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공주를 구하라!>
[퀘스트를 깨고 보상을 받으세요! 100개의 퀘스트를 깰 수 있다면 당신은 이 세상의 영웅이 될 것입니다!]
[마음의 준비가 되셨다면 ‘시작’이라고 말씀해 주세요. 첫 번째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시야 중간에 반투명하게 쓰인 글씨의 내용은 그런 것이었다. 이건 뭘까?
내 눈에 보이는 바대로라면, 숲 속에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말 위에 타고 있었다. 양손은 그 고삐를 잡고 있었는데, 손에는 철로 된 장갑을 끼고 있었다. 나만 그러고 있는 건 아니었다. 말도 머리에 철갑을 두르고 있었다.
양옆에도 말이 있었는데, 그 모양이 달리다가 공중에서 정지한 모양새였다. 벌려진 말의 입이 그리는 곡선이 마치 캡처한 것 같았다. 지금 당장에라도 달릴 듯했다.
말 위에는 영화에서나 볼 법한 갑옷을 입은 사람이 타고 있었다. 양옆의 두 사람 모두 그런 것으로 보아, 나 역시 그런 차림새일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생각이냐 하면, 몸이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이상은 내 시야로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시각 이외의 감각은 활성화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철갑을 끼고 있는 손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데 말을 하라고? 입은 움직이는 건가? 하지만 역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시작이란 말만 할 수 있는 건가?
하지만 함부로 내뱉지 않았다. 지금 상황이 뭔지는 몰라도 섣불리 시작이라고 하는 멍청한 짓은 할 수 없었다. 퀘스트라고 하는 걸 보면 게임인지도 몰랐다. 가장 먼저 그게 떠올랐다.
게임이라, 게임이라. 게임만 너무 하다 보니 꿈도 이런 걸 꾸는 건가? 한 번도 이런 꿈은 꾼 적이 없는데?
꿈이라는 걸 확인하는 방법 중에 가장 잘 알려진 그 방법을 시도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몸을 움직일 수 없으니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이건 뭔가, 나는 누군가 하고 고민해봤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상황이 변할 기미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시작이라고 말해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폐에서 공기가 흘러나와 성대와 입을 통해서 소리가 만들어졌다.
“시작.”
다그닥, 다그닥.
말이 땅을 박차는 소리가 가장 먼저 내 귀를 때렸다. 내 몸이 말 위에서 들썩거렸다. 갑자기 벌어진 일들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내 몸은 안정적으로 말 위에 있었고,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이건 마치, 내가 말을 타고 있는 것 같았다.
오옷, 나 천잰가? 말 처음 타는 건데 떨어지지도 않아! 그리고 이 속도는 뭐지? 스쿠터보다 빨라!
신기했다. 정말로 신기했다. 말을 타고 있다는 것도 신기했는데, 무시무시한 속도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건 더 신기했다. 뺨에 부딪치는 바람이 칼날처럼 나를 스쳐 갔지만, 방향을 잃지도 않았고, 말 위에서 리듬을 잘 타고 있었다. 심하게 들썩거리는 데도 멀미할 기미도 안 보였다. 배만 타도 심심하게 멀미를 하는 나인데 말이다. 그리고 이 속도감이 익숙하다는 것도 신기했다. 친구 스쿠터 뒤에 타서 조금이라도 빨리 달리면 친구를 타박하는 게 난데.
온몸에서 느껴지는 무게를 견디고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 내 감각이 틀린 게 아니라면, 어깨를 누르고 있는 무게는 거의 20kg이 넘는 거였다. 그런데도 내 몸은 전혀 힘들지 않았다.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버티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고삐를 잡고 흔드는 손도 신기했다.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힘이 장난이 아니었다. 사과를 쥐면 단번에 으깨버릴 듯한 힘이었다. 언제 배웠는지 말의 움직임에 맞춰서 고삐를 풀거나 당기는데, 그 기술이 신기에 가까워 보였다.
조심스레 왼손으로 고삐를 놓았다. 굳이 두 손으로 잡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그랬다. 내 머릿속에 그런 지식이 어느새 들어와 있었다.
