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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개의 퀘스트-14화 (14/160)

14화

결국 그날 밤, 다시 퀘스트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번에는 처음부터 거리를 두었다. 거리를 두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까딱 잘못하면 그냥 허기의 인력에 빨려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관건은 냉정함을 유지하는 거였다. 그리고 이 감각이 내 것이 아님을 인지하는 거였다. 몸에서 전해오는 감각을 거부하는 만큼, 몸에 대한 통제권을 주장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몸의 통제권은 또 이름을 알 수 없는 나에게로 넘어갔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내 정신이 허기의 공격에서 진정이 좀 되자 기억에 접속을 시작했다. 몸의 통제권과 기억에 대한 분리를 하는 게, 조금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엿본다고 생각하고 엿보았다.

‘찾아야 돼, 찾아야 돼. 찾아야 돼.’

그의 머리에는 그 소리밖에 없었다. 그 이상은 말려들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알기가 어려웠다. 말을 걸기도 무서웠다. 뭘 찾아야 한다는 말인가? 그것 말고는 다른 이야기는 일체 찾아볼 수 없었다. 기억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 이 광기와도 같은 느낌이 그가 허기를 이길 수 있는 원동력인 것 같았다. 그는 오로지 그 생각밖에 안했고, 온 정신을 거기에만 쏟고 있었다. 무슨 사연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찾아야 했다. 자기 목숨이 끝나더라도.

그 이상은 알 수가 없었다. 그 다음은 어제와 같았다. 그가 힘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그렇게 기다리다보면 무슨 변화가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라이트닝 소드가 무얼 할 수 있지 않을까. 내공심법이라든가 하는 건 없는 건가 하는 기대감이 있었지만, 그런 것 없는 것 같았다. 이 세계는 우리 세계와는 다르게 마법이 존재하는 게 분명한데 말이다. 아무것도 없는 지팡이가 빛나고 있는 걸 보면 그건 확실했다.

그러다가 어제 되돌아 나왔던 갈림길에서 그가 어제와 같은 방향을 선택하는 걸 보았다. 그 순간 깨달았다. 이번 퀘스트에서 내가 해야 하는 게 뭔지.

다 비슷비슷한 갈림길이었는데, 그 갈림길이 어떻게 기억에 남았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그건 어제의 그 갈림길이 확실했다.

급하게 몸의 통제권을 돌려받았다. 새로운 먹잇감을 발견한 허기의 이빨이 내 살점을 파고든다. 그리고는 알 수 없는 곳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나는 그의 생각을 붙잡았다. 어제는 붙잡을 게 아무것도 없었지만, 지금은 그의 생각을, 꼿꼿이 서있는 그의 생각을 붙잡을 수 있었다. 이 공간에, 나 혼자만 있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고통스러웠다. 겨우 정신을 붙잡고 있었지만, 비어있는 배가 가져다주는 허무함이 장난 아니었다.

겨우 다른 방향, 어제 가려다가 못간 방향으로 틀었다. 그리고는 다시 빠져나왔다. 조금만 잘못했으면 여기서 또 끝날 뻔했다. 진짜 위험했다. 그런 나의 헌신적인 노력 끝에, 그는 다른 길로 계속 움직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막다른 길이 우리를 가로막았다. 그리고 슬슬 시간이 다가옴을 알았다. 좋아, 조금만 더 버텨보자.

+ + +

“……,”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심호흡을 길게 했다. 내 배를 만지고, 내 몸의 감각들을 재확인했다. 나는 사라지지 않았다. 어둠에 먹히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생각하고, 내 몸의 감각들도 이전과 같았다. 나는 존재하고 있었다.

종이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길게 선을 긋고, 갈림길을 만들었다. 그리고 두 갈림길의 끝에 X 표시를 했다. 지도였다. 이번 접속으로 발견하게 된 내 일이다. 일단 길을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수십 개의 갈림길이 있는 지역에서 어떻게 길을 찾을 수 있을지 막막하지만,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는 지금 정신이 없었다. 사고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허기를 정신력으로 버티며 움직이는 것으로도 충분히 벅찰 것이다. 길 찾기는 내가 대신 해주면 된다.

길어지겠군.

