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왜 이런 일이 내게 생겼을까? 당연히 알 수가 없었다. 그 어떤 징조도 없었고, 그 어떤 설명도 없었다. 그냥 잠이 드니 메시지가 떴고, 이상한 곳에 떨어졌을 뿐이다. 이곳은 다른 세계인 걸까? 아니면 누군가가 만들어낸 정교한 게임인가?
장르 소설에 등장하는 가상현실 게임 같은 거 말이다. 지금의 기술로는 절대로 만들 수 없을 것 같지만, 혹시 누군가가 이런 게임을 만들었을지 모른다. 그럼 내가 자고 있을 때 몰래 집으로 들어와서 납치한 다음에 접속을 시키는 건가?
그것도 아니라면 내 완벽한 상상력이 만들어낸 꿈일지도 모른다. 어제의 경험이나, 지금 내 눈에 비치는 광경만 생각하더라도 불가능할 것 같지만, 또 모른다. 머리가 아프고, 알바 중에 내내 자는 이유가 이런 완벽한 꿈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일 수도 있지 않은가?
정체는 알 방법이 없고, 그럼 목적은 뭘까?
메시지에 나와 있는 대로라면, 당신은 영웅이 될 것입니다? 영웅? 무슨 영웅? 게다가 어떻게 영웅이 된다는 걸까?
이걸로는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도대체 뭐가 목적인지.
단 하나 알 수 있는 거라곤, 내 삶에 변화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이대로 공부하고, 군대에 가고, 졸업하고, 취직하고, 결혼은……, 어쨌든 그런 식으로 평범하고 무료하게 진행될 것 같은 내 삶에 남들과 다른 특별한 일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내일이 되어 이 꿈이 끝난다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겠지만, 왜인지 그럴 것 같은 예감이 들지 않았다. 내일도, 모레도, 또 그 다음 날도 이 꿈은 이어질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이 메시지처럼 100개의 퀘스트가 끝나기 전에는 평생 이런 꿈을 꿀 것만 같았다.
두근, 두근, 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만 같았다. 지금 내 상태는 시각 말고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지만 그런 기분이었다. 지금 내 심장이 있었다면 튀어나올 정도로 뛰고 있었을 것이다.
살짝 두렵긴 했다. 무슨 목적인지 모르니까. 그러나 그것 때문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뛴 건 아니었다. 심장이 뛸 뿐만 아니라, 미친 듯이 웃고도 싶었다. 소리를 낼 수 있다면 배꼽이 빠지듯 웃어 재낄 것이고, 표정을 바꿀 수 있다면 입이 귀에 걸리도록 찢어질 것이다.
즐거웠다. 기대감이 몽글몽글 솟아올랐다. 앞으로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르겠지만, 무료한 삶보다는 나을 것이다. 게임에 몰두해서 시간을 보내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던, 의미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 삶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무엇보다 재밌었다. 어제의 경험은 너무나도 신선했고, 피가 끓어오르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말을 타는 것도 재미있었고, 스치는 바람이 시원했고, 갑옷의 차가운 감각조차도 아주 좋았다.
그다음은 무얼 할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이 넘쳐흘렀다. 검을 휘두를 수 있을 것이고, 마법사랑 싸울 수 있을 것이고, 기억만으로도 아름다웠던 공주를 실제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그 후에는 어떤 일이 있을 것인가? 다음 퀘스트는 뭘까?
가상현실게임을 꿈꿔보지 않은 게이머가 있을까? 있을지도 모르지만, 자칭 프로게이머인 나는 가상현실게임을 꿈꿨다. 죽기 전에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그럴 때마다 현재의 기술력으로는 불가능할 거란 결론을 내리며, 굉장히 안타까워했다. 꿈에서라도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는데, 꿈이 어떻게 원하던 대로 되던가?
그런데 이런 기회가 내게 온 것이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모르지만, 이런 기회를 잡지 않으면, 이런 기회를 즐기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바보가 아닌가?
