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9월의 카페>
“하아암.”
입을 잔뜩 벌리고 절로 나오는 하품을 토해 냈다. 잠이 온다. 낮인데 벌써 잠이 온다. 새벽까지 한 게임 때문인 것 같다. 늘 있는 일이기 때문에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여기가 카페의 카운터만 아니라면.
딱.
“아악, 왜 때려요?”
“손님 왔다, 이 녀석아.”
말쑥하게 차려입은 사장의 말에 아픈 뒤통수를 만지며 앞을 보았다. 자주 보는 고등학생이 눈앞에 서 있었다. 가방끈이 어깨를 파고들 정도로 들고 다니는 것도 모자라 가슴에도 책을 가득 들고 있는 여고생이었다. 얼굴은 그냥저냥 생겼다. 안경 벗고 화장하면 예쁠 것 같다고 사장은 늘 이야기하지만,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좋게 말하면 귀여운 소녀다. 아직은.
“얘가 무슨 손님이에요!”
“유일한 단골이다, 이 자식아! 똑바로 안 하면 잘라 버린다?”
사장의 협박은 이미 수십 번도 더 들었다. 그러나 한 번도 잘리지 않았다. 왜냐고? 내가 커피를 잘 내려서? 아니다. 청소를 잘해서? 그것도 아니다. 아니면 마스크가 돼서? ……마스크는 조금 될지도 모른다. 저 여고생도 솔직히 내 얼굴 보러 매일 오는 게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골목 구석에 처박혀 있는 이 작은 카페에 매번 찾아올 리가 없지. 그렇다고 이제 30을 막 넘기려는 사장 얼굴 보러 오는 것도 아닐 테고.
어쨌든 마스크가 돼서 여기 계속 있는 건 아니다. 정확한 이유는 사장이 귀찮아서. 새로 알바생을 구하고 면접을 보는 게 너무 귀찮아서 내가 이런 식으로 일하면서도 잘리지 않고 계속 일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 이렇게 일하면 잘리는 게 당연했다. 물론 한두 번이면 잘리지 않겠지만, 거의 매일 잠에 취해 보내는 내가 잘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은 꿈의 알바장소였다. 반쯤 잠에 취해 있어도 잘리지도 않고, 손님이 오지 않으면 깨우지도 않는다. 거기에 골목 구석에 처박혀 있어서 손님도 거의 없다. 내 눈앞에 있는 이 여고생을 제외하면.
그래서 가끔은 이 여고생이 싫다. 서서 자는 스킬은 거의 만렙을 찍었는데, 이 학생 때문에 강제적으로 잠에서 깨어나야 했다. 그래도 먼지나 날리고 있는 이 커피숍에 찾아오는 단골이자, 유일한 손님이나 다름없기에 기본적으로는 애정을 품고 있었다. 얘라도 없으면 일하러 온 건지, 잠을 자러 온 건지 구분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 미움과 애정을 섞어 무표정과 퉁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네.”
여고생의 작은 목소리가 내 귀에 들렸다. 가만 보면 얘도 완전히 별종이다. 대학 입학하고부터 이 알바를 시작했으니까, 2학기가 막 시작된 지금까지 거의 반년을 일한 셈이었다. 그동안 이 여고생을 본 적이 절반을 넘겼다. 그런데도 이 여고생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었다. 듣는 목소리라고는 ‘아메리카노 주세요.’, ‘아이스로 주세요.’, ‘네.’ 하는 게 다였다.
심지어 아직 이름도 듣지 못했다. 이름표를 보면 알 수 있을까 했지만, 이름표는 늘 책이나 팔 같은 걸로 철통방어 중이라 이 가게의 유일한 단골이지만 아직 이름을 모른다. 그래서 여고생이다. 그리고 사장이랑 내가 투닥거리는 걸 보면서도 늘 표정이 한결같았다. 학교에서 왕따라도 당하는 거 아닐까? 한 번은 그런 주제로 사장이랑 진지한 토론을 한 적도 있었다. 당연히 결론은 나지 않았지만.
졸린 눈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만들어 여고생에게 직접 가져다주었다. 큰 카페에서는 이런 짓 안 하지만, 이곳은 테이블도 몇 개 없는 작은 커피숍이고, 소녀는 우리 가게의 유일한 단골이었다. 이 정도는 기본이다. 물론 이게 내 알바 시간 중에 거의 유일하게 하는 일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손님이 한 명이라도 더 있었다면 하지 않았을 지도.
