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552화 (552/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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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로서 조연이 되고자 하는 이는 없다. 단지 상황과 현실에 타협하며 자신의 꿈을 깎아낼 뿐이다. 그렇게 체념한 채로 관성적으로 노력하던 임옥빈에게 비로소 반전의 기회가 왔다.

‘꼭 해내고 말겠어.’

이만큼 집중한 적은 정말 드물었다. 그녀는 온 신경을 모아 윤태식 회장이 보여준 액션을 익히고 표현하고자 최선을 다했다.

한때 예능프로그램에 나가서 말실수로 꽤 좋지 않은 이미지가 생겼던 만큼 그녀는 카메라가 비치는 곳에서는 예전보다 훨씬 입조심을 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대놓고 표현하지만 못했을 뿐, 자신이 생각하기에 강서원보다도 액션 연기는 자신이 뛰어나다고 보았다.

실제로 윤태식 회장이 한 번 보여준 동작들을 그녀는 강서원이 터득한 때보다 더욱 빠르게 익혔다. 기억과 대조할 때 전혀 어긋남이 없었고 이는 몇 번을 시험해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촬영은 NG의 반복이었다.

‘왜?’

머릿속의 혼란을 가라앉히고 다시금 집중했다.

그래도 감독은 오케이 사인을 주지 않았다.

[나쁘지는 않습니다. 한 번 더 가지요.]

[아니지. 다시 합시다.]

[그 느낌이 아니라니까!]

[다시!]

[다시 갑시다!]

이상한 일이었다. 대본을 토대로 어떤 영상이 찍힐지 만들어가며 표현하는 게 아니었다. 최고의 교보재라 할 만큼의 액션을 이미 봤으니 그것을 고스란히 재연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그런데 바로 그 장면을 도저히 넘어가지 못했다.

[잠시 휴식!]

결국 촬영을 중단한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저마다 모여 의논했다. 임옥빈 역시 땀으로 흠뻑 젖은 얼굴을 닦으며 미간을 찡그렸다.

“차별 아닐까요? 일종의 길들이기?”

“그럴 리가 없잖아. 게다가 그럴 거였으면 촬영 초반에 했어도 충분하고.”

“하긴, 그 대단하신 회장님이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으시니······.”

편을 슬쩍 들며 위안을 주려던 매니저가 슬그머니 물러섰다. 그녀는 심리적으로 큰 위안을 준 김해수에게 도움을 청하듯 보았지만, 본 제스처는 고개를 젓는 것이었다.

“회장님 액션이랑 상대적으로 차이 나서는 아닌 것 같아.”

“틀린 부분은요?”

“내가 보기에는 없었어. 그런데 느낌이 조금··· 달라.”

“할리우드 액션 영화에서는 흔하지 않은 롱테이크라서 그럴까요?

“롱테이크라고 전부 NG가 나는 건 아니야.”

지금 촬영하는 장면은 연구실에 잠입해서 내부의 경비원들을 암살하듯 제압하는 씬이었다. 구체적인 액션은 1층에 있는 적의 복부를 가격해서 제압한 후, 그의 어깨를 밟고 뛰어서 2층의 높이까지 올라 돌려차기를 하는 것이다.

꽤 고난도의 동작이지만, 임옥빈은 이를 윤태식 회장과 완벽하리만큼 똑같이 재현했다.

“유난히 NG가 나는 장면은 오히려 그다음이었어.”

“단체 전투요?”

함께 휴식 시간 내내 고민했지만, 뾰족한 답변은 나오지 않았다. 쉽기 때문에 오히려 틀린 부분이 없다. 실수가 없으니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운 기이한 상태인 것이다.

“그 부분에 대해 다들 저리 고민하는 거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더 NG가 나면 체력이 따라가지 못할 것 같아요. 기왕이면 빨리 이유를 알았으면 좋겠어요.”

