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557화 (557/577)

< 게임으로 >

“그건······.”

“먼저 터트리는 편이 낫습니다.”

“먼저요?”

“감추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터트리기 전에는 해결할 수조차 없고 휘둘릴 뿐입니다. 그러니 터트려야 합니다.”

김해수의 문제는 그녀의 모친이 김해수의 이름으로 빌린 억 단위의 빚이다.

원론적으로만 따지자면 이건 김해수의 문제가 아니다.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의 이름을 팔아서 빌렸든 아니든 김해수가 빚에 관여한 것이 없다면 이는 모친의 빚일 뿐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녀의 직업이 연예인이라는 점에 있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그 빚을 돌려받기 위해서 김해수를 걸고넘어지게 될 것이고, 결국 김해수는 연예계에 계속 있기 위해 빚을 갚거나 연예계에서 퇴출하거나 둘 중 하나를 고민하게 될 수밖에 없다.

‘2019년쯤 되면 빚투니, 뭐니 하면서 워낙 다양한 사건들이 생기고 그 분위기를 타면 조용히 넘어갈 수 있는 방법들이 많이 생기겠지만, 지금은 아니지.’

이 시기에는 그런 방법들로 조용히 넘어가는 게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니 먼저 터트리기보다는 쉬쉬하며 그냥 넘어가는 게 편할 수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다. 추후 알려질 테고 그때는 나의 도움을 받지 못할 때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고민이 제법 깊었으나 그녀의 선택지는 정해진 셈이었다.

“먼저 터트린다면 어떻게 되나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어떤 거죠?”

검지를 들었다.

“첫째. 관계를 분리하는 겁니다. ‘어머니의 빚이니 어머니와 해결하라. 나는 그 빚에 조금도 관련이 없다.’고 모르쇠로 나가는 방법이지요. 이 방법의 장점은 재산을 지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단점은 사회적인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는 점이지요.”

이번에는 검지와 함께 중지를 들었다.

“둘째. 이번 빚까지는 다 갚아주고 ‘이후로 어머니와 연관된 모든 것에 나는 관계가 없다’고 공표하는 겁니다. 장점은 명예와 이미지를 지킬 수 있다는 것. 단점은 억울하기까지 한 빚을 오롯이 책임져야 하는 거지요.”

여기서 무엇을 선택하건 그녀를 어리석거나 야박하다고 매도할 이는 아무도 없으리라 본다. 특히 빚을 다 갚아준다는 선택지는 남의 사정일 때야 입바른 소리로 충고할 수 있을 뿐, 자신의 처지가 된다면 그 발언을 철회할 이가 대부분이라 확신한다.

감당해야 하는 빚의 수준은 100만 원, 1,000만 원이 아니라 수십억 원의 단위니까.

‘잘나가는 연예인이기는 하지만, 속 빈 강정이나 마찬가지인 신세고.’

일찍이 김해수의 현재 생활을 알아봤다. 그녀는 지금 마포의 아파트에서 월세를 살고 있다.

물론 마포의 고급 아파트이니 일반인이 생각하는 그런 월세와는 다르다. 그러나 김해수라는 배우가 한국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와 출연료를 고려하자면 200억 상당의 재산을 가져야 정상이니 그녀의 삶을 감히 ‘궁핍하다’라는 말로 표현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바로 수년 전부터 어머니의 빚을 갚고 있었기 때문이지.’

본래의 미래에서는 어떤 식으로 해결했을까?

지금이 아닌 떠들썩하게 빚투가 거론되던 미래의 김해수는 빚을 갚지 않는 식으로 해결했다. 대중에게는 ‘문제를 일으킨 점에 대해 사과하지만, 어머니의 빚은 어머니의 빚입니다.’라며 못을 박았다.

여기에는 빚투라는 사회적 현상과 더불어 이미 수백억의 빚을 갚아온 전적, 어머니와의 연을 진즉 끊었다는 것이 배경으로 작용했다. 실제로 현재의 빚들은 전부 그녀가 어머니와 연을 끊은 이후에 생긴 빚들이다.

‘반면에 지금은 역풍을 맞기 십상이지.’

