 가져가? 다 먹지도 못하는 걸 가져가서 내 집에서, 내 손으로 버려야 한다는 거니? 그걸 어떻게 해.”

버려지는 원두, 정확하게는 로스팅 한 원두의 양은 상당하다. 평소에 오는 손님 따위는 생각 안하는 사장이 엄청난 양을 주문하기 때문이다. 확실히 집에 가지고 가서 먹을 양은 아니다. 그런데, 그럼 어쩌라고.

“그럼 나가서 파시든 지요. 연대나 명지대 앞에서 좌판 깔고 팔면 잘 팔리지 않을까요? 물론 파격적인 가격이라면요.”

“그걸 어떻게 하니? 좌판은 어디서 구하고? 뭣보다 가게를 비우고 갈 수가 없잖아. 이놈의 사장은 제 맘대로 출근하는데.”

어째 저 말은 사장 몰래 판다는 이야기 같지만……, 지금 중요한 건 아니니 넘어가자. 확실히 좌판을 구하고 파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그럼 인터넷은 어때요? 인터넷으로 팔면 되잖아요?”

“그건 더 판로 개척이 힘들어. 인터넷엔 싸게 파는 사람들이 많다고. 그리고 택배를 하나하나 붙여야 하잖아? 그게 얼마나 귀찮은 줄 알아?”

그래, 그게 상당히 귀찮기는 하겠지. 귀찮을 거야. 그런데 나보고 어쩌라고?

누님은 여전히 원두를 보면서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예쁜 얼굴이 울려고 하니 제법 파급력이 컸지만, 계속 투덜대는 걸 듣고 있자니 짜증이 모락모락 솟아나려고 했다. 그러다 갑자기 파이레스가 떠올랐다. 일의 무게는 달랐지만, 현상은 비슷했다. 그도 슬퍼했고, 내 말은 죽어도 듣지 않았으니까.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여전히 모르겠다. 그러나 누님은 내 눈 앞에 있고, 말이 안 통하는 상대가 아니니, 물어 보면 된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이 바보야, 네가 그래서 여자 친구가 없는 거야. 집에서 맨날 게임만 하고 있으니까 그렇지. 쯧쯧.”

내 항복 선언에 누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표정을 풀어 버리고는 혀를 차기 시작했다. 그러는 자기는 남자친구라도 있나? 내 여자 친구도 아니면서 무슨 참견이야, 라고 말하고도 싶었지만, 일단은 이야기를 들어보자고 생각했다. 어쩌면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래서요?”

“그래도 모르겠어? 너 SNS는 하니? 글은 좀 읽어? 진짜 게임만 하는 구나? 인터넷은 정보를 얻으라고 있는 거지, 게임하라고 있는 게 아니거든, 이 게임 중독자야.”

이 누님도 똑같다. 그래, 사장이랑 다를 바가 없다. 그렇게 사장 욕을 하면서도 나가지 않는 이유가 있었던 거다. 동류라서 그런 거였어. 이 누님이 솔직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나, 알바 바꿀까?

“……흠, 흠. 미안해. 내가 좀 말이 심했네.”

그래도 양심은 있는 건지, 내가 표정을 굳히고 보고 있으니 금방 사과를 했다. 이런 점은 사장보다 낫다……고 할 수는 없다. 그냥 위치의 차이일 뿐이니까. 누님은 내게 욕할 입장이 아니고, 사장은 고용주로서 피고용주에게 막 대하는 거니까. 이 누님은 그 자리에 가면 분명 사장이랑 똑같이 변할 것이다. 더 심할 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럴 때는 ‘그러네요. 진짜 원두 아까워서 어쩌죠?’라고 운을 띄우면서 사장 그 새끼가 다 잘못이다. 이러면 되는 거야. 너에게 원두 처리 방법을 묻는 게 아니라고. 원두에 대해서라면 내가 훨씬 더 잘 아는데, 내가 왜 너한테 그걸 묻겠니. 여자와의 대화는 공감이 먼저라고, 공감. 꼭 명심해. 게임 하듯이 답만 찾으려고 하면 진짜 답 없다. 그 왜 예지라고 했나? 예지에게도 그렇게 답만 땍땍 거리면 안 돼. 금방 널 싫어하게 될 걸?”

듣고 나니, 본 적이 있는 거 같았다. 나도 SNS하고, 인터넷하고, 책도 읽으니까. 물론 지나가면서 읽은 게 태반이라 머리에 남고, 행동에 옮겨지는 지식은 별로 없었다. 이 지식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확실히 머릿속에 박아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쁜 말 들어가면서 배워서가 아니라, 오늘 밤에 사용해 볼 것이기 때문이다. 역시나 지식은 몸으로 직접 체험하며 익혀야 하는 건가?

그리고 예지 이야기는……, 이놈의 사장! 그동안 누님이 아무 말 안 하기에 얘기 안 한 줄 알았는데……, 역시나 그럴 리가 없지.

“걔 이야기가 갑자기 왜 나와요?”

“그거야 이제 수능이 다가오니까 그렇지. 어때, 사귈 마음은 있어?”

이 이야기는 누님이 화제전환을 위해 꺼낸 게 분명하지만, 알면서도 말려들 수밖에 없었다. 내일이면 11월, 이제 수능은 일주일 밖에 남지 않았고, 내가 했던 말을 지켜야할 시간이 된 것이다.

“……그렇죠. 어느새 그렇게 됐네요…….”

“오호, 말 하는 거 보니 마음이 없는 건 아닌 모양이다? 어떻게 생긴 애야? 예뻐? 우리 가게 유일한 단골이라는 데, 나는 아직도 못 봤구나.”

그러고 보니 예지는 항상 오후에만 왔다. 주말에도 항상 오후에만 왔다. 다르게 말하면 내가 알바하는 시간에만 가게에 출몰했다. 처음부터. 응? 처음부터?

“귀엽게 생겼어요. 사장님 말로는 안경 벗고 꾸미면 미인이 될 상? 한 번 그렇게 하고 온 적이 있었는데, 그 때는 진짜 예쁘더라구요.”

“아, 어떻게 생겼는지 알 것 같아. 동그란 안경 끼고, 피부는 하얗고, 머리는 포니테일에……, 동글동글한 느낌인데도 자기주장이 있어 보이고? 몸매도 제법 괜찮은데? 부끄러움도 많이 타는 것 같은데?”

누님의 이야기가 점점 구체적이 되어갔다. 직접 보고 말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 직접 보고……. 정체 모를 부끄러움에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열린 카페의 문 앞에 예지가, 동그란 안경을 쓰고 얼굴을 붉힌 채 서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던 걸까? 내 얼굴도 좀 달아오르기 시작한 것 같았다.

“푸하하하하하, 너네들 진짜 웃기다.”

누님의 솔직한 웃음소리가 카페를 가득 채웠지만, 나나 그녀나 쉽사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부끄러워!

============================ 작품 후기 ============================

여러분의 작은 관심이 작가에게는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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