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563화 (563/577)

< 예술 작품 >

‘그러고 보니 세월의 흐름이 실감 나네.’

처음 워쳐가 GF에서 수정되던 시기에만 하더라도 김대익 실장이었는데 지금은 이사가 되어 있다. 이들은 직급이 올라가는 만큼 정력적으로 활동했고 게임 업계와 관련해서 세계에서 손가락에 꼽힐 만큼의 거인이 됐다.

나만 잘나가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는 이들 모두가 성장하는 기분.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워쳐3의 진행 상황은 어떻습니까?”

“현재까지 개발 된 부분이 국내로 들어와 있습니다. 플레이가 가능하죠.”

“한 번 해봐야겠군요. 검토는 누가 하고 있습니까?”

“김대익 이사였습니다만, 최근에는 김현섭 이사에게 검토받는 일이 더 잦은 것 같습니다.”

김현섭 이사에게 검토받는다는 의미는 스튜디오에서 개발하는 과정에 수많은 오류가 발생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룹 내에서는 대단한 능력자이자 해결사처럼 내가 비치고 있으나 개발 과정이 수정안이라면 모를까, 기술적 오류에 대해서는 기다리고 지켜봐주는 게 전부였다.

“게임을 확인해 봅시다.”

“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게이머에게 있어 지금보다 더욱 흥분되고 기쁜 순간은 없다. 나는 웃음을 감추지 않으며 손가락을 풀었다.

*

2시간.

워쳐3 와일드 헌트가 세팅되기까지는 걸린 시간이다. 그동안 뇌리에 있는 꿈속 미래의 워쳐3를 처음부터 끝까지 회상하며 맛있는 음식을 음미하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이윽고 컴퓨터에 세팅이 마쳐짐과 동시에 바로 플레이를 시작했다.

‘워쳐 시리즈는 퀘스트나 스토리적인 면에서는 손댈 필요가 없는 명품이지. 선풍적인 인기를 구가한 워쳐3 조차도 전투에서 실망했을지언정 병적인 디테일부터 퀘스트의 깊이까지 곱씹을 가치가 있었으니까.’

나는 분업화와 전문화라는 단어를 신용한다. 그룹 계열사 중 애니메이션과 영상 연출에 있어서는 마이코닉스가 으뜸이며 한국에서 사채업자에게 빌빌대던 이들은 이무기처럼 성장하여 글로벌해진 지 오래다.

즉, 이들의 역량으로 만들어진 영상연출이 바로 내가 보는 워쳐3였다.

창백한 달이 떠오른 으슥한 밤, 흥얼거리는 노래를 따라서 간 사냥꾼은 창백한 피부의 미녀와 마주한다. 경계하며 검을 꺼내든 위쳐와 달리 고혹적으로 보며 야릇한 표정을 짓던 미녀는 옷을 벗어 나신을 보이는가 싶더니 한줄기 그림자가 되어 유령처럼 사라졌다.

스산한 소리와 옅은 웃음. 이를 따라 바람 없는 숲의 나뭇잎과 바닥의 풀잎이 일정한 방향으로 흔들렸다.

‘정교하면서도 절제된 무게감이 있어. 워쳐의 분위기를 제대로 살렸구나.’

워쳐. 괴물을 사냥하는 그들의 싸움법을 보여주는 강렬한 이 4분 남짓의 영상은 꿈속 미래의 그것과 크게 보면 다르지 않았다. 다만, 영상의 길이만 같았을 뿐, 들어간 소리와 장면의 수는 배가 되었다.

바람이 이끄는 곳은 허름한 창고다. 말을 탄 워쳐는 입구에 서서 땅을 녹일 만큼 강한 산성의 물약을 삼켰다. 이윽고 핏줄이 검게 돋아나고 그런 채로 창고의 문을 열었다.

어스름한 달빛이 비치는 실내 공간. 그곳의 중심에 있던 여인을 보며 경계하던 사냥꾼의 발밑으로 붉은 피가 소리 없이 뻗었다. 촉수 같던 그것이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치솟는 순간, 사냥꾼은 춤추는 바람처럼 몸을 돌리며 은검으로 이를 베어냈다.

