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개의 퀘스트-5화 (5/160)

5화

“백작님, 저, 저……!”

“제코르, 이 극악무도한……!”

크리스와 마크가 동굴 끝에서 로젤리나를 발견하고 경악했다. 그들뿐만 아니라, 뒤이어 들어온 은십자 기사단 모두가 말을 잊고서 키메라 로젤리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크크크큭, 네 놈들, 네 놈들도 가만히 둘 순 없지. 저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베르트랑도 베르트랑이지만, 네 놈들도 만만찮아. 네 놈들 손에 죽어간 내 피 같은 키메라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려. 그러니까……, 죽어라!”

제코르가 외치며 지팡이를 들었을 때, 그 동작으로 인해 큰 함정이 발동할 거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피해는 은십자 기사단 전체에 미칠 거라는 것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 몸은 여전히 강력한 감정의 여파로 그 자리에 정지해 있었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있으려 애써 봐도, 심장을 멈추게 하는 강력한 충격, 그 절망을 이기기가 쉽지 않았다. 그나마 은십자 기사단을 데려온 게, 현재의 나로서는 최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쿠르르르릉.

공동의 입구 주변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직 진입 중이던 은십자 기사들은 그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저마다 칼을 들러 떨어지는 돌덩이를 쳐내고, 잘라보지만, 역부족이었다. 기사들의 비명이 공동을 수놓았다. 살아남은 사람은 열이 채 안 됐다. 4/5가 한 수에 사라진 것이다.

“젠장! 제에코르!”

멈춰 있는 나를 두고서, 크리스와 마크를 위시한 살아남은 은십자 기사단이 제코르를 향해 돌진했다. 동굴 속이라 전력을 다한 기병의 돌진이 더욱 강력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동굴 전체를 진동하게 만드는 그들의 발굽은 제코르의 앞을 막아선 키메라 로젤리나로 인해 강제로 멈춰야만 했다. 크리스와 마크 역시 로젤리나의 얼굴을 한 키메라를 차마 공격하지 못하는 것이다.

“크크크크큭, 네 놈들이 날 뛰어 봐야 다 내 손아귀 안 이니라! 자, 이제 오랜 악연에 종지부를 끊어보자꾸나! 나의 사랑스런 로젤리나여, 저들을 쓸어 버려라!”

“크아아아앙!”

키메라 로젤리나가 괴성을 지르며 양팔을 휘두르자, 크리스와 마크부터 날아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냥 당하던 은십자 기사단은, 나중에 가서는 반격을 했다. 내가 보기엔 진심이 담긴 반격이었다. 그러나 키메라의 두꺼운 피부를 가르지 못했고, 그들의 검기는 키메라의 뼈에 닿지 못했다.

반면 키메라의 두툼한 팔은 기사들의 갑옷을 짓누르고, 그 안의 몸을 한 방에 찌부러트렸다. 키메라 로젤리나는 흑마법사 제코르 혼신의 역작이었다. 로젤리나가 없었다고 해도, 애초에 기사들이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자, 이제 네 놈만 남았구나. 어디 말 좀 해 보거라, 그 잘난 입을 놀려보란 말이다. 왜, 이제 말을 못하겠느냐? 너의 사랑스런 약혼자가 이제 내 사랑스런 로젤리나가 되었는데, 어째 분노 한 번 표출하지 못하는 것이냐? 설마……, 너 그건 아니겠지? 그거, 그거 말이야. 고자. 크크크크큭.”

내가 들어도 속이 부글부글 끓는 욕을 듣고 있음에도, 베르트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을 잠식한 절망은 그 정도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애써 버티고 있었다. 그의 감정에 휩싸이지 않도록, 그의 절망에 내 정신을 내주지 않도록 억지로 버티고 있었다.

지금은 이게 최선이었다. 이렇게 하면서 동시에 육체를 움직여야 하는데, 그것까지 하기에는 내 정신력이 부족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있으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번에도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 가거라, 나의 사랑스런 로젤리나여! 너의 옛 약혼자에게 안식을 가져다 주어라! 크하하하핫!”

