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556화 (556/577)

< 게임으로 >

‘또 전화. 질리지도 않네.’

벨 소리가 지겨워서 진동으로 바꿔버렸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나 보다. 귀가 따갑도록 울리는 소리도 짜증 났지만 살아 움직이는 벌레처럼 연신 덜덜 떨며 자리를 이동하는 꼴도 그 못지않게 보기 싫었다.

차라리 꺼버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서원은 휴대폰의 배터리를 뽑기 위해 소파에서 일어났다. 뒤이어 짜증스레 배터리를 분리하려다가 멈칫했다.

“이건 받아야지.”

울버렌을 통해 지금은 같은 배를 타고 있다고 봐도 좋은 처지다. 또한, 김해수라면 연예계에서도 자기관리로 유명한 배우였다. 그녀라면 해결책을 갖고 있을 게 분명하다. 아니더라도 무작정 비난하고 대책 없이 위로해주려는 지인들보다도 훨씬 자신을 이해해줄 게 틀림없었다.

재빨리 통화버튼을 눌렀다.

- 여보세요?

“네. 해수 선배.”

- 좀 괜찮아?

“물론이죠! 걱정하실 정도는 아니에요.”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괜찮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그들은 얼굴을 보고 있지 않음에도 마음이 통했는지 목소리만 밝을 뿐,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김해수는 어설픈 위로 대신 바로 본론을 꺼냈다.

- 이번 일. 뭔가 이상해.

“이상하다니요?”

- 너 요즘 인터넷 안 보고 있지?

“상황이 이러니까. 무서워서 못 보고 있어요.”

- 그래. 비난하려고 작정한 사람들의 반응을 굳이 읽을 필요는 없어. 잘했어. 그런데 이번 일은 자연스럽지가 않아. 마치 큰 이슈를 덮으려고 연예계 소식을 끌어다 쓰는 것처럼 동시다발적으로 나오고 있거든. 너뿐만이 아니라 옥빈이도 난리가 났어.

“옥빈이도요? 걔는 무슨 일인데요?”

- 그거 있잖아. 예전에 할인 카드 쓰는 남자는 쩨쩨해 보인다고 했던 거.

강서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화를 냈다.

“정말 사소한 거고 그나마도 오해가 있었던 거잖아요. 무조건 할인 카드를 쓰면 쩨쩨해 보이는 게 아니라 소개팅 자리에서 할인 카드를 사용하는 걸 두고 한 말이었고요.”

- 그래. 하지만 중요한 건 전부가 아니잖니. 전체 맥락이 아닌 자극적인 일부분이고 우리는 그런 사례에 특히 잘 노출되는 직업이야.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는 부정할 수 없고.

“다들 만만한 게 연예인이죠. 이럴 거면 아예 입을 다물고 평생 말하지 않아야 하는 거랑 뭐가 다를까요?”

-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고작 그런 멘트 하나로 임옥빈은 자숙을 위한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차로 사람을 치고도 버젓이 활동하는 사람들도 있는 데다가 마약···”

- 서원아. 너 흥분했어.

언성이 높아지려던 그의 입을 해수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가라앉혔다.

“죄송해요.”

- 괜찮아. 네 상황을 나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니까.

“어쨌든 저 때문에 많은 분이 피해를 보게 됐어요. 선배는 제가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으세요? 성명이라도 내야 할까요?”

- 기다려봐. 문제는 지금 불거진 소란들이 뚜렷하게 의도를 가지고 퍼지는 조짐이 있다는 거야. 단순히 안티를 통해서 양산된다기보다는 조직적으로 확산되고 있고 시의적절하게 언론에서 지나치게 포커스를 맞춰줘. 단순히 받아쓰는 수준이 아니야.

연예인인 만큼 아는 기자들도 많다. 기획사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녀가 백방으로 알아보아도 기자들 개개인이 대답하는 태도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르다고 했다. 흘리듯 하는 말에도 ‘이건 우리가 낄 수 있는 게 아니다.’라는 식의 메시지만 있었다.

중범죄가 아닌 흠결을 확대하여 무언가에 큰 타격을 입히려는 도구.