머리를 맞대고 거듭 논의했지만, 지금은 ‘느낌적인 느낌’이라는 모호한 말이 딱 맞는 상태였다. 애석한 건 남자와 여자의 차이라고 넘길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는 모두가 공감한다는 점이었다.

합을 맞추는 액션 배우들과도 결의를 다졌다.

“연기라서 현장감이 떨어진 게 이유일지 몰라요.”

“진짜로 때리세요.”

“맞아도 원망 않겠습니다.”

짜 놓은 동선과 합대로 주고받되 다치는 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촬영 시작합니다!]

그러나 문제 파악이 되지 않은 상태로 부단히 노력만 한다고 달라지는 게 무엇이 있겠는가. 몸을 내던졌고 진짜로 맞아서 멍이 든 부분을 화장으로 가리며 연기했다.

하지만 결과는 같았다.

[여전히 느낌이 안 삽니다. 다시 할게요!]

역시나 4대 1의 다대일 구도 액션이 나오자 NG가 나왔다. 이로써 11번째 NG였다. 그즈음 촬영에 방해되지 않고자 멀찍이서 구경하고 있던 윤태식 회장이 넌지시 끼어들었다.

[감독님. 지금 그 장면들만 다시 확인 좀 해볼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죠. 회장님이 보시고 싶으신데, 누가 막겠습니까?]

다시금 ‘휴식하겠습니다!’라는 외침이 들렸고 저들은 문제가 되는 단체 전투를 돌려보며 확인했다. 이제는 그가 촬영에 개입하려고 들면 은근히 기대하는 이들이 많았다. 소위 말하는 투자자의 쓸데없는 갑질이라고 치부하기에 윤태식 회장은 보여준 능력이 너무나도 출중했다.

저쯤은 되어야 맨손으로 세계적인 그룹을 세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 액션을 만들어낸 인물이어서인지 그는 긁지 못하던 부위를 시원하게 긁어주었다.

[이번 액션의 구도는 할리우드식보다는 홍콩식에 가깝습니다.]

그런 뒤 심각한 고민에 빠지고 다시금 의기소침해진 임옥빈에게 말했다.

“액션이든 뭐든 영화는 할리우드가 최고라고 하지만, 맨손 격투 영화는 홍콩을 빼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특히나 지금 같은 시퀀스는 할리우드가 오히려 홍콩의 시퀀스를 따라가지 못하지요. 저 사람들은 인정하기 싫을 테지만 말입니다.”

그는 누렁소와 검은 소 중에서 누가 일을 잘하냐는 말에 소가 질투할까 작게 대답했다는 농부의 일화처럼, 할리우드 스태프들 쪽을 슬쩍 눈짓하고는 ‘쉿’이라고 덧붙였다. 이후, 언제 그랬냐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이 장면의 배우들을 모아주십시오.]

[네!]

임옥빈을 비롯하여 4명의 액션 배우가 앞에 섰다. 스태프들 역시 귀를 기울인 와중에 그가 말했다.

[여러분들의 액션을 확인해 봤습니다. 몇 번을 돌려봤는데 합이 기계 같더군요. 이 액션을 위해 만들어진 잘 만들어지고 정교하게 움직이는 기계였습니다.]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칭찬이 아닙니다.]

“네?”

[임옥빈 배우님.]

[네.]

[제가 여러분의 액션을 기계와 같다고 하면서 칭찬이 아니라고 했는데, 왜 그런 말을 했다고 생각합니까?]

그녀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알려주시면 꼭 고치겠습니다.]

목숨 걸고라도 반드시 잘 해 보이겠다는 의지가 가득한 대답이었다. 윤태식 회장은 크로 확고한 대답에 한차례 웃고는 대답했다.

[여러분들은 액션 연기를 하지만 보는 사람은 정말로 싸우는 것 같아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합이라는 것이 너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 말에 한 액션 배우가 꽤 억울하다는 듯이 눈에 힘이 들어갔다. 맞는 역할이며 진짜로 때리라고 말했고 실제로도 정말 얻어맞으며 연기했기 때문이다.