+ + +

“민, 너 요즘 무슨 일 있냐? 말이 왜 그렇게 줄었어? 졸지 않는다는 건 좋은 변화지만, 갑자기 그러니까 좀 그렇다?”

“괜찮습니다. 아무 일도 없어요.”

“……그런 게 아닌 거 같은데? 아무 일도 없으면 좀 자, 네 뒤통수나 좀 때리게. 나에게서 즐거움을 빼앗지 말아줘.”

“너무 심하시네요.”

“장난이야, 장난. 받아치는 거 보면 정상인 거 같기도 하고, 너 진짜 아무 일도 없는 거 맞아?”

“네, 몸이 조금 피곤해서 그런가 봐요.”

“뭐하는데 피곤해? 밤마다 운동이라도 하는 건 아니겠지?”

사장은 예지가 들으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예지는 거기에 그대로 걸려들어서 연필을 멈추고 말았다. 누가 봐도 관심 있다는 듯한 몸짓이었다. 이 사장은 나를 가지고 놀지 못하니까, 이제 그녀라도 건드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정신 차리세요, 사장님. 그래도 쟤는 손님이라구요.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좀 피곤하네요. 만성피로인가 봐요.”

“네 나이에 무슨 만성 피로야. 솔직하게 얘기해 봐. 밤마다 누구 만나지? 요즘 분위기도 확 바뀐 게, 드디어 사랑을 하는 거 아냐? 남자가 이렇게 차분해지는 건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했을 때뿐이라고.”

이유는 달랐지만, 사장의 눈은 정확했다. 요즘 겪고 있는 일은 내 존재를 매번 확인하는 일이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내 존재를 깨닫고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그 죽음에도 꽤나 익숙해졌지만, 그의 정신이 끊어질 때는 여전히 두렵고, 내 존재가 사라지는 건 생각하기도 싫었고, 깨어나 다시 내 방인걸 알았을 때는 깊은 안도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말이 없어진 것도 당연했고, 피곤해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그만큼 심력을 급격하게 소모하는 경험이었다. 하루하루 겪게 되는 죽음도 그러했지만, 벌써 20일이 넘어가는 이 퀘스트 자체도 사람을 힘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런 경험 덕분에 요즘 변했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죽음을 코앞에서 겪은 탓인지, 알게 모르게 변한 것들이 좀 있나 보다. 스스로는 잘 인지하지 못했다. 내가 인지할 있는 거라곤, 그냥 지금 자지 않는다는 것 정도? 잠에 들면 퀘스트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지만, 피곤하지도 않는데 잠을 자는 것, 지루하다는 이유 잠을 자는 게 너무나 아까웠다.

카페에 흐르는 음악을 듣고, 창밖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고, 예지의 연필이 움직이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내 마음대로 생각할 수 있었고,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손에 힘이 들어가고, 발을 떼어 앞으로 옮길 수 있다는 건 정말로 행복한 일이었다. 겪기 전에는 몰랐는데, 겪고 나면 알게 된다. 그 기쁨을, 행복을.

그런 면에서는 많은 변화가 있었을지 모르겠다. 피곤하긴 했지만, 이런 걸 인격적인 성장이라고 해야 하나?

“아닙니다. 요즘 공부한다고 바빠요. 사장님도 요즘 대학생들이 얼마나 바쁜지 아시잖아요? 만나긴 제가 누굴 만나요. 학교랑 이 카페 말고는 아는 데도 없는데. 잘 아시잖아요?”

“그래도 밤은 젊은이의 시간이지. 여기서 조금만 나가면 밤에도 꺼지지 않는 장소들이 많은데 말이지. 피곤하다는 건 거기 가서 한바탕 노는 거 아니야. 여기서는 프로게이머인 척하지만, 실상은 밤의 황제라든가?”

이 사람이. 이건 나를 타깃으로 하는 게 아니다. 그도 안다. 내가 이런 말에 혹하지 않는다는 거. 처음에는 그런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냥 웃어넘길 수도 있고, 반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예지는 달랐다. 지금 완전히 경직하고 있었다. 좀 전까지는 책이 넘어가고 있었는데, 지금은 책도 멈추고, 무릎도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쟤 수능이 이제 코앞인데. 이 사장은 대체 무슨 심보야?

