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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개의 퀘스트-13화 (13/160)
  • 13화

    [퀘스트를 깨고 보상을 받으세요! 100개의 퀘스트를 깰 수 있다면 당신은 이 세상의 영웅이 될 것입니다!]

    [마음의 준비가 되셨다면 ‘시작’이라고 말씀해 주세요. 두 번째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또 들어왔다, 이 세계에. 두렵다. 무엇이든, 그것이 육체든 정신이든, 그냥 쓰잘데기 없는 잡생각이든 상관없이 빨아들이는 공허, 그 공허에 다시 내 모든 것을 내어주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두렵다. 단 한 번뿐인 기억이었지만, 다시 겪고 싶지 않을 정도로 강하게 새겨져 있었다. 내 모든 것이 하나씩, 하나씩 사라져가는 느낌.

    그리고 끝내는 내 생각까지 멈추고,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사라진다. 그저 한 번에 끝이라면 괜찮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죽음은 한 번에 하나씩, 단계를 밟아 나를 갈아먹었다. 그게 진짜 무서웠다.

    주위에 누구도 없다는 것. 죽음조차도 이렇게 외롭지는 않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외로웠다. 그곳에서 나는 혼자였고, 내가 만들어낸 허기에 빠져들었고, 나를 내주고 말았고, 거기에 저버렸다. 누군가가 있다면, 누군가가 있다면 뭐라도 할 수 있을까? 첫 번째 퀘스트처럼 동료들이나 부하들이 있었다면 조금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죽어가는 게 외롭지는 않겠지.

    거기에 지금은 내 정신 자체가 피폐해져 있었다. 하루 종일 이 긴장감과 씨름하다보니 정신 줄이 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져서, 아직도 멍했다. 이 상태로 들어가면 분명 1분도 버티지 못하고 허기에 휩쓸릴 것이다.

    그게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그냥 좀 멍하니까, 그 고통, 그 깊음, 그 외로움이 잘 안 느껴질 수도 있었다.

    아니면 그냥 ‘시작’이라고 하지 말까?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걸까? 이대로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깨어나는 걸까? 조금 전에는 분명히 그랬지만, 그건 굉장히 짧은 시간이었으니까. 시간이 한 시간, 두 시간, 혹은 열 시간이 넘어가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강제로 시작될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 열 시간을 견딜 수 있을까? 이 상황, 몸은 움직일 수도 없고, 감각이라고는 시각밖에 느껴지지 않지만, 여기 있는 것만으로도 허기가 떠오른다. 그 공포가 되살아난다.

    잘 수 있다면, 그냥 자고 싶다. 지금 이 상태에서는 잘 수 없을까?

    잠을 청해 본다. 하지만 눈이 감기지 않는다. 시각이 계속 정보를 뇌 속으로 보내오고 있었다. 내 지팡이에서 나는 작은 빛과, 어두운 공간이 보이는 게 다였지만, 눈을 뜨고 자는 일은 카페에서도 해본 일이 없어서, 도무지 잘 수가 없었다.

    거기에 퀘스트 메시지, 내가 ‘시작’이라고 하지 않은 한은 사라지지 않는 그 메시지는 시각 정보와는 좀 달랐다. 내 정신, 영혼에 직접 들어오고 있는 것만 같았다. 머리는 자고 싶다고 계속 외치는데, 그 메시지가 계속 내 머리를 치니까, 강제로 깨어나 있는 느낌이다.

    일단 시작을 해야 하나? 그럼 고통 뒤에는 편하게 잘 수 있겠지? 물론 잠을 참는 게 훨씬 덜 고통스럽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10시간 쯤 이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더 미쳐 버릴지도 모르겠다. 허기는 그래도 한 30분 정도만 견디면 되니까.

    아, 시작하고 바로 자면 괜찮지 않을까? 그리고 그러면 혹시 다시 원래 세상으로 돌아오는 거 아닐까?

    이건 실험해 볼 가치가 있다. 현실에서 잠에 들어 이 세계로 들어오는 거라면, 그 반대도 충분히 가능할 테니까.

    그런 생각 반대편에서는 여전히 공허를 두려워하고, 거부하는 ‘나’가 있었지만, 결국 내 정신은 당장의 고통에 과거의 아픔을 무시해 버리고 말았다.

    “시작.”

    감각이 하나씩 활성화 되었다. 여전히 추웠다. 여전히 힘이 없었다. 여전히 배가 고팠다. 이번엔 모든 게 어제보다 빠르게 진행됐다. 한 번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피곤했다. 몰라, 잘래. 그냥 잘 거야. 자고 싶어. 내 정신은 잠을 요구하고 있어. 배고프지? 배고파도 잘래. 이 몸은 내 몸이 아니다. 이 몸은 내 몸이 아니다. 이 몸은 내 몸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 허기도 내 것이 아니다. 내 것이 아니……다.

    ……….

    ……….