윤태식 회장은 방금 전 촬영한 영상을 다시 틀어서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설명은 그들을 비롯한 감독에게도 전해져야 하기에 여전히 영어로 이어졌다.

[먼저 옥빈 씨가 오른쪽을 향해 크게 돌려차기하고, 왼손을 들어서 방어, 빠르게 남은 회전을 다 하면서 정면에서 오는 공격을 방어, 왼쪽 상대 공격까지 방어한 후, 다시 정면의 적을 공격. 끝으로 오른쪽의 상대에게 가격을 당합니다.]

[네.]

[이 부분의 NG는 진짜 싸움이 아니라. 짜고 치는 동작이라는 느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는 바로 이 부분이지요.]

화면 속의 합은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중이었다. 자신들이 거듭 관찰하고 분석했던 부분이니 실수는 여전히 없었다.

[틀린 부분을 찾지 못했습니다.]

[다시 잘 보십시오. 오른쪽의 상대에게 돌려차기를 하고, 왼손을 들어서 방어까지는 그럴 수 있습니다. 돌면서 상대가 보이니까. 문제는 다음부터입니다. 정면에서 오는 공격을 방어하는데 옥빈 씨의 시선은 어디에 있습니까? 다음 동작으로 가 있지요?]

“아!”

액션의 어색함이 나오는 이유.

배우들은 정교하게 잘 짜인 합을 통해 액션을 연기한다. 그렇기에 약속된 동작을 정확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노력한다. 문제는 그러다 보면 상대의 액션과는 전혀 상관없이 그저 액션만을 연기하는 기계와 같은 모습이 탄생한다는 것이었다.

‘회장님 연기를 너무 재현하려고만 해서 기본을 깜빡했었어.’

큰 것에만 집중하다가 오히려 작은 부분을 놓친 경우였다.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라 모두 같은 처지였는데 이건 윤태식 회장의 액션이 특별했고 충격적이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화려함에 현혹된 것이다.

[강서원 배우는 이런 문제는 없었습니다. 이유는  시선처리를 잘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애초에 강서원 배우가 연기한 캐릭터는 특징이 감각에 있었고 굳이 보지 않아도 감각적으로 적을 느낄 수 있는 캐릭터였기 때문입니다.]

아이컨택이 필요 없는 액션이 많았고 전혀 문제되지 않았던 이유다. 반면에 명세은이라는 캐릭터는 그런 능력이 없다. 그래서 강서원에서는 없었던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여기까지의 공통된 설명을 끝으로 윤태식 회장은 한국 배우들에게 부담 갖지 말라는 듯 친근히 말했다.

“여기에 보면 오른쪽의 대상에게는 한 번 가격을 당합니다. 왜 가격을 당할까요?”

“시선을 돌릴 시간이 없어서요.”

“정답입니다. 맞아요. 이전의 동작들을 취한 후 시선을 저기까지 돌릴 여유가 없습니다. 시선을 돌리지 못하니까 적의 공격을 간파하지 못했고 그래서 가격을 당하는 거예요. 맥락 없이 그냥 이쯤에서 공격을 허용하는 순서라는 게 아니지요.”

“여기서 바로 만든 액션인데 거기까지 다 계산을 하신 건가요?”

“오해가 있군요. 심심할 때 이리저리 구상해 둔 액션을 꺼낸 겁니다. 바로 만들 정도는 못 되거든요.”

겸손한 그의 말을 아무도 믿지 않았다.

이제 답을 얻었다.

“해결할 수 있으시겠지요?”

“네!”

자신감 넘치는 배우들의 대답과 함께 촬영이 다시 시작되었고 목소리의 크기만큼 이번에는 감독의 표정과 목소리에 만족스러움이 가득 들어찼다.

문제를 찾으면 해결하기는 아주 쉽다. 동작하기 전에 아이컨택을 하면 되는 것이다.

