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련 없이 >
*
GF그룹은 순항(順航)하고 있다.
거대한 철마가 처음 움직일 때는 막대한 힘이 필요하지만, 관성이 붙으면 여력만으로도 나아가듯 우리 그룹은 신사업이나 개발에서 손을 떼도 향후 10년은 아무런 문제가 없을 만큼 잘 나갔다.
“이게 다 회장님께서 농사를 잘 지으신 덕분입니다. 좋은 씨를 뿌려서 무럭무럭 잘 키웠으니 남은 건 비료 주고 과실만 제때 잘 수확하는 일 뿐이니까요.”
“오늘도 여지없이 아부로 일과를 시작하는 겁니까?”
“너무 한가해서 이렇게 보필하기라도 해야죠.”
김유천 비서실장이 보고서 하나를 테이블에 두었다. 그런 그에게 나는 직접 내린 커피를 가져왔다.
한국의 본사로 돌아온 지 석 달째가 되었다. 그간 내가 아는 것과 다른 대통령이 당선됐고 우리 그룹의 사업은 언제나처럼 대성공을 거두는 등의 다양한 일이 있었지만 어느 것도 나의 일상을 흔들지는 못했다.
나는 커피 머신을 통해 카페에서 나오는 각종 커피를 손수 제작하는 기술을 배웠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냥.’
소믈리에랑 바리스타.
와인과 커피 중에서 더 쉽고 실용성 있게 써먹을 취미가 뭔가 고민하다가 커피로 정했을 뿐이다. 시험을 치를 마음은 없이 내 마음대로 식도락을 즐기려고 한 거였는데 덕분에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
알고 보니 커피를 만드는 데는 대단한 노력이나 공부를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
원두를 고르고 로스팅 하여 풍미를 조합하는 등의 알 수 없는 탑클래스를 과감히 포기하면 커피는 단순하게 정리된다.
커피 머신 사용법.
설명서 잘 보고 메뉴에 따라서 버튼을 누른다. 원액에 뭘 섞을지, 거품을 낼지 등등 조합하는 방법들만 외우고 비율에 맞게 부으면 된다. 그럼 전문 카페와 똑같은 커피를 마음껏 즐길 수 있다.
‘왜냐면 업장에서 쓰는 기기랑 똑같은 거거든.’
덕분에 회장실에는 항상 그윽한 커피향이 나고 있었다. 물론, 사내의 잘 꾸며서 여러 매체를 탄 카페가 있기는 하지만 내가 만드는 거랑 남이 만들어 주는 건 엄연히 차이가 있다.
자유롭게 먹는 즐거움 말이다.
오늘도 그렇게 4층 휴게실의 카페에서 가져온 원두로 커피를 내려 김유천 비서실장과 함께 마셨다.
“요즘 같아서는 월급 받는 게 죄송스러울 정도입니다. 회장님의 스케줄이 너무나도 한가하시니 제 삶에도 여유가 넘치네요.”
“이제야 드라마에 나오는 회장다운 모습을 사는 겁니다. 계단으로 내려가다가 예쁜 신입사원과 부딪쳐서 서류만 떨어뜨리면 되고 말이지요.”
“뺨을 맞으면 ‘나를 이렇게 대한 건 네가 처음이야’와 같은 대사를 꼭 하셔야 합니다만, 회장님은 그 신입사원의 아구창을 날려버리시겠죠.”
“어허. 아구창이라니요.”
“아니면 때린 신입사원의 손목이 나갈 겁니다.”
“사람을 앞에 두고 괴물 취급하는 거 아닙니다만, 사실이니 인정할 수밖에 없군요.”
아무런 말.
문자 그대로 아무 말을 주고받다가 그가 가져온 던전&워리어의 보고서를 보았다. 중국이라는 거대 시장을 석권한 게임답게 1조원을 가볍게 넘기는 매출이 자랑스럽게 적혔고 최종인 회장이 던전&워리어의 세계관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를 원한다는 메시지가 있었다.
“이 보고서가 참 상징적입니다.
“상징적이요?”
“키니의 약속과 믿음 없이도 잘 될 게임이고 대전이니 뭐니 하며 스토리를 갈아엎을 일 없이도 정통성을 잘 살리는 판타지임을 증명했으니까요.”
기분이 좋다.
