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576화 (576/577)

< 미련 없이 >

“쟤네들 또 저러네. 그냥 냅둬요. 사고 날 일 없어요.”

빤히 보는 우리에게 가게 주인이 반찬과 술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런 일이 자주 있습니까?”

“많은 건 아닌데 뭐랄까··· 그냥저냥? 가물가물할라치면 생기고 ‘있는 갑다~’ 싶으면 또 금방 친해져서 어깨동무하고 그런 거 말이죠.”

“친해요?”

“남자 새끼들이 다 그렇잖아요. 욕하고 팼다가도 의리 있게 뭉치고 침 뱉고 같이 다니다 바지 벗기기 튀고 그런 것들 말입니다.”

짓궂은 친구들이 벌이는 익살스러운 장난들이 쭉 열거됐다. 정도가 지나치면 지독한 따돌림이나 괴롭힘이지만, 그게 아니면 약간 위험할 뿐인 놀잇거리들이었다.

“저기 보이죠?”

아직 덜 치운 불판과 누군가가 먹다가 일어난 자리를 가리켰다.

“저 자식들이 좀 전까지만 해도 저기서 먹던 놈들입니다. 하단 공격인지 콤보인지 뭔지 막히네 마네, 이게 더 세네, 저게 더 세네 하더니 ‘함 보자!’하고는 말싸움하다가 달려가더니 저 꼴인 거죠. 저러니 6년째 고시 중인 거겠지만요.”

세상에 저런 멍청이가 또 어디 있냐는 투로 말하지만, 모양새가 정말 한심해서라는 뉘앙스는 아니었다. 철딱서니 없는 아들을 보는 시선이다.

남자들의 우정과 추억!

저주 같은 온갖 욕을 다 퍼붓지만 그게 다 일상 언어인 친구들이다.

“별일 아니네요. 그런데 행인이 신고해버리는 경우는 없었습니까?”

“있었지요. 사정 설명하고 알아서 잘 나오면 그만이고요.”

히쭉 웃고는 가게 주인이 음식 준비를 하러 돌아갔다.

준우가 내 잔에 술을 따랐다.

“왜 그러십니까? 오락실 볼 때부터 기분이 꼬롬하고 그러던데 말입니다.”

“저런 게 청춘이다 싶고 나는 제법 꼰대가 됐구나 싶어서 그런다. 사실 눈살 찌푸릴 이유가 전혀 없잖냐. 군대에서도 저런 애들 많이 봤었고.”

생일 빵이니 뭐니 하는 것처럼 군대의 전통 중 잘 알려진 것으로는 모포말이가 있다. 전역하기 전날, 말년 병장을 모포로 말아 놓고 때리는 쓸데없으면서도 기억에 남는 일 말이다.

겉절이들 사이로 숯이 들어왔다. 달궈지는 불판과 먹음직스러운 곱창이 나왔다. 술과 안주가 모두 준비된 테이블을 두고 대화했다.

“서민 체험하듯이 여기 오신 이유가 말입니까?”

“여러모로 이상하겠지. 여태껏 성공하는 투자 아이템만 찾아다녔고 그리 움직였었는데 이번에는 망하는 걸 막겠답시고 오락실에 왔으니까.”

“막상 오락을 즐기지는 않고 태도도 그냥저냥이셨고 말입니다.”

“맞아. 게임은 좋아하는데 오락실은 싫어하거든.”

“형님답지 않습니다.”

“그간의 내가 어땠는데?”

“초인이고 철인이시죠. 명확하고 확실하셨습니다. 남들은 다 틀렸지만, 그게 다 옳았고요.”

“이제 그렇게 살지 않으려는 중이다. 이건 김유천 비서실장한테 너도 들었지?”

최측근이니 모를 리가 없다. 내가 기나긴 휴식기를 가질 거라는 이야기는 말이다.

“아쉽게도 저한테는 들어오는 게 없더군요. 콩고물이 묻어야 챙기네 마네 할 텐데, 그간 너무 강직하게 경호만 했나 봅니다.”

“거봐라. 인생을 각박하게 사니 융통성을 발휘할 일이 없는 거야. 이제부터는 타협하면서 탐관오리처럼 지내라고.”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흘리는 웃음 사이로 불판 위의 곱창이 익어갔다.

