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임으로 >
그뿐이랴.
그냥 이동하다가 마주쳤을 뿐인데 매질을 당해서 문자 그대로 병신이 되어 이동불가가 되었다. 컨트롤로 대항하려고 하면 ‘제법 싸울 줄 아는 조센징이로군!’이라며 강제로 전쟁터로 끌려간다.
다 포기하고 농부로 플레이할 때는 집 밖에 나가지 않은 채로 생산만 하며 집 주변을 탐색하려고 해봤다. 그런데 집안의 식기와 농기구 등의 모든 쇠붙이를 다 빼앗아 가는게 아닌가! 파종할 씨앗까지 싹 수거하고 말이다.
결국, 굶어 죽고 말았다.
[순사 이 개 같은 놈들아!]
뭐라도 할라 치면 온갖 방법으로 모멸감을 주니 게이머인 크리스조차 분통이 터졌다.
이번에는 남산이라는 어디 들어본 적도 없는 장소에서 신전을 세우는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잠깐 보물을 찾아보겠다고 자리를 이탈하자마자 어떻게 알았는지 순사가 바로 잡으러 왔다. ‘근무지 이탈은 총살이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말이다.
[으아아아!]
1시간이라는 시간은 참 묘하다.
30분 이내에 죽게 되면 그냥 짜증만 나고 다시하자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1시간은 어딘지 모르게 캐릭터에 애정이 생긴다. 그리고 그렇게 애정이 생긴 캐릭터가 죽을 때마다 분노와 상실감은 훨씬 더 많이 커진다.
이럴 때마다 구매 첫날의 플레이를 떠올리게 된다.
[처음에 깼어야 했어. “선비”라는 직업이 이렇게까지 희귀할 줄 누가 알았겠냐고.]
크리스는 인터넷의 여러 불평불만들을 보며 자신의 경솔함을 반성했다. 초심자의 행운이라는 말이 딱 맞을 만큼 조선의 트레져헌터에서 선비라는 직업은 유니크한 직종이었다.
지금은 많이 해봐서 잘 안다. 클래스 중에서 하인을 부릴 수 있고 우물물을 떠오는 대신에 남이 떠다놓은 우물물로 씻기만 하면 되는 직종은 선비를 제외하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갓이라는 모자를 아무나 쓸 수 있는 게 아니더라. 왠지 되게 멋있었는데.’
BGM도 처음 듣는 동양풍의 고급스러움이고 스타트할 때의 권장 선행 퀘스트로는 「몸과 의복이 단정한지 점검하세요」, 「부모님의 안부를 여쭙고 조상신의 사당에 방문하세요」와 같은 것들이 있었다. 물론, 크리스는 이 퀘스트를 무시한 채 티켓을 찾고자 집을 수색했었다.
게임의 목적이 해외여행 티켓이기도 했거니와 다른 건 몰라도 독실한 크리스천인 그에게 조상을 신으로 여기면서 절을 하라는 건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래서 상호작용하는 오브젝트들을 샅샅이 눌렀고 ‘청자운학문매병’이라는 도자기를 깨드렸다.
본래 게이머라는 게 그렇다. 제작자가 치밀하고 세세하게 설정하더라도 중요한 건 이 아이템이 쓸모 있느냐, 없느냐일 뿐이다. 제법 예뻐 보이는 도자기에는 「청자운학문매병 : 높이 41. 고려식 매병으로 태토받침의 흔적이···」라는 식의 설명이 있었으나 크리스는 마지막만 보았다.
「무늬와 내부를 살펴볼까? (Y/N)」
[당연히 봐야지.]
「매병 안쪽에서 기묘한 글씨가 보이지만 명확하지 않는다.」
「1. 안을 비춰볼 도구를 찾아보자.」
「2. 깨뜨려서 확인해보자.」
만약 시간이 넉넉했고 여행 티켓이 선착순만 아니었다면 크리스는 꼼꼼하고 느긋하게 찾아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쉬운 방식으로 발견할 수 있다면 그때부터는 시간 싸움이 된다.
느긋하게 여유부릴 수 없으니 대충 방 내부만 돌아보고는 상호작용하는 물건이 없자 그냥 깨뜨려 버렸다. 그리고 깨진 도자기 속 넘버링을 통해 ‘다른 세계로부터의 초대장(1/3)’을 획득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게 끝이었다는 거지. 도대체 내가 왜 그랬을까? 조금만 더 신중할 걸!]