그리고 도망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이 일을 하는 자가 누구든, 이 정도의 일을 할 수 있으면 적어도 내가 상대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닐 것이다. 신이나 악마라면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며, 인간이나 회사가 상대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나란 인간은 물론 평범한 소시민일 뿐이지만, 이런 일이 내 주변에 일어나는 데도, 심지어는 스스로 그 대상이 되었는데도 사전에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만큼 은밀하고 빠르게 모든 일을 추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상대에게, 평범한 소시민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게 함정이라면 벌써 함정에 빠진 것이고, 상대의 의도가 뭐든지 거기에 걸려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함정이든 뭐든, 해답은 아마도 이 게임 속에 있을 테니까.
“시작.”
다그닥, 다그닥.
말은 어제와 같이 시원하게 나갔다. 두 번째 하는 거지만 말을 몰 수 있다는 건 여전히 신기한 일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하는 거라서 어제보다는 익숙했다. 잴 것도 없이 고삐를 한 손으로 바꿔 잡고 다른 한 손으로 투구를 매만졌다. 어제처럼 잘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어디를 고정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그 순간에 내 손이 알아서 움직였고, 이전에 알았던 것처럼 그 지식을 떠올렸다.
이런 방식이면 검술 같은 것도 내 맘대로 쓸 수 있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쓸 수 있는 검술에 대한 것들이 떠올랐다. 기본 베기부터 시작해서 화려한 고급 검술까지 차례대로 떠올랐다. 발의 위치, 팔의 각도 같은 세세한 자세는 기본이고, 무게 중심을 어떻게 둬야 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검로를 이어야 하는지도 떠올랐다. 검술교본을 통째로 외우고 있는 듯했다.
검술 대부분은 내가 살아가는 현대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몇몇 것들은 현대에서 도저히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게임에서나 보던 것들이 기억 속에 있었다. 이른바 검으로 충격파를 날린 다거나, 검막을 생성한다든가 하는 것들이었다.
뭐야, 이런 게 검으로 되는 거야?
퀘스트에서 마법사를 봤을 때 이런 일을 예상하기는 했다. 초자연적인 힘들이 존재하는 세계, 거기에 대응하려면 이런 힘이 당연히 필요할 것이다. 그래도 신기한 건 신기한 것. 당장에라도 써 보고 싶었다.
“이제 금방입니다!”
어제처럼 오른편에 있던 사람이 외치는 소리에 그쪽으로 돌아보았다. 눈과 입을 가려주는 바이저를 올리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처음에는 누군지 몰랐는데, 바로 누군지 깨달았다. 오래도록 내 부관이었던 크리스. 동시에 믿을만한 사람이라는 정보가 떠올랐다. 그의 눈에 걱정과 두려움, 기대가 섞여 있었다.
“반응은 저 동굴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바로 돌진하시겠습니까?”
왼쪽에 있던 사람도 눈과 코, 입만 보였다. 그 외의 부분은 투구를 비롯한 갑옷에 쌓여 있었다. 그의 이름은 마크. 크리스와 마찬가지로 어릴 때부터 나를 보좌해 온 부관이었다.
눈앞에는 어제 본 동굴이 있었다. 여전히 기병 셋이 달려도 부족함이 없는 넓은 동굴이었다. 그 동굴을 보는 순간, 어제의 기억이 연이어 떠올랐다. 어제 분명 들어가자마자 정신을 잃었다. 무언가 눌리는 듯한 느낌이 나는 것과 동시에 실패 메시지가 떴다. 그러니 안에 무언가 있다고 봐야 했다. 아마도 함정 같은 거겠지.
손을 들었다.
“전군, 정지!”
일단 멈춰서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내 몸이 알아서 반응했다. 가슴에서부터 웅혼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내가 말해놓고 스스로 깜짝 놀랐다. 목소리만으로 주위 공간이 가득 찰 정도로 힘이 담긴 목소리였다. 물론 그 언어도 신기했다. 알 수 없는 언어를 아주 자연스럽게 말하고 있었으니까.
이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까. 함정이 있으니까 발동을 시키고 파괴를 하든가, 아니면 해체를 해야 하겠지? 게임이라면 그렇게 접근할 거고, 나는 지금 이 상황을 일종의 게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은십자 기사단에 함정을 해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던가? 내 기억, 아니 정체불명의 기억은 내게 바로 답을 알려 주었다. 은십자 기사단에 함정을 해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 파괴해야겠군. 여기서 함정전문가가 올 때까지 기다릴 시간은 없으니까. 이미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내 약혼녀인 로젤리나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몰랐다.