조금 전의 이유들이 고스란히 반대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빚투라는 사회적 현상이 없고 그녀는 안타깝게 여겨질 만큼 수백억의 빚을 갚아온 전적이 없다. 오히려 ‘돈 때문에 가족을 버려?’라거나 ‘아무리 그래도 저를 낳아준 어머니께 그럴 수 있냐?’라는 식의 훈계로 더 공분을 살 수 있다.

끝으로 가장 중요한 건, 모친이 그녀의 이름을 팔았건 어쨌건 김해수라는 이름을 믿고 투자한 이들의 심정이다. 손해를 본 시점에서 그들은 본전이라도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며 원망의 대상은 자신들의 마음을 움직인 김해수를 향할 수밖에 없다.

그녀가 제아무리 사정이 있고 합당한 이유가 있다 해도 ‘그건 그거고 내 돈은 어떻게 할 거냐고!’라는 말을 꺾기란 대단히 어렵다. ‘법대로 해, 법적으로 문제없어.’라는 식의 태도는 피해자들의 울분을 더욱 증폭할 뿐이고 말이다.

한참의 고민 끝에 김해수가 말했다.

“첫째를 선택할게요. 후자를 선택하고 싶지만, 그럴 돈이 없어요.”

국내 최고의 톱스타의 입에서 돈이 없다는 말이 나오는 게 쉬울 리 없다. 누군가에게는 별것 아닌 말이지만, 그녀에게는 엄청난 고민 끝에 나온 말일 것이다.

“돈 문제는 걱정할 거 없습니다. 제가 누군지 잊으셨습니까?”

소싯적에는 집이니 땅이니 하며 어떻게든 저렴하게 구매하고 시세차익을 보기 위해 노력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몇십 억쯤에 연연할 필요가 없는 위치에 올랐다.

결과론일 뿐이지만, 시세차익으로 이득을 보기 전에 내 재산이 불어나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딱히 눈에 드러나는 이득이 아니게 되었으니 할 말 다 한 셈이다.

“돈이 많으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적은 돈이 아닌데, 그냥 받을 수는 없어요.”

“빌려드리는 겁니다.”

팬심이라거나 특별한 감정이 있어서 선물하는 게 아니다. 그녀의 출연료보다 큰 금액을 쓰는 데는 김해수라는 배우의 가치가 그만한 값을 하기 때문이었다.

김해수는 드라마든 영화든 섭외하기가 가장 힘든 여배우 중 하나다. 수십억의 빚을 갚을 때까지 내가 원하는 작품을 지목해서 넣을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이득이 된다.

“돈으로 갚을 게 아니라, 저희 작품에 출연을 계속하신다는 조건으로 말이지요.”

“빚을 갚을 때까지 제 커리어를 마음대로 하시겠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대신 영화의 흥행 여부에 따라 빚은 그만큼 빠르게 처리가 될 겁니다. 터무니없는 작품에 참여하시라는 요구를 할 만큼 제가 어리석지는 않으니 그 점에 대해서는 안심하셔도 되리라 생각합니다.”

배우의 커리어를 건드린다. 민감한 일일 수밖에 없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입술을 꽉 깨물고 눈을 감은 채 고개까지 아래로 떨궜다. 자신의 처지가 한스러울 것이다.

자존심을 정면으로 건드렸으니 생각할 시간이 꽤 필요하리라 보였다.

‘기다려주지. 사업하면서 내가 이런 건 안 지루하게 잘 버틸 수 있게 됐거든.’

객쩍은 생각을 하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실 때였다.

“선택권이 없네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빨라!’

실수로 커피를 뱉는 줄 알았다.

예상과는 다르게 엄청 신속하게 답변이 돌아왔다.

‘아무렴 어때. 좋은 게 좋은 거지.’

티 나지 않게 커피를 꿀꺽 삼키고는 손을 내밀었다.

“후회할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럼, 저도 움직여보겠습니다.”

한 명, 한 명과 악수하고 저들을 내보냈다.

내 기분 탓일까.

돌아가는 저들의 발걸음과 표정이 한결 가볍게 보였다.

*

윤태식 회장과의 대화를 마치고 나오던 중 임옥빈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김해수를 보다가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였다.

‘왜 좋아하시지?’

이상한 일이다. 막대한 빚으로 묶어두고 어떤 작품에 출연할지를 꽉 잡아둔 채 물주 마음대로 휘두르겠다는 구두 계약을 마친 상황이다. 의지할 수 있고 한 점 흐트러짐 없는 선배인 줄만 알았던 그녀에게 저런 속사정이 있는 줄은 알지 못했지만, 임옥빈은 지금의 상황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래를 타인에게 붙잡힌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녀는 왜 걱정하지 않는 걸까.

