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565화 (565/577)

< 예술 작품 >

시간을 보니 무려 50시간이 지나 있었다. 테이블에는 먹고 마신 주전부리의 흔적들과 쓰레기가 저편에 밀렸다. 여기에 물 담은 페트병과 수북하게 쌓인 담배꽁초만 더해지면 여지없이 게임 폐인의 인테리어가 완성된다.

이토록 푹 빠져서 한 나 자신이 놀라운 것과 동시에 오늘에야 깨달은 사실이 생겼다. 향상된 육체 능력은 이틀 밤을 지새워도 너끈히 버티는 수준이라는 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차원 게이트가 열리고 상태창, 레벨업, 헌터 각성이 일어나야 한다니까.”

총알은 통하지 않고 냉병기만 통해주는 편리한 아포칼립스가 오면 나는 세계 제일의 헌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따위 세계가 와서 밑바닥부터 다시 정상에 올라가는 개고생을 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누가 뭐래도 나는 지금이 좋으니까. 패배해서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울 필요도 없는 지금, 이 순간이 전성기다.

시답잖은 상상은 이쯤 하고 본 문제인 워쳐3를 되짚었다. 팬으로서 할 거리가 많고 다회차를 즐기게 만들 만큼의 분기점이 많은 건 무조건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한계효용이라는 게 존재한다.

GF 버전의 워쳐3는 내가 기억하는 꿈속 미래의 명작보다 낫다. 사니라오의 깊이가 더해져서 각각의 볼륨이 늘어났다. 덕분에 사이드 퀘스트는 떠오른 것들을 확인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플레이 타임이 저리도 오래 걸렸다.

‘이러면 지루하지. 모름지기 아쉬운 정도가 좋아.’

덧붙여 게임계에서 상도덕을 지켜야 한다. GF쯤 되면 이 업계를 선도하는 위치이고 우리의 행보 하나하나가 업계 표준이자 한계점이 된다. 그런데 AAA급의 게임의 기준치를 지금 만큼 높여버리면 우리만 찬양받고 다른 회사들은 불필요한 비난을 들을 수밖에 없다.

완성품의 수준보다 저렴한 가격, 너무나도 풍성한 플레이 타임.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다행스럽게도 정말 간단했다.

DLC로 쪼개는 거다. 이를 치사하다고 하면 나는 그 이야기를 무시하련다. 적어도 자동차 튜닝, 결혼, 임신과 같은 업데이트 수준의 패키지 하나씩을 더해가며 그때마다 돈을 받아먹는 게임에 비해 워쳐3의 DLC는 각각 10시간의 볼륨이 들어갈 테니까.

“김유천 비서실장님. 결재할 서류들은 잠시 미루지요.”

나는 바깥으로 나가며 말했다. 뒤이어 어지럽혀진 회장실은 청소하게 두고 사람들을 호출했다.

“우선, 극악의 난이도를 만들어 낸 개발자들을 전부 회의실로 모이라고 하십시오.”

“설마, 전부 클리어하신 겁니까?”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맙소사······.”

김유천 실장은 다른 이사들이 나를 상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거기에 더해서 이사들에게 이 게임이 가진 난이도를 열심히 들었을 거다.

그런 만큼 저리도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짓는 것이리라.

“이틀을 꼬박하신 듯한데, 잠시 눈이라도 붙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아직 젊어서 이 정도는 쌩쌩합니다.”

“시험 전에 땡땡이친 고딩도 이틀을 새면 비몽사몽일 겁니다. 그런데 회장님은 흔한 다크서클조차 조금도 없으시네요. 최근에 자주 생각하는 건데, 회장님께서는 지구인이 아닌 것 같습니다.”

“신체 능력 패치는 받았는데 유머 코드가 하필 회장님 식 버전이라서 제가 말만 하면 분위기가 썰렁해지더군요.”

“···그 농담을 들으니 회장님께서는 인간이 틀림없으십니다.”

