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그 후로 며칠, 퀘스트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 육체를 통제하는 건 익숙해졌지만, 그 다음의 길이 보이지 않았다. 로젤리나를 공격하면, 베르트랑의 감정이 통제를 벗어났다. 키메라를 공격을 막기만 하다보면, 어느 순간 제코르의 마법에 적중되어 죽음에 이른다. 키메라를 무시하고 제코르를 공격하면, 키메라가 계속 몸으로 막아 결국 같은 결론에 이를 뿐이었다.
한 번은 은십자 기사단과 함께 들어갔다. 제코르가 함정으로 기사들을 한 번에 죽이려하는 걸 내가 나서서 어떻게 살려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키메라가 팔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두세 명씩 죽어갔다. 그 중에서는 가장 강하다고 할 수 있는 크리스와 마크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들도 몇 합 버티다가 키메라의 공격에 쓰러질 뿐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은 키메라를 붙잡고 시간을 끌 능력도 안 됐다. 그들이 키메라를 붙잡는 사이에 제코르를 공격했지만, 그러면 키메라가 기사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나에게 달려들었다. 그런 상황이 되지 않도록 기사들이 제지해야했지만, 그들은 그러지 못했다. 몸에 부딪히기만 해도 공중으로 날아가는데, 막을 수가 없었다. 공격을 해도 피부를 겨우 뚫을 수준이니,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잠시 그들의 목숨을 버려가며 잠시 버틸 수 있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제코르를 잡을 수는 없었다. 그는 약한 마법사가 아니었다. 전투의 프로페셔널이라고 할만 했다. 그동안 수없이 싸우면서 매번 이겼지만, 그를 죽일 수 없었던 건 그런 이유였다.
“……, 쳇.”
잠에서 깨어나면서 혀를 찼다. 벌써 10번째 시도였다. 그런데 전혀 진전이 없는 것 같았다. 객관적으로 보면 뭔가 변하고 있긴 했다. 육체의 통제는 날이 갈수록 완벽해졌고, 어느 타이밍에 어떤 기술들을 써야하는 지도 제법 익숙해졌으며, 제코르의 마법도 눈에 익었다. 그러나 기분 상으로는 전혀 진전이 없었다. 내 검은 번번이 허공을 갈랐고, 제코르의 마법은 내 몸을 마비시켰으니까. 어제도, 그제도.
어떻게 방법이 없나?
접속할 때마다, 베르트랑의 기억들을 계속 뒤져 보았지만 별다른 방법이 나오지 않았다. 이게 다 그가 강력한 검사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검은 빨랐고 날카로웠다. 그의 검 앞에서 잘리지 않는 것을 찾는 게 어려웠다. 그의 검은 제코르가 만들어낸 키메라들을 손쉽게 베어냈고, 제코르의 마법을 갈랐다. 그리고 제코르가 물러나게 만들었다.
그동안 행했던 대부분의 전투가 그런 식이었다. 그 혼자의 힘으로만 싸웠고, 그게 통했고, 별다른 어려움 없이 이겼다. 은십자 기사단은 최정예라 불릴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게 확실했지만, 그에 비하면 어린아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강했고, 그랬기에 그 화려한 전적에도 불구하고 돌진밖에는 몰랐다.
그러니 지금과 같은 상황, 벨 수 없는 것이 나타났을 때 대처하는 법도 기억 속에 들어 있지 않았다. 부하들이 조금만 더 강했다면 방법이 있을 텐데, 지금은 혼자 상대하는 거 말고는 방법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로젤리나를 베고도 정신이 멀쩡하도록 감정 컨트롤에 더 힘을 써야 하나?
가장 먼저 떠오른 방법은 그거였다. 지금까지 해오던 것도 결국 그거였다. 하지만 그건 어떻게 해도 안 됐다. 팔을 베어내는 게 안 된다면, 손가락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서 시도해 본 적이 있지만, 그것조차도 베르트랑은 지랄발광을 했다.
이쯤 되면 이건 컨트롤의 문제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실패조건이라고 봐도 좋았다. 완전히 게임이라고 생각하면, 퀘스트 실패 조건은 ‘키메라 로젤리나를 상처 입히지 말 것’인 것이다. 메시지가 따로 뜨지는 않지만, 그런 게 분명했다. 퀘스트 목적도 로젤리나를 구하라고 했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겠지. 로젤리나가 죽으면 퀘스트를 성공시킬 수 없으니까.
아, 그러고 보면 이거 로젤리나를 구하는 퀘스트였지? 계속 제코르를 죽이는 것만 생각하다 보니 까먹고 있었다. 분노에 휩싸이지 않겠다고 그렇게 되뇌었는데, 이미 사고가 분노 쪽으로 고정된 모양이었다. 제코르를 죽이는 데 집착한 것이다.
그러나 제코르를 죽이지 않고 로젤리나를 구할 수 있나? 그를 죽여야 로젤리나가 원래대로 돌아오는 거 아닌……, 그러지 않을 수도 있겠네. 그를 죽인데도, 키메라가 해제되리라는 보장은 없어.
생각해보면 그에 관한 지식은 살펴보지 않았다. 오늘 밤에 접속하면 일단 마법에 대해 알아봐야겠다.
+ + +
딱.
“아악!”
뒤통수를 딱하고 때리는 손길에 무지막지한 아픔을 느꼈다. 이 패턴은 뻔했지만, 평소보다 더 아팠다. 뒤통수를 문지르며 고개를 옆을 보았다. 정장 차림의 사장이 나를 보고 있었다.
