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개의 퀘스트-12화 (12/160)
  • 12화

    <공허>

    [퀘스트를 깨고 보상을 받으세요! 100개의 퀘스트를 깰 수 있다면 당신은 이 세상의 영웅이 될 것입니다!]

    [마음의 준비가 되셨다면 ‘시작’이라고 말씀해 주세요. 두 번째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완전히 다른 장소, 완전히 다른 시간, 완전히 다른 사람. 아마도 다른 세계. 예상대로 베르트랑과는 이별인 것 같았다. 내 눈에는 철갑을 두른 말머리도 보이지 않았고, 건틀릿을 끼고 있는 손도 보이지 않았고, 옆을 달리고 있는 말들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들고 있는 지팡이에서 나는 하얀 빛으로 조그맣게 밝혀진 공간에는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내 뒤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앞은 그랬다. 그리고 그 공간 앞에는 완전한 어둠이었다. 빛이 없으면 절대로 볼 수 없는 공간이 내 사방으로 펼쳐져 있었다.

    여긴 어딜까? 내가 들어온 이 몸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 걸까? 땅과 눈 사이의 높이만 봐도 베르트랑이 아닌 건 한 번에 알 수 있었다. 베르트랑은 이것보다 컸다. 그리고 베르트랑이 검을 가지지 않고서 움직일 리도 없었다. 내 뻗은 손에는 지팡이 같은 것만 하나 들고 있을 뿐이었다.

    퀘스트를 시작하기 전에 정보를 모을 수 있을까 하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딱히 짐작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정보를 모을 수 있는 감각이라고 해봐야 시각밖에 없고, 고개를 돌려서 시야를 조정할 수도 있는 게 아니니 당연했다.

    일단 시작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처음이니까, 가볍게 정보를 얻는다는 심정으로 가자.

    “시작.”

    추웠다. 가장 먼저 느껴진 감각이었다. 두터운 로브, 노숙 시엔 이불 대용으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두꺼운 로브를 입고 있는데도, 온 몸이 덜덜 떨렸다. 이공간의 한기를 막을 수가 없었다.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움직이는 것도 아니지만, 날이 선 한기가 내 빈틈을 파고들었다.

    감각이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베르트랑에 들어갔을 때는, 온갖 정보가 다 들어왔었다. 말의 숨소리, 말이 느끼는 진동, 땅의 감촉, 옆을 달리는 기사들의 존재, 바람의 방향 등 오감이 모두 증폭되어서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에 비하면 이 사람의 감각은 나랑 비슷한 수준이었다. 어둠을 꿰뚫어 볼 수도 없었고, 빛 너머에 뭐가 있는지도 느낄 수가 없었다. 오로지 지팡이 위에서 빛나고 있는 빛이 닿는 범위 안만 내 감각 안에 들어와 있었다.

    동굴인가. 십여 일을 동굴 속에서 뒹굴다 보니, 지금 이곳이 동굴 비슷한 곳임은 감이 왔다. 공기가 눅눅하다고나 할까, 환기가 잘 되지 않아 정체되어 무거운, 그러나 날카로운 찬 공기. 동굴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밀폐된 공간임은 틀림없다.

    움직여 볼까. 아니, 그전에 이 추위를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 건가? 이대로 있다간 얼어 죽을 것 같은데. 지금도 온 몸이 제대로 움직이는 것 같진 않았다. 게다가 힘도 제대로 줄 수 없었다. 뭐야, 이거 왜 이렇지?

    그리고, 배가 너무나도 고팠다.

    "흐아어."

    목으로는 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완결된 소리가 나와야 하는데, 비명이 나오다가 도로 들어갔다. 그보다도 문제는 배고픔이었다. 살면서 이런 허기는 처음 느껴본다.

    뱃가죽과 등가죽이 나뉘어져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원래 그사이에 애증의 뱃살이 존재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몸을 지탱할 근육만 겨우 남아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상체를 버티고 있었다. 그 공간으로 내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깨닫기 전에는 몰랐지만, 깨닫고 난 후에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허기는 블랙홀처럼 내 전부를 빨아들였다. 팔을 바쳐도 사라지지 않았고, 다리를 바쳐도 사라지지 않았다. 폐도 끌려가서 생을 마감했고, 귀와 눈도 그 허기에 갇혀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탐욕스러운 허기는 그러고도 만족하지 못했고, 심장과 뇌를 삼키려 준비하고 있었다. 심장이 먼저냐, 뇌가 먼저냐, 탐욕의 화신인 허기는 주저하지 않았다. 허기는 둘을 동시에 삼켰다. 주위를 밝히던 작은 불빛은 그 순간 꺼졌고, 내 몸은 텅 빈 공동이 되었다.

    허기는 또 요구했다. 그러나 이제 나 말고는 내어줄게 없었다. 결국 나도 그 구멍 속으로 끌려들어갔다. 그러고도 그 공허는 만족하지 않았다. 주위의 어둠을 끝없이 끌어당겼다. 어둠이 끌어당긴다고 없어지는 것인가? 그리고 먹는다고 배가 부르든가? 허기는 그렇게 기 싸움 아닌 기 싸움을 시작했다. 서로 차원이 다른 것을 모르고.