꿈속 미래에서 던전&워리어는 한국 게임계 역사에 남는 한 획을 긋는데 그것이 바로 과금 이벤트인 ‘키니의 약속과 믿음’이다.
게임을 플레이하지 않는 사람조차 알 정도로 최악인 이벤트!
아이템을 강화하다가 실패해도 장비가 깨지지 않도록 해주는 이 유료 이벤트는 던전&워리어의 게임성을 절반 이상 허물어 버렸다.
본래 이 게임이 갖고 있던 고강화의 이점은 방어 무시 공격력을 얻게 되는 건데, 키니의 약속과 믿음으로 고강화 장비가 넘치게 됐으니 어쩌랴, 기존 장비를 무력화하고자 한계 레벨을 계속 증가하고 새 장비를 만들었으며 끝내는 방어력 무시라는 개념을 없앴다.
그 결과, 던전&워리어는 999,999,999라는 높은 데미지와 몇 백 억의 체력을 가진 보스 몬스터들이 등장하는 화려하고도 컨트롤 대신 데미지로 찍어 누르는 게임이 되었다.
“하지만 그건 없습니다.”
반면, 돈 되는 상품이나 수익성에 대해 압박하지 않고 키니의 약속과 믿음 같은 이벤트를 하지 않은 채 인력을 추가하니 던전&워리어는 내가 알지 못한 게임이 되었다. 모험가가 여러 경험을 통해 용사가 되는 클리셰의 전형이지만, 풀어나가는 방식은 탄탄했다.
흥미로운 점은 2020년 시점의 스토리 전개보다 2014년의 속도가 더욱 빠르다는 사실이었다. 다만, 세계관을 위협하는 신급의 사도를 처리할 때까지는 시나리오상 취약해진 상태를 유지했다. 내부의 배신자가 음모대로 성공한 탓이다.
게임이 엔딩을 볼 때까지 캐릭터들은 음모의 체스 말로 움직였고 끝내 세계는 멸망하고 말았다. 그 이후 시간의 아이라는 신규 캐릭터를 통해 평행 우주로 넘어가서 재도전하는 방식의 스토리가 전개되었다.
이것은 꿈속 미래의 지지부진하고 보스 레이드로 2년 이상씩 업데이트가 없던 던전&워리어와는 확연히 다른 게임이었다. 이점이 너무나도 마음에 든다.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는데 수익 면에서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룹 내의 모든 사업에 관여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잘 된다는 상징과도 같은 게임이지 않습니까?”
“글쎄요. 보고서에 그런 내용은 없었던 걸로 압니다만, 저 같은 보통 사람과는 다른 것을 보고 말씀하시는 일이 한 두 번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김유천 비서실장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익숙하게 흐름으로 넘겨짚었다.
“다만, 아침 인사에도 언급했다시피 회장님께서 손을 떼도 잘 이루어졌다는 말씀은 어폐가 있습니다. 재촉하지 않고 냉정하게 지켜보는 투자자를 만난다는 것부터가 큰 행운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렴 어떻습니까. 무엇이건 좋군요. 그럼 던전&워리어의 애니메이션은 기쁜 마음으로 기대 하겠다 전해주십시오.”
“검토해주시거나 초안을 잡아주십사 하는 메시지도 적혀 있는데, 혹시 못 보셨습니까?”
“그런 건 전문가들이 알아서 하는 겁니다.”
손짓하여 내보냈다. 김유천 비서실장은 문틈 사이로 소심하게 말했다.
“그 전문가가 회장님이십니다만.”
봐라. 아닌 척 하면서 어떻게든 나보고 일하라고 하는 거.
하지만 나는 다르다.
“프롬에서는 이 다음 게임을 언제 내놓으려나. 골든 링도 내 예상보다 먼저 나올까?”
정장 딱 차려입고 출근한 뒤, 넥타이 풀고 단추 몇 개도 끌러서 게임 콘솔 앞에 앉는다. 세상에는 많은 개발자와 회사가 있고 이들은 저마다 부푼 꿈을 꾸며 출시한다. 켜켜이 쌓이면 거짓말 하나 보태지 않고 몇만 개나 되는 게임이 된다.
대작 게임만 하는 것도 편식이다. 나는 이들 게임을 즐기고 개인 SNS에 별점을 매겨서 가볍게 코멘트를 남기는 일상을 보냈다.