고민하던 그녀가 다가가서 물었다.

“선배. 출연 이야기 있잖아요. 괜찮으세요?”

“그 일? 물론이지.”

“물론이라고요?”

“내가 너무 빨랐지? 조금만 뜸 들였다가 대답하는 게 좋았을 텐데, 그러다 놓치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

“네?”

되묻는 그녀에게 김해수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미소 지었다.

“매니저 저기 있네. 그럼 잘 됐으니 나중에 봐. 서원이도.”

“예? 아! 네, 선배.”

“어? 드··· 들어가세요.”

어깨가 축 처질 정도로 들어왔던 조금 전과는 확연하게 다른 모습으로 김해수가 먼저 떠나버렸다. 멍하니 있던 그녀는 강서원에게 얼결에 인사하고는 자신의 매니저와 함께 돌아오는 차량에 올랐다.

“윤태식 회장이 뭐래? 분량 다 쳐 낼 거래? 공개 사과하라고 하셔?”

회장실에는 매니저 없이 배우만 들어갔기에, 매니저들은 내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단지 고민에 잠긴 담당 배우의 얼굴을 보고는 덩달아 화를 내며 그녀의 편을 들어줄 뿐이었다.

“으이구! 그러게 카드 얘기는 그때 왜 막 해서 이런 꼴이 나게 만들어? 황금 같은 기회를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날려야 한다니. 윤태식이도 진짜 너무하네. 그거 가지고 분량을 싹 빼는 게 말이 되는 일···”

“으으! 쫌! 나 아직 말 하나도 안 했거든? 회장님이 나 자르거나 하는 얘기 안 했단 말이야.”

“그래? 휴우. 다행이다. 네가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까 내가 그런 거잖아. 그럼 뭐라고 하셨어? 우리 회장님께서?”

“좀 전에는 친구처럼 부르더니?”

“내가? 언제?”

“매니저 오빠는 잘 못 태어난 게 틀림없어. 어쩜 남자가 그렇게 말이 많아?”

“요즘 같은 세상에 그런 차별적인 이야기를 하면 못써. 방송에서 그러면 또 여기저기서 와글와글 물어뜯으려 할 거야.”

“네~ 네~ 조심할게요~”

“네~ 네~ 조심하세요~”

익살스럽게 발뺌하는 매니저의 모습에 상념에 잠겼던 임옥빈의 정신이 온전히 돌아왔다. 뒤이어 그녀는 궁금해하는 매니저에게 물어보았다.

“오빠. 여배우한테 100억쯤 주면서 ‘앞으로 무슨 영화에 출연할지는 내가 정한다.’라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윤태식 이 개 같은 녀석이 무슨 지금이 쌍팔년도인 줄 알아? 뭐래? 누드? 벗으래? 어디 배우 커리어를 망치려고! 이 새끼가 돈 좀 벌었다고 여배우를 떡 주무르듯이 하려나 본데 어림도 없지. 옥빈아. 내가 준 녹음기는 잘 켰···”

“쫌! 나 아직 말 안 끝나거든? 그리고 나 아니야!”

“그래? 아님 말고.”

장난치다가 순식간에 분기탱천했던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휘파람을 불었다. 그 모습에 ‘저 오빠는 분명히 정신병 있는 게 틀림없어.’라고 생각하던 임옥빈에게 매니저가 물었다.

“너 아니면, 김해수 씨겠네.”

“그걸 어떻게 알았··· 에잇. 나 그런 말 한 적 없어.”

“응. 나도 그런 얘기 들은 적 없어~”

“어휴! 짜증 나.”

“괜찮아. 내가 짜증 다 들어줄게.”

“그게 더 짜증 난다고!”

“응~ 응~”

왁왁! 소리 지르는 대화가 잠시 오갔다. 그리고 임옥빈이 힘이 빠져서 본의 아니게 후련해진 나머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맞아. 오빠 같은 그런 반응이 나와야 정상인데 선배는 왜 달랐을까?”

“뭔데?”

