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572화 (572/577)

< 미련 없이 >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참가한 팀원들이 아니라 이번 프로젝트에 관해 관심을 둔 그룹 내의 모두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맞다.

“게임은 21세기에 이룩한 첨단의 문화이자 종합예술입니다. 수많은 인력과 자본이 들어가야 AAA의 게임을 만들 수 있지요. 바꿔 말하면 혼자서는 지금 기준에서의 대작, 명작, 걸작을 만들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이들이 더러 있습니다.”

“참가자들이 말입니까?”

‘글쎄요.’라고 하며 웃고 직원들의 프로필과 그간의 경력이 담긴 보고서를 옆으로 던졌다.

“자기애와 자긍심 높은 이들 중 빈도가 높다는 정도로 그치지요. 아울러, 우리 GF의 작품들은 거의 대부분이 성공했기 때문에 그 공로를 자신에게 돌리는 이들도 더러 있습니다.”

“모두가 회장님의 선견지명 때문인데, 그걸 모르는 멍청이가 있을까요?”

“지금처럼 본인보다도 주변에서 더 떠받들고 인정해주다 보면 진짜로 그런 줄 아는 사례도 더러 있을 겁니다. 생각해보세요. 프랑스의 태양왕도 아니고 GF그룹이 곧 윤태식이고 윤태식이 곧 GF그룹이기야 하겠습니까. 저마다의 위치에서 권한과 책임만큼 이행했을 뿐입니다.”

부하직원이 직장에서의 아부 스킬이랍시고 상사를 모시다가 스스로 오만방자한 상사를 만드는 모양새라 하겠다. 그런데 김유천 비서실장은 고집이 있었다.

“일반적이라면 맞는 말씀이시지만, 회장님의 경우는 이례적입니다. 이 부분을 부정하는 그룹의 인사는 없을 겁니다.”

이 정도 뚝심으로 아부할 줄 알아야 비서실장도 하는 거다.

‘알았으니까 패스합시다.’

적당히 넘기며 말을 이었다.

“수다스러운 직원들 덕분에 에디스 가문의 유산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 당사자들이 고작 어느 정도의 참여만 했는지는 그룹 내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담백하게 상황설명만 담지는 않았다. 말이 오가며 표현의 수위가 올라가듯 저들의 빈정거림도 시작은 미미하였으나 그 끝은 매우 창대하게 변해 있었다.

그리고 에디스 가문의 유산이라는 결과물이 나왔다.

이제 이를 보고 무엇을 느낄지는 당사자들에게 달렸다. 아울러, 꿈속 미래의 완성작과 같은 이 게임을 팀원들이 어떤 방식으로 바꿔나갈지도 관심사가 될 것이다.

“경종을 울리는 것 이외에도 회장님의 성향상 다른 목적도 있으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게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쉽습니다. 처음 질문으로 돌아오면 되니까요.”

“게임의 예술성 말인가요?”

고개를 끄덕였다.

확률형 아이템과 모바일 게임에서의 과금 시스템 부분과 이번 작업도 같은 선상에 둘 수 있다. 내가 하는 일은 바람직한 대조군 및 좋은 선례를 남기는 일이었다.

앞서 나간 이의 행보가 뒤따라오는 이에게 나침반이 되듯, 이번 에디스 가문의 유산은 논란이 많은 게임의 예술성 논쟁에 굵직한 기준점이 되어줄 것이다.

“0과 1로부터 시작해서인지 게임이라는 장르에서는 모든 것을 수치화하게 됩니다. 전쟁의 역사에서 명장의 이름은 남되 전사자 90만 명의 생명은 그저 숫자로만 남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레벨업 용 경험치와 죽음이 같다는 말이시군요?”

“적의 요새에 침투하고 인질을 구출하는 등의 모든 미션에서 가정적이며 드라마틱한 주인공인 무수한 적을 도륙한 끝에 행복한 결말을 봅니다. 이를 두고 말이 많은 만큼, 예술성을 추구하는 이들은 복수의 무의미함, 생명존중의 가치를 담고자 시도할 겁니다.”