“나는 절대적으로 옳아. 게임은 게임다워야 하고 PC건 유료 정책이건 정치와의 관계건 다 부차적인 문제야. 없어져야 할 거라고 봤고 그 확신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런데 오락실은 어떨까?”

“저는 몸 쓰는 일에만 자신 있지 머리 쓰는 일에는 쥐약입니다. 왜 그게 갑자기 오락실이랑 연관되는지 모르겠거든요. 묻지 말고 그냥 얘기해주시죠. 듣는 것 정도는 잘할 자신 있습니다. 곱창도 잘 굽고 말입니다.”

나는 ‘오냐’ 하고서는 말했다.

“페미니즘이랑 오락실의 의미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는 소리다.”

필요하긴 한데 유효기간이 다 됐고 시대에 따라서 모양새가 바뀌어야 하는데 너무 예전의 모습만 유지하려고 든다.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냐는 식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발상의 근거는 이렇다. 우리 어릴 적에는 게임기는 물론이고 컴퓨터가 귀했어. 그나마 접할 수 있는 곳이 오락실이었고 그곳에서 이러저러한 게임을 플레이 할 수 있었단 말이야.”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노는 것이 고작이던 시절.

오락실은 특별한 곳이고 필요한 장소였다.

“테트리스니, 퀴즈니 그림 맞추기니 등등 여러 아케이드 게임을 접할 수 있는 장소가 오락실이지. 여기서 주류가 되는 게임은 네가 봤듯 대전 격투 게임이야. 한 판, 한 판의 호흡이 짧고 수익성도 좋은 데다가 자극적이거든.”

던전&팔라딘 같은 게임은 100원으로 엔딩을 보며 몇 시간이고 즐길 수 있다. 이런 손님은 주인 입장에서는 나쁜 손님이고 가성비가 좋지 않았다.

나는 준우와 나의 자리를 가리켰다.

“문제는 오락실이라는 환경이 스트레스를 증폭한다는 거다. 너도 경험했다시피 지면 기분 나쁘고 이기면 기분이 좋은 건 인간의 본성이다. 스트레스는 지면 쌓이고 이기면 내려가지. 그런데 오락실의 대전 격투 게임은 구조적으로 반드시 기분 나쁜 놈을 만들게 되어 있어.”

지면 내 탓이고 이겨도 내 탓이며 인간은 성공은 쉽게 잊어도 실패는 오래 기억하도록 태어났다. 그래야 같은 잘못을 다시 저지르는 실수를 범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게임에 적용해보면, PVE 콘텐츠와 달리 PVP 콘텐츠가 안겨주는 부담감이자 패배의 경험은 누적되어 스트레스가 된다는 의미다. 게임을 통한 긍정적인 부분보다 부정적인 면모가 강화되는 셈이다.

“게임 때문에 살인이 난다는 주장은 형님이 초창기에 박살 내버린 논리 아니었습니까?”

“김요환 선수랑 나갔던 방송 말하는 거지? 맞아. 게임에서 총 쏘고 몬스터 잡았다고 현실에서도 살인충동이 일어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런데요?”

“내가 짚으려는 건 오락실의 구조와 대전 격투 게임이라는 특정 장르에 대한 거다. 너나 내가 어릴 적에 봤던 양아치가 정신병자처럼 사방팔방 돌아다니면서 시비 거는 놈은 아니잖아. 방금 전에 본 고시생 청춘들도 화가 가라앉으면 어깨동무하고 잘 지내는 사이라고 했듯이.”

“게이머가 성인군자일 수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철없다가 철들었다가 하는 게 보통이니까요.”

“맞아. 그런데 대전 격투 게임은 다양한 사람의 모습 중에서 그 부분을 도드라지게 만들어. 얍삽하고, 치사하게 내 약점만을 집요하게 노리는 놈이 바로 옆에서 히죽히죽 웃고 있는 거야. 기기 반대편에서 조롱하는 소리가 들리는 상황인 거지.”

준우가 말한 어릴 적 친구가 맞은 경험, 인터넷 게시판에서 볼 수 있는 의자를 던져버리고 도망친 누군가의 이야기, 기기의 전원 버튼을 눌러서 꺼버린 일 등등이 해당한다.

‘필살기 커맨드나 다채로운 기술 같은 격투 게임의 게임성을 부정하는 건 아니야. 문화적이고 감성적인 부분에서의 접근일 뿐이지.’