    나는, 그렇게 죽었다.

    + + +

    "……."

    눈을 뜨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내 배를 만지는 거였다. 내 배는 어제처럼 그곳에 잘 자리 잡고 있었다. 다행이다. 없어진 줄만 알았다. 조금 전까지 느끼던 그 공허가 아직도 남아 있어서, 내 몸이 내 몸 같지가 않았다. 한참을 기다리고서야, 그 끔찍한 감각이 사라졌다. 이런 게 아사인가? 죽음에 이르는 부상은 고통이 없던데, 이건 왜 이렇게 생생하지? 부상이 아니라서? 아니면 그런 때는 한 번에 죽어서 그런가?

    하루 정도 굶어본 게 최대였던 나에게는 굉장히 끔찍한 일이었다. 한 40일? 그 정도는 굶은 것 같았다. 그런데도 몸의 주인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내가 그 몸에 들어갔을 때에 빛을 유지하고 있었던 게 그 증거다. 내가 배고픔에 휩쓸리자마자 빛은 힘을 잃었고, 나는 죽어 버렸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베르트랑의 감정을 견디는 건 이거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역시 사람은 몸의 지배를 받는 동물이었다. 배가 고프면 슬프고 기쁘고 행복한 게 별로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또 아니었다. 내 몸의 주인, 아직 이름도 모르는 그 주인은 그 상황을 견디고 있지 않은가? 조금만 정신이 흐트러지면 죽어버리는 상황에서 앞으로 움직이려고 하지 않은가? 도대체 왜?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지?

    그리고 난 어떻게 하면 될까? 이번 퀘스트는 아직 목적도 나오지 않았는데……, 길이 보이지가 않았다.

    + + +

    고백을 받고나니, 여고생, 예지를 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워낙 할 일이 없으니까, 전에도 그게 주 업무이긴 했는데, 요즘은 더 집중하게 된다.

    화장과 머리스타일은 그 날 한정이었는지, 예지는 다시 안경에 민낯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예쁘다는 소리는 들을 만 했다. 화장한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어서 그런 걸까? 하얀 예지의 얼굴에 이런저런 화장을 하면 진짜 예뻐지겠구나 하는 상상이 쉽게 돼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자, 여기, 열심히 해."

    "아, 네. 감사합니다……."

    늘 마시는 아메리카노, 9월인데도 아직 더운 이 땅의 날씨 때문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예지의 테이블 위에 살포시 올려놓았다. 원래 이런 말을 하는 다정한 남자는 아니지만, 나를 좋아하는 어린 양이 잘 되길 바라는 건 인지상정. 잘 되면 나 같은 거 쳐다도 안 볼 것 같지만, 그건 또 그것 나름대로 이야기 거리가 될 테니.

    그녀는 공부에 빠져 있다가, 쟁반이 탁자를 치는 소리에 내 손을 보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내 상체를 훑고, 내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내 눈과 안경 너머의 큰 눈동자 두 개가 마주쳤다. 내가 독심술사도 아니고, 그 눈을 보고서 무얼 알아낼 자신은 없지만, 나를 좋아한다니까 그 눈이 참 사랑스럽게 보였다. 나도 참 쉬운 남자다. 변명을 해보자면 이제껏 모태솔로로 지내왔던 세월이 이 기회를 꼭 잡으라고 소리치고 있다고 말해주겠다.

    그리고 이 아이, 보면 볼수록 예쁘다. 바리스타 누님도 예쁘지만, 이 아이가 더 이쁘다. 어린 아이답게 피부에서 우위를 가져가고, 안경으로 보호되는 눈, 아직 때타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결정타를 날렸다. 남자란, 보통 깨끗한 설원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그 자신이 백지 같은 상태라면 더더욱.

    그런 마음이 내 얼굴에 자연스러운 표정을 만들어냈다. 씨익하고 웃었다. 그러니까, 너무 재밌다. 예지의 얼굴이 천천히 빨개졌다. 눈을 떼면 될 텐데, 무슨 이유에선지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굴이 시뻘게질 때쯤에야, 급하게 고개를 팍하고 숙였다.

    "고, 고맙습니다."

    인사는 아까 했는데, 뭐가 고맙다는 걸까? 라며 능글맞게 되받아치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고3에게 너무 심한 장난은 치지 말도록 하자. 빨간 귀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대 만족이니까 말이다.

    보면 볼수록 귀엽다. 그래서 놓치고 싶지가 않다. 그녀의 마음이 그저 그녀의 스트레스에 기대어 증폭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 끝이 뻔히 보여도, 그냥 놓치고 싶지가 않았다.

    그 뒤로도 계속 예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열심히 공부하다가도 한 번씩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았는데,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면 이도저도 못하고 아까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래도 다행이다. 공부에는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아이, 놓치기가 너무 아쉽다.

