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570화 (570/577)

< 미련 없이 >

강의실 1열에 앉은 모범생처럼 즐겁게 이해하던 주지철 이사의 생각이 잠시 멈추었다. 확신을 가졌던 부분에서 틀렸다고 하니 이전에 이해한 모든 부분마저 오해하고 있던 건 아닐까 싶었다.

‘숙제로 내주시려나?’

보통 교수님이나 옛이야기의 스승은 ‘아직은 때가 일렀으니 깊이 궁구하고 오너라’와 같은 화두를 건네주곤 한다. 남이 알려주는 지식은 자기 것이 아니고 시행착오를 통해서 깨우쳐야 진짜라는 식의 말을 덧붙여서 말이다.

하지만 윤태식 회장은 이러한 옛스러운 방식의 스승이 아니었다.

바로 알려주었다.

“조금 전, 수정해야 할 작업 중에 무엇을 빠뜨리지 말라고 했었습니까?”

“퀘스트입니다.”

“바로 그겁니다. 아이템을 팔면 그건 아이템만 파는 겁니다. 그러나 아이템을 획득하기 위한 퀘스트가 존재한다면 그 아이템에는 시간이 더해집니다. 즉, 긴 시간을 거쳐서 동일한 아이템을 구할 수 있을 때 시간을 거래하게 되는 거지요.”

‘그랬구나!’

“과금 유도 투성이의 게임들은 돈을 투자하지 않으면 시간의 투자 자체가 무의미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나그네로크는 절대 그렇게 되어선 안 됩니다.”

“네.”

“시간을 투자하거나 돈을 투자하는 양자간의 선택. 이 중 하나를 선택하는 형태의 과금을 유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내가 구상하고 우리 GF가 추구하는 모바일 게임의 생태계입니다.”

실로 눈높이에 딱 맞춘 원포인트 레슨이다. 주지철 이사의 얼굴에는 의문이 싹 가셨고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회장님의 시야는 달라. 멀리 내다보시고 무게감을 아신다.’

회사는 공공의 이익을 위한 단체가 아니다. 이익을 추구하며 사업가는 이를 극대화할 줄 아는 것이 곧 실력이다. 하지만 이는 작은 장사꾼의 기초소양일 뿐, 본인의 발언과 행동이 시장에 큰 파급력을 일으키는 체급이 더해진다면 한 가지 요소가 강요되는 처지에 이른다.

윤리다.

냉혈한 사업가, 합리성에 매몰된 과학자를 대중매체에서는 사이코패스로 자주 등장시킨다. 높은 이상을 위해서 희생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거나 만 명을 살릴 수 있으면 백 명쯤은 거침없이 죽이는 이성적인 사고가 야기하는 폭력성을 경고하기 위함이다.

그렇기에 윤태식 회장이 모바일 게임의 과금을 논하며 언급한 생태계라는 단어는 정말 중요한 가치이자 덕목이었다. 고객을 개나 돼지로 여기지 않고 인간으로 대우하며 생산자와 소비자가 적정선을 지키고 상생하도록 만드는 가이드라인이 되기 때문이다.

사내 정치나 줄타기보다는 실력과 성과로 증명하는 곳이 GF라는 굴지의 그룹이다. 주지철 이사가 윤태식 회장 앞에서는 모자란 모습을 보였지만, 그건 상대가 상대이기에 보인 부족함일 따름이다.

이제 새로운 개념을 이해했으니 바로 적응할 능력은 갖고 있었다. 주지철 이사는 미간을 찡그리며 서둘러 계산을 마치고는 대답했다.

“2013년의 한국 최저시급은 4,860원으로 알고 있습니다. 게임에서 노가다를 하는 것보다 알바를 하는 게 훨씬 빠르지만, 게임과 현실은 전혀 다른 노력의 가치를 가지는 만큼 현금 기준으로 1만 원당 10시간 정도의 노력이 필요하게 퀘스트를 구성해 보겠습니다.”

그러자 윤태식 회장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믿고 맡기도록 하지요.”

주지철 이사에게는 더할나위 없이 큰 칭찬이었다.

“네, 회장님. 이번에는 만족하실 수 있도록 제대로 준비해서 보여드리겠습니다.”

고개 숙여 인사하고 나간 그는 소속 팀원들을 모두 불러 모바일 게임 시장에서의 과금 정책에 대해 확실히 개념을 숙지시켰다. 그리고 양질의 게임성을 자랑하는 GF의 행보는 초창기 확률형 아이템을 등장시켰을 때와 유사한 영향력을 끼쳤다.