대전 격투 게임은 너, 아니면 나 중에 한 명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리고 화가 쌓이는데 풀기란 마땅치 않다. 폭력이라는 선을 넘기 전에는 담배를 피고 침을 뱉거나 연신 욕을 하며 돈을 넣고 이어서 도전한다. 그러다 이기면 풀리는 것 같다가도 다시 지면 화가 쌓인다.

몹시 흥분해서 어떻게든 이기려 드는데 설상가상으로 상대편이 조롱하는 제스쳐까지 선보인다. 쓰러져 있는 내 캐릭터 위에서 저놈이 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가봤는데 한참 어린 녀석이 있다.

이제 쌓인 스트레스를 푸는 가장 쉽고도 확실한 방법을 선택할 차례다. 치사하게 게임하면서 나를 농락한 꼬맹이의 머리통을 후려치는 거다. 이런 상황을 처음 접하거나 충격적으로 받아들이면 오락실은 나쁜 곳이고 양아치들만 모이는 장소로 남게 된다.

“GF의 게임들에 유독 신고 기능이 많은 게 그런 이유였군요.”

“맞아.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되고 뭐든지 하다보면 늘게 마련이거든. 빈정거림이나 욕설이 지나치면 패드립이 나오고 언어만으로도 사람을 피폐하게 만들 수 있어. 내가 게임으로 교화시킨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게 나쁜 짓이고 하면 페널티가 크다는 건 확실하게 짚어줄 수는 있지.”

꿈속 미래와 달리 GF의 AOS게임에서 패드립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모님 안부를 묻거나 인격적으로 모독하는 짓을 하면 싸잡아서 그런 플레이어들만 매칭 되도록 강제로 묶어버린다.

이곳을 심해라고 명시했는데 이 심해에서 좋은 점수를 받아 다시 수면으로 올라오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비매너 플레이어들이 잘한 파티원이라고 해도 좋은 점수를 주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게 왜 페미니즘이랑 비슷하다는 겁니까?”

“소수자의 인권에 대한 언급과 보호는 처음에는 분명히 필요했지. 그러나 초창기의 목적을 달성한 후에는 보편적인 인권을 보호하자는 목적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계속해서 소수자, 여성과 같은 좁은 울타리의 권리와 확장만을 주장했어.”

인권이 아닌 이권이 됐고 공감 대신 빈축을 사게 됐다. 사회적 강자와 비교하면 여전히 낮은 여성의 인권이지만, 약자 계급에 속한 남자들에게는 그들의 주장이 탐욕으로 보이고 자신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결과로 보이는 탓이다.

아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꿈속 미래에서 자주 보는 논쟁이 대중교통의 좌석 문제다. 버스에 탔는데 맨 앞자리를 제외한 두 번째는 장애인 석, 셋째는 노약자석, 넷째는 여성좌석, 다섯째는 임산부석이라 표시됐고 그 뒤부터 앉을 수 있는 것 말이다.

‘귀찮을 일을 피하려고 아예 서서 가는 게 속 편하다고 생각했었지.’

소시민에게는 어느 대포의 100억 횡령은 멀어도 소주 값, 담뱃값, 빵 값 몇 백 원은 크게 느껴지는 법이다. 나도 앉고 싶은데 핑크색으로 표시되어 꺼려지는 자리가 많아지면 거기서 분통을 터트리는 이들이 적잖았다.

“이해했습니다. 형님 말씀은 오락실도 변해야 되는데 케케묵은 예전의 모습만 지키고 있었다는 말씀이시죠?”

“아니지. 오락실이 변하거나 살아남는 일은 지나친 요구다.”

“네?”

“게임방이 있잖아. 한 대에 천 만 원 단위를 하는 저 거대한 기기 말고 우리가 저렴하게 만든 콘솔, 레이컴, 레이폰과 같은 것들 말이지.”

“이해한 줄 알았는데 다시 모르겠습니다. 그냥 저는 곱창이나 굽는게 나은가 봅니다.”

소주잔을 비우고 준우가 잘 구운 곱창을 양념장에 찍어 먹었다. 헛웃음이 나왔는데 우리의 몰골은 영락없는 백수인데 나누는 대화는 문화에 게임이 끼치는 영향과 같은 담론이다. 흡사 여당, 야당을 평가하며 국제 정치를 걱정하는 노년의 모습이지 않은가.