여고생의 테이블 옆에 쟁반을 올려 두자 그녀가 머리를 작게 숙인다.
그녀의 테이블은 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 늘 이렇게 공부를 했다. 책을 보니 수능이 코앞인 고3인 건 알겠다. 이 정도로 공부하는 걸 보면, 서울대라도 노리는 건가? 하지만 여기 모습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공부는 여기서만 하는 걸 수도 있으니까. 수수한 겉모습이나 전체적인 분위기를 보면 범생인 듯하지만, 사람은 겉만 봐선 모르는 법이니까.
어쨌든, 어떤 목적으로 공부하는 거 든 잘 되기를 속으로 빌어주었다. 많은 부분에서 귀차니즘을 유지하는 나지만, 이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당연하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자, 그럼 이제 다시 서서 자 볼까? 오늘 알바는 이걸로 끝이다. 여고생이 집에 갈 때쯤 나도 문 닫고 돌아가면 되겠지.
+ + +
내 알바 시간은 매일 오후 6시부터 12시까지다. 다른 카페라면 피크 시간대일 게 틀림없다. 알바생도 한 명 더 붙일 시간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는 나 혼자 지킨다. 오늘은 사장이 있었지만, 사장이 없는 날이 더 많다. 그만큼 손님이 없다. 오늘도 결국 손님이라곤 그 여고생 혼자뿐이었다. 그래도 한 명 정도는 더 들리는데, 오늘은 기록적인 날이다. 기록적이라고 해봐야 타이기록을 세운 날이 수두룩해서 별 의미는 없다만.
12시 가까이 되니까 흐리멍덩했던 내 눈에 팍하고 힘이 들어왔다. 이제 갈 준비를 해야 했다. 원래는 12시가 지나서 해야 하지만, 손님도 없고, 사장도 이미 돌아갔는데 그럴 이유가 없다. 여고생이 조금 걸리지만, 이미 이런 모습을 수십 번 정도는 본 사람이다. 이제 와서 조심해봐야 의미가 없다. 그 전에 나에게 관심이 있는지조차 의문이지만. 소녀는 6시 전후로 와서 책에서 한 번도 눈을 떼지 않았다. 늘 그랬다.
정리라고 해봐야 컵과 기구들을 한 번 정도 닦고, 바닥을 한 번 청소하면 끝나는 일이었다. 보통은 화장실 청소를 해야 하지만, 손님도 없어 사용자가 적은 이 카페는 며칠에 한 번씩 해도 상관없다. 사장조차도 청소한 건지, 안 한 건지 잘 구분하지 못했다.
대충 정리를 끝내고 나니 어느새 12시가 되어 있었다. 여고생에게 이제 끝났다고 얘기하려고 돌아보는데, 소녀도 이미 책을 덮고 갈 준비를 끝내놓고 있었다. 소녀는 가방을 멘 채 텅 빈 잔과 쟁반을 내게 들고 왔다. 그것을 받자, 소녀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책을 가슴에 안고는 종종걸음으로 커피숍을 나갔다. 문을 어깨로 밀면서 내 쪽을 향해 살짝 돌아보는 듯했는데, 아마 그게 인사인 것 같았다.
인사라, 오늘 처음 봤다. 오늘 처음 한 건가? 잘 모르겠다. 그동안은 컵을 받으면 컵을 재빨리 씻느라고 여고생의 나가는 뒷모습엔 신경을 안 썼기 때문이다.
흐음, 밖에서 만나면 손이라도 흔들어 주는 사이 정도는 된 건가?
커피숍의 불을 끄고 잠금장치를 한 다음에 보안절차를 마무리했다. 이러면 진짜 오늘 알바는 끝이었다.
발걸음을 왼쪽 골목으로 옮겼다. 이 주변은 아파트촌, 그것도 오래된 아파트촌이었다. 한 몇 년 뒷면 재개발 바람이 불 것 같은 그런 동네였다. 커피숍은 그 한가운데 있었다. 그러니 장사가 안되지 라고 하고 싶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이 커피숍은 조금 구석에 있기는 하지만, 이 주변에 다른 커피숍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다른 커피숍들은 하나같이 장사가 잘 됐다. 마치 이 커피숍의 손님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말이다.