“아닙니다. 제게는 일단 예약되어 있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 사람부터 만나봐야죠. 저는 사장님과 달리 예의를 아는 사람이거든요. 제가 한 말은 끝까지 지킵니다.”

내 말에 예지가 눈에 띄게 움찔했다. 머리카락 사이로 얼핏 보이는 귀가 빨개진다. 옆을 보니 사장도 그걸 같이 보고 있었다. 눈빛으로 사장에게 그만 좀하라고 말했다. 이내 내 쪽을 본 사장도 나에게 눈빛을 보냈다. '이 재밌는 걸 왜 그만해.’ ‘쟤 좀 있으면 수능이라고요.’ ‘어구, 언제부터 남 신경을 그렇게 쓰셨을까?’ ‘저도 고3 시절이 있었는데 그 정도는 당연하죠.’ ‘벌써부터 팔불출이냐? 그러면 나중에 잡혀 산다?’ ‘어쨌든 그만해요.’

……라는 긴 눈빛 교환을 하고 나니, 사장님의 장난질이 멈췄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울리는 사장님의 핸드폰 때문이었다.

“어, 잠깐만…….”

그래도 개인 전화는 밖에 나가서 받는 사장님. 그 사장님을 바라보다가 다시 예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침 그녀도 나를 보고 있었고, 우리 눈이 마주쳤다. 슬쩍 웃어주었다. 그녀는 처음처럼 어떤 행동도 못하고 얼굴을 붉힌 채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솔직히 이해는 안 갔다. 내 얼굴이 그렇게 잘 생긴 것도 아니고 말이다. 하지만 이해가 가든 안 가든 그런 반응을 보면 즐거워지는 게 당연지사. 손으로 파이팅 포즈를 취했다.

“힘내, 잘 할 거라고 믿어.”

“아……. 네, 네! 열심히 할게요!”

그녀는 내 말에 큰 소리로 화답했다. 밖에 있던 사장이 뭔 소린지 쳐다볼 정도였다. 그녀는 스스로도 깜짝 놀라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붉어진 목이 보였다. 참, 즐거운 시간이었다. 마음 한편엔 퀘스트에 대한 공포가 여전했지만, 거기서 나를 분리시키는 것 정도는 이제 익숙했다.

길을 찾은 건 그로부터 10여일이나 더 지난, 11월의 첫날이었다.

+ + +

이번에도 또 막다른 길인 줄만 알았다. 그의 지팡이가 벽을 툭툭 쳤다. 평소와 같은 둔탁한 음이 날 줄 알았다. 별다른 기대도 없었다. 기대를 가지는 순간, 실망을 하게 되고, 실망은 나를 냉정에서 벗어나게 한다. 그럼 바로 죽음이었다. 어느새 40일 째, 이제 조금은 버틸 수 있게 되었지만, 그래봐야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건 5분이 채 안됐다.

그런데 속이 텅 빈 듯한 공명음이 들려왔다. 어라? 이게 무슨 일이지? 안이 비었다는 이야긴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내가 그런 고민을 하는 동안, 그가 알아서 움직였다. 그의 지팡이에서 하얀 빛이 꺼지더니, 이번엔 붉은 빛이 피어올랐다. 불꽃은 바로 지팡이를 떠나 벽에 부딪혔다.

쾅.

폭발이 일어나고, 바람이 불고, 먼지가 일었다. 지근거리에서 터진 폭발에 타격을 입었지만,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뭐, 허기를 버티고 서 있는 정신력이라면 그 어떤 타격에도 끄떡없는 게 당연했다. 그래도 조금 떨어져서 하지.

‘찾아야 돼.’

그의 머리에는 여전히 그 생각밖에 없었다. 스스로의 안위 따위는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버틸 수 없으니까.

폭발에 벽이 부서졌다. 먼지가 가라앉고, 안을 확인하기도 전에 그는 안으로 들어갔다. 먼지 속을 터벅터벅 들어간 그 곳에는 넓은 공간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전의 어둡고, 울퉁불퉁하던 곳과는 차원이 다른 곳이었다. 안은 밝았고, 매끈해서, 사람의 흔적이 가득한 곳이었다. 아니 사람의 흔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완벽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공동을 다 채우고 있는 거대한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 작품 후기 ============================

여러분의 작은 관심이 작가에게는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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