‘그러다 배가 고파서 시계를 보면?’
점심이다. 열심히 뛰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패드만 움직여도 배꼽시계는 끼니때를 잘 알려준다. 짐짓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여기지만, 육체라는 건 심장이 뛰고 피가 돌며 생존하기 위해 부단히도 활동하는 탓이다.
그러면 맛있게 먹고 다시 게임한다.
‘이러다 허기가 지면?’
퇴근 때가 왔다. 시간을 세 토막 내서 붙인 것처럼 단순한 일과다.
이때는 저녁을 먹고 즐기는 일 없이 집으로 와서 가족과의 오붓한 시간을 함께 했다. 사실, 알고 있는 미래를 다 쓰고 나서 은퇴하겠다는 선언이 무색하리만큼 일반적인 삶이 아니냐 할 수 있을 것이다.
빌처럼 일선에서 아예 물러난 뒤, 나이 원숙한 회장님들 대열에 껴서 명가의 원로처럼 사는 게 진짜 은퇴 아니냐고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중대한 문제점이 세 개나 있다.
첫째는 현대 사회가 왕권시대가 아니라는 점이다.
2세에게 왕관을 물려주며 ‘아들아. 네가 태어나던 날, 온 오데론이 네 이름을 속삭였······.
“아니지. 왠지 이러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들놈한테 내가 칼 맞아서 죽을 것 같잖아.”
왠지 오싹한 미래를 스스로 예언한 기분이다. 얼른 냉커피를 마셔서 정신을 차렸다.
‘아무튼.’
내가 우리 그룹에서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건 최대 주주이기 때문이다. 선견지명이니 미다스의 손이니 한다지만, 회사의 주인은 주주인데 거기서도 가장 큰 대주주가 나다. 이런 내가 물러난다면서 주식을 팔아버린다?
더 짱짱하게 나갈 회사를 ‘은퇴할 겁니다.’라는 이유로 넘기는 건 너무나도 멍청하다. 안락한 노후를 위해서도 느긋하게 궁둥이 붙이고 지내야지 이걸 엄한 놈한테 던져줄 이유가 없다.
둘째는 믿을 놈이란 없기 때문이다.
“애써 누른 PC가 다시 나오는 꼴은 절대 못 보지.”
내가 옳다고 확신을 갖고 추켜세운 게임성의 의미는 누군가에게는 최악일 것이다. 여기에 올바름을 끼얹고 싶을 테지만 나는 그걸 똥이라고 부른다.
꿈속 미래의 디지니와 리벤져스만 해도 금방 바뀌지 않던가. 암약하는 무리가 얼씬도 못하는 기조를 유지하고 조던 감독 같은 인물이 나오면 발로 뻥 차버리기 위해서라도 이 자리는 내가 유지해야 한다.
마지막 셋째를 떠올리며 나는 ‘흐흐흐’하고 숨죽여 웃었다.
‘내 연애 사업을 위해서지.’
돈 많은 백수보다는 번득한 직장이 있으면서도 빵빵하게 놀 수 있는 회장님이 더 그럴듯하니까. 그 탓에 나는 출퇴근 길에는 그간 호감을 표시했던 사람들과 연락처는 잘 알지만 사적인 만남은 드물었던 이들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와우! 대장! 요즘 너무 나를 괴롭히는 거 알고 있어요?]
[에밀리. 그게 무슨 말이야? 누가 들으면 크게 오해할 대사인데?]
[봐요. 대장이 문자 보내는 시간을요. 이거 답장하고 통화하려다가 잠도 설치고 있단 말이에요!]
[그럼 나중에 답장 주면 되잖아.]
[우와! 대장! 완전 실망! 이럴 때는 시차를 맞추려고 여기 와줘야 하는 거예요!]
[어째 말 하나하나에 박력을 그렇게 실어 버리냐. 알았다. 이틀 뒤에 갈게.]
[엉? 진짜요?]
[그럼 가짜겠어?]
[와아아!]
[알버트 보러 갈 거거든.]
[야!]
순간적으로 고막을 찌르는 소리에 통화를 끊어버렸다. 이후에는 어디서 배웠는지 당근을 부러뜨리는 이모티콘부터 탁자를 쾅쾅 부수는 모양의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리벤져스에 안 끼워줬다고 엄청 뭐라고 했으면서.”