웃어야 한다고 생각만 할 뿐, 차마 웃지는 못하는 기묘한 표정으로 김유천 비서실장은 이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윽고, 김대익 이사와 김현섭 이사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가쁜 숨을 내쉬며 달려왔다.

“정말 그 모드로 엔딩을 보신 겁니까?”

“회장님 모드로 클리어하셨습니까?”

뭘 의심하냐고 웃자 저들이 애써 부정했다. 결국 방 안의 엔딩 화면을 보여준 뒤에야 저들이 허탈하게 인정했다.

“설마, 설마 했는데 설마 진짜로 해내시다니······.”

“회사에 소속된 프로 게이머들이 두 손 두 발 다 든 난이도였습니다. 그걸 이리 해내셨으니··· 이번 내기는 내가 이긴 거야.”

“1주일은 걸려야 인간미 있지,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셨습니다.”

김대익 이사는 김현섭 이사에게 묵직한 봉투를 내밀었다. 꼴을 보니 한두 명이 아니라 팀 전체가 클리어 타임을 두고 도박한 게 분명해 보였다. 어처구니없는 모습에 혀를 차다가 말했다.

“AI들의 움직임과 판단에 감탄이 나오더군요. 도대체 어떻게 만든 겁니까?”

“이번에 새로 들어온 친구 중 하나가 분대 단위 전투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고대부터 중세시대의 전투에 대해서는 아주 빠삭했지요.”

“그 친구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다양한 병종이 어우러진 군대를 마주했을 때 유저들은 ‘이래서 정규군이구나.’라는 스트레스를 여지없이 느끼게 될 것이다. 그만큼 방패병은 플레이어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차단하고 창병이 거리를 유지하며 찌르고 궁수가 저격과 견제를 조직적으로 했다.

“어려움 모드는 마음에 들었습니다. 제 전용의 난이도 역시 새로운 액션의 가능성을 보았을 만큼 흡족했습니다. 그런데 보통과 쉬움은 왜 그리 만들었습니까?”

“지나치게 쉬운 것 말이시군요? 이대로라면 쉬움에 익숙해서 보통으로 넘어갔다가는 그냥 멘탈이 깨질 테니 말이죠.”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걸 가져왔느냐면··· 이게 뭐랄까··· 그···”

웃으며 말을 고른 두 명의 이사는 나이를 초월한 개구쟁이의 표정을 지었다.

“실은 각각이 회장님께 보여드리려는 장기자랑이었습니다.”

“폴란드 친구들의 속도가 한국과는 원체 달라서 이래저래 짬이 났거든요. 그래서 전투 메커니즘을 이래저래 적용했습니다. 회장님처럼 오직 컨트롤만으로 모든 밸런스를 무너뜨리는 것도 가능하지만, 본래는 캐릭터의 성장 패턴에 맞는 상성이 적용되어 있죠.”

이 부분에 대한 해결책들 역시 마련한 상태라고 했다. 고작 방패를 잘 다루는 것만으로 난이도 상승이 이루어진다는 건, 방패 방어에 제한을 두면 된다. 다양한 병종의 조직적인 움직임이라는 건 달리 보면 조화를 무너뜨릴 때 금방 파탄을 드러낸다는 뜻이니 말이다.

“몬스터들에게도 지구력을 적용한 버전이 있습니다.”

“하지만 회장님은 그게 있으면 더 심심해하실 게 뻔해서······.”

윤태식 접대 모드라 저 모양이었단다. 나무랄 수 없는 게, 김대익 이사의 말마따나 어려워서 나는 오히려 집중해서 하는 재미가 있기는 했다.

“그렇다면 게임 볼륨에 대한 문제도 인지하고 있었습니까?”

“여부가 있을까요. 회장님과 함께 한 세월이 있는데 그걸 모르면 이사 직함을 때려치워야지요. 워쳐 시리즈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보는 재미와 서브 스토리를 통한 새로운 경험이 강점인 게임입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풍성하면서도 매력적인 사이드 퀘스트가 메인 시나리오를 방해하고 오히려 난해함을 줍니다. 이러한 내부 테스트 결과를 이미 받았고 흡입력이 높은 것들은 DLC로 나눠 시차를 두고 내놓는 게 어떨까 합니다.”