물론, 말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내가 내린 결론대로 정말 바꿀 수 있는 위치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오기 전에 아케이드 게임장에 대한 잠정적인 결론은 내린 상태였다.”

“망하지 않도록 투자하신다는 거 말이죠?”

“그래. ‘블루와 인정. 이 두 곳의 건물을 사고 월세는 올리지 않는다.’ 이 정도를 기본으로 두고 오락실을 느껴보려고 이런 모습으로 왔지. 만약 학생들이 있거나 관심을 보이는 젊은 연령층을 볼 수 있다면 투자를 조금 할 요량이었다.”

“어떻게 말입니까?”

“사람이 있으면 돈이 모인다. 그 반대로 돈이 있으면 사람도 모이지. 대회를 열어주고 상금을 걸어. 격투 게이머들 중에서도 선별하여 프로게이머들에게 국가 대표 이미지로 장사하게 만들어 준다. 그러면 근근이 방송하고 상금 타면서 벌어먹는 일보다 윤택해 질 테지.”

“방송이요?”

“GGT나 위튜브에 고전 게임이나 대전 격투 게임 방송도 당연히 있다. 구독자나 조회수는 변변찮지만, 게임이라는 직업을 통해서 먹고 살 방법이 있었다는 점에서는 예전보다 좋은 시절이 맞지.”

“그 급을 형님이 확 높여주냐, 그냥 두느냐였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럼 어찌 결론 지으셨습니까?”

“그거 아냐? 여기를 나중에 추억하는 이들은 시멘트 바닥, 정신없는 분위기, 나는 애들한테 좋지 않다고 여기는 욕설을 정겹게 떠올리는 부류라는 것. 예를 들면 저쪽의 친구들처럼 말이지.”

흘끔.

창밖에는 얼마 전에 죽자 사자 쫓아가고 도망쳤던 이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돌아오고 있었다.

“용산 전자상가에 갔다가 사기 당하고는 면전에서 말 한마디 못한게 화나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맹세한 친구가 있지. 반대로 나는 초기 사업 밑천으로 컴퓨터 맞췄던 추억을 가졌고.”

“지금 용산에 컴퓨터 사러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저 오락실들 역시 그리 대하련다.”

“어떻게요?”

기본만 하겠다.

“그룹차원의 투자는 없고 상가 건물 두 개나 내 돈으로 사련다. 딱히 이슈를 만들어 주지도 않는다. 오락실 주인들이 그만두면 격투 게임계의 성지라고 스스로 여기는 장소는 자연스럽게 없어지는 거고 정겨운 폭력과 추억할 욕설들도 잊히겠지.”

시골집과 할머니다.

추억에서 사람과 장소는 하나의 세트다. 시골집은 그대로인데 가족이 없으면 그건 고향이 아니고 할머니와 함께 지내되 시골집이 없으면 이 역시도 고향이 아니다.

“오락실이 부흥할 만한 최적의 게임들을 만드시는게 여태까지의 형님 스타일 아니었습니까? 가까이에서는 맞을 수 있으니 원격으로만 해라, 고사될 때까지 지켜봐주기는 하겠다··· 라는 건 너무 미온적인데요.”

“몰라서 못한다.”

“소싯적에 들린 더러운 오락실이 형님을 외면하게 만드나 봅니다.”

허명이 쌓이면 이게 문제다.

꿈속 미래에서 보지 못한 정답이라서 풀 방법이 없을 뿐인데, 내가 할 수 있지만 외면하는 것으로 지레짐작해버린다.

“그런데 말입니다. 교육적으로 나빠서 오락실이 문제면 대전 격투 게임 없는 오락실을 만들면 되는 거 아닙니까?”

“네가 스릴 없는 카지노 도박장을 차려서 성공해봐.”

“너무 학부모 스타일로 교육적이라서 그냥 말해봤습니다.”

“너나 나나 애는 아니잖아.”

“왕년에 갈구던 솜씨가 부활하신 것 같습니다.”

웃어넘기고 우리는 다시금 군대 이야기를 나누었다.

신경 쓸 필요도 없고 아무런 부담도 없는 잡담들이었다.

< 미련 없이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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