‘더 라스트2처럼.’

이 말은 내뱉지 않고 마음에 담아두었다.

더럽게 못 만든 게임의 대명사이자 조롱의 상징이 되는 비루한 2편. 대단했던 1편과 대비되어 더욱 가슴 아픈 작품이다. 도대체 왜 스스로 잘났다고 여기는 녀석들은 감동을 선사하려고 그토록 발악하는 걸까?

이념만 담고 정작 스토리는 우연에 기대는 졸작을 만든 주제에 말이다.

‘잘못은 인정도 않은 채 SNS로 말싸움이나 하고.’

‘여기서는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려!’라며 가르치려고 하는 태도가 건방져서 더 불쾌감이 드는 것 같기도 하다.

“에디스 가문의 유산은 삶의 마지막을 보여줍니다. 끝을 마주하고서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도 알려주지요. 가장 중요한 건 이 모두를 표현하는 관점에 존중이 있다는 겁니다. 저는 교조주의적인 태도 없는 대표적인 게임으로 이 작품이 언급되기를 바랍니다.”

예술성을 논하려면 살인이라는 쉬운 방법을 써먹으면서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지 말자. 나태하지 말고 보다 나은 스토리를 써야 하는 거다.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기회를 받았다는 것. 그 자체는 네가 경이롭게 여겨줬으면 한다.’는 게임 속 마지막 메시지가 그래서였군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김유천 비서실장의 의문에 대답해주고 난 뒤, 알파 버전의 게임은 암암리에 그룹 내 직원들이 두루두루 하게 되었다. 이 게임을 플레이하고 각자 어떤 식의 개선점을 적용할지, 이 게임의 완성도를 어떻게 평가할지 충분히 의견을 주고받는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떠들썩하게 모은 프로젝트팀원들인 만큼 저들이 느끼는 부담감은 커질 수밖에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최대한 손대지 않고 퍼즐 몇 개만 추가한다거나 하는 소극적인 수정만 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한다.

‘내가 볼 때는 그게 베스트지. 본래의 미래에서도 너무나도 제한된 자유도와 뛰어난 연출에 비해 기믹이 너무 부족한 점을 단점으로 꼽았으니까.’

반면에 혁신적으로 변화를 주자니 기존의 작품성과 완결성을 무너뜨리고 만다. 그러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와중에 시간만 허비하게 된 것이다.

“화기애애했던 처음의 분위기와는 달리, 높은 언성이 오가는 중이라 합니다. 하지만 의외로 내부 결속은 더욱더 끈끈해졌고 서로 간에 자체적인 게임을 개발하는 건 어떤지 논의하는 부류도 생겼습니다.”

인간은 짐짓 이성적으로 메시지의 합리성을 따지지만, 그 메시지가 자신에게 불리하다면 메신저를 의심하여 의도를 왜곡하여 받아들이곤 한다.

놀라운 점은 벽창호처럼 자기주장만 반복하는 이 행위의 뿌리에 있는 것이 합리성이라는 부분이다. 관점을 오직 스스로에게 매몰하고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건 나야’라는 자부심으로 무장한다면 나를 위해 주위의 모든 것을 왜곡하는 대범한 짓들이 타당성을 갖게 된다.

내가 중요하고 세상의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다. 이런 걸 두고 ‘잘 모르는 사람이 신념을 갖게 되는 건 매우 무서운 일’이라고 한다. 그리고 매우 애석하지만, 프로젝트팀원들 중에는 무서운 사람들의 비율이 아주 높았다.

“회장님이 공공의 적이자 상징적인 악마가 되셨습니다. 정치적 신념으로 무장한 이들에게는 회장님의 방침은 종교적인 박해라도 되는 양 이겨내거나 참고 견뎌야 하는 일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습니다.”