“오프더 레코드···라고 하기엔, 일부러 터트린다고 했으니까 그냥 얘기할게. 김해수 선배 엄마가 선배 이름으로 빚을 엄청 졌대. 그래서 기사에 실릴 가능성이 있으니 회장님이 돈 빌려줘서 해결해주고 먼저 밝혀서 앞으로 그런 일이 없도록 했거든.”

“우후~ 그리고?”

“돈 빌려주는 대신 갚을 때까지 작품에 출연하라고 하셨어.”

“어떤 작품? 넷플렉스 작품?”

“그건 모르겠는데, 회장님이 만드는 작품은 맞는 것 같아. 무슨 시리즈랬거든.”

“완전 초대박이네. 아깝다. 너도 왕창 빚 좀 졌으면 좋았을 텐데.”

“응?”

운전하며 그가 혀를 내둘렀다. 궁금해하는 그녀에게 매니저는 간단히 대답해주었다.

“윤 회장 별명이 뭔 줄 알지?”

“응. 외계인, 투자의 신, 미다스의 손, 영화계의··· 아!”

가만히 손가락을 꼽아가며 말하던 그녀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매니저는 전방주시를 잘 지키며 운전하는 채로 말했다.

“실패하지 않고 성공만 하는 제작자. 노는 물도 한국이 아니라 세계라서 할리우드를 끌어안고 왔지. 돈이 너무 많아서 남들 돈은 아예 필요도 없이 혼자 다 먹는 황금의 손이야. 울버렌의 배역 따려고 오디션 보고했잖아.

“그런데 선배는 무조건 맡아 놓은 거네?”

“맞아. 사실 기획사나 배우가 아무리 신중하게 골라도 작품이 성공할지, 괜찮은 커리어가 될지는 운에 맡길 수밖에 없어. 노력해서 최대한 성공하도록 가능성을 높이는 게 전부지.”

듣고 보니 너무나도 맞는 이야기였다.

대단한 건 김해수였다. 회장실이 주는 위압감과 부정적인 여론을 만든 자신들이 을의 처지라서 시야가 좁아졌던 건 자신뿐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경험이라는 게 진짜 큰 건가 봐.’

후배로서는 아직 부족한 선배의 연륜이다.

“아마 윤태식 회장한테 잠깐이라도 원포인트 투자 조언을 받을 수만 있다면 몇억이 아깝지 않은 사람이 많을 거야. 지금만 해도 봐. 어느 투자자가 이렇게 나서겠어? 오히려 문제 되는 배우를 더 쪼이면 쪼이지.”

“맞아. ‘될 작품에 투자하는 게 아니라 무조건 되는 작품으로 만드는 사람’이라고 한참 얘기했었는데··· 그걸 까먹었었어. 으으··· 선배가 갑자기 엄청 부러워졌어!”

울버렌을 촬영하며 크게 느낀 부분이다.

손해 본 게 없는데, 괜히 손해를 본 기분이 들었다.

“또 모르지. 겉으로는 이미지가 엄청 좋아서 영화계의 신이라고 불리는 윤태식 회장이 알고 보면 은밀한 취미를 가졌을지도. 그래서 빚 갚아주고 배우 이미지 개선시켜 주고 출연도 시켜주고 다른 문제들도 해결해주고 그러면서 사악하게 웃고 있을 지도?”

“방금 얘기한 거 어디가 사악한 건데?”

“그야 아무도 모르지.”

“확실한 건, 똑같이 들어가서 누구는 고민만 해결하고, 누구는 엄청 이득보고 나온 기분이라는 거야.”

“우리 배우님은 감사를 모르는구나.”

“그러지 말고 내 편 들어줘.”

“파이팅! 스트레스받지 말고 푹 쉬어. 남은 건 여론이 바뀌기 전까지 괜히 댓글 보면서 속상해하는 게 아니니까. 너도 잘 알잖아. 욕하는 애들은 끝도 없이 욕만 하는 거. 이유 없는 비난을 신경 쓰면?”

“지는 거.”

“그래. 믿고 기다려보자.”

“알았어.”

약을 올리는 건지 위로인지 구분 못 할 대화를 나누며 그녀는 집에 돌아갔다. 인터넷을 수시로 확인하며 어떻게 동향이 바뀌어 가는지 조심히 지켜보는 것은 전과 같았다. 하지만 대책 없음에 마음이 답답하거나 무겁지는 않았다.

< 게임으로 > 끝

ⓒ (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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