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마지막 메시지에선 현실에서도 라이트닝 소드를 사용할 수 있다는 뉘앙스가 풍겼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그에 관해 생각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떻게 쓸 수 있다는 거지? 머릿속에 여러 지식들이 떠오르긴 했다. 검을 어떻게 잡는지, 발의 위치는 어떤 식으로 하는지부터 해서, 라이트닝을 사용하는 방법까지 떠올랐다.
그동안은 이렇지 않았다. 꿈에서 깨어나면, 자세한 지식은 사라졌다. 그건 내 기억이 아니었으니까. 그 인상은 남아 있지만, 자세한 방법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었다. 나는 검술의 검자도 모르는 일반 사람이니까, 그냥 좀 휘둘러본다고 한 번에 기억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지금은 그 자세한 방법이 떠오르는 것이다. 마치 책을 외운 것처럼.
당장 일어나 검 대용으로 쓸 수 있을 만한 것을 찾았다. 우산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방구석에 있던 장우산을 한 손으로 잡았다. 라이트닝 소드에 쓰는 검보다 살짝 길었지만, 대충 흉내나마 낼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일단 기억속의 기수식, 베르트랑의 몸으로 했던 방법을 떠올려 서 보았다. 발을 앞뒤로 벌리고, 몸은 옆으로 돌려 정면에서 명치가 보이지 않게 섰다. 그리고 우산을 들고 있는 오른 팔을 적당하게 들었다. 마치 펜싱 자세 같았다.
그렇게 자세를 취하고 시스템이 내게 건네준 지식을 떠올리니 이 자세가 얼마나 다른지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겉모습은 비슷했다. 하지만 발의 각도, 무릎의 각도, 팔꿈치의 각도, 몸의 위치, 무게 중심 등 이 기수식 하나에도 신경 쓸 게 너무 많았다.
베르트랑의 몸에서 펼칠 때는 그 몸이 알아서 해주었고, 내 머리이면서도 내 머리가 아닌 베르트랑의 의식과 신경체계가 알아서 부족한 부분을 메꿔주었는데, 여기에서 내가 하나하나 해야만 했다.
어려웠다. 오른발이 맞으면, 왼발이 흐트러졌다. 무릎을 맞추면, 골반이 흐트러졌고, 골반이 맞으면 검 끝을 유지할 수 없었다. 별 거 아닌 거였는데도, 온 몸에서 땀이 줄줄 흘렀다. 평소에는 취할 일이 없는 자세를 정확하게 하려니까, 온 몸에서 근육들이 비명을 질렀다. 가볍다고만 생각했던 우산의 무게도 만만치 않았다. 손목 운동은 마우스로 많이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라면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많이 단련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였다. 그런 거랑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내가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 머릿속에서 이게 제대로 된 자세다, 아니다가 자연히 떠오른 다는 것. 내가 거울을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피드백이 바로바로 왔다. 개인 트레이너가 내 몸을 툭툭 건드리며, ‘야, 거기, 거기 좀 더 굽히고, 야 그쪽은 좀 더 굽히랬잖아. 그래가지고 언제 배울래?’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 시간을 낑낑대며 자세를 취했다. 완벽한 자세는 아니었다. 하지만 성공이라고 불릴 정도의 위치에 내 모든 몸이 들어가 있었다. 검 끝, 우산 끝이 심하게 흔들렸지만, 얼핏 보면 베르트랑이 내뿜던 기세가 내 몸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기도 마나도 없는 이 세상에서 그런 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축하합니다. 고된 훈련의 결과로 라이트닝 소드가 lv.0에서 lv.1로 올라갑니다.]
[현재 숙련도 라이트닝 소드 lv.1 0.01%]
이건, 이건, 이건!
메시지를 보니 대번에 무슨 의민지 감이 왔다. 주위에 넘치는 게임 판타지 소설에서나 보던 광경이 아닌가? 이런 게 진짜 현실로 존재할 줄이야. 이게 꿈은 아니겠지?
이번에는 전통적이 방법을 실행해 보기 위해서 내 볼을 꼬집었다. 만지는 감각도 있었고, 계속 누르고 있으니 아픔도 느껴졌다. 일단은 현실인 것이다. 꿈의 세계에서 느꼈던 격통을 생각하면, 그조차도 확신할 수는 없지만, 지금 있는 이곳이 내 방 인 것만큼은 틀림없었다.
그리고 현재 시각이 어느새 10시라는 것도. 일단 수업에 가야겠다.
+ + +
“어서 오세요!”