생각할수록 이불을 발로 펑펑 차고 싶을 만큼 짜증났다. 쾌재를 부르며 바깥으로 나온 크리스는 문 밖에서 「!」를 머리 위에 띄운 채 「마님! 도련님께서 가보를 깨뜨리셨습니다!」라고 하는 하인을 보았다. 뒤이어 화면 저편에서 「이놈!」하는 고함이 울렸다.
크리스의 캐릭터가 화들짝 놀라서 쏜살같이 집 바깥으로 도망가는 이벤트와 함께 말이다. 그 탓에 동양풍의 넓은 저택 이곳저곳을 뒤져보지 못한 채 선비 캐릭터는 바깥을 헤매며 NPC들에게 단서를 묻고 아이템을 열심히 찾았다.
그리고 순사를 만나서 죽고 말았다.
양반이면서 천한 것들과 무슨 작당모의를 하느냐는 이유였다.
‘처음이라서 조선의 신분제가 엄청 빡빡한 줄 알았었지. 그런데 그게 아니었었어. 망할 새끼들! 두고 보자. 이번에는 기필코 내가 깨고 만다!’
정신을 퍼뜩 차린 크리스는 텅텅 빈 소지품 창의 티켓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하늘에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부디 축복해주시어 이 어린양에게 만나와도 같은 양식을 베풀어주소서.]
게임 패드를 손에 쥐고 경건하게 기도를 올렸다.
[제발 하나님··· 이번에는··· 씨발! 아! 하나님한테 욕한 거 아닙니다. 그냥 상황이 병신 같아서 그런 거예요. 저한테 욕하는 겁니다.]
캐릭터가 만들어지자마자 그는 좌절했다. 지금까지 경험해봤던 직종 중 최악인 바로 그 직업이 걸린 것이다.
[복 좀 내려주시지. 아오! 이 캐릭터는 답이 없단 말이야.]
비렁뱅이.
이 직업은 최악이다. 경성이라는 도시를 어디든 돌아다닐 수 있고 NPC들도 순순히 대답해줬던 선비와는 달리 이 캐릭터는 혐오의 대상이다. 뒤질 곳은 길거리일 뿐, 상가에 들어가려고 하면 「냄새나는 거지새끼가 어디를 감히!」라면서 내쫓겼다.
당연히 아이템을 찾는 방법은 ‘비렁뱅이의 상황별 구걸 스킬 10가지’ 중 적선해줄 것 같은 NPC에게 딱 맞는 문구를 고르는 것뿐이었다.
구걸에 성공 못하면?
죽는다. 배고픔 게이지가 바닥남과 동시에 풀썩 쓰러지는데, 바로 그것을 본 순사가 미관을 해친다며 끌고 가서 처분해버린다.
귀엽게 아이콘화 된 가축들의 먹이통에 누더기 한 조각이 보이는 것이다. 처음에는 게임의 장르가 코믹호러 쪽인가 오해했지만 이제는 개의치 않았다. 대신 각양각색의 죽음들을 수집하며 머리를 벅벅 긁을 뿐이었다.
‘어쩌니 저쩌니 해도 GF네. 이벤트 게임 주제에 뭔 완성도가 이리 높아?’
비렁뱅이에게도 한 가지의 비밀수법이 있기는 했다. ‘훔치기’라는 선택지가 굶주림 상태에 들면 생기기 때문이다. 이때는 모든 NPC의 주머니를 털 수 있는 기능이 생기고 사용 시 리듬 게임으로 바뀐다.
타깃을 정하면 행인의 걸음걸이와 옷차림에 따라 음악이 나온다. 메트로놈처럼 좌우로 똑딱이는 바늘도 함께인데 박자에 맞춰 클릭하면 소맷단이 풀리고 주머니가 살금살금 떨어져서 비렁뱅이가 확 낚아채는 방식이었다.
굶주림 상태가 오래지 않아 아사(餓死)로 바뀌는 바람에 소매치기의 활성화시간은 길지 않다. 그러나 과감하고 신속하게만 행동한다면 정상적으로는 대답조차 해주지 않던 NPC의 아이템을 고스란히 빼앗을 수 있는 특별한 단계였다.
문제는 이때도 짜증나는 존재가 방해한다는 것이다.
「이 조센징이 하는 꼴 좀 보라고.」
순사다.
