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574화 (574/577)

< 미련 없이 >

*

인생은 제로섬 게임이다. 이익을 본다면 다른 의미에서는 손해를 보기 마련이며 이러한 법칙은 삶의 요소요소에 모두 적용된다.

“회장님. 자진 퇴사자들의 수가 제법 많고 인권단체의 항의가 줄을 잇고 있습니다. 이대로 계속 강경대응 하시겠습니까?”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법이고 공익 단체들은 자기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누군가가 숨을 쉰다고 그걸 막아버릴 수는 없지요.”

“알겠습니다.”

원칙과 소신을 드러내는 일은 확실한 아군과 적군을 동시에 만든다. 이제 윤태식이라는 이름을 비롯하여 GF의 기조는 분명하게 정해졌고 사내 직원들에게도 행동 강령이 내려졌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주제와 관련한 타협 없는 선!

‘법령처럼 내리지는 않았지만, 눈치나 기조라는 식으로 세워졌지.’

타협해서 직장을 유지할 사람은 남고 아닌 사람은 ‘더러워서 내가 퇴사하고 만다!’라고 소신을 지키면 된다. 가장 좋은 건 회사를 만들어서 자신의 가치관을 듬뿍 녹인 게임으로 성공을 일구어내는 것이니 나는 저들을 마음으로만 열심히 응원할 요량이다.

짐짓 시원시원하게만 보이는 지금의 행보지만, 주의해야 할 점은 있다.

첫째는 나 혹은 GF를 칭송하는 대중에게 호응하지 않는 것!

둘째는 나와 GF를 모욕하는 이들에게도 강경 대응하지 않는 일이었다.

얼핏 보면 전범 기업이나 국내 언론, 조던 감독의 사례와는 매우 다르게 여겨질 수 있으나 여기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조직적으로 우리를 적대하는 이익집단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사회단체나 중·소규모의 커뮤니티의 성명 정도가 고작입니다.”

목소리 큰 개인에 불과할 정도로 규모가 작다는 것.

“사내에서 SNS로 호응한다거나 하는 멍청이가 있을 가능성도 없겠지요?”

“물론입니다. 존재하지 않습니다.”

GF그룹 내부에 존재하는 암세포가 아니라는 것.

바로 이것들이다. 즉, 개인이 외부에서 내는 작은 소리까지 제거하는 건 불가능할뿐더러 지나친 폭압이자 탄압이기에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후자에 대해서는 법적으로 엄정한 대응을 하겠다고 선언한 상태다.

대작 게임을 만드는 데는 수백 명의 노동력과 막대한 자본이 들어간다. 그런데 고작 디렉터라는 신분을 가지고 ‘우리 게임을 제대로 즐길 줄 모르다니, 너희 같은 패배자들은 할 자격이 없어!’라는 식으로 지껄이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다.

‘나처럼 모든 손해를 쌈짓돈으로 메꿀 수 있다면 모를까. 어딜 자기 직장 하나만 걸고 회사 전체를 구렁텅이에 빠뜨리려고 들어?’

책임질 수 있는 만큼의 발언이면 좋은데, 신념으로 꽉 찬 이들은 자신의 소신을 위해 온몸을 불사르는 선택을 주저 없이 하고 만다. 그 탓에 주위의 사람들까지 손해를 보고 당사자들은 책임질 수 없는 피해만 남긴 채 한 줌 재가 되어버리고 만다.

이 와중에서 생긴 피해자는 대의를 위한 희생의 밑거름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불상사를 방지하는 나의 해결책은 돈이었다.

‘파산할 각오를 해!’

SNS를 멍청이가 하는 일이 아니도록 만드는 건 막연한 손해나 명예훼손 대신 패가망신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편이 빠르다. 그렇기에 훗날에 있을 더 라스트2의 빌 드럭만 같은 고객 대응은 GF그룹 직원 어느 누구도 감히 할 수 없다.

“상품을 만들어서 팔았으면 평가는 오롯이 고객에게 달린 겁니다. A/S 한답시고 추가 설명을 한다거나 평가가 잘못되었다는 등 게이머를 나무라는 일은 결단코 없어야 합니다.”

“네, 회장님. 말씀하신 바는 일찍이 그룹 내에 전달되었습니다. 그런데······.”

김유천 비서실장은 겸연쩍게 자신이 들고 회장실로 들어온 물건들을 들어 보였다.

“이것들을 제가 정말 받아도 될까요?”

고급스러운 포장의 선물 세트부터 상품권 등등 묵직한 물건이 가득했다. 명절이나 생일에 받는 거창한 명품들은 모두가 김유천 비서실장에게 청탁하고자 들어온 것들이었다.

“공짜 아닙니까. 누군가가 헛돈 쓴 거니 버리는 것도 아깝지요. 다 챙기십시오.”

써먹을 게 더 없어져 버리기 전에 알고 있는 미래의 지식을 몽땅 써먹자!