딱 그 의도로 자신들이 이용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제가 뭘 한다고 해결될 게 아니게 되는데······.”

- 우선 대응하지 말고 잠깐 기다려봐. 내가 연락 부탁드린다고 메시지를 보냈거든. 생각이 맞다면 조만간 답장이 올 거야. 대응은 그때 해도 늦지 않아.

“부탁드려요? 누구···”

되물으려던 그의 휴대폰으로 문자가 도착했다.

동시에 받은 듯 김해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 왔어.

“윤 회장님이 보내신 건데, 선배가 말씀하신 부탁드린 분이 이분이셨어요?”

- 맞아.

비로소 돌아가는 모양새를 읽은 그가 긴장을 조금 풀었다.

“문제가 생겼으니 우리 촬영분을 다 없앤다고 부르시는 건 아니겠죠.”

- 누가 아니? 기부도 한 번에 1,000억씩 하는 사람인데 아니다 싶으면 영화 하나 다시 찍자고 할지?

“그러면 그건 그거대로 쇼킹하겠어요. 아무튼, 바로 이동할게요. 조금 있다가 봬요.”

- 응.

불안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두 사람은 판교의 GF 본사 사옥으로 향했다. 이동하는 중에 연락 온 임옥빈의 초조함을 풀어주며 ‘우리도 가는 중이야.’라는 답을 해주는 헤프닝도 있었다.

판교에 새로이 만들어진 GF 사옥은 국내 최대 기업답게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를 뽐내고 있었다. 다만, 눈이 휘둥그레져서 여기저기 둘러보고 감탄하지는 않았다.

다양한 촬영 활동을 통해 어지간히 큰 회사나 별장 등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곳을 경험한 적이 많기 때문이다. 다만,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일반인들과 다른 지점에서 내심 놀라기는 했다.

“서울 인근에 이 정도의 규모로 들어오다니. 대단하네요.”

“한국에서 가장 큰 부지는 아니지만, 여긴 수도권이니까. 게다가 분위기 봤니? 정말 자유로워. 꼭 한국 기업이 아닌 것 같아.”

“다들 꿈의 직장이라고 할 때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순위라잖아요.”

훌륭하게 잘 갖춰진 복지 시설들을 보며 마주치는 이들에게 눈인사할 무렵이었다.

“서원 선배! 해수 선배!”

“왔니?”

“고생 많았지?”

“서원 선배보다는 조금이죠.”

“윽! 아픈 데를 찌르다니.”

일부러 과장된 표정을 지은 그들이 잠시 후 숨을 골랐다. 회장실의 문 앞에서 서로 쳐다보던 시선은 김해수를 향했고 슬쩍 둘이 뒤에 붙었다.

장소가 달라서일까.

촬영장에서 보던 넉넉한 웃음의 윤태식 회장과는 다른 분위기의 그가 저편에 앉아 있었다. 불쾌한 게 있었는지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는데 그것만으로도 에어컨을 켠 듯 서늘했고 솜털이 쭈뼛하게 설 만큼 날 선 긴장감이 느껴졌다.

“내가 만만하게 보이나 본데.”

신문을 툭 내려놓은 그의 말에 강서원이 눈을 질끈 감았다.

‘해수 선배. 도와주는 게 아니라 이건 우리 혼내려고 부른 거잖아요!’

티 나지 않게 째려보는 그의 시선은 김해수의 목덜미에 조심히 얹혔다.

*

- 회장님. 울버렌 배우분들이 도착했습니다.

“들어오시라 하세요.”

- 네.

답하고는 신문 쪼가리를 보았는데, 참으로 가관이다 싶었다. 악의적으로 비열하게 느껴지고 해석될 소지가 다분한 사진을 골라서 떡하니 실어 놓았던 것이다. 이런 걸 보면 카메라에 노출된 삶을 사는 이들도 여간 피곤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거듭 들었다.

‘그런데도 유명해지려고 연습생이 되거나 오디션 보는 사람들을 보면, 참 나랑은 다른 사람들이구나 싶다니까. 인기 얻는 대신 사생활이 없는 저 삶이 그토록 좋아 보일까?’

