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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개의 퀘스트-15화 (15/160)
  • 15화

    공동은 직경 50m 정도 되는 넓이였고, 높이는 약 20m 정도로 완벽한 반구형은 아니었다. 벽에는 화려한 부조들이 저마다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 사이사이에 그려져 있는 벽화 역시 화려했다. 무엇보다 다채로운 색깔이 인상적이었다. 현대에서 볼 수 없을 것 같은 색도 보였다. 저 미묘한 색, 자연 그대로의 색 하나만 봐도 이 공간에 들인 노력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걸 만든 장인의 실력도 대충 짐작이 갔다. 분명 세계 최고의 실력자들이 모여 작업했을 것이다. 아니라면 신이거나.

    중앙에는 큰 나무가 한그루 있었다. 일단 컸다. 공동을 가득 채울 만큼 가지가 풍성하게 자라나 있었고, 그만큼 그 밑동도 매우 컸다. 어른 다섯 명이 양팔을 가득 뻗어야 감싸 안을 수 있을 만한 굵기였다.

    두 번째로 놀란 건, 잎의 모양이 제각각이라는 것이었다. 어느 가지에는 가늘고 긴 나뭇잎이 달려 있었고, 또 다른 가지에는 잎이 넓고 둥근 나뭇잎이 달려 있었다. 그것도 한 종류가 아니었다. 그냥 보통 나뭇잎부터, 은행잎처럼 생긴 것까지, 내가 본 갖가지 나뭇잎들이 한 나무에 다 달려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 각각의 잎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나오고 있었다. 이 공동을 채우고 있는 빛은 전부 나뭇잎에서 나오고 있는 거였다. 이 나무들은 스스로 광합성을 하는 걸까? 그 말 그대로의 의미로, 빛을 합성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나무의 중앙부, 줄기 사이에 동그란 구멍이 있었다. 옹이구멍이라고 불러야 하겠지만, 줄기에서도 나는 빛과 그 안에 있는 것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안에는 푸른빛을 내는 구슬이 있었다. 나무의 열매처럼 매달려 있었는데, 그 구슬 주변을 나무줄기가 둘러싸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심장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대리석으로 된 바닥을 밟으며 그 쪽으로 옮겼다. 아마 푸른 구슬을 향해 움직이는 것 같았다. 보는 순간 감이 왔다. 저 물건을 찾기 위해서 이렇게도 열심히 움직인 거구나 하고. 딱 봐도 엄청난 힘을 지닌 물건 같았다. 무슨 일에 쓰일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일에 써도 기대 이상의 효과를 가져다줄 것 같은 구슬이었다. 팔면 엄청난 돈이 되겠지만, 그런 이유는 아니겠지. 고작 그런 이유로, 말도 안 되는 공허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역시 그의 목표는 푸른 구슬이었다. 그는 나무 앞에 서서 지팡이로 푸른 구슬을 조준했다. 그리고 조금 전처럼 불꽃을 생성해냈다. 아까 전과는 약간 다른 불꽃이었다. 이전의 불꽃이 원형이었다면, 이번엔 길쭉한 모양으로, 화살과 비슷했다. 그 불꽃의 화살은 어느 정도 형체를 이루자 바로 푸른 구슬을 향해 날아갔다.

    방어막 같은 게 펼쳐질 거라고 예상했지만, 화살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푸른 구슬에 닿았다. 그리고 폭발했다. 구슬이 부서지거나 혹은 상처 입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잘은 모르지만, 이 정도의 공격으로 어떤 해를 입을 물건이 아니라는 감이 있었다.

    예상대로, 구슬은 아무런 피해도 없었고, 구슬을 고정시키고 있던 나무줄기들만 타버렸다. 구슬은 자연스레 밖으로 떨어져서 뻗은 그의 손 위, 지팡이도 내팽개쳐버린 그의 두 손 위로 떨어졌다.