이 각오로 종횡무진 하는 중이다. 여기로 가면 여기서 해결, 저기로 가면 저쪽에서 해결, 대박 날 시나리오도 발굴하고 될성부른 미래의 스타도 건졌다.

여기서 알아야 할 사실은 내가 세계사를 통틀어서 모든 미래를 알고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관심사는 빠삭하지만 나머지는 문외한이다. 그 탓에 나의 동선은 규칙적이지 않았고 외부에서 볼 때는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체계적인 사업계획과는 다른 이 행보를 세간에서는 ‘천재의 괴팍한 선택’이라는 식으로 여기고 있었다. 진실은 저 너머에 있고 한 다리 너머에서 들리는 모든 소식은 과대와 포장이 더해지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회장님께서 오시면 이 부분이 그냥 해결되는데, 관심을 받을 수가 없어!]

[잠깐. 근처에 오셨다고? 그럼 차라리 촬영 순서를 바꾸자!]

그 덕분에 의외의 권력자로 부상한 인물이 바로 김유천 비서실장이었다.

[회장님께 저희 쪽 업무에 대해서 한 말씀만 좀 올려주십쇼.]

[어디로 행차하시는지 살짝 귀띔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땅을 가리키면 그 자리에 유전이 있을 지경이라고 하는데 자그마한 선물이 대수겠는가.

이러한 사안에 대해 김유천 비서실장이 내게 보고했고 나는 이를 이용하여 그가 선물 받은 리스트 중에서 아는 곳들을 다니는 중이었다. 지금까지는 하지 않았던 이런 일탈을 감행하는 이유는 매우 단순했다.

“이게 다 한철입니다. 바짝 일하고 나머지는 느긋해서 시간이 더디게 갈 만큼 여유를 부릴 테니 지금 챙겨두세요.”

짧고 굵게!

“대신 그 기간에 남들 평생 일한 만큼의 성과를 이루는 거지요.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제법 깊게 인상을 남기고 꽤 오래 회자할 만 하겠지요?”

“지금만으로도 충분히 전설로 남으실 겁니다.”

예언자랑 해결사 이미지도 죄다 한 철 장사다. 오래 유지할 수 없는 캐릭터이니 나부터도 지금 만끽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혹시··· 은퇴라도 하시려는 겁니까?”

“그럴 요량입니다. 일선에서 물러나는 정도이고 이제는 즐기면서 살아볼 계획입니다.”

“정말 실례되는 물음이지만, 회장님께서는 환갑도 아니시고 별다른 질환도 없으신 걸로 압니다만······.”

측근의 물음에 나는 외부에 대답하고자 준비했던 대답을 태연하게 했다.

“저는 돈이 많습니다. 너무 라는 단어를 써도 될 만큼 정말 많지요. 평생 가도 다 쓰지 못할 정도로 부자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동분서주하며 온갖 나라를 다니며 일하고 짬짬이 여가를 즐기며 삽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것 이상의 돈은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쉴 때가 되었어요. 한국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들처럼 일하기보다는 연애만 하면서 지내는 나태한 삶, 배 나온 회장들 대신 여러모로 즐기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할 때가 됐습니다.”

“연애 말이시군요.”

“유부남이시니 저보다도 잘 아시잖습니까? 데이트도 결국은 시간이 있어야 하고 결혼도 마찬가지라는 것을요.”

수긍하며 듣고 있던 김유천 비서실장이 내게 진지하게 말했다.

“회장님. 연애는 좋지만, 결혼은 비추입니다.”

일찍이 그가 쓴 적 없던 단어라서 당황하고 말았다.

비추라니?

“비추천 말입니까?”

“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을 아실 겁니다.”

“그렇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애인과 아내는 다릅니다. 정말 다른 존재입니다. 그러니 결혼은 심사숙고하시고 부디 신중히 결정하시기를 충심으로 말씀드립니다.”

허탈감이 담긴 시선.

삶의 깊이를 담고 있는 그의 말에 처음으로 내가 살짝 눌리는 기분이 들었다. 얼떨떨하게 있는 내게로 김유천 비서실장은 ‘다릅니다. 달라요··· 다르지요···’라는 말을 몇 번이고 되뇌고 있었다.

그리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한낱 새우가 아닌 고래가 되어버린 나의 움직임은 정해진 미래를 탈선 시켜 변해버린 현재로 만드는 속도를 가속했다.

어느덧 내가 아는 미래는 파편화된 과거의 자료가 되어갔고 나는 정보와 지식의 차이를 좁히고자 고군분투해야 하는 시점이 되었다. 물론, 구체적인 사례에서의 오류가 있을 뿐, 아직도 선견지명 있는 사업가의 면모는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기로 했다.

‘나머지는 출중한 인재들의 몫으로 두자.’

성공을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여 성과를 달성하려는 열망.