「감히 황국신민의 재산에 손을 데다니.」
「해만 끼치는 그 손은 없애주는 게 좋겠지?」
걸리면 순사에게 잡혀가며 엔딩이 난다. 말만 손을 자르네 어쩌네 할 뿐, 고문 받다가 죽는다. 이래저래 죽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캐릭터인 것이다.
‘버티면서 구걸만 하다보면 운 좋게 깡통으로 티켓을 적선해준다고도 하던데. 그거 믿고 기다리던 사람들이 다 손해만 봤다고 하니까, 차라리 빨리 죽고 다시 하자. 아니면 한 방에 대 역전극을 노리고.’
부유한 여느 NPC와는 차원이 다른 상대.
순사라면 귀중품을 가지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크리스는 일단 빠르게 일본인 순사를 찾아서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하는 일 없이 행동만 하고 있으니 자연스레 굶주림 단계에 접어들었다. ‘꼬르륵’과 ‘꿀꺽’하는 침 삼키는 사운드를 듣고 순사의 뒤에 바짝 붙었다.
5분간 지켜본 바로 이 NPC의 이동 경로는 왼쪽 길, 오른쪽 골목, 정면의 대로를 돌다가 다시 같은 길로 순찰하는 게 전부였다. 그러니 리듬게임의 박자만 잘 맞추면 되리라 생각했다.
「조센징 새끼가 감히 내 주머니를 노려?」
[뭐야. 타깃이 되면 새 패턴이 나오는 거였어?]
이동경로가 바뀌었다. 순식간에 손목을 잡아챈 순사의 얼굴이 와락 구겨지며 악마처럼 변했다.
소매치기의 대상이 순사여서일까?
게임의 속도가 매우 느려지더니 선택 메시지가 나왔다.
「1. 엎드려서 절하고 절박하게 용서를 빌자.」
「2. 재빨리 정강이를 차고 이놈의 주머니를 털자!」
「3. 얼굴에 침을 뱉어서 당황시키고 얼른 도망치자.」
시간제한이 있었다. 7초부터 카운트였다.
크리스는 어차피 쪽박, 아니면 대박을 노리기로 했었으니 이 보기 중 2번을 선택했다.
퍽!
「으억!」
잽싸게 비렁뱅이 캐릭터가 걷어찼다. 순사가 크게 놀라 비명을 지르는 사이 주머니 속에 들어간 캐릭터는 잡아 뜯듯이 무언가를 가져왔다.
「순사의 주머니에서 금 떨잠과 떨잠을 감싼 천을 발견했다.」
「1. 떨잠의 장식물을 살펴보자.」
「2. 천을 풀어 기묘한 숫자들을 살펴보자.」
「3. 그럴 시간이 없다. 우선 도망쳐!」
마지막 3번을 확인했을 무렵의 카운트는 단 2초!
[너무 빠르잖아!]
숫자라 했으니 2번을 눌러야 티켓조각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도망치고 나서 봐도 된다. 그러니 3번을 누르는 게 맞는데, 서두르다보면 실수가 나오기 마련 아니겠는가. 크리스의 손가락이 미끄러졌고 그가 선택한 번호는 1번이었다.
[으아악! 악? 어라?」
떨잠의 선명한 이미지와 함께 ‘조선시대 부인들이 큰머리나 어여머리의 앞 중심과 양옆에 꽂았던 머리장식품···’이라는 알고 싶지도 않았고 별반 필요도 없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리고 크리스의 비명이 의아함으로 바뀌게 만드는 아이템도 나왔다.
「‘우아한 금 떨잠’을 챙겼다! 팔면 배를 채울 수 있겠어!」
「이건 뭐지? ‘다른 세계로부터의 초대장(1/3)’이라니. 이건 불쏘시개로나 써야겠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누가 봐도 2번이었는데, 그 숫자가 오히려 함정이었던 거구나!]
티켓 2개를 획득했다. 이제 남은 건 달랑 한 개이니 이번 플레이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하지만 기쁨과 놀라움에 취해서 멀뚱하게 있던 비렁뱅이 캐릭터는 분노한 순사에게 칼을 맞고 말았다.
「아가리를 찢어버릴 새끼! 쓰레기라는 말이 칭찬일 조센징!」
순사는 망나니처럼 칼을 뽑지 않은 채로 몽둥이처럼 휘둘렀다. 타격음과 함께 화면이 흔들렸다.