이보다 더한 시도를 보이면 ‘GF 게임의 반도 못 따라가는 수준으로 돈을 더 받으려 들어?’라는 조롱이 부지기수로 올라오며 게이머들에게 비난과 혹평을 받는 게임으로 낙인이 찍힌 것이다.

이를 두고 윤태식 회장은 덤덤한 반응을 보였는데 모바일 게임과 관련된 한 가지 소식을 접하고는 크게 기뻐한 적이 있었다.

“플레지M도 바뀌었구나. 그래. 이 정도 상도덕은 지켜줘야지!”

이후로도 ‘M’을 두고 여러 번 뜻 모를 웃음을 지었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

한참 베이스볼 매니지먼트의 신규 이벤트를 점검하고 있던 조윤화에게 직원이 다가와 말했다.

“팀장님. 대표님이 찾으세요.”

“그래? 무슨 일이시래? 표정은 어떠셨어?”

“얼음여왕님이시잖아요. 다만, 유 비서한테 물었는데 나쁜 일은 아닌 것 같데요.”

“그럼 다행이네. 알았어.”

조윤화는 얼른 거울을 보고 화장과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그녀의 가슴이 상사병에 걸린 것처럼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김지애 대표님께서 부르셨어!’

클로버 스팅의 대표, 김지애.

GF를 거론할 때마다 특히 강조된 성공한 여성의 상징이 바로 그녀였다. ‘여신급 아이언 우먼’, ‘결혼하고 싶은 여자’ 등등 각종 순위에 매번 오르는 미녀 사장이기도 했다.

딱히 연예계 활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호사가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건 그녀의 소소한 위튜브 활동 때문이었다.

도도함으로 무장한 듯한 그녀는 파충류와 실내 수족관에서 악어를 키우는 등 독특한 동물을 기르는 취미가 있었다. 이는 대형 위튜버인 윤태희와의 자연스러운 만남이나 콜라보로 이어져서 자주 서로 출연하는 일로 이어졌고 김지애는 ‘취미마저 여왕님!’이라며 팬들이 열광하는 이였다.

하지만 이토록 흠모하는 그녀에게도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사장님 덕분에 GF가 큰 건데, 매번 회장만 찬양한다니까.’

경리로 취직하여 사장에 오른 수직 상승의 이력과 성공사례가 몇이나 되겠는가. 기울어진 축구장에서 이만한 지위를 얻었다는 건 알려진 능력보다 적어도 세 배는 더 뛰어나야만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즉, 김지애 대표는 윤태식 회장과 대등하거나 그 이상인 위인이고 그녀의 능력이 없었다면 작금의 GF는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조윤화는 날개가 꺾인 채 그릇의 크기보다 한참 작은 클로버 스팅만 갖게 된 김지애 대표가 한편으로는 애처로웠다.

필시 그녀의 능력을 경계한 윤태식 회장의 경계심이 틀림없었다.

조윤화는 확신이 있었다.

‘불법으로 아이템 팔아서 큰 조조 같은 한남 같으니. 우리 대표님이 한국에서가 아니라 미국에서만 태어나셨으면 GF가 뭐야. 디지니의 대표가 되셨을 거라고.’

이런 애환을 가진 그녀를 곁에서 보필해야 한다. 그러다 때가 되어 자신에게 더 많은 권한과 권력이 주어진다면 이러한 진실을 듬뿍 담은 결과물로 세상에 널리 알려줄 생각이었다.

“대표님. 조윤화 디렉터입니다.”

비서가 전하고 이윽고 문이 열리며 대표실에 앉은 그녀와 독대하게 되었다.

한참 업무를 보던 중이었는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서류를 본 그녀가 무언가에 사인을 마쳤다. 그리고 어중간하게 서서 대기 중인 조윤화를 보았다.

‘멋있어요! 언니!’

심장 박동이 더욱 빨라졌다. 부디 상기된 피부를 화장이 가려주기를 바라며 있는데, 애석하게도 김지애 대표는 그녀와 다른 감정이었나 보다.

“그룹 내 공문은 읽으셨나요?”

“공문이라면, 어떤 것 말이죠?”

“회장님의 신규 프로젝트 지원을 말하는 거예요. 읽으셨나요?”

“네, 대표님. 예술성과 비폭력성, 정치적, 철학적 메시지를 담은 게임성을 추구하는 이들을 모으는 이상한 공문이었죠. 읽었어요.”

