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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개의 퀘스트-11화 (11/160)
  • 11화

    다행히, 내 등에서 날개가 다시 돋아났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다. 자신보다 어린 소녀에게, 그것도 귀여운 소녀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은 당연한 거다. 남자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거였다. 허세라고 해도, 허세라도 부리고 싶은 게 남자의 마음. 그런 허세,‘여자 친구가 있다’라는 허세를 간파당한 나는 침몰했다.

    그리고 그러했기에, 지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이 여고생이‘저랑 사귀지 않으실래요?’란 말을 먼저 했다면, 모태 솔로이자, 고백 받은 적이 없는 나는 기분이 플러스가 되어서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나를 먼저 침몰시켰기에, 그 말을 듣고 나서도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 냉정히 사고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건 그냥 지나가는 이야기다.

    흔히 있는 이야긴가? 현실에서는 잘 모르겠지만, 인터넷에서나 만화, 드라마 등에서는 흔히 있는 이야기인 것 같다. 익숙하니까. 어디서 봤는지는 기억이 안 나도 익숙했다. 심지어는 나도 겪은 일이었다. 스트레스가 많은 상황, 이른바 그녀처럼 고3이라면 그 스트레스에 대한 반발심 아무나 좋아하게 될 수가 있다.

    나도 그랬다. 공부에 대한 압박이 심했던 고등학교 때, 그 압박에 대한 탈출구로 누군가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그 마음이 진짜인 줄 알았다. 하지만 모든 게 끝난 지금은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건 가짜 마음이었다. 나는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다. 그러니까 내 인생은 공부에 갇혀서 사는 게 아니다. 나는 청춘을 누리고 있다. 그런 말을 하기 위해서 내가 만들어낸 마음이었다. 스트레스 상황이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 마음은 사라진다. 나 같은 경우는 게임을 했다. 결국 여자 친구 보다 게임이 훨씬 재밌었다는 이야기다.

    그녀는 고백을 하고 얼굴을 붉힌 채로 서 있었다. 얼굴이 터질 것 같다. 누가 보면 완전 진심인줄 알 것이다. 내가 봐도 진짜 진심으로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문제였다. 냉정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속아 넘어가버렸겠지만, 지금과 같은 냉정한 상태, 베르트랑의 감정도 밀어내던 이 상태에서는 훤히 보였다.

    그녀가 저렇게나 나를 좋아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카페의 손님이었고, 나는 알바생일 뿐이었으니까. 6개월을 넘게 얼굴을 보고 지냈지만, 그게 다였다.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저렇게 좋아할 수 있다는 건 성립되기가 힘들었다.

    그냥 조금 수줍은 느낌으로 말했으면 수긍했을 수도 있는데, 이건 아니었다. 이런 진심, 그 눈에서 레이저가 나올 정도의 진심이 성립되려면, 6개월 간 나를 가지고 수많은 망상을 했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를 만나지도 않았는데, 나를 머릿속에서 만들어서 좋아했다는 이야기다.

    그런 망상은 오래갈 수 없다. 만나자마자 끝이다. 내가 상상의 사람과 다른 사람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끝나 버린다. 내 경험이니 확신할 수 있었다. 어쩌면 내가 상상의 사람과 다르다는 걸 부정하며 오래 갈 수도 있지만, 그건 그것대로 불행한 일이다.

    실망이 컸다. 그러니 이렇게 구구절절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거겠지. 내 인생 처음으로 받은 고백이고, 이제 봄날이 펼쳐질까 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선고가 내려졌다.

    “…….”

    예지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빨간 사과, 홍옥과 같은 얼굴을 하고서 두 손을 꼭 잡고 있었지만, 그 눈은 다른 곳이 아니라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결과적으론 나에게 호감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면에서는 기뻤다. 오늘 보니 상당한 미모를 자랑하고, 그 전에도 성실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었으니까, 그런 사람이 자신에게 호감이 있다는 걸 싫어할 사람은 없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아, 몰라. 기쁨은 기쁨이고, 실망은 실망이고, 대응방안은 대응방안이다. 어떤 게 됐든 이럴 때 할 말은 정해져 있다. 그녀는 아직 고3, 그리고 고3이니까. 그리고 나는 어른 코스프레 하는 대학생이니까.