자유로워진 왼손으로 내 얼굴을 만져 보았다. 얼굴에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그 이상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건틀릿이라고 해야 하나? 손에 끼고 있는 것 때문에 손으로는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만질 수 없었다. 철의 표면을 거울같이 사용할 수 있을까 하고 또 보았지만, 무광택이라 비치는 게 없었다. 그리고 숲 속이라 빛도 적었다.
이게 꿈이 아니라는 걸 확인해보려 했는데,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퍽.
꿈이 아닌 건가?
왼손으로 가볍게 볼을, 투구로 어느 정도 보호되고 있는 볼을 쳤는데 꽤 아팠다. 투구의 투박함이 내 볼을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짓눌렀다. 이거 투구가 제대로 고정되어 있지 않잖아? 응? 그 생각을 하고서 스스로 놀랐다. 내가 왜 이런 걸 알고 있는 거지?
“백작님, 정신 차리십시오. 백작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왼편에서 소리치는 사람의 목소리에 순간 멍해졌다. 조금 전에도 놓지 않았던 고삐를 놓고서 말에서 떨어질 뻔도 했다.
이번 건 신기하다 못해 이상했다. 내 귀에 들리는 건 처음 들어보는 언어였는데, 알아들을 수 있었다. 12년 동안 한 영어는 한 자도 듣지 못하는데, 이건 처음 듣는데도 귀에 쏙쏙 들어왔다. 그리고 외국어 같은 느낌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모국어도 아니었다. 정말 이상했다. 내 좌뇌는 이걸 모국어로 듣고, 우뇌는 외국어로 듣는 느낌이었다.
“이제 금방입니다!”
오른편에서도 같은 언어로 말했지만, 이해하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말에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 기억 속에서 떠오른 듯, 매우 희미한 장면이었다.
‘끌끌끌, 공주의 피로 목욕을 하면 시원하겠군. 크크큭.’
‘백작님!’
검은색 누더기를 뒤집어쓴 노인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성의 허리를 붙잡고는 공중에 떠 있었다. 처음에는 무슨 상황인지 몰랐다. 삼류 게임에도 나오지 않을 신파인가 하고 생각했는데, 이어 떠오르는 정보들이 있었다.
공주는 내 약혼녀였다. 정략이었지만, 정략이 아닌 약혼녀. 나는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도 나를 사랑했다. 이번에 내 성에 찾아온 건 결혼 날짜를 확정하기 위해서였다. 그동안 만남은 매번 왕성에서 가졌지만, 이번만은 특별히 그녀가 내 성으로 왔다. 후에 자신이 살 곳을 보고 싶다고 했다. 나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반대했지만, 이번만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대신에 공주를 호위하는 인력은 특별히 더 추가했다.
그런데 그 인원들을 다 죽이고 공주가 납치되는 일이 발생했다. 범인은 흑마법사 제코르. 늘 나와 부딪히는 인물이었다. 마지막 전투에서 크게 한 방 먹여서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렇게 치졸한 복수를 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공주를 잡아가다니. 내 목숨과도 같은 그녀를 잡아가다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진짜로 슬퍼지고 있었다. 머리를 한 번 흔들고 나니 조금 진정되었다. 사랑하는 사이라고? 제코르?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이 기억은 뭐고, 이 감정은 뭘까?
그 순간, 내 귀에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분명히 한국어였다.
[첫 번째 퀘스트, 공주를 구하세요! 공주를 구하면 므흣한 선물이 있을지도?]
이번엔 이해가 안 되었다. 이전의 말들은 외국어라도 무슨 말인지 이해되었고, 전혀 어색하지 않았는데, 이번에 귀에 들려온 건 단어 하나하나는 이해가 되어도, 문장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퀘스트? 공주? 므흣? 도무지 연결되지가 않았다.
“반응은 저 동굴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바로 돌진하시겠습니까?”