「이대로 죽일 수는 없지. 너 같은 쓰레기에게 가장 어울리는 죽음을 맛보여주마.」
휘두른 검에 맞아 비렁뱅이가 기절했다. 눈을 떴다가 감는 장면을 연출했는지 시야가 컷, 컷 바뀌며 어디론가 끌려가는 장면이 보였다.
어디인지는 몰랐지만, 크리스는 예상할 수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고문 받아서 죽는 형무소일게 분명하다. 그런데 다음으로 나오는 화면이 이제까지와는 달랐다.
가운데의 붉은 점을 중심으로 집중선이 쫙쫙 퍼져나가는 깃발.
욱일기가 높이 걸린 건물에는 「731부대」라고 써 있었다.
분명히 일본인 순사에게 잡혀왔는데 이곳은 군대다.
‘전쟁하라나 보네.]
이미 몇 번 전쟁터에 끌려가서 죽는 엔딩을 봤으니 이번에도 그런 줄만 알았다. 하지만 아까까지와는 달랐던 화면전환만큼 이제부터 나오는 건 지금까지 보지 못한 것이었다.
[마루타? 인체 실험? 저쪽에는 임산부를··· 오오! 맙소사. 이 미친놈들이 뭐하는 거야?]
전쟁터의 총알받이가 나으리라 여겨질 정도의 장소에서 아기의 울음소리와 여인들의 흐느낌이 들렸다.
비렁뱅이의 처지도 저들과 같았다. 처참한 생체 실험을 시작했다. 유혈이 낭자한 부분들은 모자이크 처리가 됐지만 그 화면조차 뚫고 나오는 잔인함에 등골이 서늘할 지경이다. 이윽고 배드 엔딩의 화면으로는 인간의 형태를 잃어버린 캐릭터가 나와 있었다.
『지금까지 33번의 사망을 경험하셨습니다.』
『지금까지의 스토리를 확인하시면 보물에 대한 확실한 단서 한 가지가 제공됩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Y/N)』
본 적 없는 메시지.
딱 하나만 더 찾으면 목표를 달성하는 크리스에게 이는 거부할 수 없는 권유였다. 그는 Y를 눌렀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가 플레이한 캐릭터들간의 이야기가 일제강점기라는 시대를 통해 연결되며 완성된 서사를 보여주었다.
허구가 아닌 실존임을 증명하는 자료와 그나마 거부감이 덜한 사진들.
알 필요도 없고 그럴 이유조차 떠올리지 못한 다른 나라의 역사였다. 그러나 자신이 플레이하며 조금이나마 체험했기에 다가오는 느낌은 여타의 다큐멘터리와는 달랐다.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가장 낮은 곳에 있는 민중들의 삶.
크리스가 어리숙하게 플레이했던 선비의 행동은 자신을 멍청이로 위장한 채로 민의를 살피고 뜻을 모으려다가 죽은 인물과 연결되었고 각종 캐릭터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몇 번이고 죽으면서 반복했던 것은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못하는 누군가의 삶일 수 있는 진실이었다.
「축하드립니다! ‘다른 세계로부터의 초대장’을 획득하셨습니다!」
조각들은 합쳐져서 완성되었다. 크리스는 목표를 달성했고 즐겁게 한국여행을 가서 마음껏 놀고 GF의 테마 파크에서 좋은 추억을 만들고 오면 된다.
[이럴 수가······.]
그런데 왠지 가슴이 먹먹했다.
아마도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산타클로스의 선물 보따리 대신 지옥에서 온 아련한 편지 같은 느낌이 물씬 드는 건, 보물을 찾아내어 완성하지 못하고 731부대의 자료를 보며 티켓을 완성한 이유일 거라고.
그렇게 GF의 이벤트용 게임은 세계의 게이머들의 심정을 발칵 뒤집었다.
혹자는 ‘일본의 실체에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고 어떤 이들은 ‘일본의 명예를 노골적으로 훼손했다!’며 GF를 욕했다. 다른 이는 ‘어느 한쪽의 말을 무조건 믿기보다는 게임 속 자료가 진실인지 확인해보자. GF의 책임은 그 후 묻는게 맞다.’며 관심을 갖고 조사했다.
이렇듯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일본이 어떻게든 숨기고 싶었던 사실들이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게임으로 > 끝
ⓒ (5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