웃으며 휴대폰의 연락처에서 엠마 스틴이 저장된 목록을 옮겼다. 나에게 아직 호감을 갖고 있는 사람 쪽으로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됐다.
‘과연 일이 전혀 끼어들지 않은 일상에서의 만남에서도 호감이 유지될 수 있을까’하는 것이다.
‘연애랑 엔조이는 다르다고.’
현재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당연하겠지만 47살까지 살았던 꿈속의 경험이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당시의 나는 결혼정보회사에서 등급을 받고 조건을 저들이 맞춰준 채 만남을 가져보는 경험이 전부였다.
서로 결혼을 전제로 마주하는 남녀의 기분은 어떨까.
여자는 모르겠다. 당사자가 아니니까.
다만, 남자인 나의 기분은 안다.
‘사람을 있는 모습 그대로만으로는 못 보지.’
안다. 지금은 내가 운전할 필요도 없이 기사가 운전해주고 뒷좌석에서 상념에 빠질 수 있는 위치라는 것을.
꿈속 미래와 달리 나의 조건이나 여자의 조건에 대해 크게 고민하지 않고 사람에게만 집중해도 된다는 사실 정도는.
그러나 안다고 해서 고민조차 없을 수는 없다.
‘첫 경험이니까.’
이 나이 먹고 무슨 생각이냐 싶겠지만, 연령과 무관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뭐든지 진지하게 여기는 처음은 누구에게나 긴장되고 두근거리며 고민된다.
다만, 생각보다 흥미로울 것이라는 것만큼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
비싼 재료를 마음껏 쓰지 못하던 시절에도 탁월했던 어머니의 요리는 좋은 재료를 만나며 최고의 맛 집으로 탈바꿈한지 오래다.
“고 여사님도 요리책 한 권 쓰시죠?”
“고마워~ 우리 아들. 근데 엄마는 칼 퇴근하는 아들보다 며느리도 보고 싶은데? 데이트는 잘 하고 있는 거지?”
“비법 양념으로 상품 내면 대박도 나실 겁니다!”
“아이고. 때가 됐으니 얼른 가라는 말은 않겠다만, 그래도 기왕 여유를 부린다면 여자도 만나고 그러려무나.”
그 말에 ‘데이트 하러 조만간 나가볼 겁니다.’라는 말을 하려다가 내리 눌렀다. 괜한 설레발이 될 수 있고 이를 통해 여러 말이 오가는게 부담스러워서다.
“거참. 잘난 아들이 오죽 잘 하려고. 먹다 얹히겠으니 그만하고 먹읍시다.”
“당신은 맨날 중간에서 현자인척만 하죠. 고민을 함께 하지는 않고.”
눈을 흘기는 어머니의 모습에 딴청 피우는 아버지.
“제가 왔는데~ 우리 집은 항상 이 모습이라는 사실! 그럼 가족의 비타민인 제가 다 풀어드릴게요! 우리 익룡이랑 함께!”
활기차게 내려온 태희는 목에 뱀을 두르고 손에는 새끼 악어를 올려놓은 상태였다. 그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어머니와 잠시 후 등짝을 얻어맞고 도망치는 동생의 모습이 펼쳐졌다.
그 사이 살그머니 다가온 아버지가 내게 말하셨다.
“봐라.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몸 바쳐 희생하는 동생의 모습을. 저게 다 분위기 이상하면 몸으로 때우는 살신성인이다. 그러니까 이쯤에서 엄마 부탁 좀 들어주는 게 어떠냐?”
“네. 아버지께만 말인데, 사실 그것 때문에 조만간 만나볼 참입니다.”
눈을 휘둥그레 뜬 아버지가 반색하셨다.
그리고 어머니를 불렀다.
“고 여사! 됐어! 당신 아들이 글쎄···”
“어머!”
“오빠? 진짜?”
···역시 우리 집 최고 권력자는 어머니시다. 한숨 내쉬는 사이 소파에 놓인 잡지가 보였다. ‘국내 부자 순위’라는 타이틀과 함께 내가 웃고 있는 사진이 떡하니 박힌 모습이 유난히 눈에 띄는 잡지였다.
<終>
< 미련 없이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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