“그런데 왜 여기 있나요?”

“네?”

물끄러미 보던 김지애 대표는 소파를 보았다. 비어있는 자리지만, 뜨거운 커피가 탁자 위에 있었다. 조윤화가 그 자리에 앉아 조심스레 잔을 들었다.

말이 없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행동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아까의 소녀 같은 두근거림 대신 회초리를 든 사감을 마주한 오싹함이 들었다. 대표실 전체가 통제된 장소이고 정해진 행동만 강요받는 기분이다.

억압과 강압.

이는 그녀가 맹렬하게 거부하는 요소다. 하지만 상대가 김지애 대표라면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한 모금 커피를 마시고 내려놓고는 조심스럽게 있자니 그녀가 말했다.

“우회적으로 표현하면 오해나 재해석의 여지가 있죠. 그러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그룹 공문은 예술병과 PC에 물들었고 아직 그 색이 빠지지 않은 직원들을 보내라는 거예요.”

‘너 같은 애들’이라는 말을 뺐지만, 이 자리에는 달랑 두 명 뿐이다.

조윤화는 고개를 흔들었다.

“오해하고 있으세요. 저는 그룹의 방침에 동의하고 다른 불만을 갖지 않아요.”

“일찍이 조윤화 팀장은 루도 내러티브를 언급하면서 게임의 폭력성과 팽배한 마초주의에 대해 강한 비판을 한 글을 쓴 적이 있죠.”

게임이 추구하는 목적과 유저가 게임하며 보이는 선택의 괴리감.

“플레이어가 컨트롤하는 캐릭터는 사랑하는 사람과 높은 가치를 구하기 위해 수십, 수백의 적을 학살하니까요. 클로버 스팅의 캐주얼함에 대한 긍정적인 이야기와 함께 말이에요.”

“그런 적이 있기는 했어요.”

“어떤가요? 지금 극찬을 받고 있는 더 라스트의 평가는?”

“좋은 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해보기는 했나요?”

“···아니요.”

“알기는 하죠? 엔딩에서 백신을 만들어 내려는 의료진들까지 모두 죽인다는 것은?”

“네.”

“그런데 좋은 게임이라고 생각하나요? 감동적이며 예술적이라는 더 라스트의 비평가들과 플레이어의 평가를 인정하고?

“······.”

“우리 솔직해져 봐요. 제가 아무런 이유 없이 감정에 따라서 불이익을 주는 그런 사람으로 보인다면 듣기 좋은 말을 해도 되지만, 정말로 그런다면 여러모로 실망하게 되겠네요. 조윤화 팀장에게나 저 스스로에게나.”

날 선 어조는 아니었다. 언성이 높거나 딱히 낮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부담감과 압박감만큼은 비교할 수 없이 컸고 특히나 이런 말로 추궁하는 사람이 존경하는 김지애 대표라는 점은 너무나도 가슴 아팠다. 그리고 이 원망은 한 사람으로 향했다.

‘윤태식, 이 자식은 왜 이상한 짓을 해서 난처하게 만드는 거야?’

입술을 꾹 다물고 있던 내심 한숨을 내쉬고는 대답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좋은 게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어떤 것들이 말인가요?”

“대표님께서 언급하신 대로예요.”

“그 이외의 것들을 예로 든다면?”

“감염되어 사라지는 캐릭터가 굳이 여자이고 마지막에도 공주님처럼 보호받는 대상도 소녀라는 점, 유색인종이 맡은 포지션, 폭력성에 대한 부분 등등이죠.

“그 견해를 밝히지 않은 이유는 뭐죠?”

“의미가 없기 때문이에요. 한창 인기몰이를 하는 중이기도 한데다가 회장님이 직접 SNS로 인정해주기까지 하신 게임이거든요. 이런 게임에 부정적인 비평을 올린다는 바보 같은 일을 할 리가 없잖아요.”

그 정도 눈치가 없는 얼간이가 있겠느냐는 당연한 반문에 김지애 대표가 말했다.

“이 자리와 앞에 있는 나를 말한 건데 공식적인 비평을 말하는 거군요. 내 눈치가 아니라 회장님의 눈치이고 사회적인 매장으로까지 여길 오해가 있고?”

“그건···”

아니라며 말하려는 그녀의 말을 끊고 김지애 대표는 몇몇 이름을 언급했다. 모두 소위 말하는 한남들에게 상처 입은 적이 있고 인권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 사내의 직원들이자 동생들이었다.