기쁜 날이다. 그래서 매일 보는 여고생이지만, 크고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표정도 그와 비슷할 거라고 자신한다. 그렇다고 소녀를 보는 게 반가워서 이러는 건 아니다. 그냥 지금 내 상태가 기쁠 뿐. 그렇지 않겠는가? 신비의 검술을 익힐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효과가 언제 나타날지, 언제쯤 검기를 쓸 수 있을지는 모른다. 내가 죽기 전까지는 쓰지 못할지도 모른다. 설사 그러할지라도, 나만의 비밀이 있다는 것, 그게 나에게 좋은 일이라는 건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었다. 내 얼굴은 하루 종일 웃고 있느라 고생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웃는 걸 멈출 수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해서 이 기쁨을 나누려고 큰 소리로 소녀를 맞이하는 게 아닌가?
허리도 거의 90도로 꺾었다가 다시 드는데, 여고생이 문을 열던 자세 그대로 입구에서 멈춰 있는 게 보였다. 당황스러웠을까? 당황스러웠겠지? 내가 안하던 짓을 하니까, 당황을 넘어 황당함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평소와 다르게 고개를 푹 숙이고 들어오는데, 웃음을 참고 있는 걸까?
“뭐 드시겠어요, 손님?”
그러나 말거나 최선을 다해서 접객에 들어갔다. 이 모습을 사장이 와서 좀 봐야 되는데, 그래야 내 알바비가 조금이라도 늘거나, 사장의 구타가 조금이라도 줄어들 텐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나 혼자 뿐이었다.
여고생은 그 말에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안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화장을 옅게 한 것 같기도 했다. 립클로즈로 인해 입술이 반짝였다. 옷차림은 여전히 교복이었지만, 오늘따라 깨끗이 빤 듯 빛이나 보였다. 가방은 매고 있었지만, 늘 가슴을 가리던 책 뭉치는 들고 있지 않았다. 뭔가가 이상한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일단 내 눈은 여고생의 가슴을 향했다. 가슴이 생각보다 큰데……가 아니라, 이름을 보기 위해서였다.
전예지
6개월 만에 알아낸 여고생의 이름이었다. 이름 예쁘네. 얼굴도 오늘따라 예쁘다. 정말 사장의 말대로 안경을 벗고 화장을 했을 뿐인데,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여전히 귀엽다는 인상이었지만, 확실히 예뻐졌다. 확실히.
좀 더 화장을 하면 연예인 하자고 스카우트가 달려들 정도일지도? 아니지, 그 정도라면 원래 안경 끼고 다녔을 때부터 스카우트가 붙으려나? 하지만 이 여고생, 전예지양은 고개를 들고 다닐 것 같은 느낌은 아니니, 그냥 눈에 안 뛰었을지도. 아니, 그 전에 밖을 돌아다니기라고 해야 그런 일이 일어나지. 예지양은 계속 우리 가게에만 있었잖아?
그나저나 오늘은 그런 태도가 아니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턱을 당기고, 어깨를 편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주문은 안하고 나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왜? 내가 이렇게 웃는 게 이상한가? 평소에는 무기력한 모습만 보여줬으니 이상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도 인간인데 이런 모습쯤 없을까봐? 네가 그렇게 변신한 것처럼 나도 변신한 거라고. 그런 눈빛을 쏘아 보냈다.
결국 눈이 마주친 것이다. 그런데 내가 왜 눈을 마주쳤을까? 갑자기 제 정신이 들었다. 그 눈 안에 얼핏 보이는, 내가 제대로 본 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안에 보이는 열망에 당황해 버리고 말았다. 그 전까진 오늘 아침에 겪은 일로 마치 마약을 한 것 같은 상태, 그런 기분에 놓여 있었는데, 순간 지금 어찌해야할 바를 모르겠는 거다.
예쁜 사람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어!
물론 그런 거에 놀란 깜냥은 아니다. 어려서부터 각종 미인들의 보살핌을 극진히 받은 사람으로서, 여자 앞에서 떤다거나 하는 사람은 아닌데, 이건 느낌이 좀 달랐다. 소녀의 눈은 그냥 나를 보는 게 아니었다. 내게 무언가 요구하고 있었다. 요구, 뭘 요구 하는 거냐?
애매하게 웃었다. 조금 전과 같이 활짝 핀 미소였으면 접객이 완벽했을 텐데, 예기치 못한 사태에 결국 내 접객은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래도 미움과 애정을 섞은 무표정은 아니니 다행인가?
“아메리카노 줄까?”
그리고 나도 모르게 반말. 그동안 여고생에게 반말 아닌 반말을 하긴 했다. ‘아메리카노?’, ‘아이스 아메리카노?’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건 말이 짧은 거고, 그 뒤에 숨겨진 말이 뭔지는 나 자신도 모를 정도의 그냥 관용어구이다. 반말과는 다르다, 반말과는.
그러나 ‘줄까?’라는 말이 붙는 순간 그건 확실한 반말이 된다. 실수다. 아무리 그래도 손님에게 반말은 좀 아니지 않는가? 이 여고생, 전예지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와 본 지가 6개월이 넘었다 하더라도, 손님과 종업원일 뿐에 아직 통성명도 안했고, 말을 섞어본 적도 없었다.