아이컨택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그럼 그것까지도 연기하면 된다.

연습이 부족했던 만큼 한국 배우들의 액션 연기는 진짜 홍콩 액션 배우들의 퀄리티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부분은 할리우드의 자본력으로 충분히 더 좋은 퀄리티를 뽑아낼 수 있었다.

[좋아요! 다음 씬 들어가죠!]

막힌 부분이 시원하게 뚫렸다. 이후의 촬영은 탄탄대로를 질주하듯이 NG가 그리울 정도로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아직 나는 할리우드에 가려면 부족한가 봐.’

좋은 계기가 된 날이었다.

그녀는 오늘의 촬영을 통해 깊이 반성했다. 임옥빈은 태권도와 합기도 그리고 각종 무술을 섭렵한 꽤 훌륭한 액션 배우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촬영을 계기로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자만하고 있었는지 여실히 느꼈다.

“괜찮아?”

고된 액션의 반복. 혼자서 소나기라도 맞은 것처럼 땀에 흠뻑 젖은 임옥빈에게 김해수가 비타민 드링크 하나를 건네면서 말을 걸어왔다.

“힘들지?”

“그냥 싱숭생숭해서요. 회장님은 엄청 쉽게 하셨는데 저는 왜 이렇게 안 될까요?”

“그건 잘못 생각하는 거라고 봐.”

“잘못이라니요?”

“저분이니까 되었던 거 아닐까?”

“네?”

“내가 봤을 때, 윤태식 회장님은 이 세계 사람이 아니야.”

엉뚱한 말에 그녀는 김해수를 의아한 시선으로 보았다. 김해수는 장난이 아니라 진짜라며 말했다.

“사람이 어떻게 이 모든 걸 다 잘할 수 있겠어? 말이 안 돼. 그리고 그거 알아?”

“뭐요?”

“아까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윤태식 회장님은 태권도 1단 말고 딱히 무술 수련을 하신 적도 없대.”

“진짜요?”

“그나마 그 태권도 1단도 군대에 있을 때, 부대에서 억지로 따게 해서 딴 게 전부라고 하더라.”

“그게 말이 돼요? 선배님도 아까 발차기하는 거 보셨잖아요. 군대에 다녀온 친구들 말로는 군대에서 하는 태권도는 그냥 어떻게든 부대에 단증 소지자를 늘리려고 하는 거라 제대로 하지도 않는다고 하던데요.”

“그래서 하는 말이잖아. 저 사람은 이 세계 사람이 아니야.”

“그럼. 뭐 도깨비라도 된 대요?”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봐도 사람 같지 않잖아.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완벽할 수가 있어? 말이 안 돼.”

늘 자신에게 엄격하고 진지한 김해수의 입에서 이런 비현실적인 표현이 나올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한 적 없었다. 그래서 당황해하는 데 그녀가 빙긋이 웃었다.

“그 말을 정말로 믿니? 타고난 재능이 천재적이고 특공무술을 따로 잔뜩 했을 게 뻔하잖아. 경호원한테 보호받을 바에는 내가 더 강해지겠다~ 이런 식으로.”

“천재라서 다 잘하는 거면 참 불공평하잖아요.”

“그런 말 함부로 하면 못써. 네 외모도 많은 사람이 부러워하는 재능이잖니?”

어깨를 토닥일 즈음 짧은 시간 동안 익숙해진 영어가 들렸다.

[자! 세팅되었으니까. 다시 가볼게요!]

김해수 역시 응원해 주었다.

“힘내. 그래도 넌 아직 서원이보다 실수가 적어. 알잖아. 서원이는 액션 연기만 하다가 탈진할 뻔했어.”

“네······.”

퍽이나 위로되는 말이었다.

*

‘벌써 몇 번째 세팅인지 모르겠어.’

영화는 사람들의 시각과 청각을 최대한 자극해서 그들에게 감정을 전달하는 예술 장르다. 이것은 그 장르가 공포든 멜로든 상관없다. 각 장르마다 목적에 맞는 효과를 주면 될 뿐이니까.

