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551화 (551/577)

< 돋보기 >

임옥빈은 그나마 남은 자신의 액션을 확실하게 소화하기 위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강서원은 초기 일본 기업의 명령을 받아 김해수를 납치하려 하고 공격했지만, 영화 막바지인 지금은 아군으로 돌아선 상태다. 이번 촬영분은 그런 강서원의 든든한 저격 지원을 받으면서 갇혀있는 휘 잭맨을 구하러 가는 장면이었다.

배경은 거대 연구실의 내부.

복잡한 구조물들 사이로 화살이 날아들면 임옥빈의 사각에 있는 적들이 쓰러진다.

백발백중의 헤드 샷!

‘쳇. 자기만 엄청나게 돋보이고.’

질투로 고개를 홱 돌리고 싶을 만큼 혼자만 멋진 캐릭터였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배우들 모두가 공감하는 바이기도 했다. 이 영화에서 휘 잭맨 다음으로 가장 주목받는 인물은 여주인공인 김해수보다도 강서원이 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도 최대한 잘 해봐야지.’

강서원에게는 밀리더라도 연기 자체가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는 없다. 배우로서의 프로페셔널함이야말로 그녀의 자부심이다. 임옥빈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액션을 뽑아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액션을 소화했다.

하지만.

“Not bad!”

감독의 사인은 계속 ‘나쁘지 않네요!’의 반복이었다.

이번 영화에 참여하면서 가장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이 바로 이 ‘Not bad.’다.

나쁘지 않으니 합격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나쁘지 않지만, 다시 하자.’였기 때문이다. 이걸 한국으로 치자면 ‘NG!’가 되고 ‘No good.’과 같은 말이었다.

전혀 반대의 말이 같은 표현이 되고 있는 것이다.

“죄송합니다!”

보통 이런 액션 장면은 들어가는 것들이 많아서 재촬영마다 제작비가 크게 올라간다. 자신 때문에 제작비가 올라가는 것에 임옥빈은 얼른 인사하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자신이 실수한 부분이 어디인지 곱씹으며 발목을 풀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때, 최근 들어서 원망의 대상이 된 사람이 불쑥 끼어들었다.

“임옥빈 씨가 못해서 다시 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죄송해할 필요는 젆여 없습니다.”

촬영 시작 전에도 없던 인물인 윤태식 회장이 손짓하여 불렀다. 감독과 함께 보는 모니터에 오자 이를 같이 보자며 그가 말했다.

“나무랄 데 없는 연기였습니다. 다만, 액션 구성이 제 스타일이 아니더군요.”

‘스타일!? 이거!’

긴장이 눈 녹듯 사라지고 기대감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지금의 상황은 며칠 전, 강서원의 액션 때 보여주었던 것과 동일했다. 임옥빈은 윤태식 회장이 그때와 같은 이야기를 해주기를 바라며 그의 입을 뚫어지라 보았다.

이윽고, 그가 말했다. 감독을 비롯한 배우 모두에게 말하는 것이기에 영어로 갑자기 바뀌었지만, 그녀는 재빨리 집중해서 들었다.

[우선 강서원의 지원 사격이 의아합니다. 지금 임옥빈의 서포터로 지원사격을 하고 있는 게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죄다 헤드샷입니까?]

[설정상 강서원은 백발백중의 사수입니다.]

[그런 사수가 왜 헤드샷입니까?]

[네? 백발백중의 사수라서 그런 건데···]

도돌이표 같은 답변에 무술 감독만 뒤늦게 ‘아차’하는 반응을 보였을 뿐, 다른 이들은 여전히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임옥빈은 눈앞에 있는 윤태식이라는 재벌이 일반 병사로 전역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렸다.

[저격수는 합동 작전에서 지원할 때 머리를 노리지 않습니다. 헤드샷은 단독 작전일 때 노리지 지금 같은 지원에는 더욱 높은 확률의 사격을 이행하지요. 머리든 몸통이든 맞추는 순간 전투력이 하락하니 좁은 면적의 머리보다는 넓은 면적의 몸통을 노리는 게 효율적입니다.]

[아!]

[100% 헤드샷이 가능한 설정이라 해도 속도 면에서는 여전히 후자가 월등히 빠릅니다. 그러니 근접 액션을 보여주기 위해서나 현실적으로 보나 이편이 자연스럽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액션을 연출하는 감독도 익숙하게 알고 있는 부분이었지만, 이 영화의 장르가 밀리터리가 아니었기에 잊고 있었던 부분을 지적받은 것이다.

다음은 임옥빈의 차례였다.

“옥빈 씨가 합기도 유단자라고 했던가요?”

“네? 네! 3단입니다!”

“좋습니다. 합기도가 3단이나 되면 그걸 활용해야지요.”

“네?”