아무튼, 나한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다.

“내가 만만하게 보이나 본데.”

툭하면 공격해대는 언론사들.

마음에 안 든다.

그즈음, 세 명의 배우들이 들어오다가 모두 걸음을 멈췄다.

내 방에 처음 들어오는 이들에게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들이다.

‘속된 말로, 돈을 쳐발랐거든.’

이런 데 돈을 왜 쓰냐며 뭐라 했었지만, 막상 완성하고 난 회장실의 인테리어를 보고 나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흡사 웅장한 음악을 듣고 우리 집 고양이를 보면 ‘크와앙!’하고 울부짖는 호랑이처럼 잠시 착각하게 되듯, 으리으리한 회장실의 인테리어는 나를 어마어마한 흑막 속 주인공으로 느끼게 해준다.

물론, 이런 경험은 처음 몇 번이 고작이다. 김유천 비서실장이나 나처럼 익숙해지면 다른 사람들 표정을 보고 즐기는 효과가 전부이게 된다.

“반갑습니다. 다들 자리에 앉아서 이야기하지요.”

“네!”

얼떨떨한 표정으로 긴장한 채, 사무실의 소파 옆쪽으로 자리를 잡는 세 사람에게 인사차 말했다.

“요즘 이슈가 꽤 많이 되고 있더군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임옥빈과 강서원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영화 속에서는 대단한 액션을 자랑하는 히어로지만, 현실의 그는 생각보다 강건한 성격이 아닌 듯했다. 당장 떠들썩하게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당사자들이기도 하고 말이다.

“사과를 받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선 긴장을 풀 겸 커피라도 마시면서 이야기합시다.”

원두부터 커피 머신기기에 대해서까지, 읊어보자면 온갖 비싸고 끝내주게 좋다는 이야기를 풀어 쓸 수 있는 커피가 잔에 나왔다. 단어 하나로는 ‘맛있다.’로 요약되는 따뜻한 커피가 몸을 데우자 배우들은 조금 긴장감이 완화되는 모양이다.

“대뜸 죄송하다는 말이 나오는 거로 봐서는 김해수 배우를 제외하면 왜 여러분을 불렀는지 아직 모르시는 것 같군요.”

“그게···”

“저희의 과거 때문에 영화에 좋지 않은···”

반성문 쓰러 교무실에 온 학생처럼 주저주저하는 그들에게 내가 말했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이번 이슈에 대해 알아보니 여러분이 죄송해할 일도 아니더군요. 우리 작품에 출연했기 때문에 더 불을 켜고 언론 플레이가 시작된 거니 제가 책임져야 할 부분도 있는 셈입니다.”

냉정하게 보면 지금의 내 말은 틀렸다. GF와는 상관없이 연예인들 당사자가 벌인 일이 원래보다 빨리 터졌을 뿐이고 책임은 저들에게 있는 게 맞다. 그러나 여기서 ‘그래. 네 죄가 맞다. 그러게 좀 조신하고 겸손하게 하지 그랬냐?’라고 책임소재를 따져 무엇 하겠는가.

이렇게 말이라도 해서 편하게 대화하는 게 낫다.

“제가 만든 영화가 공격당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야 없지요. 그룹 차원에서 대응할 것이고 여러분에게도 지원하겠습니다. 가짜뉴스를 양산하고 악의로 비난하는 이들은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

단순히 연예인들이 예쁘고 마음에 들어서 도우려는 게 아니다.

X팀의 판권을 회수하기 위해서는 영화들이 전부 성공해야만 한다. 그만한 수익을 그들에게 가져다주어야. 판권을 돌려받을 수 있다. 미국과 중국 두 나라의 기대치가 나머지 국가들을 다 합친 것보다 크지만, 그렇다고 한국이라는 시장을 무시하기엔 이곳도 작은 시장은 아니다.