귀에 들려온 소리가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하는 사이에, 상황은 급박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울창한 숲 속에 거짓말처럼 뚫려있던 길은 깎아지른 벽에 막혀 있었고, 그 벽 아래에 커다란 동굴이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커서, 기병 셋이 달려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였다. 마치 현대의 터널 같은 느낌? 절대 자연적인 공간은 아니었다.
옆에서 부관들이 다그치는 소리에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나를 계속 쳐다보던 왼쪽의 사람이 그걸 놓치지 않고서 외쳤다.
“모두 돌격! 이번에야말로 제코르를 쳐부순다!”
“우와아아!”
그제야 내 뒤에 수십의 사람들이 따라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내 뒤를 따라오고 있는 건 은십자 기사단이었다. 내 수족과도 같은 사람들. 그런데 왜 이렇게 이름이 촌스러운 거야?
모두 돌격이라고 했지만, 가장 앞서 달리는 건 나였기 때문에 동굴에 먼저 들어간 건 나였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무언가에 눌린 것 같은데, 자세한 건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행인 건 그리 아프지 않았다는 걸까. 기억하는 마지막은 여전히 이해하기 힘든 한국어 목소리였다.
[실패하셨습니다. 다음 기회를 기다리세요!]
+ + +
따르르르르르릉!
잠에서 깬 건가? 저 소리는 분명 내가 맞춰둔 알람 소린데. 그런데 왜 잔 거 같지가 않을까? 조금 전까지 경험했던 건 도대체 뭐지? 꿈인가? 꿈인 건가?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했는데?
마치 눈을 감았다가 떴는데 벌써 일어나야 하는 시간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잠이 오지는 않는데, 여전히 어안이 벙벙했다.
따르르르릉!
다시 한 번 알람이 울리고서야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일단 학교에 가면서 생각을 해야 할 것 같았다.
+ + +
온종일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지만, 꿈을 꾼 것 같지가 않았다. 기억이 너무 생생했다. 피부에 느껴지는 바람이나 코로 맡은 숲의 냄새, 땀 냄새, 말의 냄새 등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갑옷의 모양이나 문양들도 당장 그릴 수 있을 정도였다. 언어만은 희미하게 기억났지만, 그 뉘앙스라고 해야 하나? 특징들은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었다. 말은 못해도, 흉내 정도는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억이 생생한 건 ‘사실적인 꿈이구나.’하고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어젯밤 꿈에 나타났던 그 모든 것들은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었던 일이라는 게 문제였다. 그저 내 상상으로만 이루어진 꿈이라면 어딘가 부족할 수밖에 없다. 냄새가 상황에 안 맞는다거나, 감각이 이상하다거나 하는 일들이 분명히 있어야 했다. 그러나 어젯밤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모든 것이 완벽했고, 자연스러웠다. 꿈은 말이 땅을 디디며 전해오는 충격 하나하나를 빼놓지 않고 느끼게 해줬다. 너무나 이상한 경험이었다.
그 생각에 온종일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사장에게 내 뒤통수를 많이 내주었다. 그래도 계속 그 생각에 빠져 있었다. 웬일인지 알바 중에 잠도 오지 않았다. 말을 타고 숲을 내달리던 기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다시 침대에 누웠다.
꿈이 아니라면, 자는 거에 무언가 비밀이 있을 거로 생각했다. 어제 오래도록 게임을 하고 새벽이 다 되어서야 잠이 든 기억은 생생했으니까.
다시 그 세계로 들어가는 건가 하는 궁금증.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하는 걱정과 두려움. 혹은 소설 같은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닌가 하는 기대감.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살아있는 기억들.
무료하기만 했던 일상이 깨지는 것인가?
[퀘스트를 깨고 보상을 받으세요! 100개의 퀘스트를 깰 수 있다면 당신은 이 세상의 영웅이 될 것입니다!]
[마음의 준비가 되셨다면 ‘시작’이라고 말씀해 주세요. 첫 번째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말이 두르고 있는 철갑을 배경으로, 다시 내 눈 앞에 나타난 메시지를 보면서 내 일상이 알 수 없는 곳으로 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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