키메라 로젤리나가 한 걸음씩 다가왔다. 어제와는 또 달랐다. 어제는 빠르게 움직이며 공격해왔지만, 이번엔 천천히 다가와서 나를 잡았다. 제코르는 그런 느린 움직임에도 내가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하는 걸 보며 입이 찢어져라 미소를 지었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채, 자글자글한 주름이 넘치는 노인의 찢어진 입만이 보였다. 섬뜩한 장면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나에게도 시간이 더 주어졌다. 베르트랑의 감정을 가라앉히고, 냉정함을 유지하며, 육체의 조종에도 신경 쓸 수 있는 시간이. 이번에 못하면 내일까지 또 기다려야만 했다. 아니, 이미 이번은 글러 버린 것 같지만, 내일을 위해서라도 조금 더, 아주 조금이라도 더 나아가야만 했다.

그래서 로젤리나가 내 머리와 몸을 잡고 서서히 당길 때, 겨우 내 손목을 움직일 수 있었다.

물론 너무 늦었지만.

“크와아아앙앙!”

[실패하셨습니다. 다음 기회를 기다리세요!]

+ + +

“제코르!”

“크크크크큭, 죽어라, 베르트랑!”

이번에는 다시 혼자 왔다. 은십자 기사단이 같이 와봐야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이틀 전이랑 다른 점이라면, 베르트랑의 감정에 취해 혼자 온 게 아니라, 내 선택으로 홀로 움직였다는 것이다.

“가라, 나의 사랑스런 로젤리나!”

“……로젤리나…….”

“크아아앙!”

제코르의 말에 키메라 로젤리나가 나를 향해 빠르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여전히 빠른 속도였다. 거기에 더해 키메라의 팔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역시나 빠른 속도였다.

하지만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게 아니고, 내 검이 따라잡지 못할 속도가 아니며, 내 몸이 견디지 못할 힘이 아니었다. 보는 순간 알 수 있었고, 그건 이전에 봤을 때도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다만 내 몸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죽었을 뿐이다.

깡.

그러나 이번은 다르다. 베르트랑의 감정은 여전히 격정적이고, 집채만 한 파도가 되어 나를 삼키려 들고 있지만, 그 파도를 타고 날아올랐다. 그의 감정을 수용하고, 그의 감정에서 객관적으로 있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야 키메라의 공격을 막는 것 정도는 간단했다.

카강.

오른손에 이어 들어오는 왼손의 공격도 검을 옮겨 막아냈다. 역시나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키메라답게, 피부가 강철과 같았다. 검에 마음을 모아 검기를 일으켰다. 다음 번 공격은 막음과 동시에 팔을 잘라내고 이어 다리를 잘라버릴 생각이었다. 노란 검기가 애검 라이트닝에 맺혔다. 그리고 그 이름과 같이 번개처럼 변한 검으로 키메라의 공격을 막았다.

스응.

키메라의 오른손이 공중을 날았다. 그것을 눈과 감각으로 동시에 확인하며, 검로를 옮겨 오른 다리를 베려고 했다. 그런데, 그게 내 뜻대로 안 됐다. 베르트랑의 감정이 다시 커졌다. 그 감정이 내 감정을 잠식하고, 내 감정은 내 이성을 흔들고, 내 이성은 베르트랑의 육체에 대한 제어를 놓쳐 버렸다. 검기가 사라졌고, 몸도 일순간 경직되었다. 결국 공중에서 무방비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 무방비한 몸뚱이에 키메라의 왼손이 망치처럼 내리꽂혔다.

쾅, 텅, 텅, 터엉.

“쿨럭!”

아팠다. 이번엔 내 정신이 진짜로 멍해졌다. 이제껏 고통이라고 느낀 게 제대로 없었다. 하나같이 죽음에 이르는 고통이라, 뭘 느낄 새가 없었다. 이 게임의 시스템이 어떻게 되는 지는 잘 몰라도, 죽기 직전의 고통은 느끼지 못하게 해주는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죽지 않을 고통은 그대로 느끼게 해주는 것 같았다. 지금처럼

“크아아아악!”