이 생각을 하면서 내 속에서 살짝 분노가 일어났다. 그건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인 동시에, 굉장히 어색한 느낌이었다. 한 명의 나는 거기에 동조했지만, 또 한 명의 나는 그걸 지켜보고만 있었기 때문이다. 이 분노는 분명 나의 것이 아니었다. 내 속에 있는 누군가, 어쩌면 내가 몸을 차지하고 있는 주인의 분노였다.
그러나 그게 나를 지배하는 수준은 아니었기에 불쾌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상황에 더 집중할 수 있게 해주었다. 나에겐 이 상황이 죽어도 죽지 않는 게임 같은 거지만, 또 다른 나에겐 실제 상황이었다. 역할 놀이로 끝날지, 그 이상이 있을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진지하게 임할 필요를 느꼈다.
스르릉.
왼쪽 허리춤에서 나의 애검, 라이트닝Lightning을 꺼내 들었다. 칼집을 빠져나오는 소리만으로 가슴을 섬뜩하게 만드는 날카로운 예검이었다.
아무 말은 없었지만, 크리스, 마크를 비롯한 은십자 기사단이 내 행동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좌에서, 우에서, 뒤에서 느껴졌다. 현실의 나는 이런 시선 앞에 서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떨릴 줄 알았다. 주저할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지금 나는 나인 듯 내가 아니라서 어색하지만 익숙했다. 거기에 단련된 육체는 내게 허튼 움직임을 허락하지 않았다. 심장이 살짝 두근거려도, 그 떨림이 검 끝에까지 전달되지 않았다. 고요한 검 끝을 위에서 아래로 가볍게 내렸다.
그 궤적을 따라서 노란색의 반달이 생겨났다. 반달은 바라던 대로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빠른 속도였다. 원래의 나라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였다. 노란 반달은 파공음을 내며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면서 뭔가 건드린 건지, 띵 하는 소리가 났고, 그다음 입구 쪽에 동굴을 막을 수 있는, 엄청난 암석 덩어리가 떨어졌다.
쿠우웅.
“백작님……, 어떻게?”
크리스가 놀라움을 이기지 못한 듯, 의문을 내비쳤지만 무시했다. 내렸던 검을 다시 올렸고, 또 내렸다. 그것만 아니라 연이어 총 8번을 베었다. 벨 때마다 내 검의 궤적을 따라 노란색 반달, 말하자면 검기가 생성되었고, 8개의 검기가 뒤엉켜서 동굴을 막은 암석 덩어리를 향해서 날아갔다. 내가 쓸 수 있는 중급기술 중에 하나로 이름은 라이트닝 템페스트Lightning Tempest라고 한다.
8개의 검기는 암석 덩어리와 충돌했고, 충돌 과정에서 회전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폭풍이 되어 거대한 암석 덩어리를 가루로 갈아 버렸다. 남은 것은 적당한 크기로 분열된 암석들과 자갈, 돌멩이뿐이었다.
“백작님, 분부를.”
“함정을 하나하나 파훼할 시간 따위는 없다. 모조리 부수며 돌진한다. 목표는 제코르의 목이다. 오늘 밤은 그의 피로 전우들의 원한을 달래는 거다. 모두 돌격!”
마크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내가 한 거지만, 내가 한 게 아니었다. 함정을 부수며 나아가자 라는 말 정도를 하고 싶었는데, 내 입에서 나오는 건 저런 오글거리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게 너무 기분이 좋았다. 이건 영화의 주인공이나 할 수 있는 대사가 아닌가? 삶의 변두리에서 그저 시간을 때우고 있던 나는 겪어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걸 지금 하고 있다. 그것도 현실과 거의 다를 바 없는 완벽한 세계 속에서.
신이 나지 않으면 소년이 아니다.
말의 배를 차며 가장 먼저 앞으로 뛰어 나갔다. 왼손은 고삐를 잡고, 오른손은 라이트닝을 잡고 있었다. 그 무엇이든, 내 앞을 가로막는 게 있다면 베어 버릴 각오로 달렸다.
내 사랑이 이 동굴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누가 나를 막을 것이냐! 번개의 검사라는 이명을 가진 나, 베르트랑을!
============================ 작품 후기 ============================
여러분의 작은 관심이 작가에게는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