그리고 영화의 장르들 중에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가장 많은 돈이 들어가는 장르가 바로 액션이다.

블록버스터.

초대형 폭탄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 단어는 지금이야 엄청난 수익을 달성한 작품이나 엄청난 제작비가 들어간 작품을 말하는 단어지만, 원래는 메이저 제작사에서 만드는 액션 영화를 의미하는 단어였다.

이 말이 엄청난 제작비의 영화라는 의미와 동일해진 이유는 액션 영화에서나 그런 제작비가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소품도 얼마 안 남았어. 더는 실수하면 안 돼.’

기껏 윤태식 회장이 만들어 준 이 기회를 날려버릴지도 몰랐다.

‘해내자 임옥빈! 아자! 아자!’

한창 흘렸던 땀들이 다 식어버린 후였지만, 카메라에 붉은 등이 켜지자 임옥빈의 눈이 다시 타오른다.

‘그래. 다른 건 몰라도 발차기 하나는 나도 어디서 밀리지 않아!’

느낌이 좋았다.

아까 윤태식 회장이 보여준 동작을 그대로 다 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실제로도 이번 촬영 중에 이 장면까지 액션이 이어졌던 적이 없었다. 늘 중간에 끊겼는데,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액션을 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여기서 발차기만 제대로 보여주면!’

임옥빈의 몸이 계단 난간을 딛고 공중을 날면서 빠르게 회전을 시작했다.

이어지는 돌려차기.

난간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거의 완벽한 540도 발차기였다. 이제 액션 배우가 그것에 맞고 뒤의 유리창을 깨면 된다.

그때였다.

“크헉!”

임옥빈의 발차기에 날아간 액션 배우의 몸이 뒤의 유리를 깨면서 완충작용을 만들어내면서 안전하게 쓰러져야 하는데, 유리가 깨지지 않았다.

보호벽이라는 콘셉트를 가지고 있는 만큼 두껍게 만들어진 유리 소품이다. 그러나 아무리 두껍게 만들었다고 한들 실제 보호벽과 같은 강도를 가진 것은 아니다.

그 탓에 깨지지 않은 것이다. 지금까지는 액션에 들어가는 소품들에 필요한 비용의 문제였다면, 이번에는 안전의 문제가 터진 셈이었다.

[부상인지 확인해!]

최대한 안전하게 촬영이 가능하도록 미리미리 준비를 다 해두기는 했지만, 액션 영화는 언제 어디서나 부상의 위험이 따른다. 강한 충격을 받은 것 같은 배우의 모습에 임옥빈의 표정이 파리하게 질렸다.

“어떡해.”

순식간에 심각한 분위기로 이어지려는 촬영장의 분위기.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액션 배우는 괜찮다는 듯이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워낙 충격이 둔탁하게 와서 순간 놀라서 그랬습니다. 괜찮습니다.”

“정말 다행이에요.”

배우는 주변에 자신의 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리듯이 촬영장 곳곳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뒤이어 원인 파악에 들어갔다.

“저게 왜 안 깨진 걸까요?”

“혹시 소품을 다 써서 진짜 유리를 가져온 거 아닐까?”

추측이 난무하려다가 당사자의 말로 딱 끊겼다.

“유리가 안 깨진 이유는 둘 다 맞아본 제가 가장 확실하게 알고 있습니다.”

방금 임옥빈의 발차기를 맞고 충격을 받았던 배우가 말했다.

“힘입니다.”

“힘이라니요?”

“말 그대로 힘이 부족했다고요.”

“네?”

“이번 액션은 제가 옆에서 달려들고 그런 저를 옥빈 씨가 발차기로 날리는 씬인데, 겨우 유리에 닿을 정도의 힘밖에 없었어요.”

