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돋보기 >
[영화의 시나리오를 보면 이런 역사적인 것들을 설명하거나 그런 게 없던데요. 혹시 추가되는 겁니까?]
울버렌은 어디까지나 오락 영화다. 그런 영화에서 굳이 역사적인 것을 설명하려 들면 과연 그 영화를 재미있게 볼 수 있을까? 심지어 그 역사가 서구권에서 별 관심도 없는 한국의 역사인데?
‘페미니즘이나 PC주의들에서 이런 실수를 정말 자주 볼 수 있지. 스토리에 놓여내는 게 아니라 정치적인 가치관만 보여주는 졸작들.’
애당초 나는 그럴 생각이 없을뿐더러, 내가 그런 식으로 엇나간다고 해도 제동을 걸어줄 이들이 곁에 있다. 불과 얼마 전에만 해도 레이첼에게 한 소리 크게 듣지 않았던가.
당연히 우리 영화에서는 그러한 설명 따위는 들어가지 않는다.
[없습니다.]
[예? 그럼 굳이 이런 곳에서 촬영하는 게 아무 의미가 없는 거 아닌가요?]
[의미는 있습니다. 영화는 일반인들이 자각하는 것 이상으로 큰 힘을 가진 매체입니다. 현존하는 미디어 중에서 가장 파급력이 강하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지요. 그러니 영화가 잘 팔리고 인기를 누릴수록 그 영화의 촬영지 또한 관심을 받게 됩니다.]
백인제 가옥을 눈으로 응시했다.
[깊이 있게 보고 싶은 팬들은 관심이라는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촬영지와 관련된 배경 이야기를 알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울버렌이라는 세계관의 치밀함은 한국의 실제 역사와 더불어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게 될 겁니다.]
억지로 홍보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공감을 일으키게 된다. 이렇듯 최대한 자연스럽게 사람들에게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알려주고 최대한 사실에 근접한 정보들만을 제공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리고 알게 되는 만큼 친근감을 느끼게 되겠지. 일본에 대해 실제로는 잘 모르지만, 심리적으로는 가깝게 느끼는 여러 서양의 덕후들처럼.’
한국에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 일본은 나쁘니까 한국의 편을 들어야 해! 라고 말해봤자. 그들은 괜히 시끄러운 쪽보다는 조용한 쪽에 붙는 게 편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거기까지 생각을 하신다니, 정말 다르시군요.]
[출연하는 영화를 국가 간의 분쟁에 이용하는 부분은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괜찮습니다. 다만, 거짓말로 사람들을 속이는 일만 없었으면 합니다.]
[그럴 일은 절대로 없으리라 약속하지요.]
지금까지 한국에 대한 호감을 보여왔듯이 어쩌면 꽤 불쾌할 수 있는 상황에도 여전히 미소를 보이는 휘 잭맨.
[다른 장소들도 의미가 있나요?]
[일단 용산은 전반적으로 한강을 보여주고 복잡한 구조를 활용하기 위함이 우선입니다. 하지만 나름대로 일제강점기와 미군 등 다양한 역사를 보유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죠.]
영화 촬영지 사전 답사로 시작했던 일정은 나도 모르는 사이 한국의 역사 가이드로 살짝 바뀌어 있었다. 물론, 스태프들이 열심히 움직여주니 나 하나쯤은 빠져도 관계없으니 부리는 일탈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단지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영화를 통해 한국의 정서와 역사를 담으시려는 그 과정이 정말 멋있었습니다. 나중에 우리 아이들에게도 이곳이 품고 있는 역사에 대해서 설명을 해줄까 합니다.]
이건 얻어걸린 건데 이 작업 역시 영화의 질을 높여주는 일과 중 하나가 됐다. 휘 잭맨이라는 배우가 스스로 어떤 울버렌이 되어야 하는지 내 이야기를 통해 차곡차곡 캐릭터를 쌓을 수 있었다고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말이 조금 불쾌하실 수 있는데, 저는 슬픈 역사라도 역사를 보유한 한국이 부럽습니다.]
[부럽다니요?]
내 말에 그는 괜히 손가락으로 코를 훔치며 대답을 미루었다.
‘모를 일이네.’
호주는 시작부터 영국 소속으로 시작되어서 영연방 국가가 되었고 처음부터 강대국이었다. 그런 호주인이 ‘슬픈 역사라도 역사가 있는 것을 부럽다’라고 말할 줄은 조금도 생각 못 했다.
그런 휘 잭맨을 보다가 문득 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한 가지의 미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코에 있는 점. 원래 있던 겁니까?]
[근래에 갑자기 생겼는데, 이유를 모르겠더군요.]
기억이 선명해졌다. 휘 잭맨에 대한 일화에는 그가 이즈음에 피부암 수술을 받았고 나중에 재발해서 재수술을 했다는 사실이 말이다. 이를 알고 있어서일까. 어쩌면 저 점이 생긴 이유가 그 피부암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들었다.
‘빤히 알면서도 도움을 주지 않을 수는 없지.’
좋은 오지랖을 부려보도록 하자.
[없던 점이 최근에 갑자기 생긴 거라고요?]