사냥꾼의 경직된 표정은 가늘어지는 눈동자로 연출됐다.

미녀는 아쉽다는 듯, 그러나 장난감을 마주한 양 미소 지었다. 이후의 접전은 그야말로 초단위의 복합적인 스킬 충돌이다.

‘시네마틱 장인답다! 다이나믹해. 빠르다가 임팩트 있는 순간의 묵직한 모션은 기존의 슬로우 연출과는 비교도 할 수 없어.’

뛰어난 검술가이자 다채로운 포션을 다루는 사냥꾼이 아니었다. 영상 속의 워쳐는 뱀파이어에는 못 미치지만, 충분히 개조 인간이 보일 수 있는 초인적인 움직임을 선보였다. 헛간에 있던 손수레 따위에 방어마법을 쓰지 않고 완력으로 대응하는 대신 마법에는 상응하는 기술로 대처하는 식이었다.

이 안에 콘셉트와 몬스터의 공략법이 다 담겼다. 뱀파이어의 손톱에는 그냥 휘두르는 칼질은 튕겨 나가지만 반격과 휩쓸기로는 중심이 흐트러지지 않고 대응할 수 있으며 피와 그림자를 다룰 때는 달빛 가루와 화염으로 대응하면 된다.

연글술의 포션은 던져서 맞추려 하기보다는 띄우고 물러서며 충격파로 터트리는 방식을 쓸 수 있고 단발성 화염 마법은 차오르는 그림자를 밀치는 데도 사용할 수 있다. 이처럼 1초에서 4초마다의 액션으로 부딪치는 하나, 하나가 스킬 상성을 보여주었다.

‘물론, 몬스터는 저걸 다 써도 플레이어는 스킬 포인트가 부족해서 다 찍지 못하지.’

하지만 게임에서 네가 쓸 수 있는 기술이고 잘만 다루면 최고의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건 분명했다. 이윽고, 역동적이었던 전투의 끝은 반파된 창고와 지쳐서 그림자에 잡아먹혀버린 워쳐가 끝내 목을 물어뜯기고 피를 빼앗기면서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

워쳐를 모르는 이라도 이를 통해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세계관에서는 인간 중의 강자라고 해도 이종족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렇기에 자신의 몸을 미끼로 내던지면서 사냥하는 처절함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좋다!”

워쳐의 검게 변해버린 피를 마신 탓에 내부에서부터 불타고 녹아내리는 고통에 휩싸인 뱀파이어는 도망치다가 끝내 죽고 말았다.

암전된 영상으로 늑대 교단의 심벌과 함께 워쳐3의 로고가 보였다.

“방금 것은 홍보영상이고 이제 진짜 오프닝이 나옵니다.”

“김 실장님도 해보셨습니까?”

“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게임 플레이에는 소질이 없어서요. 단지 영상만 봤는데··· 정말 끝내줬습니다.”

“저도 같은 심정이네요.”

이어지는 스토리 영상 역시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말을 타고 도주하는 검은 머리의 미녀, 이를 뒤쫓는 기마병들, 추적자들을 저지하기 위해 마법을 사용하는 그녀의 컷.

정확히 같은 공간을 뒤쫓는 워쳐는 부러진 깃발과 잔해만 남은 자잘한 흔적들을 통해 앞서 지나간 그녀의 싸움을 응시했다. 여기에는 단순한 뒤쫓기가 아닌 워쳐 센스라는 추격기술을 통해 동선이 잔상처럼 그려졌고 이것이 구체화하며 영상이 교차하는 식이었다.

전장의 중심에서 마법으로 위기를 모면하는 마녀, 그녀의 탈출씬은 뒤따르는 워쳐의 똑같은 구도와 함께 그림처럼 겹쳐졌다.

‘아주 좋아! 깔 게 없어. 주문한 그대로이고 그래픽은 더 끝내준다!’

우리 직원들이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럽다. 아낌없이 보너스를 지불해야겠다!