    대답을 정하고 나서, 신선한 경험 후에 날뛰는 감정들을 정돈했다. 베르트랑과 함께 지냈던 일이 큰 도움이 되었다. 마음이 금세 평온해졌다.

    대답을 정하고 나서 그녀의 눈을 다시 보니, 그 눈빛에서 흔들림이 느껴졌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나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데, 그런 걸 어떻게 느끼겠냐만은, 내 마음 상태에 따라서 그녀의 눈은 흔들림이 없다가도 떨고 있었다. 결국은 내 마음의 문제라는 걸까.

    으음, 그래도 고백에 대답해 주는 건데 무심한 표정을 지으면 트라우마로 남겠지? 조금 웃자. 전예지양은 충분히 예쁘고, 기회가 된다면 사귀어 보고 싶은 외모의 사람이니까.

    “……음, 사귀는 것까진 잘 모르겠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게. 대신에, 일단 수능이 끝나고 하자. 너는 지금 공부해야 할 때잖아? 그렇지?”

    “아……, 그럼……?”

    정석적인 대답이다. 그래도 이건 거절이 아닌 보류. 그녀도 그걸 캐치한 건지, 혼자서 좋다고 웃었다. 물론 나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 미소를 정면에서 볼 수 있었다. 귀엽네. 잘 되면 좋겠는데, 무리겠지?

    “그래서, 아메리카노 마실래?”

    “네? 아, 네. 아메리카노 주세요.”

    그녀는 내 말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푹하고 숙였다. 자신이 무얼 하고 있었는지, 스스로 이제야 자각한 모양이다.

    + + +

    “야, 쟤 무슨 일 있어?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저렇게 예쁘게 하고 온 거야? 그리고 넌 왜 그렇게 싱글벙글이야?”

    사장은 사장인지, 가게에 들어오자마자 한 눈에 상황을 파악했다. 예지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크기로 사장에게 조용히 얘기했다.

    “……아, 저 고백 받았어요.”

    “고백? 고백? 누가? 너가? 누구한테? 설마……, 쟤한테?”

    그의 눈이 동그라지며 손으로 예지를 가리켰다. 나는 조용히 했지만, 그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그녀도 이쪽이 하는 말을 대충 눈치 채고 말았다. 그녀의 귀가 다시 붉어졌다. 저걸 보니, 오늘은 공부가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도 공부할 생각으로 온 것 같지는 않는데, 아까 고백을 받고 보냈어야 했나? 내가 괜히 주문하라고 압박 주니까 마지못해 주문을 받은 거 같기도 하고.

    “네. 쟤한테 고백 받았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어, 설마 받아 준거야? 오늘 보니 역시 애가 기본이 되어 있는데, 그렇다고 고3 데리고 노는 거 아니야.”

    “에이, 설마요. 저도 그 정도 개념은 있어요. 그냥 수능 끝나고 생각해보라고 했어요. 뭐, 저러다 말겠죠.”

    “잘 했다. 흐음, 아닌가? 이러다가 수능 끝나면 우리 가게의 유일한 손님을 잃을지도 모르겠는데? 그렇게 되면 다 너 때문 인거야. 처신 잘해.”

    “그렇게 까지 부담 주시면 안 되죠. 결국 제가 저 때문에 여기 온 걸로 밝혀졌는데, 상은 못 줄망정 벌이라니요.”

    “내 맘이다. 그런데, 고작 어린애한테 고백 받았다고 그렇게 싱글벙글이야?”

    고백도 고백이지만, 그것 때문은 아니었다. 고백은 시간이 지나며 그냐 잊혀 갔고, 머릿속에서 라이트닝 소드에 대한 기대감이 다시 피어올랐던 것이다.