망했군. 이제 이쯤에서 사장이 들어오고, ‘네 놈, 드디어 걸렸구나! 크하하핫, 이제 넌 해고야!’하면서 내게 손가락질을 할 것만 같았다. 이건 함정인가? 몰래 카메라인가? 나를 당황하게 만든 뒤, 실수를 하게 할 작정인가? 왜? 이 나쁜 사장, 그렇게도 내가 싫었나? 애꿎은 소녀를 이용할 정도로. 소녀여, 너는 사장에게 무엇을 받았나? 혹시 시험 답? 스폰? 아아, 현실에서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이런 치졸한 계략에는 걸리지 않았을 텐데…… 나는 어찌 이리도 바보란 말인가.
……물들었군. 확실히 물들었다. 지금 약간 패닉 상태이긴 했다. 소녀는 내 제안에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며 그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을 마주치기 싫어서 시선을 내리니 가슴이고, 올리니 눈이라 목 부근을 쳐다보니 교복 사이로 매끈한 목과 쇄골이 약간 보인다…… 나 변탠가?
아무튼 그 눈을 보고 있지 않았지만, 전에 보지 못한 빛으로 빛나고 있을 것 같은 느낌에 내가 패닉인 것이다. 베르트랑과 함께 지내면서 감각이랄까, 눈치랄까, 예감이랄까 그런 종류의 것들이 조금 예민해진 느낌인데, 지금이 딱 그랬다. 무언가 일어날 것 같았다. 내 인생을 좌지우지 할 정도는 아닐지 몰라도, 한 일주일 정도는 내 정신을 빼앗아갈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맞아, 이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니었지. 그래, 나 완전 패닉인가 보다. 그러니 베르트랑이나 하던 오글거리는 생각을 머릿속으로 하고 있지.
정신 차리자. 여기는 내 본진이야. 소녀가 그동안 이 곳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 할지라도, 여기는 내 본진이야. 카운터는 내 직장이잖아? 소녀가 그동안 자신의 체취를 남겨 온 곳은 이 계산대 앞이 아니라 저쪽 구석의 테이블이지. 그러니까 홈 어드벤티지를 가지고 힘을 내자. 자, 덤벼라. 어떻게든 받아쳐주지.
그리고 소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소녀의 두 눈은 여전히 내 얼굴, 정확하게는 내 목이 정 위치에서 30도 정도 아래로 굽어졌기 때문에 내 이마 근처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목소리는 평소처럼 작지 않았다. 그렇다고 크지도 않았으며, 듣기 좋은 크기로 부드럽게 내 귀에 착하고 감겼다.
“오빠, 여자 친구 없죠?”
그리고 그만큼 타격이 컸다. 일단 ‘오빠’하고 잠시 숨을 쉬는 타이밍이 예술이었다. 남자를 가지고 노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 듯한 밀당이었다. ‘오빠’하는 그 순간에 내 기대감이 확 올라갔다가, 잠시 숨을 쉬는 타이밍엔 지옥과도 같은 기다림, 영원을 버텨야만 했다. 안 그래도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그 순간 예지가 더 예뻐 보였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눈을 마주쳤다.
표정은 한결 같았다. 사장과 내가 투닥거리는 걸 볼 때나, 어제까지 주문을 할 때나, 공부를 할 때나 마찬가지인 그 표정. 다만 그 눈만큼은 다른 걸 얘기하고 있었다. 기대? 설렘? 떨림? 나도 그 눈에 전염될 뻔했다.
그래서 내 귀가 여자 친구란 말을 들었을 때, 내 머리는 폭발적인 연산에 들어갔다. 얘가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걸까? 기대감이 막 넘쳐났다.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그 뒤에 붙을 말이야 뻔했다. ‘없죠’말고 뭐가 붙겠는가? 여자 친구가 되 주세요? 이것도 아니고, 여자 친구가 되어 드릴까요? 라고 하기엔 주어가 빠졌다.
그렇지만 내 머리는 그런 가능성을 배제하고 그냥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걸까 하는 거에만 집중했다. 뇌가 미친 듯한 속도로 연산을 하면 뭐해, 프로세스가 꽝인데.
그리하여 ‘없죠’라는 말이 나왔을 때, 완전히 추락했다. 바닥이 없는 깊은 해구, 마리아나 해구로 천천히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천천히 떨어져 내렸지만, 끝이 없기 때문에 더 무서운 그곳. 도대체 어디까지 떨어지려는 걸까. 그 표정만으로 대답이 된 건지, 소녀가 말을 이었다.
“그럼 저, ……저랑 사귀지 않으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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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작은 관심이 작가에게는 큰 힘이 됩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