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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개의 퀘스트-7화 (7/160)
  • 7화

    눈을 뜨니 내 눈 앞에 썬더가 보였다. 그리고 옆을 다리고 있는 은십자 기사단, 정확하게는 크리스와 마크의 모습이 반쯤 보였다. 이번에는 기사단을 두고 가기로 했다. 유인작전을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내 의견을 따를 것이라 여겼던 두 부관은, 동굴 앞에서 내 말에 반박했다.

    “안됩니다! 백작님 혼자 가시는 건 위험합니다. 혼자서 마법사의 소굴에 들어가신다니요, 천부당, 만부당한 말씀이십니다.”

    맞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너희들이 간다고 도움이 되는 건 없던데? 나는 미래를 알고 있기 때문에 조금 짜증이 났고, 이 몸의 주인인 베르트랑은 모르는 데도 발끈했다.

    “나를 못 믿는 것이냐!”

    “그건……, 아닙니다.”

    “그럼 됐다.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라. 내가 그를 유인하여 오겠다.”

    “……알겠습니다.”

    말은 했지만, 수긍하지 못하는 둘, 그리고 기사단. 그러든 말든 나는 썬더에서 내렸다. 바로 들어가려고 하다가, 지시해야할 것이 생각났다. 크리스와 마크를 다시 불렀다.

    “제코르와 함께 키메라가 나올 거야. 그 키메라를 못 움직이게 해. 방법은 너희가 알아서 하고.”

    “알겠습니다. 그런데 키메라가 있다는 건 어떻게 아십니까?”

    “당연하잖아. 그 놈이 제 부하들이랑 같이 안 싸운 적이 있던가?”

    “맞, 맞습니다. 역시나 지혜가 뛰어나신 백작님이십니다. 백작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크리스의 얼굴은 ‘헐, 내가 아는 그 백작이 맞나?’라는 거 같았다. 그리고 이제야 진짜 내 유인작전을 수긍하는 것 같은 둘이었다.

    어이, 베르트랑, 너 도대체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 거냐.

    그런 생각을 하며 동굴을 달렸다. 말없이 다리로 달리는 거라 시간이 좀 더 걸렸고, 함정을 피하는 게 조금 더 어렵긴 했지만, 별다른 상처 없이 동굴의 끝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어김없이 제코르와 키메라 로젤리나가 있었다.

    "제코르!"

    "드디어 왔군, 기다리다가 죽을 지경이었다. 네 사랑하는 그녀는 너에게 그런 존재밖에 되지 않나 보지?"

    "아니다! 내 사랑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 사랑스런 로젤리나!"

    "크와아아앙!"

    "……로젤리나……."

    매번 반복되는 신파극이었지만, 이번에는 좀 더 감정을 담아 어울려 주었다. 저 늙은이가 완전히 속아야지만, 이 작전을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가라, 로젤리나! 너를 버린 전 약혼자에게 네 분노를 보여줘라!"

    "크와아아앙!"

    키메라 로젤리나가 빠르게 다가왔다. 키메라의 움직임을 보면서 뒤로 뒷걸음질 쳤다. 아주 천천히, 온 몸을 비틀 대면서 뒤로 움직였다. 누가 보면 충격을 먹어서 그러는 것처럼 보이도록, 최선을 다해서 연기를 했다. 사실, 연기할 필요도 없었다. 감정의 고삐를 조금만 풀면 베르트랑이 알아서 움직여 주었으니까.

    쾅!

    처음 공격은 뒤로 주저앉으면서 피했다. 정확한 타이밍에 넘어지며,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지는 척을 했다.

    그 다음 몸통 공격은 검집으로 막았다. 내 몸이 키메라의 팔에 밀려 뒤로 날아갔다. 어느새 내 바로 뒤에 공동의 입구가 있었다.

    “……정신 차리시오! 로젤리나!”

    마음을 다해 소리쳤다. 연기가 아니라, 진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이제 그만 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담아 소리쳤다. 그러나 키메라는 내 목소리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크크큭! 그런 걸로 될 것 같으냐! 지금 로젤리나는 너에 대한 미움과 분노로 가득 차 있다! 너에 대한 사랑이 크면 클수록, 그 증오는 깊은 법이지! 사랑한다는 이유로 참아왔던 여러 가지들이 지금 한 번에 터진 거란 말이다!"