    “없다고는 못하죠. 예쁜 애잖아요? 하지만 좋은 일이 있답니다.”

    “그래? 뭔데?”

    “전에 말씀 드렸던 퀘스트 말인데요, 그거 드디어 깼습니다.”

    그 말에 그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과 말투로 얘기했다.

    “……참, 말을 말자. 너 프로 게이머였지.”

    “이게 다 사장님 덕분이에요. 역시 사람은 혼자 사는 게 아닌가 봐요.”

    “뭐, 좋아. 자세히 이야기나 해봐. 심심하니까.”

    + + +

    [축하합니다. 고된 훈련의 결과로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현재 숙련도 라이트닝 소드 lv.1 0.05%]

    숙련도는 굉장히 더디게 올랐다. 평소라면 게임에 몰두했을 시간, 알바를 마치고 난 뒤의 새벽에 계속 우산을 들고 자세를 잡아보았지만, 오른 건 겨우 0.04%. 두 시간 동안 근육을 비틀어댄 결과치고는 상당히 작지 않은가.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굉장히 빠르게 오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두 시간에 0.04%가 올랐으니까,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한 시간에는 0.02%가 오른다. 그럼 1레벨 올리는 데 드는 시간은 약 5,000시간, 그랜드 마스터까지는 대충 50,000 시간이 걸리는 셈이다. 50,000 시간은 일수로는 대략 2100일, 년 수로는 6년에 가깝다.

    물론 24시간 내내 검술 수련만 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하루에 8시간씩 수련을 한다고 치면, 18년이면 그랜드 마스터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 계산은 지금의 수련 효과가 나중에도 이어질 거라는 가정 하에서 하는 거긴 하지만, 천지를 개벽시키는 효과를 지닌 검술을 18년 만에 익힐 수 있다는 건 굉장히 빠른 편이다. 하루 10시간이상 검술에 신경을 썼을 게 분명한 베르트랑도 아직 마스터등급인데 말이다.

    그리고 성취를 눈으로 바로바로 볼 수 있다는 게 너무나 좋았다. 설정을 조정하면 0.00%단위 아래에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말이다.

    [라이트닝 소드 lv.1 0.00546%]

    더 아랫자리도 볼 수 있었다. 이게 얼마나 사람을 자극하냐면, 한 십분만 하고 자야지 하던 나를 2시간 동안이나 근육을 비틀게 만들었다. 0.00001% 수준이지만, 한 번 동작을 취하고 나면 조금씩 오르는 걸 보니까, 0.00150%까지만 하고 자야지, 거기에 다다르면 0.00160%까지만 하고 자야지, 뭐 이런 생각을 계속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고, 이제 온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가 된 지금이 되어서야 멈추게 된 것이다. 사실 더 하고 싶었다. 0.00550%까지는 숫자를 맞추고 싶었다. 하지만 이 이상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고, 손목이 들리지 않았다. 누워 있는데도 배와 허벅지와, 허리가 땅겼다.

    씻고 자야 하는데……, 나는 그냥 땀에 절은 채로, 맨바닥에서 잠에 빠져들었다.

    ============================ 작품 후기 ============================

    다음 편 부터는 2번째 퀘스트네요.

    뱀파이어들의 왕 같은 경우는 설정 자체를 그렇게 시작했기 때문에 빨간노블을 선택한 거였죠.

    이 소설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서.... 여러분, 저희에게는 동영상 교재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라고 해도 저도 그런 씬들이 약방의 감초 역할을 잘 한다는 걸 알고는 있습니다....그러나 이 소설은 그런 내용이 굳이 필요없는 거라... 그렇지만 여러분의 성원이 있다면 100회 특집 같은 걸로 외전은 써 보겠습니다ㅎㅎㅎ그 때까지 주인공이 그런 관계의 사람이 없다면, 뇌내망상으로라도!

    독자분들의 작은 관심이 작가에게는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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