그런 한편으로는 의구심도 들었다.

“이게 G크로스에서 구동이 가능한 게 맞습니까?”

“김대익 이사가 충분히 구동 가능하다고 확답을 주었습니다.”

“기적적이군요.”

정말 대단하다. G크로스는 경쟁 기종과 비교하면 확실히 성능이 떨어지는 편이다. 그것을 GF엔진이 가진 강점 중 하나인 일종의 감성적인 그래픽을 통해 극복하는 것이 특징인데. 이건 그것도 필요 없는 수준이다.

실로 극한에다가 극한을 더해 한계지점까지 도달한 셈이다. 이와 동시에 시원함과 아쉬움의 감정이 동시에 들었다.

‘다들 내가 피드백해주는 걸 기대할 텐데, 이제는 그럴 필요조차 없는 수준으로 가져오니 이거 어쩌지?’

GF의 전통으로 자리 잡은 것.

회장인 내가 개발 중인 게임을 직접 플레이할 때는 반드시 해당 게임의 업그레이드 지점들을 찾아냈고 개선을 이뤄냈으며 그 게임은 무조건 대박을 쳤다는 게 있다.

워쳐3의 관심을 보이기 무섭게 이 게임이 바로 세팅되었다는 건, 김유천 비서실장과 다른 직원들이 그런 기대를 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진짜 격세지감이다. 문제없이 완벽할 것을 우려해야 할 줄이야.’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긴장된다. 어린아이처럼 마냥 기뻐하며 즐기기만 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이를 방지하고자 헛기침하고는 말했다.

“김 실장님.”

“네, 회장님.”

“게임에 집중할 테니 나가서 쉬고 계시지요?”

“알겠습니다.”

김유천 비서실장이 나가고 이제 회장실은 오롯이 나만의 공간이 되었다. 나는 표정 관리를 위해 애써 힘주고 있던 입가에 힘을 풀고 헤벌쭉 웃었다.

‘얼른 해보자. 가이드라인은 예전에 다 언급해뒀으니까 다 반영 됐을 거야. 과연 우리 직원들이 이걸 얼마나 초월시켰을까?’

게임을 실행하자, 그루터기에 걸쳐 앉은 채로 모닥불을 응시하고 있는 워쳐의 캐릭터가 보였다. 옆으로 클릭할 수 있는 목차가 나오는데, 이외에도 커서를 움직여서 누르고 움직일 수 있는 오브젝트는 더 있었다.

이를테면 모닥불을 건드려 불의 기세를 바꾸는 것이다. 그러면 응시하고 있던 캐릭터는 약한 불일 때는 명상하는 자세를 취했고 센 불에는 꼬치고기를 꺼내어 굽는 변화를 보였다. 캐릭터의 소지품을 건드리면 ‘호기심 많은 요정인가.’라며 툭툭 쳐내기도 했다.

GF가 인수하면 게임 개발 속도가 빨라지고 완성도는 높아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소속 회사 간에 콜라보레이션 뿐만이 아니라 저들이 본래는 거쳤어야 할 시행착오를 화끈하게 압축시켜주기 때문이다. ‘이게 좋을까? 아니면 2안? 3안이 나으려나?’와 같은 선택 직전까지의 고민을 없애고 이 메인 화면처럼 ‘이 구도로 갈 테니 완성도에 집중합시다.’가 된다.

발언의 책임은 내가 진다고 해버리니 저들은 단축되는 시간만큼 퀄리티만 미친 듯이 파고드는 것이다. 아울러, 여유가 있을 때는 유머도 자연스레 나오듯 게임의 각 요소요소에는 위트를 담는 다양성도 보였다.

“난이도는 아쉽지만 쉬움으로 해야지.”

어려움으로 하면 플레이 타임이 길어진다. 이건 각 잡고 게임을 즐길 때라면 모를까, 전체적으로 둘러보고 피드백을 해주려는 처지에서는 좋지 못한 선택이었다. 우선은 업무의 연장선이니 얼른 피드백을 해치우고 차근차근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길 예정이다.