    오히려 제코르의 말에 내 감정이 요동쳤다. 순간 내 몸이 흔들렸지만, 다시 냉정을 되찾았다. 이 정도는 이제 가뿐히 넘길 수 있었다. 다만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베르트랑은 저 말에 찔리는 게 많은 모양이었다. 주로 멋모르는 공주가 떼를 쓰면, 그가 점잖게 타이르는 모습이었다.

    기억을 보니 이건 연인이라기보다는 오빠나 아빠에 가까웠다. 어쩌면 보모? 이번에 공주가 그의 성에 온 것도, 자그마치 한 달 동안이나 떼를 써서 온 것이었다. 안전의 문제로 그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반대했지만, 공주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서 진행된 것이었다. 결국 일은 이렇게 되었고, 모든 건 공주의 자업자득이었다.

    안 봤으면 좋을 뻔 했다. 이 커플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사랑 때문에 참았다기에, 자기도 피곤한데 애써 웃어주었다거나, 있는 돈 없는 돈 모아가며 남자친구 기를 살려 주었다거나, 귀찮지만, 남자친구를 위해 매일 도시락을 싸서 보냈다거나, 돈 많고 잘생긴 남자 대신에 오래 사귄 소꿉친구를 선택했다거나, 뭐 그러 미담을 기대했는데, 이건 뭐, 궁궐 밖으로 데려가 주지 않았다고 떼를 써? 이 시대의 여자들이란 다 이런 건가……? 그리고 그거 못해줬다고 질질 짜려고 하는 이놈은 뭐냐…….

    그래, 현대인의 상식으로 이해해선 안 되겠지. 내가 보기엔 유치뽕짝이라도, 지들이 보기엔 아름다운 로맨스겠지. 덕분에 더 객관적인 위치에서 볼 수 있게 됐으니까, 그걸로 넘어가자. 더 생각했다간 있던 정도 떨어지고, 혐오감이 들게 될 것 같으니까.

    깡!

    "미안하오, 로젤리나! 제발, 제발 정신을 차리시오! 내가 다 잘못했소!"

    마음속으로는 손발을 오그라뜨리며, 거침없이 느끼한 말을 내뱉었다. 키메라의 주먹은 내 검에 막혀 있었다. 그 힘의 방향을 따라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이어 내 위로 그림자가 생기자, 다시 한 번 뒤로 뛰었다.

    콰앙.

    땅바닥이 깊게 패일 정도의 강한 공격이 동굴을 강타했다. 날리는 먼지와 흔들리는 천장 아래에서, 어느새 공동을 벗어나 통로로 들어왔음을 깨달았다.

    "크크크큭, 어서 공격해 보아라! 그렇게 계속 도망만 갈 것이냐! 번개의 검사라는 이름이 울겠구나! 어디서 개새끼가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있는 거냐! 크크크크큭!"

    "닥쳐라! 제코르!"

    계속 물러났다. 적당히 피하고, 적당히 맞아주면서 동굴 밖을 향했다. 그건 어렵지 않았다. 키메라의 공격은 눈에 다 보였고, 제대로 막기만 하면 별다를 피해는 없었고, 제코르는 나를 놀리는 게 재밌는 지 다른 마법을 쓰지 않았으니까.

    "로젤리나아! 내 사랑이여! 나를 벌해도 좋소! 하지만, 하지만! 자신을 잃진 마시오!"

    하지만 내가 나를 잊어버릴까 걱정이었다. 온몸이 근질근질하고, 당장이라도 저 주먹에 몸을 맞아 죽어버리고 싶었다.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는가? 그래야 퀘스트를 해결할 수 있는 건가? 평소와는 다른 반응을 보여주는 둘을 보며 기대에 빠졌지만, 동시에 내 마을은 손발은 둘둘 말려서 보이지 않을 지경이 되어갔다.

    "크와아아앙!"

    "로젤리나!"

    "크크크크큭!"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목이 쉬도록 불렀다. 이쯤이면 입구가 나와도 되잖아!

    "백작님!"