“야, 너 자고 있는 것도 아닌데, 왜 내가 들어오는 것도 몰라? 앞을 지나가도 반응도 없고, 멍하게 있고 말이지. 그거 자는 것보다 더 나쁜 거야. 알아?”
“생각 좀 깊게 했어요! 그거 가지고 이렇게 때리는 건 너무 하잖아요!”
“뭘 너무해, 너 같은 바보가 생각할 게 뭐가 있냐?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내가 네 손에 돈을 쥐어주는데.”
그건 맞지만……, 바보는 너무 심하잖아.
“바보는 너무 심하잖아요!”
“어쭈, 대든다? 너 요즘 반응이 다채로워 졌는데? 뭐, 더 해봐. 나야 재밌지. 자, 이러면 어떻게 할래?”
딱.
“아악! 노동청에 고소해 버릴 거예요!”
“그러시든지, 너 아니라도 일할 사람은 많단다. 그리고 그딴 소송이야, 뭐, 귀찮은 일일 뿐이지 나한테 뭐 불이익이 있겠어. 정 뭐하면 지금 이 자리에서 돈으로 줄까?”
내가 졌다. 질 수밖에 없다. 저쪽은 내 고용주인데다가, 심지어 돈도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이니까. 열불 내봐야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니 이제껏 가만히 있었던 게 아니었던가? 정신 차려, 강민!
“……쳇, 됐어요. 요즘 고민할 게 많아서 그랬어요. 어차피 손님도 없는데, 그러면 좀 어때요?”
“코 베어가도 모를 정도로 멍하게 있었으면서 뭘……, 뭐 좋아, 그러든 말든 상관없지. 너만 한 놈을 다시 찾기도 어려우니까. 그런데 뭐가 그리 고민이야? 얘기나 좀 들어보자. 요즘 자는 거 보다 멍하니 있는 경우가 더 많던데, 그건 너 답지 않잖아? 너, 어디 아프냐? 부모님이 아프셔? 돈 필요해? 내가 돈 좀 꿔 줄까? 무이자로 얼마든지 빌려줄 수 있는데?”
중간에 정정해야 할 말들이 조금 있는 것 같았지만, 끝까지 듣는 순간 감동 먹을 뻔했다. 이렇게까지 세심한 사람이었나? 손바닥만 매운 사람이 아니었단 말인가? 이 직장, 생각이상으로 꽤 괜찮을지도?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게임이 어려워서 그거 생각 좀 했어요.”
그렇다. 요즘 내 머리 속에는 어떻게 하면 제코르를 없앨 수 있을까 하는 생각밖에 없었다. 내 말에 점장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게임? 너 같은 프로게이머가 게임이 어려워? 진짜? 그거 어떤 게임이냐? 나도 한 번 해보자. 난이도 체험이라도 해보게.”
자칭이 아니라 타칭으로 바꿔야겠군. 하기야, 그동안 점장님과 얘기한 게 게임밖에 없긴 했구나. 그러나 어쨌든, 진실을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그냥 꿈 이야기일 뿐이니까. 아니지, 꿈 이야기니까 해도 괜찮은 건가? 그래도 일단 그러고 싶지는 않지만…….
“그런 게임이 있어요. 옛날 게임이라 요즘은 구하기도 힘들어요. 돌아가는 컴퓨터도 잘 없구요. 저도 돌리는 데 무척 애먹었어요. 그런데 그것보다 게임은 더 어렵네요. 첫 판을 넘기기가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어요.”
“돌리기가 어렵다고……? 으음, 그럼 패스. 난 그런 건 딱 질색이야. 그래도 내용은 궁금한데? 설명이나 해봐.”
저래 보여도 점장은 남에게 뭘 시키는 타입은 아니었다. 까는 게 어렵다면 나에게 시켜도 되는 문제였지만, 그런 문제에 관해서는 칼 같았다. 그런 점에서 바리스타 누님과는 통하는 점이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게임에 열정적인 사람도 아니었다. 게임은 시간낭비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아, 그게…….”
나도 답이 없는 이 상황이 답답했다. 그래서 마침 잘 됐다 싶어 게임의 상황과 내가 한 일들, 그리고 의문들을 점장에게 천천히 설명했다. 꿈에서 이루어진다든가, 엄청나게 현실적이라든가, 이런 말만 안 하면 3류 게임에서 볼 법한 흔한 스토리이니 내용설명이 크게 부담되지는 않았다.
“흐음, 그래? 일단 밖으로 끌어내보지 그래?”
“네?”
“그 마법사인가 뭔가를 밖으로 끌어내보라고, 그럴 수 없어? ……아, 게임은 그렇게 자유롭지 못하지? 보스 방에 들어가면 보스 방이 매번 막히던가?”
점장은 게임을 즐겨하는 편이 아니다. 요즘 유행하는 모바일 게임도 전혀 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컴퓨터 게임, 그 중에도 롤플레잉 류를 해본 건 5년도 넘은 일일 것이다. 아니, 10년 이상이 넘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점장은 게임의 한계를 정확하게 짚고 있었다. 그런 것 때문에 게임을 안 했던 건가?
그리고 그 한계가 내 생각을 가로막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퀘스트라기에, 무의식적으로 게임처럼 생각하고 접근하고 있었다. 죽어도 다음 도전을 할 수 있으니까, 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겪고 있는 일들은 그런 수준의 일만은 아니었다. 생각을 깰 필요가 있었다.
“그러네요. 그렇게 한 번 해볼게요.”
“그게 돼? 뭐, 좋아. 잘 되면 나에게도 알려줘.”
“알겠어요.”
좋아, 오늘 밤에는 유인 작전으로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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