그 열정을 충만하게 가진 이들이 이룩하면 될 일이다. 나처럼 성공한 사람들은 이제 더 큰 성공을 이루려고 집착하기보다 이룩한 것을 토대로 누리며 살아가면 된다. 그렇게 마음먹었고 세계를 종횡하던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한국으로 돌아와 느긋하게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하나 남았구나!”

정신을 퍼뜩 차린 나는 영등포구 대림동에 있는 오락실로 향했다. 보통은 김유천 비서실장과 최소 다섯 이상의 경호원을 대동하고 이동했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무서운 와이프가 있는 안타까운 유부남인 비서실장은 집에 돌려보냈고 후배 녀석만 불렀다.

“준우야. 놀러 가자.”

“어디를 말이십니까, 형님.”

“철권의 성지라고 아냐?”

“좀 싸울 줄 아는 놈들이 있나 보군요. 애들 부를까요? 연장은 저만 챙기면 되겠습니까?”

“짜샤. 그거 아냐. 그리고 연장을 챙기는데 왜 너만 챙겨?”

“형님이야 주먹이 흉기잖습니까. 저 같은 일반인이랑은 다르게요.”

“어떤 얼간이가 너를 보고 일반인이라고 하냐?”

터미네이터 같은 1년 후배.

일찍이 처음 경호원으로 채용했던 이 녀석은 명실상부한 내 직속이자 경호실장으로 입지를 탄탄히 구축했다. 개인단련에도 쉼 없어서 나처럼 비정상적인 능력이 있는 특이사례가 아니라면, 장담하건대 실전으로 준우 녀석을 이길 사람은 정말 몇 안 되리라고 본다.

‘이 자식이 나 따라다니면서 정말 온갖 것을 익혔으니까.’

물론, 살상기술들이라서 선 보일 일은 없을 테지만 말이다.

“철권으로 유명한 오락실에 가려고.”

“···오락실이요?”

흥미진진해하던 눈은 대번에 힘을 잃었다. 역시, 이 녀석은 직접 싸우는 것을 좋아한다.

“넌 오락실에 추억 같은 거 있냐?”

“별로 없습니다. 어렸을 때 친구 따라서 간 적은 있었는데, 거기서 대판 싸우고 아버지한테 죽도록 맞았었거든요.”

“싸우다니? 왜?”

“저 데려갔던 친구가 게임을 치사하게 했나 봅니다. 다섯 판정도 지더니 반대편에서 있던 양아치 새끼가 갑자기 와서 친구 뒤통수를 까더라고요. 친구놈은 울고 그 자식은 막 욕하고 그래서 저는 의자로 그 새끼를 쳤습니다.”

“의자로? 주먹 놔두고 왜?”

“그땐 어렸거든요. 딱 봐도 어린 애가 고딩으로 보이는 양아치를 이기기는 어렵잖아요. 적어도 의자로는 쳐야 데미지가 들어갈게 뻔해서 쳤다가···”

몇 번 입맛을 다시며 뭔가를 회상한 준우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아무튼, 그 이후로는 오락실에 얼씬도 하지 않았습니다. 동네 양아치들이 죄다 거기 주변에 있어서 가봐야 싸움만 났거든요. 담배 냄새 퀴퀴하고 죄다 깡패 새끼들만 있는 데다가 100원 있냐며 삥 뜯는 놈들이 파다하게 있는 곳이 오락실이었습니다.”

‘떡잎부터 파란만장했던 새끼 같으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녀석이 내게 같은 시선을 보내는 것이 아닌가.

“저보다 괴물이시면서 저만 괴물취급하시면 섭섭하지 말입니다.”

“지금은 너나 나나 오락실에서 맞을 일은 없을 거다.”

“앵간한 놈들은 눈도 못 마주칠걸요?”

그 말에 웃고 말았다.

내가 ‘준우야!’라고 부르면 ‘예! 형님!’이고 ‘최준우 경호실장’이라고 하면 ‘예, 회장님!’으로 대답하는 이놈과 함께 향한 곳은 영등포구 대림동의 블루 게임 랜드였다. 쫙 빼입은 정장 차림 대신 트레이닝복을 입었지만, 떡 벌어진 어깨나 울퉁불퉁한 귀와 근육은 여간해서는 감춰지지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녀석이나 나나 몇 치수는 큰 옷을 입어 90년대의 힙합에서나 볼 법한 모습으로 움직였다.

“형님. 갑자기 오락실에는 왜 가시는 겁니까? 혹시 거기서 뭐가 대박이라도 나서 투자하시렵니까?”

“반대야. 대박이 아니라 쪽박 나서 망하지 않도록 가는 거거든.”

“네? 쪽박이요?”

“너나 나는 잘 모르지만, 아케이드 게임계의 성지가 몇 곳 있다더라. 한창 때는 잘 나갔지만 나중에는 장사가 안 돼서 망하게 될 곳들 말이지.”

< 미련 없이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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