    그리고 드디어 밖으로 나왔다. 나 혼자 나온 건 아니었다. 키메라의 마지막 공격은 몸통박치기였고, 따라서 키메라와 내 몸이 한 덩어리가 되어 동굴 밖을 뒹굴었다. 빙빙 도는 하늘과 땅이 멈추고 나니, 동굴에서 많이 떨어져 있었다. 제코르는 아직 동굴 안에 있었지만, 이걸로도 충분하다.

    "크리스, 마크!"

    "모두 투척!"

    크리스의 복창에 은십자 기사단은 큰 포대를 던졌다. 기사들의 망토를 엮어 급조한 거였다. 그리고 마크가 키메라위로 달려들었다.

    "뛰어!"

    마크를 시작으로, 모든 기사들이 키메라 위를 덮치기 시작했다. 시야가 제한되고, 십여 명의 기사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자, 키메라 는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땅위에 넘어졌다.

    그리고 그 위를 기사들이 몸으로 직접 눌렀다. 밧줄이 있었다면 다른 방법을 썼겠지만, 아무것도 없으니 무식하게 몸으로 때워야 했다.

    키메라는 일어나려고 바동거렸지만, 갑옷을 갖춰 입은 성인 남자 30명은 키메라에게도 무거운 듯했다. 더군다나 누운 상태라면 말이다. 들썩거리는 순간 기사들이 살짝 떠오르긴 해도 떨쳐내지는 못했다.

    대신에 기사들은 죽을 맛이었다. 자기 몸무게와 갑옷의 무게를 감당하기도 쉽지 않은데, 다른 기사의 몸무게를 감당하려니 죽을 맛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 정도면 성공인 셈이다. 키메라를 봉쇄했으니, 마법사를 상대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그동안의 전적으로 보면, 내가 이기는 건 당연지사.

    그러나 제코르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크크크큭! 그 이름 높은 번개의 검사가 이런 치졸한 수를 쓸 줄은 몰랐구나! 이 사실을 전 대륙이 알아야 하는데! 그리고 치졸한 수를 쓴다는 게 고작 이런 수준이라니! 역시나 개돌만하는 검사답구나!"

    저 늙은이가 나에게 쌓인 게 많긴 한가 보다. 아까부터 놀리는 게 끝이 없고,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작 놀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 저렇게 태평한 건가?

    "이건 다 나의 사랑하는 로젤리나를 구하기위해서 한 것일 뿐! 너에게 계략 따위는 필요도 없다. 내 힘만으로 그 피를 이 땅에 뿌려주마!"

    사정 봐줄 필요가 없었다. 이쪽이 우위라는 건 확실한 사실. 방해물도 사라졌으니, 이제 응징을 해줄 차례였다. 이제까지의 설움을 모두 담아 검을 휘둘렀다.

    "그만 끝내자, 제코르!"

    애검 라이트닝으로 한 순간에 여덟 번을 베었다. 라이트닝 템페스트가 펼쳐진 것이다.

    "크크크크큭! 그딴 허접한 검기 따위!"

    제코르가 나의 검기 폭풍을 보고도 비웃으며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뭐지? 저 당당함은? 기억 속에서 그는 늘 저 기술을 피했었는데? 그리고 그가 외쳤다.

    "리플렉트!"

    리플렉트? 그의 손앞에 하얀 막이 생겨났고, 내 검기 다발이 거기에 부딪혔다. 검기 다발은 부딪히면서 서로 엉켰고, 이내 폭풍이 되었다. 폭풍은 하얀 막을 갈아 버리기 위해서 회전을 시작했지만, 하얀 막은 찢어지지 않고 폭풍을 튕겨내었다. 그것도 내가 날린 속도보다 더 빠르게.

    응? 뭔지 몰라 대응이 늦었다. 그 덕에 되돌아온 번개 폭풍에 내 오른팔을 내주고 말았다.

    "크와악!"

    "크크크큭! 너야말로 죽어라!"

    그리고 그 후에 날아 온 머리통만한 마력 탄에 난 머리가 터져 죽었다. 죽으면서 드는 생각은 하나였다. 젠장! 그 오글거리는 짓을 또 하란 말이냐!

    ============================ 작품 후기 ============================

    여러분의 작은 관심이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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