‘여기에 내 자존심도 얹어야지. 사람들이 영 현실감각이 없어. 말로는 글로벌한 기업이고 세계적인 갑부라고 하는데 정작 이런 꼬락서니를 보면 만만하게만 보는 것 같더라고. 아닌 말로 오성 같은 기업이었으면 언론사들이 이렇게 함부로 물어뜯었겠어?’

어이가 없어서 웃길 지경이다.

누구 코털을 건드렸는지 확실하게 보여주겠다.

“하지만 강경 대응은 저의 몫일 뿐, 여러분은 각기 입장 성명을 해주셔야 합니다. 우선은 강서원 배우의 친일파 논란부터 방침을 세워보지요.”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첫째, 울버렌에서 강서원 배우의 역할은 친일로 시작하는 역할입니다. 영화 진행상 나중에 돌아서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당신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어필하십시오. 둘째, 언론사에 연좌제의 부당함을 공론화하며, 셋째. 외가 핏줄을 무기로 사용합시다.”

“무기요?”

“강서원 배우의 외가 핏줄에는 독립운동가가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애초에 외증조부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이유가 외할머니의 가문이 독립운동가 가문이었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맞아요. 그렇죠. 그래서 외할머니가 말씀하시는 것들을 그대로 다 믿었던 거였습니다.”

“그걸 최대한 활용할 겁니다.”

남들이 볼 때는 단시간에 대응법을 찾아낸 것처럼 보일 테지만, 사실은 이들을 배우로 섭외하면서부터 염두 했던 부분이었다. 확신을 갖고 밀어붙일 수 있는 이유 역시, 본래의 미래에서 이들 이슈가 어던 방식으로 진화되었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한테는 너무나도 크게만 느껴지는 사건이겠지만, 남의 눈으로는 아니거든.’

다음은 임옥빈의 차례.

“임옥빈 배우는 부화뇌동하지 않으시면 됩니다. 개인적으로 당부드리자면, 앞으로 남녀 프레임이 씌워질 만한 실수에 유의하시는 게 좋겠군요..”

“앞으로요? 저는 그럼 그냥 있나요?”

“포인트 발언 이슈는 의도적으로 한쪽을 부각해서 문제가 되었을 뿐, 상식적으로는 문제 될 일이 아닙니다. 가만히 있으세요. 저희 쪽에서 비호하는 글을 꾸준히 올려 대중에게 상황 전체를 인지하도록 만들겠습니다.”

처음 그녀의 문제가 터졌을 때야 된장녀니 뭐니 하면서 관련된 내용이 사회적으로 큰 이슈를 끌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매장이 된 거다.

“완벽하게는 불가능하지만, 상쇄는 될 겁니다. 때를 봐서 그즈음에 ‘당시에 발언들이 과연 매장이 되어야 할 정도였던가?’라는 논제를 부상시키면 오히려 동정론이 일어날 수 있어요.”

“감사합니다.”

“즉, 상쇄는 확실하고 이미지 개선은 높은 확률로 가능합니다. 오래지 않아 해결하겠노라고 약속하지요.”

“정말이지··· 정말로 감사합니다.”

카메라 앞에서 언제든지 사인만 보내면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게 배우이기 때문일까. 감수성이 풍부해서인지 물에 젖은 목소리를 삼키며 내게 말했다.

말로 내가 뭐라 더 하겠는가.

다음 대상을 볼 따름이다.

“김해수 배우는 아직 안 터졌지요?”

“알고 계셨나요?”

“물론입니다.”

“그럼, 안 터지게 막을 수 있는 걸까요?”

“가능합니다.”

단호한 나의 대답에 김해수의 한숨이 바닥을 꺼트릴 지경이 된다. 이슈가 되지 않은 만큼 후배 배우들은 아직 모르는 대화다. 그러나 호기심 어린 시선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는지 김해수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고민했다.

가족과 관련된 일이고 빚에 대한 스캔들이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보면 저리 고민하는 게 어리석은 일일 뿐이지.’

나는 갈팡질팡하는 그녀에게 말했다.

“정정해서 말하지요. 이번에는 가능합니다. 하지만 다음에도 가능할까요?”

< 게임으로 > 끝

ⓒ (554)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