‘제자를 하산시키는 스승의 기분이 이런 거겠군.’

손뼉을 쳐주고 싶다. 본래의 워쳐는 이야기를 파편화해서 정작 게임을 이해하고 몰입하는 데 방해를 주는 진행이 많았다. 그러나 그런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저들이 완성품을 가져오는 경지였다.

스타트를 끊으며 내가 정해준 가이드라인이 없었다면 시일이 더 걸리기는 했을 테지만, 이들은 명실상부한 대가들이 분명했다.

“다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워쳐3의 최종본을 추후 보기로 하지요.”

“스토리를 통째로 교정하거나 하는 수정안은 없으신 건가요?”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폴란드 친구들이 아쉬워하는 소리가 벌써부터 들리네요.”

“아쉽다니요?”

“모르셨습니까? 오후가 있는 삶보다 레드 프로젝트팀원들은 야근을 하고 싶어할 때가 정말 많습니다. 어떻게든 기회가 되면 꼭 하는 방향으로 선택하고 그 바람에 자꾸만 완성도가 높아졌죠.”

“왜들 야근하고 싶답니까?”

“야근하면 평소보다 1.5배로 받으니까요.”

듣는 순간 바로 이해했다.

폴란드의 일반적인 직장 급여와 비교하면 상당히 높은 급여를 받고 있음에도 더 하고 싶은 이유는 돈이었다.

“그런데 회장님 모드라고 이름 붙인 것 말입니다. 이것만을 극대화한 게임을 개발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어이쿠! 회장님의 피지컬이야 천상계에 계시니 할 만할 뿐, 일반인들한테는 그저 욕 나오고 이가 갈리는 모드에 불과합니다. 저희야 개발 성과를 자랑할 수 있으니 좋지만, 그걸 내놓는 건 유저들을 학대하는 겁니다.”

“게임 테스트에 이골이 난 소속 프로게이머들 중 아직 단 한 명도 클리어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괴작은 아직 인간들에게는 시기상조입니다.”

익살스러운 대꾸에 모두가 웃고 말았다. 뒤이어 솔직한 대답을 들었다.

“판정에 여유를 두면 독특한 액션성이 나오리라 생각은 했습니다. 다만, 워쳐3의 풍조와는 맞지 않고 이것만을 살린 신작을 개발하기에는 잠시 인력의 공백이 있을 때라서요.”

“회장님께서 보장해주신 강제 휴가 말이지요. 이게 다 취업하고 싶은 회사로 손꼽히는 GF의 위용입니다.”

더 말해봐야 입만 아픈 GF의 사원 복지 시스템에 대한 찬사를 끝으로 지금의 언급은 잠시 후에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걸로 일단락 지었다.

방해하는 이도 없고 준비가 철저한데 계획에 차질이 빚어질 리가 있으랴.

워쳐3를 출시하고 우리는 열화와 같은 성원을 받으며 명실상부한 게임 업계의 명가로서 그 입지를 공고히 했다.

【당신이 게이머라면 이 게임은 반드시 해야 한다. 완벽한 판타지의 세계가 당신을 기다린다.】

【워쳐의 시리즈와 함께 걸작의 명예는 계속된다!】

【원작을 초월하는 워쳐3. 게임 문학의 결정판!】

【다시 생각해 봐도 완벽한 게임!】

전문 리뷰어들의 극찬과 함께 실제 플레이한 게이머들의 점수도 고평가가 이어졌다. 커뮤니티 게시판과 위튜브의 플레이 영상, 반응 등등 푹 빠져서 플레이하는 이들의 행복한 모습이 수도 없이 올라왔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들이 발생했다.

첫째는 걸출한 게임성과 GF그룹의 마케팅에 힘입어 태풍같이 인기를 구가하는 워쳐3에게 소송이 걸려 온 것이었다.