난간을 밟고 뛰어올라서 한 바퀴 반의 회전을 이용한 발차기였다. 공중에서 떨어지는 낙하 에너지에 회전에너지까지 합쳐진 강력한 발차기다. 그런 발차기가 힘이 부족하다면 대체 뭘 어떻게 해야 저 유리를 깰 정도의 힘을 낼 수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회장님이 보여주셨을 때는···”

“옥빈 씨는 안 맞아보셔서 모르실 텐데, 저분은 사람이 아닙니다.”

“예?”

“진짜로 힘이 달라요. 인간이 무슨 고릴라도 아니고··· 아무튼, 그냥 다릅니다.”

왠지 모를 기시감이 느껴지는 대답이었다. 한편, 기왕 끼어든 것이니 끝까지 책임져주겠다는 의도일까.

“힘이 부족했다고 하셨습니까?”

‘우리 얘기를 들었어? 저 멀리에 있었는데?’

소란스러운 촬영장에서 몇십 미터는 떨어져있다. 그런데 자신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왔다. X팀을 촬영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게 영화가 아니라 실존 인물을 다룬 게 아니냐는 음모론이 무럭무럭 자라서 소름이 돋는 중 그가 말했다.

“동작을 바꿔봅시다.”

“저 때문에 액션의 퀄리티를 떨어뜨리시는 거라면, 제가 더 노력할게요.”

“장면 전체를 재구성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니 너무 실망한 표정을 짓지 않으셔도 됩니다. 힘이 부족하면 더 힘이 강하게 들어가는 발차기를 하면 되니까요.”

그러고는 손뼉을 쳐서 주위를 환기한 뒤 잘 보라며 움직였다. 이번에는 외투를 벗지도 않고 정장 차림 그대로 난간을 밟았는데 그 모습에 촬영장의 모두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난간을 밟고 뛰어올라서 선 자세, 이후 회전하는 발차기가 아니라 측전을 선보였다. 공중 옆돌기에 가까운 회전을 보인 것이다. 그는 그 동작으로 힘을 받으며 양발 차기를 했는데 이는 무술 동작보다는 마치 기계체조 같았다.

‘저걸 하고 다시 일어섰어!?’

사람들이 가장 크게 놀란 것은 마무리였다. 보통 저런 발차기는 원래 동작 후에 바닥에 추락하는 위험천만한 동작이다. 그래서 바닥에 매트를 깔아 충격을 완화 시키는데, 그는 킥을 다 선보이고 마치 고양이처럼 바닥에 착지한 것이다.

“맙소사. 말이 돼?”

“저게 가능할 리가 없는데, 하네?”

“그거 봐. 사람 아니라고 했지?”

“괴물이다!”

“UFO에서 강화 받은 게 틀림없어요.”

“맞아. 영화 속 돌연변이랑 같은 존재일지도 몰라.”

일전의 강서원 액션에서는 농담처럼 오가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실존하는 괴담으로 여겨졌다. 이 자리에는 액션 배우가 많다. 그만큼 윤태식 회장의 동작이 어떤 신체 능력을 가져야 가능한지 단숨에 알았다.

하지만 그건 실수였다.

“조금 오버했나?”

충격에 가득 찬 촬영장을 둘러본 그는 작게 중얼거리고는 ‘촬영 기대하겠습니다.’라는 메시지를 끝으로 완전히 떠나갔기 때문이다.

고난도였으나 임옥빈은 이를 악물고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X팀 영화에서 명세은이 생명력을 얻었고 그들은 세간에 널리 퍼진 말을 실감했다.

“윤 회장님이 선택한 영화는 무조건 뜬다던데, 그게 아니었어.”

“‘무조건 뜨게 만든다’는 게 정답이야.”

누구도 ‘잘 됐으면 좋겠다’거나 ‘잘 되야 할 텐데’라는 식의 바람은 가지지 않았다. 얼마만큼 대성공할지에 대해서만 내기할 만큼 촬영장의 분위기는 좋았다.

< 돋보기 > 끝

ⓒ (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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