    힘이 없는 그 두 손은 크다고는 할 수 없는 구슬의 자유낙하, 고작 5m 정도의 낙하를 견디는 것도 힘들어했다. 하지만 절대 구슬을 놓치지는 않았다. 그는 마지막 남은 혼신의 힘을 거기에 쏟아 붇고 있었다. 그저 지켜만 보는, 감정의 공유를 하지 않는 나도, 그가 얼마나 간절한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이제 끝인 걸까? 원하는 걸 얻었으니 이제 끝이 아닐까. 하지만 그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푸른 구슬을 중심으로 바람이 일어났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건 마나의 흐름이었다. 나무에서부터 마나가 불어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산들바람처럼 약했다. 그 다음에는 땀을 식혀줄 수 있는 바람 정도가 되었고, 마지막에는 모든 것을 삼킬 폭풍이 되었다. 나뭇잎과 나뭇가지, 줄기에서 미친 듯이 마나가 불어와 푸른 구슬에 모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 따라 나무가 서서히 말라갔다. 빛나던 잎들은 빛을 잃었고, 공동 끝까지 뻗어가던 나뭇가지들이 땅으로 고꾸라졌다. 무지막지한 굵기를 자랑하던 나무의 줄기는 쩍쩍 갈라지더니 속살을 드러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 세상에 다시없을 것 같은 아름다운 나무가, 이제 쓸쓸한 나무가 되어 버렸다. 빛으로 가득하던 공동이, 신성함이 넘치던 공동이 갑자기 공동묘지처럼 변했다.

    또 바람이 불었다. 이번엔 푸른 구슬에서 시작된 바람이었다. 푸른 구슬에서 시작된 마나의 기운이 그의 몸속으로, 나의 몸속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힘을 잃었던 다리에 힘이 돌아오고, 구슬도 무거워했던 팔이 다시 위로 올라갔다. 영원히 붙어 있을 것만 같았던 등가죽과 뱃가죽이 드디어 이별했다. 얼굴에도 살이 오르며 생기가 드러났다.

    다만 광기에 찬 눈, 이미 원하는 걸 찾았음에도 계속 찾고만 있는 그 눈만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배고픔이 사라지고, 힘이 회복되고, 정신이 돌아왔는데도, 머릿속에는 계속 찾아야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미 미쳐버린 걸까?

    바람이, 마나의 흐름이 멈춘 공동에는 푸른 구슬만 고고히 빛을 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느낌이 별로였다. 분명히 원하던 것을 찾았고, 몸도 회복됐으니 이제 퀘스트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면 되는데, 어쩐지 그런 결말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재빨리 그의 기억을 뒤졌다. 불길한 예감이 실제로 나타나기 전에, 실마리라도 잡아야 했다.

    ‘아빠……, 안녕.’

    병색이 완연한 소녀,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소녀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소녀의 마지막 말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감기라고 생각했다. 조금 쉬면 낫겠지, 그렇게 여겼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마법을 써도, 신관을 불러도, 전혀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소녀는, 딸은 그렇게 정신을 잃었다. 죽은 건 아니었다. 그냥 죽게 두지 않았다.

    나, 마법사로는 세계에서 열 손가락에 드는 화염의 마도사, 파이레스가 그렇게 두지 않았다.

    신관을 붙여서 계속 숨을 쉬도록 만들었다. 부족한 영양분을 공급하게 했다. 그런 식으로 딸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딸은 목숨을 연명하게 되었다.

    그 후엔 바로 깊은 던전으로 갔다. 깊은 던전의 최하층, 세상의 배꼽이라고 불리는 그곳에는 세계수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 세계수의 심장은 죽은 사람도 되살린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물품이었다. 이제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누구도 성공한 적 없고, 신탁에서나 나오는 세계수이자 부활의 전설이지만, 믿을 건 그런 이야기뿐이었다.

    깊은 던전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지만, 굉장히 어려운 던전이다. 초반부는 쉽다. 초보 모험가나 등급이 낮은 용병이 수련하기에 딱 좋은 장소였다. 하지만 100층, 200층 정도 가면 세계 최고의 파티라도 고전할 수밖에 없는 몬스터와 함정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래서인지 아직 던전을 정복했다는 이야기가 없다. 최하층이 몇 층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동안 가장 많이 내려간 기록도 213층 이었다.

    내 동료들과 함께 그 던전으로 들어갔다. 최고 기록은 갱신했다. 마지막으로 층수를 샌 게 250층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층수를 셀 기력이 없었다. 던전은 아래층으로 갈수록 넓어졌다. 몬스터나 함정은 줄었지만 미로는 더욱 복잡해졌다.