“전해 듣는 이야기 말고 직접 겪어보고 오세요. 누구는 가고 싶어도 자리에 묶여서 못 가는 좋은 기회이니 허투루 생각하지 마시고요.”

“당장이요? 저희가 하고 있던 업무는···”

“당신의 빈 자리가 대체 불가능할 정도로 클 거라고 생각하고 있나요?”

“······.”

고갯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시선조차 주지 않으니 자신에게 허락된 시간은 그걸로 끝이었다.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조윤화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나왔다.

그간 몰랐던 적대적이기까지 한 발언들은 왜 나온 걸까?

정말로 사상의 차이 때문에?

아니다. 그녀는 이유를 찾아냈다.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윤태식을 존경하는 거였어!’

은연중에 김지애 대표를 높이고 윤 회장을 깎아내린 발언들 때문이다. 계기가 된 사건이 그룹의 공문을 봤느냐는 것에서부터 시작한 게 명백한 증거였다.

이 덕분에 알았다. 그녀가 존경하고 흠모했던 아이언 우먼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짙은 배신감에 사직서를 내고도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오기가 생겼다. 도대체 무엇을 하려고 저런 식으로 직원들을 모으고 김지애 대표마저 사람을 매도하는 지를 말이다.

“두고 봐.”

이를 갈면서 합류하게 된 프로젝트팀.

이상하리만큼 여자들의 비율이 높은 그룹 내 직원들 중 일부가 된 그녀는 난생처음으로 겪는 기괴한 방식의 게임 계발에 참여하게 되었다.

- 나를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 미사여구는 다 빼도록 하지요. 여러분은 이제부터 에디스 가문의 유산 속 배경과 인물의 스토리, 음악 등을 만들어나갈 겁니다. 단, 각자가 맡은 부분에만 충실하면 되고 누가 무엇을 맡을지는 확률에 맡길 것입니다.

‘확률?’

‘누가 뭘 맡을지 몰라?’

제비뽑기를 하는 상자가 저편에 있는 채로 모여든 이들은 프로젝터의 화면을 보았다.

러프하게 그려진 고택과 가계도.

가계도는 늙은 나무가 가지를 뻗어나가는 것처럼 조부모, 부모, 형제, 자매, 조카 등등의 빈 자리를 남겨둔 모습이었고 고택의 모양새 역시 고목이 줄기줄기 뻗어 거실, 방, 다락방을 만드는 모양새였다.

공간의 이어짐은 끊어짐이 없었는데 흑색과 갈색으로만 내부 공간이 도식화 되어 있을 뿐, 조형물이나 가구 등의 것은 비어 있었다. 고대의 보물 지도나 유령의 집, 옛 박물관을 연상케 했다.

- 각각의 카드에는 죽음으로 귀결되는 키워드가 적혀 있습니다. 그 안에 여러분 각자가 품은 예술성을 담아 표현해 내십시오. 인물의 스토리, 음악 등등은 형형색색, 각각의 모양으로 파편화되어 쌓일 겁니다.

「용기, 익사, 공포.」

「웃음, 아사, 의문.」

「파티, 사랑, 살해.」

「동심, 환상, 숙명.」

「열망, 도망, 실종.」

「숙명, 도전, 회피.」

「연인, 운명, 사고.」

「인내, 기적, 추락.」

이를 두고 윤태식 회장이 말했다.

- 그 퍼즐들은 완결성이 돋보이는 게임이 될 겁니다. 이것이 프로젝트의 첫 번째 목표이며 그 다음은 여러분의 차례입니다. 알파 버전의 게임을 역량을 발휘하여 비평하고 수정하고 보완하십시오.

스피커를 통해 들리는 메시지를 듣고 그녀가 채 말하기 전의 단어가 옆에서 수군수군 나왔다.

“이런 식으로 뭘 하겠다는 거야?”

“오만하기는. 뭘 만들어도 다 자기 예상대로 된다는 거 맞지?”

“뭐야? 저 잘난 척은? 회장이라고 해도 저건 아니지!”

“실력이 된다면 고쳐보라는 거 맞지? 실력 없으면 닥치라는 거고?”

“우와··· 어그로 대박이네.”

다른 의미로 이들을 불타게 만들었다. 그렇게 조윤화 역시 냉소적인 마음대신 자존심이 걸고 노려보며 카드를 뽑았다.

< 미련 없이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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