“합기도가 주요 3단이면 다양한 무기들을 많이 다룰 줄 알겠군요?”

“칼이나 쌍절곤. 그리고 부채와 지팡이들은 꽤 익숙합니다.”

“칼은 상투적이고 쌍절곤은 이소룡의 느낌이 강하니 이를 제외하면···”

슬쩍 미간을 찌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가 가상의 적을 상대하듯 잠시 손을 움직였다. 이후 정리를 마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합기도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봅시다.”

“장점이요?”

윤태식 회장이 감독에게 눈짓하자 그가 소리쳤다.

[15분간 휴식합니다!]

감독이 촬영장 구석을 가리키는데 배우들이 어찌하겠는가. 뜻하지 않은 휴식을 취하며 구경할 즈음, 어디에선가 스케치북과 펜을 든 일단의 무리가 들어왔다. 처음 보는 이들에게 윤태식 회장이 말하자 즉석에서 스케치북을 가득 채우는 만화가 그려졌다.

말 그대로 엄청난 속도로 완성된 그것은 오늘 촬영의 액션구도가 변하는 바를 새롭게 그려낸 장면들이었다.

그뿐이랴. 세트장의 일부 구조 역시 빠르게 바꾸어 나갔다.

“돌아버리겠네. 말로만 할리우드 스타일, 할리우드 스타일 그랬는데 직접 보니까 여긴 다 괴물들이야.”

“저걸 뚝딱 만드는 게 말이 되냐?”

“봐봐. 놀라는 사람들은 전부 한국인들인 거. 저쪽에서는 엄청 흔한 건가 봐.”

수군수군하는 스태프들의 대화에 귀가 쫑긋 세워졌다.

“내 친구가 넷플렉스에 있는데, 윤 회장 사단만 저런 거래.”

“그게 무슨 말이야?”

“기다렸다는 듯이 나온 저 사람들 말이야. 윤 회장이 천재라서 저런 식으로 현장에서 바꾸는 일이 흔하다더라. 그런 일이 워낙 많다 보니 다들 숙련된 거지 할리우드가 죄다 저런 건 아니래.”

“그거 다행이다.”

“왜?”

“우리만 우물 안 개구리라면 자괴감 들잖아. 저들 빼고는 할리우드랑 경쟁할 수 있다는 거니까 희망이 남아있어서.”

“탑클래스가 저 수준인 건 변함없는데도?”

“새꺄. 2등도 좋은 거야.”

강서원 때도 느꼈지만, 넷플렉스는 지금까지 경험했던 그 어떤 영화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함을 가지고 있다. 지금 당장만 보아도 액션의 구도가 완벽하게 변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것을 단시간에 완전히 새로 구성하는 것에 성공했다.

‘보통은 며칠은 미뤄져야 할 텐데.’

그즈음, 윤태식 회장이 임옥빈을 호출했다. 재빨리 달려간 그녀는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집중해서 들었다.

“태권도가 올림픽의 정식 종목인 만큼 해외에서도 가장 인지도가 높은 한국의 무술이긴 합니다. 그렇지만 합기도 역시 인지도에는 조금도 부족하지 않아요.”

“그래요?”

“소위 말하는, 서구권에서 좋아하는 동양의 뽕이랑 뽕은 다 모아놓은 뷔페 같은 무술이 합기도거든요.”

합기도 3단인 그녀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합기도는 한국의 주요 무술답게 태권도와 비슷한 화려한 발차기를 보유했지만, 사실 일본 고류 무술에 뿌리를 두고 대동류 합기유술에서 빠져나온 무술입니다. 그렇기에 태권도가 보유하지 못한 관절기가 체계적으로 잡혀 있고 중국의 화려한 병기술까지도 포함되어 있지요.”

‘이 사람은 게임 회사 회장 맞아? 직업이 무술인 같은데?’

“그 때문에 홍콩 영화에서는 한국 무술인이 태권도보다 합기도를 베이스로 하는 무술을 많이 선보입니다. 즉, 임옥빈 씨는 맨손인 상태에서 태권도의 발차기와 주짓수의 관절기. 그리고 손에 무언가가 잡히면 중국의 병기술이 나오는 특별한 무술을 제대로 보여주면 됩니다.”

“네.”

“좋습니다. 그럼 이대로 해보세요.”

“네?”

친절하게 스케치북을 건넸다.

‘왜 이래요. 나한테만······.’

그림은 꽤 자세하게 표현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슥 보고 척척 해내라고 하는 건 너무하다 싶었다. 괜스레 억울한 심정까지 드는데 막상 따지자니 그러기는 또 어려웠다.

넷플랙스의 스태프들은 이 정도의 수준을 평균으로 보고 진행하는 게 당연하다는 분위기를 풍겼기 때문이다.

그녀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스케치북을 보고 있을 때였다.