【게임 워쳐의 원 작가, 얀지 사프스키의 분노. ‘게임이 아니라 내가 창작자다!’】

【로열티 소송전에 들어간 게임 워쳐. 인기에 적신호?】

【워처 원작 얀지 사프스키가 받은 저작권료는 고작 1,000만 원. GF의 수입은 천문학적!】

【얀지 사프스키 ‘1편의 저작 권한을 주었을 뿐’이라며 ‘내 작품 덕에 번 돈을 내놓으라’ 일갈】

접하고 든 생각은 시기가 다르다는 것이었다.

“이게 왜 지금 일어나? 원래보다 빠른··· 아! 지금 같은 인기를 얻은 타이밍으로만 보면 올 게 왔다고 봐야 하는 거군.”

본래 꿈속 미래에 있었던 일이었다. 워쳐의 원작자가 소송을 걸면서 ‘추악한 노인네의 욕심’이라는 이야기들이 한동안 논란이 되었던 만큼 나도 제법 자세히 기억을 하고 있는 부분이다.

워쳐의 원작자인 얀지 사프스키는 폴란드의 국민작가라 불리는 인물이다. 그런만큼 자부심과 자존심이 굉장히 높고 세다고 알려졌다. 다만, 나이 지긋한 노인답게 게임에 대해서는 무지한 편이었는데 그런 그가 근래에 수치스러운 말을 자주 들었다고 한다.

‘당신이 워쳐 게임의 원작자군요!’라는 소리, ‘게임 보고 책을 읽었어요!’라는 팬의 목소리, 각국의 번역본이 팔리며 널리 퍼진 작가로서의 명성은 얀지 사프스키 본인의 힘보다 게임 워쳐의 원작자이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평가가 더해졌다.

이건 그가 보기에 매우 불합리했나 보다.

[내 작품이 뛰어나서 성공한 놈들이야! 게다가 헐값에 사가서 이만큼 벌었으면서도 아무 말이 없어? 이런 파렴치한 놈들 같으니라고!]

이미 알고 있는 바지만, 폴란드의 레드팀에게 저작권료에 대한 부분을 확인했다.

올리와 올렉은 분통을 터트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97년도에 일시불로 그 망할 노인네가 원하는 만큼 줬단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소송이라니요!]

[그 늙은이는 손해 보기는커녕 우리 덕분에 더 유명해졌어요! 게임은 애들이나 하는 거라며 매번 깎아내렸단 말입니다! 그 모욕도 그냥 넘겨왔었는데··· 젠장!]

역시 돌아온 대답은 익히 아는 바 대로였다.

사실 콘텐츠 분야에서 원작가가 자신이 가진 콘텐츠의 가치를 몰라서 헐값에 내놓았다가 이후에 그것이 엄청난 대박이라는 것을 알고는 소송을 거는 지금과 같은 상황은 그리 드문 일도 아니다.

그리고 워쳐와 같이 큰 수익이 보장될 것 같은 콘텐츠는 어느 정도 법적으로 새로운 보장을 해주는 일도 꽤 있긴 했다.

문제는.

【얀지 사프스키가 요구한 추가 저작권료는 200억!】

기분이 더럽다는 거다.

‘줘도 남는 장사야. 줄 수 있어. 그런데 태도가 글러먹었잖아. 여기가 은행이냐? 맡아 놓은 거 내놓으라는 건가?’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고운데, 변호사를 끼고 당당하게 요구하는 모양새가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고민하게 된다.

나는 한국 언론계를 일소에 청소한 전적이 있다. 부릴 수 있는 권력이나 영향력으로 보면 이번의 세상 물정 모르는 노인네의 불만 정도는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체급의 차이가 너무 난다는 것!

“시답잖아서 주저하게 될 줄이야.”

1,000만 원 주고 샀다고 하기에는 지나칠 만큼 워쳐가 대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노인네 땡깡을 묵살해버리자니 체급이 맞지 않았다. 한국 언론이나 일본 굴지의 기업이면 모를까, 늙은 작가에게 GF그룹의 회장이 뭐라 하는 건 무자비한 횡포로 보이기에 딱 좋다.

< 예술 작품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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