나야 좋지만, 사장은 이래서 괜찮은 건가? 하지만 사장은 천하태평이었다. 하는 꼴로 보니 돈이 궁해서 하는 건 아닌 거 같았다. 그러니 이렇게 장사가 안되는데도 가게를 유지하고 알바생도 쓰고 직원도 쓰지.
알바생은 나고, 직원은 나 전 타임에 오는 바리스타 누님이다. 예쁘게 생겼다. 그 누나도 한 번씩, 아니 거의 매일 나에게 하소연을 한다. 사장님 좀 어떻게 해 보라고. 일할 게 없어서 편하긴 한데, 바리스타로서의 보람이 없단다. 오래돼서 버려지는 콩들을 보고 있으면 자기 맘이 찢어질 것 같다고.
아무튼 그렇다.
사설이 길었는데, 나는 이 가게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원룸에서 자취 중이라는 것이다. 이 주변은 죄다 연립주택인데, 이 건물만 그나마 새것이고 원룸이 있었다. 주변에 대학이 하나 있긴 해서 그런 거지만. 그리고 그 여고생도 이 주변에 사는 게 틀림없다. 그러니 그렇게 늦은 시간에 돌아다니지. 유흥가가 밀집해 있던 내 고향 집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삐비빅. 딸칵.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무도 없는 방이 나를 반겼다. 조그만 방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침대 위에 옷을 대충 던져 놓고, 책상 앞에 앉았다. 그 위에는 이 방에서 제일 비싼 물품인 40인치 모니터가 놓여 있었다.
집보다 이곳이 좋은 점은 딱 하나다. 바로 게임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것. 그 외에는 모든 것이 집이 좋았다. 청소하지 않아도 되고, 밥을 준비하지 않아도 되고, 빨래하지 않아도 되고, 일어나는 데 힘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 좋은 점 하나로 다른 모든 걸 버틸 수 있었다.
이 세상에 게임만 한 것이 또 있을까?
혹자는 여자 친구라든가, 술이라든가, 담배 같은 것들을 얘기할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돈이 없으니까 여자 친구는 사귈 엄두도 나지 않았고, 술이나 담배는 영 취향에 맞지 않았다. 게다가 술 마시러 가자니 돈이 없었다. 시간도 없었다. 6시간 알바를 하지 않으면 이 집을 유지하기도 벅찼다. 등록금 대 주시는 부모님께 그 이상 손 벌리기도 어렵고 말이다.
학자금 대출을 받지 않는 것만 해도 어디인가?
그런 내가 유일하게 돈을 쓰는 게 게임이다. 모니터도 큰맘 먹고 큰 걸로 하나 샀다.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역시 화면은 크고 봐야 한다.
왜 이렇게 게임을 즐기게 된 걸까?
한 번은 그런 생각을 길게 해본 적도 있지만, 결론은 별거 없었다. 재미있으니까. 재미있으니까 하는 거지, 재미없으면 머리 아프게 이런 걸 붙잡고 있을 리가 없다. 요즘 게임은 쉽지 않아서 배워야 하는 것도 많지만, 학교에서 배우는 것과는 완전히 종류가 다르다. 학교에서 고통받은 머리를 게임을 하면서 치유한다고나 할까. 같이 머리를 쓰는 건데도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건지.
위이잉.
일단 AOS 장르를 먼저 한 판 해볼까? 멘탈 깨지기 전까지 좀 달려 봐야지.
그때까지는, 평소랑 다름없는 하루였다.
============================ 작품 후기 ============================
시작해 봅니다ㅎㅎㅎ
여러분의 선작과 추천, 코멘트, 쿠폰은 작가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후기 추가(20141105)
원래 이 글은 파란 노블로 시작했지만, 오늘 빨간 노블로 바꿨습니다. 그래서 30편 정도까지는 제법 건전한 소설이고, 그 이후도 제법 건전한 소설이.... 밤의 일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소설은 아닙니다. 남녀 관계의 자연스러운 결과로 따라나올 정도랄까요. 이 소설은 하렘 아닌 하렘을 지향합니다만.... 그게 어떤 뜻인지는 소설을 보면서 확인해 주세요!
다시 한 번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