나라 없이 떠돌던 유대교인들이 보인 놀라운 집념과 종교적 신념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유일신으로부터 선택받은 축복받은 민족이면서도 광야를 떠돌고 고난을 겪는 동안에도 끝까지 성서와 신앙을 놓지 않았다.

신께서 내려주신 시련이라 여긴 까닭이다. 이렇듯 인간의 관점과 자신만의 이성적인 판단은 상황마다 다르고 사람마다 자이를 보인다.

“어처구니없는 건, 스스로 옳다 여기는 저들의 창작물 중 이제까지 독창성과 예술성을 입증한 물건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짐짓 예리한 척 구는 평작들이 있기는 한데, 장점이 도드라지기보다는 단점을 지적하고 보완하는 식이 대부분이었지요.”

김유천 비서실장이 냉소적으로 말하기는 했으나 독창성과 예술성을 입증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여성이 주인공인 대작 게임을 만들겠다니, 응원해줍시다.”

“안 그래도 본사의 개발 지원 시스템 덕을 보기 위해 서류 신청을···”

“타당성에 대해 매우 면밀하게 검토하고 300%의 계획서라는 판단이 들었을 때만 허락하도록 합시다.”

“네, 회장님. 저들의 도전은 마음으로만 응원해주겠습니다.”

그렇게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목적은 달성한 것과 마찬가지인 그때, 영화 쪽에서 내게 도움을 요청해 왔다.

*

바벨 영화의 페이즈2를 장식할 작품은 에이지 오브 울트로였다. 그러나 촬영을 마치고 편집을 끝내가는 시기, 케인 파이기에게는 큰 시련이 닥친 상태였다.

[사장님. 이건 안 됩니다. 이 장면은 무조건 빠져야 해요.]

[나도 알죠. 알고 있어요. 그런데······.]

우선 바벨은 영화 한 편의 러닝 타임을 2시간에서 최대 2시간 30분까지를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현 리벤져스의 감독인 조던의 편집본은 무려 3시간이 넘어갔다.

그 탓에 바벨의 내부에서는 어떻게든 영화의 총 러닝 타임을 경량화하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었는데, 그것이 잘 안 되어 내부에서는 불만이 쏟아지는 중이다.

[조던 감독의 고집이 굉장하다는 것을 다들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바벨 스튜디오의 위원회는 어떻게든 여러 장면을 삭제하길 원하는데, 조던 감독은 어떻게든 더 많은 장면을 살리길 원한다. 상충 되는 두 의견의 충돌을 중재해야 하는 케인 파이기의 입장이 가장 곤란한 상황이다.

압력을 크게 넣을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에는 조던 감독의 실력 이외의 요소가 있었다.

윤태식 회장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리벤져스를 이끌어 온 인물이고 이전 편에서 보였던 회장님의 신뢰가 대단했어. 그의 안목은 단 한 번도 실패가 없었으리만큼 완벽하지. 그걸 고려하면 조던 감독을 내 마음대로 쳐낼 수도 없단 말이야.’

자신도 모르게 손톱을 씹을 정도로 고민이 되는 건 비단 러닝 타임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케인이 보기에 에이지 오브 울트로의 편집본에는 지금까지의 이어져 온 바벨의 시나리오와 맞지 않는 부분과 선회하는 느낌마저 드는 장면들이 더러 있었다.

이 역시 조던 감독이 조금만 더 양보해주어서 장면을 수정하길 원했는데 애석하게도 그는 끝까지 자신의 고집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답답함에 그저 한숨만 나올 따름이다. 위원회에 속한 임원들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지만 끝내 답을 찾지 못했다.

이들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회장님에게 말씀을 드려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적어도 회장님께서 조던 감독에 대한 의사만 밝혀주시면 어찌어찌 방법이 있을 것도 같은데요.]

[지금 우리가 영화감독 한 명도 컨트롤을 못 해서 곤란을 겪고 있다는 말씀을 올리라는 겁니까?]