“회장님.”

김해수가 선배답게 먼저 나서주었다.

“정말 죄송하지만. 저희 같은 사람들은 이런 그림만 보고 바로 이해해서 따라 하기 힘들어요. 대충이라도 지난번처럼 다시 보여주실 수는 없을까요?”

거듭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붙이며 하는 요청이다. 임옥빈으로서는 구원의 동아줄이 내려온 격이었다. 바로 그 순간, 초조함에 휩싸여서 미처 읽지 못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거듭 나서봐야 전문 배우분들게 폐만 될 뿐입니다.”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새···는 없을 겁니다.]

“영광입니다!”

“꼭 보고 싶습니다!”

윤태식은 넷플렉스의 주인이면서 대한민국 재계 서열 1위의 엄청난 재벌이다. 이런 사람에게 이 위험한 액션은 연기도 아니고 시연을 해달라고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부탁이다. 그래서 다들 먼저 보여주기를 바라며 입을 꾹 다물었을 뿐, 임옥빈 자신만 열등생인 건 아니었다.

감독부터 촬영장의 모두가 기대감 넘치는 표정을 짓자 윤태식 회장은 어이없는 웃음을 짓고는 알겠다는 대답을 해주었다. 그리고 정장 재킷을 벗고 셔츠 소매의 단추를 푸를 때는 휘파람과 환호성마저 들렸다.

“대충 떠오른 걸 보여드릴 테니 한번 보고 취사선택해 봅시다.”

언젠가 들었던 말을 자신에게 해주며 그가 나섰다. 지난번처럼 촬영팀은 물론이고 액션 배우들에게도 설명한 뒤 액션을 선보였다.

‘아! 저걸 저렇게 사용하라는 거구나.’

임옥빈의 머리 속에는 스케치북 속 흑백의 그림이 살아서 움직였다. 촬영장의 모두가 몽롱한 눈으로 윤태식 회장의 액션에 빠져들 때, 그녀는 한발 앞서 윤태식 회장의 동작을 연상하고 그림의 형체를 따라 CG처럼 현실에 장면이 입혀지는 것을 보았다.

명세은의 근접접투술은 택건과는 달랐다. 절도가 있고 다분히 실전적이다.

그의 손에 철제 계단이 잡히는 순간부터 계단은 더 이상 계단이 아니라 칼 또는 방패가 되었다. 난간의 지지대 두 개를 곤봉처럼 활용했다가, 유리를 깨서는 또 표창처럼 쏘아낸다.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이 무기가 되는 실전 무술.

그것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보여주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제는 강서원의 화살이 머리가 아닌 몸통이나 팔 그리고 다리를 향하게 되었으니, 그들을 직접 처리해야 하는 액션이 추가된다. 액션이 풍부해짐과 동시에 분량까지 늘어나게 된 것이다.

‘숨어있던 적이 화살에 맞으면서 드러난 걸 저렇게!’

화살에 맞은 적이 드러나자 빠르게 그를 밟고 2층에 올라가면서 총알을 피했다가 또 난간을 잡고 빠르게 내려왔다.

총구의 움직임보다 사람이 빠르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윤태식 회장을 보고 있으니 정말로 가능한 일로만 여겨졌고 그런 의심조차 사라졌다.

“할 수 있어.”

연기자가 자신이 연기해야 하는 장면에 설득을 당하는 것과 설득되지 않고 연기하는 것은 천지 차이다. 임옥빈은 완성형의 액션을 보며 두 손을 꽉 쥐었다.

강서원을 마냥 부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X팀의 명세은이 자신이고 임옥빈 그녀는 저 마법 같은 매력으로 두고두고 보는 배역 자체가 될 테니까.

“이상입니다.”

탄성만 나오며 모두가 흠뻑 빠졌던 액션이 끝났다. 이번에는 다들 기대했던 만큼 침묵의 시간 없이 우레와 같은 박수로 환호했다. 이런 완벽한 그림대로 촬영만 하면 되고 그러면 저런 감동을 선사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기쁘지 않겠는가.

“진짜 아깝다.”

[회장님만 아니었으면 확!]

“어떻게든 섭외하고 싶은데 회장님이라서···”

[아쉽다. 너무 아쉬워!]

감독을 비롯한 이들의 목소리는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스태프들의 아쉬움은 배우들의 안도감이기도 했다. 절대로 배역을 빼앗기지 않는다는 확신을 주는 믿음직한 인물이니 질투할 필요가 전혀 없다.

“이제 기운 나니?”

“네! 정말 대단하신 분이에요.”

“예전에도 존경하는 분이었지만, 앞으로는 더욱 존경하기로 했습니다.”

막바지에 덧붙인 강서원의 말처럼, 그들은 아낌없이 동경하기로 정했다.

< 돋보기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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