    + + +

    어제의 수련이 끝나고 난 뒤의 느낌은 이랬다. ‘아, 내일은 꼼짝도 못하겠구나.’ 그러나 큰 문제는 없었다. 온 몸이 뻐근하긴 했지만, 수업도 무리 없이 들었고, 알바 하는 것에도 별다른 지장이 없었다. 밤이 되자 다시 수련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기까지 했다. 라이트닝 소드의 효용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한바탕 수련을 하고, 쓰러지듯 잠에 들 뻔 했지만, 어제 밤의 기억이 떠오르자 벌떡하고 일어나 버렸다. 내 몸에도 손가락하나 까딱할 힘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디서 이런 힘이 나는 지 잘 모르겠다. 그만큼 아사의 경험은 무서웠다. 다시 겪기 싫었다.

    그러고 나니 오늘 내가 얼마나 한심한 짓을 했는지 떠올랐다. 생각조차 하기 싫어서, 오늘은 그에 관해 떠올리지도 않았다. 수업 때는 웬일로 교수님 강의에만 집중을 했고, 알바를 할 때는 계속 예지만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한심한 일이었다. 그녀가 나를 스트레스의 도피처로 삼은 것처럼, 나 역시 그러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는데, 쉬운 일이 아닌 게 보이니까 그냥 덮어두고 있었다. 회피했다. 그래봐야 잠을 피할 수든 없는데.

    어떻게 할까.

    사실 답은 간단했다. 정신력으로 버티면 되니까. 그래, 그거 말고 방법이 있을까? 내가 음식물을 가져갈 수도 없으니, 무슨 수를 쓰든 정신을 부여잡고 육체를 통제하고, 움직여 내야만 했다.

    하지만 두려웠다. 도저히 익숙해져 질 것 같지 않았다. 감정은 순간적이라 그 순간만 피하면 됐지만, 이 고통은 그렇지 않았다. 감정의 폭발만큼 그 여파는 말도 안 되게 큰데, 끝이 없다. 죽기 전까지 계속된다.

    고통의 크기라는 측면에서 보면 키메라의 공격이 주는 아픔이 더 컸지만, 내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가는 이 체험은 차원이 다른 고통이었다. 종류가 달랐다. 그래서 그런지 시스템에서도 막지 않았다. 한 번에 죽음에 이르는 고통이 오는 게 아니라, 작은 고통들이 쌓이고 쌓여서 죽음이 되는 식이라서 그런 걸까.

    그래도 잠을 안 잘 수는 없다. 하지만 애써 잠을 취해 봐도, 다시 벌떡 일어나는 일이 반복됐다. 결국, 한 숨도 자지 못하고 아침이 밝았다.

    + + +

    "야, 강민, 너 걷는 거야, 자는 거야?"

    오늘은 웬일인지 사장이 나를 반겨주었다. 바리스타 누님께 무슨 일이 있나? 어제는 아무 말이 없었던 것 같은…….

    "야, 너 그래서 일은 하겠냐? 어제 밤새서 게임 했지? 너 우리 가게 손님 없다고 그렇게 시위하는 거냐? 그게 알바생의 자세야?"

    구구절절이 옳은 말씀이라 변명할 말도 없고, 변명할 힘도 없었다.

    "……죄송합니다."

    "……왜 이렇게 순순해? 너 일은 하겠냐? 오늘 무슨 날인가? 둘 밖에 없는 직원이 전부 골골 앓다니. 이런 일이 없었는데……."

    그 순간, 서서 잠에 들고 말았다. 하루쯤 안 잘 수도 있지만, 자면 안 된다는 스트레스, 자면 겪게 될 고통에 대한 두려움으로 신경이 너무 쇠약해져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늘 자던 환경, 카페와 사장님의 잔소리에 그냥 습관적으로 잠에 빠진 것이다.

    + + +

    메시지는 보였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시작이라고 하는 순간 그 고통이 시작될 것 같았다. 신경 쓰지 말자고 계속 되뇌어보지만, 그게 가능할 리 없으니까.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다시 정신이 들었다.

    + + +

    "민아, 야, 민아! 정신 차려!"

    "아, 네? 아……."

    메시지가 사라지고 사장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 답지 않게 굉장히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내가 쓰러지면 아무렇지 않게 내다 버릴 것 같았는데 그 정도는 아닌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잠을 못 자……서"

    "안 되겠다. 너 일단 저기 들어가서 좀 자. 한두 시간 자고 일어나서 오늘 가게를 접을지 말지 생각해보자."

    "아니에요, 제가…할…."

    "그냥 자라고 할 때 자라…."

    안되는데……, 자면 안 되는데……, 꿈에 들었다가 깨어날 수도 있다는 걸 알았지만, 이번에 들어가면 분명 시작이라고 하고 말 것 같은데…….

    ============================ 작품 후기 ============================

    여러분의 작은 관심이 작가에게는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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