[내 앞에서 거둔 것을 보았네. 그것은 굶주림이고 두려움이었지.]

[황제는 우리들의 땅으로 그의 군단을 행군시켰다. 푸른 산맥의 모든 요새가 피로 물들고 말았어. 광기로 굶주린 이 격변은 모두가 학자들이 말하는 천구의 결합부터 비롯한 저주야.]

[신들의 저주를 받고, 인간성이라곤 없는 족속들!]

처음은 워쳐를 이번 편부터 접하는 이들을 위해 매우 요약한 전편 스토리들이었다. 2편의 백미였던 선상연회를 즐기는 왕과 빙결마법으로 모조리 얼어붙는 컷도 나왔다.

다만, 스토리가 방대한 만큼 압축이 지나쳐서 오히려 전편을 모두 플레이한 사람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식의 설명이 나왔다.

황제, 전쟁, 천구의 결합, 괴물, 신비, 이를 연구하는 이들··· 이것들은 이해하기 어렵다. 대신, 한 가지만큼은 쉬웠다. 이 괴물들을 처리하기 위해 납치하고 어렸을 때부터 무기처럼 다뤄져 만들어진 사냥꾼이 있으니 그들을 워쳐라 한다는 것 말이다.

“이거 스킵을 못 하네.”

단점 하나를 찾았다.

RPG는 스토리가 중요하지만, 스킵도 없이 말이 너무 많고 설명해주는 이 늙은이의 목소리는 무슨 주문처럼 자기만 알게 떠든다는 게 별로였다. 다만, 무조건 대사를 바꾸라고 할 수는 없다.

나처럼 게임을 알면 아는 만큼 저 축약된 단어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게 되는 맛도 있기 때문이다.

‘데빌즈 소울처럼 하는 것도 방법이기는 한데, 워쳐에는 또 워쳐만의 특색이 있는 거니까. 오히려 데빌즈 소울화 되는 걸 경계하는 게 맞고.’

이 게임은 여러모로 설명충들이 많이 등장하는 편이지만, 개인의 취향 문제로 넘기기로 했다.

문제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내가 쉬움을 고르기는 했지만, 이건 지나치게 쉽잖아.”

아무리 초반이어도 그렇지 그냥 대충 칼만 휘둘러도 적들이 그냥 휙휙 다 쓰러진다. 첫 장이어서 그런가 싶었는데, 플레이를 쭉 이어나가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구르기만 하면 무적이 적용되고 스테미나 제한도 없이 마냥 굴러다닐 수 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칼만 휘둘러도 적들은 손쉽게 쓰러진다. 그리 진행하다가 이건 아니다 싶어 다시 하기로 했다.

‘우리 직원들이 이런 걸 내놓을 리가 없어. 그냥 초심자에 대한 배려를 지나치게 한 게 분명해.’

권장 모드인 보통으로 다시 시작!

그리고 다시 플레이하는데, 이제야 비로소 게임 같아졌다. 스태미나의 제한도 생겼고 칼만 휘두르면 몽땅 맞아주던 적들이 막기와 반격을 제법 사용하는 것이다. 이를 밀치고 상단을 막으면 하단을 베고 후방에서 기습을 가하며 농락했는데 손맛이 제법 있었다.

“어쭈? 제법 잘 막는데? 하지만 이렇게 하면 그만이지. 나한테는 안······ 어라? 내가 이 정도로 할 만하면 다른 사람들한테는 어렵다는 건데?”

보스급도 아니고 퀘스트 도중에 만나는 서브 몹.

그저 이름자가 있는 몬스터를 처리하다가 잠시 멈추었다. 프로게이머 뺨을 쳐도 충분한 내 컨트롤로 할 맛이 나는 건, 기존 게임들의 매우 어려움에 해당했다. 그런데 이건 보통 모드가 아닌가.

객관적으로 볼 때 ‘쉬움에서 보통’이 아니라 ‘아주 쉬움에서 매우 어려움’의 변화였다.

모드 설정의 기준점이 매우 이상했다.

< 예술 작품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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