    베르트랑과 함께 움직일 때도 그러했지만, 그 몸을 완전히 나 혼자만 움직인다고 할 수는 없었다. 내 기억과 내 감정만으로 움직이는 거였으면, 그의 몸을 제대로 쓸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기억이 나와 함께한다는 것부터가 모든 걸 모호하게 했다. 나는 그인가? 그의 기억을 알고 그의 감정을 공유하고 있으니까 그렇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은가?

    대충 말하면 다중 인격 중에 하나처럼 그 몸을 움직이고,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가 주도권을 잡을 때도 있고, 내가 주도권을 잡을 때도 있었다. 물론 그는 내 기억과 생각을 읽지는 못하는, 일방적인 관계지만.

    그러니 내 정신이 잠에 들었다고 그 몸이 움직이지 말란 법은 없는 것이다. 애초에 정신이 피로하다는 것도 내 입장에서는 잘 이해가 안 되지만.

    움직인다. 움직이고 있다. 나는 완전히 관찰자로 돌아갔다. 첫 번째 퀘스트에서는 이런 일이 거의 없었다. 베르트랑에게 주도권이 넘어가면 거의 바로 죽었으니까. 관찰하고 자시고할 새가 없었다. 나는 계속 주도권을 쥐고 있어야 했고, 베르트랑의 폭주를 견제해야 했다. 내 아래에 두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멀찍이 서서, 그 허기에 사로잡히지 않을 정도로 멀찍이 서서 내 몸이 움직이는 걸 느끼고 있었다. 몸은 천천히 움직였다. 한 발 한 발 움직이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러나 멈추지 않았다. 단 한 순간도 쉬지 않았다. 손발이 덜덜 떨고 있으면서도 계속 걸어갔다. 그건 허기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한 몸부림일까, 아니면 애초에 그래야할 이유가 있는 걸까?

    그는 애초에 왜 이곳에 있는 걸까? 이쯤이면 상황 설명이 나올 때도 됐는데, 시스템은 아직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고 있었다. 그런 거 없다고 해도 깰 수 있다는 이야기인가?

    기다렸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다시 내가 주도권을 잡으면 금방 죽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건 아무런 변화가 없다. 지금 내 정신력으로는 그 허기를 버틸 수가 없었다. 계속 이 죽음을 반복한다면 언젠가는 견딜 수 있겠지만, 몇 년이나 지나야만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될 수 있다면 이대로 해결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하지만 그럴 리 없겠지. 그랬다면 내가 이곳에 와서 이렇게 관찰하는 일 따윈 없을 테니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일단은 관찰이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방향을 잡을 수 있으니까.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내가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것까지 포함하면 꽤 시간이 흐른 셈이다. 모르겠다. 그냥 내가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하는 지도. 시간이 없으니까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그 긴 시간동안 끊임없이 움직이던 그의 앞에, 나의 앞에 장애물이 나타났다. 막다른 길인 것이다. 아직 이름도 모르는 그 남자, 기억을 읽으면 그 허기도 같이 느껴질까 봐 머뭇거리게 만드는 상황에 처해 있는 그 남자가 지팡이를 들어 벽을 툭툭 쳤다. 아마 진짜 막혔는지 확인하는 것 같았다. 보기에는 막혀 있었지만, 이곳은 다른 세계니까. 환영일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 벽은 완전히 막혀 있었다. 안이 텅 빈 것 같은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는 실망한 기색도 없이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왔던 길을 되돌아나갔다. 어느 지점까지 되돌아나 온 그는 좀 전과는 다른 길로 들어갔다. 이곳은 갈림길이 많았다. 천장은 어느 높이인지도 모르겠고, 그 넓이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체감시간으로 서너 시간 걸었는데, 겨우 막다른 길이 나왔고, 그 사이에 십여 개 이상의 갈림길이 있었다. 그 중에는 5개 이상으로 갈래진 길도 있었다.

    새로운 길에도 갈림길이 있었다. 그는 왼쪽을 선택해서 걸었다. 그 안도 아무도 없는 울퉁불퉁한 자연 동굴 벽, 아무 소리도 없는 통로가 이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몸이 멈췄다. 무슨 일이지? 하는 순간에 몸이 앞으로 넘어졌다. 이제 진짜 육체의 한계가 온 것이다. 아니, 정신의 한계인지도 모르겠다. 옛날 옛적에 한계에 다다른 육체를 움직이던 정신, 끝을 모르던 그 정신의 힘이 다한 것 같았다. 그래서 멈추지 않을 것만 같던 육체가 정지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바톤은 나에게로 넘어왔다.

    “…….”

    이런 결말을 예상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결국, 결국 이렇게 되고 마는 군. 버텨 보려 했다. 허기가 만들어내는 강력한 인력에 버텨보려 했지만, 붙잡을 게 없었다. 그, 아직 이름도 모르는 그가 붙잡은 건 뭐였을까? 스스로 홀로 설 수는 없었다. 뭐라도 붙잡을 게 있어야 했다.