“……어라? 이거 번개의 검사가 왜 이렇게 엄살이지? 이 정도로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다니? ……뭐, 나야 잘 된 일인가? 크크큭, 로젤리나! 베르트랑이 더 고통스러워하고 싶으시단다. 귀여워 해 드려라!”

갈비뼈가 부러져 폐를 찌른 것 같았다. 아픔에 머리가 하얘져 있었다. 제코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고, 로젤리나가 다가오는 지도 몰랐다. 복부에 정신이 번쩍 들 정도의 타격을 입기 전에는, 키메라의 왼손이 나를 공격하는 지도 몰랐다. 그 공격에 다시 한 번 나동그라지며, 장에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크아아악!”

있는 대로 비명을 질러 봐도, 아픔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목청만 아플 뿐이었다. 하지만 자동적으로 비명이 흘러나왔다. 불공평하다. 왜 이렇게 아픈 거야, 차라리 죽이라고.

쾅, 쾅, 쾅, 쾅!

키메라 로젤리나가 내 옆으로 오더니, 발로 나를 마구 밟았다. 나는 한 번 밟힐 때마다 붉은 피를 토해내며 비명을 질렀다. 내 영혼이 땅속으로 박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한 4번쯤 반복되자, 아픔이 줄어들었다. 정신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영혼이 심호흡을 하면서 몸을 움직일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 몸이 이제 죽어 버렸다.

키메라 로젤리나는 내가 죽었음에도 계속 발을 구르며 구슬픈 포효를 내질렀다.

“크와아아아앙!”

[실패하셨습니다. 다음 기회를 기다리세요!]

+ + +

“젠장! 이놈의 유리멘탈 같으니라고!”

베개를 땅으로 집어 던지며, 베르트랑을 욕했다. 그 놈의 유리멘탈 자식은 어떻게 한 번을 그냥 넘어가는 적이 없다. 연인이 키메라가 됐다고 굳고, 그 연인의 팔이 자기 때문에 날아갔다고 한 번 굳었다.

그 덕에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겪었다. 트라우마가 될 정도로 끔찍한 고통이었다. 내 몸도 아니었고, 현실도 아니었지만, 지금도 그 고통이 생생했다. 아직 키메라의 무거운 발이 내 복부 위에 올라와 있는 것만 같았다.

“썩을 자식………, 후우, 후우………, 쳇.”

썩을 자식은 썩을 자식이지만, 이번 판의 경험은 컸다. 어떤 방식이든지 고통이 그대로 전해진다는 걸 알게 된 건 좋은 일이었다. 그 동안은 고통이 안 느껴질 거라고 지레짐작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때문에 이 게임에 대한 호감이 팍 줄어든 것만은 사실이다. 고통을 주는 게임을 지속해야할 이유는 아직 찾지 못했다. 베르트랑의 감정은 심히 공감이 가고, 나도 어떻게 해주고 싶지만, 내 고통은 그 무엇보다 우선이다. 그에게 로젤리나가 무엇보다 우선인 것처럼 말이다.

속물적이라고 말해도 어쩔 수 없다. 즐기기 위해 이걸 하려고 했고, 즐기지 못하면 그만두는 게 맞으니까. 나에게도 연인이 있었다면 그처럼 연인을 위해 고통을 감수할 수 있을지 모르나, 지금은 솔로인데 뭐가 문제인가? 솔로는 솔로답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하지?

그러나 그날 밤에 다시 잠을 청했을 때 내게는 선택지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퀘스트를 깨고 보상을 받으세요! 100개의 퀘스트를 깰 수 있다면 당신은 이 세상의 영웅이 될 것입니다!]

[마음의 준비가 되셨다면 ‘시작’이라고 말씀해 주세요. 첫 번째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좋아, 누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

고통은 끔찍했지만, 하루쯤 지나고 나니 이미 기억 속에서 희미해졌다. 내 몸이 아니라는 사실이 크게 도움이 된 것 같다. 그리고 까짓것, 안 맞으면 되는 거 아냐? 이대로 물러서는 건 내 게이머로서의 혼이 용납하지 않는다고.

“시작.”

나는 고삐를 강하게 쥐었다.

============================ 작품 후기 ============================

여러분의 작은 관심이 작가에게는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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