영화 스튜디오 전체를 관리하는 사장이 감독을 컨트롤하지 못해서 회장님께 보고하는 그림.

학교에서 맞고는 집에 가서 아빠를 불러오는 거랑 뭐가 다르랴. 고자질인 데다가 능력 부족을 인정하는 모양새가 될 수 있었다. 뿐만이랴, 그가 GF에 소속된 회사 하나를 관리하는 사장이라고는 하지만, 바벨 스튜디오는 고작해야 일개 자회사다.

케인 파이기가 윤태식 회장에게 직접 보고를 한다는 것은 큰 부담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논의 중인 임원이라는 이들은 이런 말이나 태연하게 하고 있었다.

[자존심이 구겨지기는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케인 파이기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저놈들은 아군이 아니야.’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그는 바벨 스튜디오를 책임지는 사장이기는 했으나 지금 이 위원회에서의 경력도, 바벨에서의 성과도 모두 부족한 햇병아리였다.

‘논의해 봐도 답이 안 나오는 건··· 어찌 보면 저놈들이 같이 고민해주기보다는 나를 방해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군. 그럴듯한 대안 대신 불가능하다는 소리만 지껄이는 식으로 말이지.’

올라갈 자리를 만들려면, 기존에 있는 누군가를 쳐내면 된다.

사장이라는 자신의 자리를 위원회에 소속된 임원 중 호시탐탐 노리는 이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이번 구실을 매우 반길 게 틀림없었다.

피하고 싶다. 다른 방법이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조던 감독을 제어할 방법이 그에게는 없었고, 그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께 보고 드리도록 하지요.]

부디 윤태식 회장이 바벨 스튜디오가 마주한 현실적인 어려움을 이해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 기대를 담아서 그는 고민하며 보고를 올렸다.

그리고 초조하게 답신을 기다리던 그에게 딱 한 줄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곧 가겠습니다.」

[곧 가겠습니다? 간다고? ···여기를 오겠다고?!]

홀로 남은 회의실에 있던 케인 파이기는 전광석화 같은 메시지를 받고 얼떨떨하게 있었다. 그리고 전용기를 타고 날아온 윤태식 회장 탓에 바벨 스튜디오 전체가 들썩였다.

[회장님께서 오셨습니다.]

[회장님이?]

[뭐라고?!]

[아니, 오신다고 미리 말씀을 주셨으면 모시러 갔을 텐데···]

무시무시하게 들어온 윤태식 회장 일행을 보고 허둥지둥하는 사이, 회의실에서 하루 숙식한 모습으로 케인 파이기가 얼른 달려왔다.

그의 몰골을 보고 윤태식 회장이 먼저 말했다.

[사안이 급한 것 같아 일단 날아왔습니다. 조던 감독은 어디 있습니까?]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는 말에 케인 파이기 사장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게··· 오늘 오실 줄 모르고 미처 부르지 못했습니다. 조던 감독이 자리를 비워서···]

얼른 주변으로 눈짓을 하자 조던 감독에게 호출하겠다는 비서의 다급한 제스처가 보였다. 그렇게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고 낯빛이 흑색으로 변하는 그의 귀로 윤태식 회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변명할 기회라도 얻으려면 빨리 와야 할 겁니다.]

[네?]

[나머지는 들어가서 이야기합시다.]

자신의 어깨를 턱턱 두드리고 들어가는 모습을 케인 파이기는 멍하니 보았다. 그러다 윤태식 회장이 날려버린 자리가 사장이 아닌 감독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표정이 바뀌었다.

조금 전까지는 미치도록 피곤했는데, 지금은 온 몸에서 힘이 넘쳤다.

[다들 뭐합니까? 회장님께서 먼저 들어가셨는데.]

[아··· 예.]

[네, 사장님.]

임원들 역시 바뀐 조류를 느끼고 바삐 회의실로 향했다.

< 미련 없이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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