    고통은 아니었다. 그냥 괴로움, 외로움. 감정조차 빨려 들어가는 공허, 그 거대한 검은 입, 소용돌이 앞에서 나는 없어져 갔다.

    + + +

    “…….”

    눈을 뜨니 익숙하지 않은 벽지가 보였다. 내 방은 민무늬 벽지였고, 여기도 민무늬 벽지인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색이 달랐다. 하늘색인 내 방에 비해서, 여기는 누런 흰색이었다. 청소 좀 하지. 그러나 누워서 침 뱉기였다. 이곳 청소는 내 담당이기도 했으니까.

    이곳은 아마도 카페에 있는 수면실. 조그만 카페에 왠 수면실인가? 당연한 의문이다. 하지만 게으른 사장에게 당연하지 않은 거였다. 그는 카페에 와서 편히 자는 것도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사장 전용인 이곳은 그만큼 아늑하다. 작은 카페에 딸린 작은 방이었지만, 일터 속에 있는 쉬는 공간, 그것도 누워서 쉴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정리는 잘 안 하지만, 한 번씩 정리할 때마다 누워서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솟아오르는 그런 곳이었다. 드디어 이곳에 누워보다니, 기쁘긴 했다. 억지로 더 기뻐했다. 그 기쁨이 내 마음을 채우도록 더 빠져들었다. 내 마음에 남아 있는 허기를 지우기 위해서.

    누런 벽지를 보면서, 한참동안이나 누워 있었다. 얼굴은 미소를 지었지만, 속은 전쟁과 같았다.

    진정이 된 건 한참이나 지난 후였다.

    일어나 볼까? 머리가 안 부딪히게 조심히 일어나서, 문을 열었다. 끼이이익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내가 일부러 이런 소리가 나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 소리에 내가 사장이 밖으로 나온 걸 알 수 있게 말이다. 그는 매번 기름칠이라도 하라고 하지만, 나는 기름이 없다는 이야기로 받아쳤다. 그가 사오면 어떻게 치기는 해야겠지만, 귀차니즘의 화신인 그가 그럴 리가 없었다.

    가게는 의외로 밝았다. 시간을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대략 12시가 넘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사장이 나 때문에 오늘 가게를 쉬었든, 쉬지 않았든지 상관없이 가게는 어두워야 했다. 가게 밖이 어두운 정도를 보면, 내 예상이 틀리지는 않아 보였는데, 가게는 평소와 같이 밝았다.

    무슨 일이지 하고 가게를 돌아보는데, 구석 테이블, 예지의 전용 석에 예지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자고 있다가 문 여는 소리에 깬 모양이었다. 나를 쳐다보는 얼굴에 눌린 자국이 있었다. 찰싹 달라붙어 있는 머리카락도 보였다. 이마도 빨갰다. 예쁘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망가진 얼굴이니까. 그런데 그게 또 귀여워 보였다. 날 좋아한다는 한 마디에 콩깍지가 쓰인 걸까?

    초점 없이 멍한 눈에 서서히 초점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책상 위에 올라가 있던 안경도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그러고서야 그녀는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귀가 빨갛게 변했다.

    “이, 일어나셨어요?”

    “응. 그런데 왜 네가 여기에 있어?”

    “공, 공부하려고요. 집에서는 잘 안 되거든요.”

    “그래?”

    방금 그게 공부하는 거였냐,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시간을 확인해보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벌써 2시. 11시 반쯤에 돌아가는 그녀에게는 많이 늦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너무 늦은 거 아냐? 나 깨워서 돌아갔어야지.”

    “아, 그게 조금, 저도….”

    머리 정리는 대충 끝낸 듯싶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더 캐묻는 건 무리인 것 같았다. 그녀의 귀가 터질 것 같고, 짐을 챙기는 그녀의 움직임이 무지막지하게 빨랐으니까.

    “그럼 저는 갈게요.”

    “잠깐, 데려다 줄게. 이 시간에 돌아다니는 건 좀…….”

    “아니에요. 집 바로 옆이니까요. 괜찮아요. 말씀만 고맙게 받을게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큰 목소리, 다급한 목소리, 빠른 움직임. 모두 오늘 처음 보는 것들이다. 그래서 더 눈에 들어왔고, 귀여웠다. 귀여운 것만으로 사귈 순 없다만, 그럴 수 있다면 이미 합격에 합격을 찍고도 남음이 있었다.

    진짜 괜찮으려나? 하긴, 이런 걱정은 이미 예전부터 했어야 했지. 원래 돌아가던 시각이 11시가 넘어서였는데.

    그나저나, 이제 집에 가서 또 자면, 다시 시작하게 되는 건가? 방금 나왔는데……, 젠장.

    ============================ 작품 후기 ============================

    여러분의 작은 관심이 작가에게는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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