    그게 우리의 발목을 잡았다. 식량은 충분히 챙겨 왔다고 생각했지만, 던전 탐사가 6개월 이상 이어질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결국 하나둘씩 배고픔에 죽어갔다. 250층까지 돌파하는 데도 많이 죽었지만, 세계최고로 구성된 동료들은 절반 이상이나 생존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도 배고픔은 견딜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혼자가 되었다.

    혼자가 되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아빠……, 안녕.’이라고 하던 딸의 목소리가 잊히지 않았다. 힘들어 하면서도 애써 미소를 지으려던 어린 딸을 생각하면, 눈물도 걸음도 멈출 수가 없었다. ‘여보, 사랑해요. 아이를 부탁해요………….’ 딸을 낳다가 죽은 아내의 얼굴도 계속 떠올랐다. 전쟁터에서 태어나, 전쟁터에서 자란 나에게, 천사와도 같았던 아내였다. 그 아내가 마지막으로 부탁한 아이였다. 아내와 나의 사랑의 결실이었다. 목숨보다 사랑했던 아내를 잃고서 버틸 수 있게 만들어준 원동력이었다. 그런 딸이 죽으면, 나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살리고 싶었다. 6개월까지 날짜를 세었을 때, 동료들은 딸은 이미 죽었을 거라고 했다. 내 앞에서는 말하지 않았지만, 쉬쉬하는 걸 내가 모를 리 없었다. 나도 알고 있었다. 대금은 충분히 지불했고, 믿을 수 있는 친구들에게 부탁하고 왔지만, 아직 딸이 살아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전란의 시대였다. 배신은 일상이었고, 기회를 노리는 무리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내가 딸을 떠나 이 던전에 들어온 이상, 딸은 죽었다고 봐야했다. 전쟁터에서 태어난 내가 그걸 모를 리가 있겠는가? 나도 안다. 던전 탐사 기간이 한 달이라면 살아 있을 확률이 높았고, 두 달이래도 희망을 걸어볼 수 있겠지만, 여섯 달에는 절망만이 존재했다.

    그러나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죽은 사람도 되돌아오게 한다는 세계수의 심장, 그 심장의 존재만 붙잡았다. 딸이 죽었다고 해도 좋다, 다시 살리면 되지 않은가?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계속 내려가는 것뿐이었다. 세계수를 찾는다면 딸을 살릴 수 있다. 그것만 생각했다. 다른 일은 생각하지 않았다. 이 여정이 실패할 확률이 높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들어온 거였다. 죽을 확률이 100%에 가깝다는 것도 이미 알고 들어온 거였다. 그게 어떻단 말인가? 사랑하는 딸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죽는 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아내도 이미 세상에 없는데, 내가 살아서 무얼 하겠는가? 그러니 찾아야 한다. 그것만이 딸이 살고, 나도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식량이 다 떨어지고, 동료들이 다 죽어도, 계속 걸었다. 막히면 돌아갔고, 비어 있는 것 같으며 부수면서 움직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잊어 버렸고, 몇 층인지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세계수는 마지막 층에 있으니까, 길을 찾다 보면 언젠가는 도착하게 될 것이었다.

    ‘찾아야 돼.’

    [두 번째 퀘스트, 세상을 멸망으로 이끌 파멸의 마도사, 파이레스를 저지하세요!]

    그의 감정, 슬픔과 절망에 깊이 빠져 있었다. 자식이 아파할 때의 그 마음, 대신 아파줄 수 없는 안타까움이 객관을 유지하려 하던 내 태도를 깨뜨렸다. 그 뒤로는 그냥 그 감정에 빠져들어 갔다. 그가 느끼는 슬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절망, 그럼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그 마음까지.

    그냥 집착이고, 광기라고 치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식을 잃은 아버지 앞에서, 그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는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비합리적이라도, 그렇게 할 수 있다면 해야 했다. 자식이 죽은 슬픔, 그 무거움은 사람이 견딜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래서 시스템의 메시지를 순간 이해할 수 없었다. 뭐지? 이건 헤피 엔딩이 아니었나? 파멸의 마도사? 왜? 파이레스의 이명은 분명 화염의 마도사였는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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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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