[저도 나이를 먹고 있긴 한가 봅니다.]
‘대뜸 그게 피부암의 전조라고 해봐야 먹힐 리가 없고.’
미신을 믿는 건 동양이나 서양이나 마찬가지다. 인간이라는 종이 원래 그렇고 괜히 불길한 소리를 해서 자신을 기분 나쁘게 만들었다고 여기게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암을 거론하기보다는
[이래저래 들은 이야기들이 있어서인지, 제게는 가볍게 보이지 않는군요. 병원에 가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걱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만, 그냥 점일 뿐인걸요.]
[갑자기 생긴 점 때문에 병원에 갔는데, 꽤 곤란한 질병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괜찮습니다만, 정 그러하시다면 이번 일정을 마치고 미국에 돌아가서 병원에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며칠 사이로 피부암이 갑자기 엄청난 질병으로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미래 지식으로 아는 바에 따르면 그는 피부암 수술 후에 피부암 온몸으로 퍼지면서 결국 평생 암을 달고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된다.
그 지경이 된다는 사실을 몰랐으면 모를까 알고 있는데 계속 시간을 끌도록 만들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를 강제로 병원까지 끌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어쩌랴.
‘일정을 이용하고 돈을 쓰자.’
울버렌의 초능력을 빼앗기 위해 사용되는 연구소가 있다. 아무래도 악역의 연구소로 사용되는 곳이라 따로 장소 협조를 받기보다는 세트장을 만들어서 촬영할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되면, 병원의 협조를 받는 것도 가능할 것 같다.
이후, 본래 예정했던 대로 KTX와 부산의 촬영지 답사를 마쳤다. 대신 한 가지를 추가했는데 피부암에 있어서 국내 최고의 권위자가 있는 경기도의 병원에 건강검진 예약을 해두었다는 점이었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수고에 보답하고 선물을 드리고자 준비한 게 있으니 추가 일정이지만 함께하여주셨으면 싶군요.]
[선물이요?]
[추가 일정?]
[고생하신 스태프들을 위해 촬영지로 협의 중인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으실 수 있도록 준비를 마쳤습니다.]
[오오! 감사합니다!]
휘 잭맨에게도 권했다.
[가족분들의 것도 준비했으니 함께 한국의 건강검진을 경험해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미국의 의료 기술과 비교하면 밀리기야 하지만, 이 나라도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절대 부족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도 이런 것이 다 좋은 추억이고 경험이 되지 않겠습니까?]
건강 보험 때문에 한국의 의료는 대중적으로 꽤 훌륭한 밸런스를 갖추고 있다. 이런 공보험 시스템이 약한 미국은 엄청난 의료 부담금 때문에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했고, 한국의 의료 시스템을 부러워한다는 이야기는 이미 흔하게 퍼져 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서민들의 이야기다. 휘 잭맨 정도 되는 사람이면 이미 충분히 훌륭한 고액 보험에 가입되어 있을 것이고 그는 미국에서도 마음껏 훌륭한 의료 서비스를 누릴 수 있다.
이러니 어필을 위해선 아이들의 교육에 대한 부분과 고생한 스태프들을 위한 선물 부분밖에 없다.
[여기까지 함께 왔는데, 마지막까지 함께 하는 것이 좋겠네요. 좋은 선물 감사히 받겠습니다.]
역시나 그는 큰 고민 없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
단순 건강검진은 회사 복지 차원에서 1년에 1번씩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검진은 인근 병원의 의료진들이 회사에 찾아와서 진행하는 대량의 검진으로 간단한 것들만 진행하고 끝이 날 뿐이다.
직접 병원에서 이런 검진을 받는 것은 미국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호사다. 그 탓에 대부분의 스태프는 처음 경험하게 될 종합 정밀 검진에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회장님 진짜 통 크시지 않아? 전 스태프들이 전부 다 건강검진을 받게 해주시다니 말이야.]
[그러게. 단순 검진이 아니라. 이런 종합 정밀 검진이라니!]
[난 내가 이런 걸 받는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
[우리 전부가 이런 검진을 받으려면 얼마나 들어가려나?]
[모르겠어. 이런 정밀 검사는 주변에서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어서 가늠이 안 돼.]
[못 해도 2만 달러는 하지 않을까?]
미국의 빈민가에는 늘 마약 중독자들이 넘쳐난다. 이것은 미국이 범죄의 온상이라서가 아니다. 몸은 아픈데, 치료비는 비싸고 그런 치료비보다 마약을 사는 것이 훨씬 저렴하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다는 미국이지만. 종합검진이나 몇 가지 검진을 받아보고 싶어도 몇천 불에서 몇만 불까지 나올 청구서가 두려워 아예 병을 키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넘친다. 이것이 세계 최고 부유국의 어두운 면 중 하나였다.
‘지출이 조금 생기기는 했지만, 나한테는 티도 나지 않는 수준이고.’
미국에서는 소변검사와 혈액검사. 단순한 이 두 가지 검사만 받아도 300달러 정도가 필요하다. 이런 단순한 검사에 35만 원가량을 들여야만 하니 스태프들에게는 한국의 정밀 검사가 1인당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검사로 느껴질 것이다.
실제로는 한국인이 75만 원.
스태프들은 외국인이라 조금 더 비싸서 95만 원이 들었다.
‘우리나라 만세. 헬이니 어쩌니 해도 우리나라 진짜 좋은 거 많다고. 자부심을 가져도 돼.’
고작해야 1,000달러도 안 들어간다는 것을 알게 되면 저들의 표정이 어떻게 변할까. 그리 생각하며 흐뭇하게 미소 짓고 있는데, 의외로 휘 잭맨의 가족도 정말 놀라워하고 있었다.
[이런 정밀 검사를 받는 건 저도 처음입니다.]
[그래요?]
[2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받고는 있지만, 보험에서 보장하는 검사들만 맞춰서 받았거든요. 연령별로 굳이 검사할 필요가 없는 질병들도 많으니까요.]
[어린아이에게 굳이 성인병 검사를 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말이군요.]
한국의 건강보험은 공보험이기 때문에 국내 어떤 병원에 가서 어떤 진료를 받더라도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미국의 보험은 다르다. 보험 종류에 따라서 보장 내용이 다르기에, 해당 보험에 맞춰서 보장받는 부분 위주로 진료를 받게 된다.
‘그래서였군.’
아마도 피부암 같은 흔치 않은 질병은 혜택에서 빠져 있던 모양이다.
[제 차례가 됐군요.]
나 역시 검진을 받는 것은 마찬가지. 새로운 경험이라는 표정으로 가족들과 함께 병원 내부를 구경하는 휘 잭맨을 뒤로 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종합 정밀 검진답게 다양한 검사를 하는 이 검진은 총 3시간가량의 소요 시간이 들어갔다.
그리고 휘 잭맨은 모르고 있겠지만, 병원 측에는 피부암에 대해서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미리 요구를 해두었다.
[세포암이라고요?]
예상대로 그의 피부에는 지금 기저세포암이 자라고 있다는 것이 검진을 통해 밝혀졌다.
[그렇다 하더군요.]
건강 건진의 결과를 확인한 휘 잭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한국인 말고는 암이라는 질병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는 말이 있는데 지금 잭맨의 얼굴을 본다면 절대 그런 말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아시겠지만 암과 같은 질병은 하루라도 빨리 수술을 받는 편이 좋습니다. 그래야 재발이든 뭐든 막을 수 있죠.]
암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는 만큼 한국은 검진을 통해 암이 발견되는 사례도 많고 수술도 많고, 암으로 죽는 사람도 많다. 결과적으로 한국은 이 많은 사례를 통해 암 진단과 치료에 관해서 상당한 노하우가 쌓인 국가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한국의 전문의들이 절대로 미국의 전문의들에게 꿀리지 않을 거라고 자부한다. 그리고 지금 이 병원에는 전 세계 그 어떤 피부암 전문의들과 비교해도 최상위에 있을 의사가 교수로 있다.
‘그래서 이 병원을 선택한 거니까.’
사실 이 분야에서 최고라고 생각하는 의사는 다른 의사였다. 실력으로만 평가하자면 이 병원의 의사는 2순위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1순위 의사를 선택하지 않은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대통령 비선 진료에 있어서 위증을 했던 의사.’
다음 대통령의 의료 고문이었던 그는 비선 실세에 관한 청문회에서 위증했고 이 부분에 있어서 자신의 잘못을 전혀 뉘우치는 모습이 없었다. 그래서 1순위가 아닌 2순위의 의사를 선택했다.
[회장님께는 정말 감사하다는 말 말고는 드릴 말이 없네요. 한국에서 수술을 받고 돌아갈 생각입니다.]
[감사는 빨리 치료받고 영화에서 멋지게 활약해 주시는 거로 충분합니다.]
[혹시, 갑자기 스태프들을 위한 선물이라고 건강검진을 계획하신 게 저 때문이었던 건가요?]
대답하지 않고 그냥 웃고는 병원을 나왔다.
‘낯 간지러운 말을 해서 뭐해.’
병원측은 유명 영화의 악당이 사용하는 연구실로 나온다는 부분에는 손사래를 쳤지만, 이후 영화 스태프들이 단체로 검진받는 것과 휘 잭맨의 수술이라는 홍보 아이템이 걸리자 촬영지로의 사용을 허락했다.
‘휘 잭맨의 수술을 훌륭하게 끝낸 병원이라는 타이틀. 한국에서 이만한 명성을 얻어낼 기회를 서울도 아닌 경기도의 병원에서 가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지.’
수술을 잘만 해낸다면 엄청난 기회가 될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거기에 이 병원의 피부암 교수는 재발률 1% 미만의 최상위 권위자다.
악당의 연구소이자 실제로 휘 잭맨을 치료해낸 병원!
한국만이 아니라 진짜 미국에서도 찾아오는 병원이 될지도 모르는 기대감을 병원 측에서 품는 건 당연하다. 안타깝게도 이쪽에서 먼저 공개하기 전까지는 보안을 확실하게 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겠지만 말이다.
< 돋보기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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